10
“너도 이젠 알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 별로 없어. 너보다 조금 더 경험이 많다는 것 말고는 다를 것도 없고. 그래도 아주 약간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도연이 뚜껑을 연 소주를 소영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 경험이 워낙 더러워서, 배운 것도 있긴 하다는 거 정도지.”
메마른 입술 아래 동그란 병이 닿았다. 알콜 냄새가 확 올라왔다.
입고 있던 가디건은 벗어 바닥에 깔아 놨다. 소영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에 헐렁한 환자복은 마치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떠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독된 면에 감싸여 여전히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도연을 노려본다. 깜빡임조차 없이 고정된 눈은 못 박듯 도연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 차에서 내리는 소영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악몽의 장면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환자복을 입은 맨발의 창백한 얼굴, 도로에 선 흔들리는 얼굴, 빙의된 사람 특유의 혼탁한 눈빛. 단경호와 다른 것은 성별뿐이었다. 기분 나쁜 데자뷰가 잊고 있던 기억을 억지로 파낸다.
“마시고 싶지 않아? 술 마신지 오래 됐었을 텐데.”
“…….”
“막걸리가 좋았을까? 제사 음식까지 바라는 건 염치가 너무 없지, 안 그래?”
권하던 술을 도로 가져와 한 모금 마신다. 도연은 확 올라오는 알콜의 맛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캬, 나도 오랜만이네.”
그리고 한쪽에 서 있는 영준에게 병을 들어 보였다.
“마실래?”
“아니.”
“남매가 둘 다 술을 못하나 봐.”
도연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난 술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하루 종일 마실 때도 있었어. 그런데 별 소용이 없더라고. 잘 취하지를 않아.”
입가로 소주가 조금 흘렀다. 옷 위로 떨어진 투명한 액체에서 알콜 특유의 싸한 냄새가 퍼졌다.
소영의 마른 입술 사이로 혀가 살짝 나왔다. 바삭거리는 입술을 핥은 혀는 이내 꿀꺽 하고 침을 삼킨다.
도연은 다시 병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치켜세운 눈초리, 여전히 눈이 한쪽으로 몰릴 정도로 노려보면서도 그녀는 입술을 벌렸다. 병을 감싸듯 문 그녀는 이내 목을 뒤로 젖혀가며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넘기는 목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뒤에 서 있던 영준이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술을 전혀 못 한다던 소영은 숨도 안 쉬고 소주 반병을 들이켰다. 그리고도 떼어내는 병을 따라 아쉬운 듯 따라왔다.
“거 간만에 마시니 좋구나.”
턱에 흐른 한 방울까지 손등으로 훔쳐 쪽, 빨아먹는다. 가녀린 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걸걸한 목소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소주는 이십 년만이네. 굿판에서도 얻어먹질 못했는데.”
“남자?”
뒤에 서 있던 영준이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도연은 손을 들어 막았다.
“염병할 마누라도 자손들도 그렇고 제 아비 귀한 줄도 모르고. 제사도 안 차려서 않아서 몇 년을 굶었는지 몰라. 개 같은 새끼들, 두고 보라고 내 가만 두나.”
도연은 남은 반병의 술을 다시 건네 줬다. 소영은 마치 몸 중심에 누군가 말뚝이라도 박아 놓은 것처럼 허리만 꼿꼿하게 펴고 있었다. 축 늘어진 팔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양옆에 늘어졌다. 입을 벌려 소주를 받아 마시며 그녀는 흥에 겨운 듯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어댔다.
“삼겹살이나 먹었으면 좋겠네.”
대답하지 않자 소영의 몸에 씌인 남자가 조급하게 다시 말했다.
“삼겹살 한 근 사줘. 소주도 몇 병 더 하고. 그럼 나가주지.”
“왜 나가? 나가서 어디로 가게. 저승에 좋은 자리라도 맡아놨어?”
“…….”
입을 꾹 다문 소영의 눈에서 다시 불이 뚝뚝 떨어진다.
“너 하나 나가도 다른 놈들이 우글거리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말해줄까 꼬맹아.”
“사람 몸 안에 있으니 좋지? 따뜻하고, 가끔은 진짜 다시 살아있는 것 같아서 이대로 잘만 하면 이 몸이 내 것이 되지 않을까 싶지? 밥도 먹을 수 있고 이렇게 술도 마실 수 있고, 어디로든지 맘대로 갈 수 있고 사람들하고 만날 수 있고 그럴 것 같지?”
“……가여워서 여기 있는 거다. 이 얘가 가여워서!”
“가여워? 그럼 네가 지금 소영이가 불쌍해서 들어갔다 이거야? 도와주려고?”
“그래!”
“그럼 얘 꼴이 왜 이 모양인데?”
“내가 한 게 아니야.”
“아 그래, 넌 도우려고 했지.”
“그래 그 년이 한 짓이지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고…….”
“그 년이 어떤 년인데? 무슨 짓을 했는데?”
“……내 아우 같고 딸 같은 아이를…… 부모도 잃고 불쌍한 아이라 도와주고 싶은데……자꾸 심사가 뒤틀려서 못 견딜 때가 있긴 했지만……그래 그럴 땐 차고 때려서 못살게 괴롭혔지……때리고 두들기고 아프게 했지만 나중엔 애가 다시 측은해져서…… 속이 상하고 내가 한심하고……그런데 또 그러면서도 또 때리거든……앞으로도 계속…….”
툭, 하고 고개가 떨어졌다. 잠시 후 살풋 정신이 든 것처럼 소영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얼굴 한쪽이 마비된 사람처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뜬 한쪽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마실래?”
도연은 다시 남은 소주를 들어 찰랑찰랑 흔들었다.
이를 박박 갈던 소영이 갑자기 도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퉤!”
“소영아!”
“괜찮아.”
도연은 자신의 뺨을 슥 닦아냈다. 영준은 이상하게 구는 동생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발만 구르고 있었다. 분명 소영인데, 하는 행동이나 말투, 말의 내용이 전혀 다른 사람이다. 머리로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구는 동생의 모습은 섬뜩하면서 마음 아팠다.
“안 마셔? 그럼 됐어.”
술을 치우자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벌어진다. 툭, 하고 바싹 말라 있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빨간 혀가 입 밖으로 나온다. 그러더니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혀는 마치 뱀 같았다. 사람이 아닌 것도 들어와 있는 걸까, 영준은 섬뜩함에 자기도 모르게 팔로 몸을 감쌌다.
“그런다고 속을 것 같아?”
움직이던 혀가 딱 멈춘다.
“얼치기 무당이라면 모를까.”
입가로 침이 흘러내린다. 고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더니 다시 이를 박박 갈았다.
“건방진……감히 뭘 안다고…….”
“넌 거짓말쟁이구나. 혼령들은 대부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악질이야.”
“내가 살아 있었으면……너 같은 것들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았어!”
도연은 영준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한 번 몸이 열리면 온갖 것들이 다 들어오기 쉬워. 생각보다 귀찮게 됐네……이런 잡귀들이 달라붙으면 정작 근원은 알 수가 없어져서. 예전에 내가 뱀을 털어냈던 건 다행히 그 사람 몸에 다른 것들은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에 싫어하던 것은 여전히 싫어하거든.”
잡귀란 말에 소영의 몸이 움찔하고 반응했다.
“잡귀?”
“네 동생한테 붙은 놈은 아마 오래 전에 죽은 걸 거야. 아주 오래 전에, 그렇지 않으면 그 정도까지 힘이 있을 리 없어. 적어도 50년-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어.”
핏발 선 눈이 독을 품고 이쪽을 노려본다. 턱을 타고 흐른 침이 무릎 위로 길게 떨어진다. 영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소영이는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았다. 남 앞에서 창피를 당하거나 실수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부모님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것 아니야.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되는 건 참을 수 없어.’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굴고 항상 모든 것에 신경을 쓰던 동생이다.
“……그냥 확 뽑아내 버릴 수는 없나?”
“안 돼. 무슨 영화도 아니고 나한테 그런 힘은 없어.”
왜 안 나오는 걸까. 병원에서는 분명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는데. 도연은 의아했다. 조금 전 둘만 있었을 때 잠시 나타났던 여자- 비릿한 썩은 내를 풍기던 그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병원에서는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듯 보여줘 놓고 지금은 무슨 꿍꿍이로 숨어버린 것일까. 이유는 모르지만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소영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거의 한 병 정도를 먹였으니 다리가 풀려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내가 정말 뭔가를 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 힘도 없이 보이기만 한다는 것은 무능하고, 번거롭기만 한 일이다.
“살아 있다고 잘난 체하는 게 아니야!”
잡귀들에게 물어보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하나 같이 자기들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 알아? 너한테 붙어 줄까? 계단을 내려가거나 전철을 타러 갈 때 조심하는 게 좋을걸. 살고 싶으면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올 때엔 집안에만 쳐 박혀 있는 게 좋을 거다! 아주 우스꽝스럽게, 비참하게, 하찮은 방식으로 죽여줄 테니까!”
“시끄…….”
“입 닥쳐!”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도연은 깜짝 놀랐다. 와락 소리를 지른 영준이 소영의 양팔을 붙들고는 흔들어댔다.
“내 동생의 입으로 그런 말 하지 마!
크게 벌린 입으로 갑자기 소영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은 중간부터 더 이상 웃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을 부라린 채 입만 크게 벌려 하하하 하는 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참을 수 없는 소리가 계속 됐다. 질린 얼굴로 소영을 놓은 영준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돌아섰다.
“씨발!”
욕을 뱉고는 바닥의 자갈과 모래를 걷어찬다.
“씨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영준은 다시 소영의 몸을 붙들었다.
“나와! 차라리 나한테 들어오란 말이야. 나오라고!”
하하하하 하고 계속 웃던 소영의 얼굴이 뚝 굳었다. 갑작스러운 침묵과 함께 그녀는 부라린 눈으로 영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앗……!”
도연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소영의 어깨를 놓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은 소영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누군가 볼펜으로 마구 그어놓은 것처럼 종이에 그려진 낙서 같은 어둠이었다. 검은 연기 같기도 한 그것은 소영의 이목구비를 불안하게 잠식하고 있었다.
“거짓말.”
“뭐?”
“거짓말 하는구나. 너에게 들어오라고? 대신 죽겠다고?”
“그래. 나한테 와!”
깔깔깔 하는 날카로운 웃음이 터졌다. 쩌렁쩌렁하고 귀기 어린 웃음이었다.
“사내들은 항상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다정하기까지 한 나긋나긋한 말투.
“뭐든지 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본심은 결코 그렇지 않아. 왜, 네 동생이 그렇게 구하고 싶니? 아무리 피붙이라 해도 남은 남인데?”
갑자기 소영이 자신의 환자복 단추를 끌렀다. 그리고는 어깨를 내려 살을 드러냈다.
“혹시 잤니? 같이 자서 살 정이라도 붙어 남매 사이가 더 돈독해졌니?”
“닥쳐!”
“여자를 이렇게 거칠게 다루면 안 되지.”
자지러지게 웃으며 소영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끌러진 단추 사이로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리와. 원하는 데로 해줄게. 네가 바라는 건 다 해줄게. 기분 좋게 해줄 테니 이리와.”
터진 입술 사이로 혀가 날름거렸다. 망연자실한 기분에 휩싸인 영준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도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한쪽에 앉아 두 손으로 자신의 양쪽 귀를 꽈악 막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그는 영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귀를 막은 채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도연은 귀청이 터지게 울리는 혼령들의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휩쓸리게 될 유혹의 목소리들이다.
피곤하고, 삶이 지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지 않니, 깊은 잠 속으로 모든 걸 잊고 들어오렴, 엄마 품으로, 아가, 어서…….
도연은 손을 들어 강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뒤를 돌아본 영준은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강의 물결 사이사이로 거대한 사람의 눈이 보였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강의 수면을 통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거대한 해일처럼 강이 일어났다. 그리고 검은 혀처럼 일렁이며 둘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충격은 몰려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 다시 평온한 강이 펼쳐진다. 반짝이는 수면에는 어떤 비현실의 흔적도 비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 사이로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떠올랐다. 하나, 둘, 셋……. 강을 가득 메운 손이 깃발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이리 온, 이리 온 하고 부르듯이…….
“보지 마!”
도연이 악을 썼다. 환상은 계속 되었다. 어디선가 침몰한 차가 강에 처박힌다. 꾸루룩, 하고 공기 방울이 올라오더니 차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창문을 두들기는 사람들은 중년의 남녀였다.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영준의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비참하게 울부짖는 부모님을 가둔 채 차가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것은 잔인할 정도로 느렸다. 차를 완전히 삼킨 수면 위로 작은 기포가 떠오른다.
“그만…….그만둬!”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거지? 나에게 뭘 바라는 거야?
“대신 죽겠다며?”
상체를 일으킨 소영이 배시시 웃었다. 바싹 마른 가슴 사이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다. 숨을 쉴 때마다 가쁘게 움직이는 몸, 고장 난 자동차 같은 가래 낀 숨소리.
“동생을 정말 구하고 싶으면, 네가 대신 죽으렴.”
“그래. 그럴게.”
“착한 것.”
소영의 손이 영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축축한 피부의 감촉이 관자놀이를 따라 스친다. 그리고는 연인에게 하듯 가슴에 머물러 잠시 더듬었다.
“너를 쭉 보았단다. 너라면 내 옆에 있어 줄 것 같아서. 하지만 사내놈들의 정은 믿을 것이 못 되니 입으로 하는 약속만으로는 안 되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양팔을 들어 영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함께 들어가자꾸나. 네 숨이 끊어질쯤 이 아이는 놓아주지.”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영준은 자신의 동생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생은 아닌 존재에게 말했다.
“네 말은 어떻게 믿지?”
“그래, 그래……의심, 의심……사내들이 잘하는 짓이지.”
그녀는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는 입술을 영준의 뺨에 문대며 말했다.
“여차하면 네 친구에게 구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니?”
“그 사람은 상관없어.”
“어차피 이대로 두어도 네 동생은 죽는단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물을 먹었게?”
“……약속할 수 있어?”
“그럼. 여자는 약속을 쉽게 어기지 않아. 어서 결정하렴. 이대로라면 네 친구도 위험할 거야. 보렴, 괴로워하고 있지 않니.”
도연은 귀를 막은 채로 영준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울리는 이상한 곡조의 노래 탓에 그와 수귀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듣는 것으로 영향을 받는다면 영준은 보는 것으로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강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한 유혹의 소리보다 그는 도연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몹시 놀라고 동요된 눈치였다.
“최영준!”
소리를 질러 봐도 도연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소영의 몸이 일어나 그에게 안겨있다.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혼령은, 그중에서도 악한 혼령과는 길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귀신의 목소리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혼란시킨다.
사람이 죽어남은 혼령 중에서도 악령이 된 것들은 거짓말에 능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자살하고 싶게 만들고,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게도 한다. 감정을 뒤흔들어 어제까지는 그토록 절약하던 이를 도박에 중독시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이 그들의 말에 한 번 귀 기울이게 되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소영을 떼어내야 하는데, 움직임이 자유롭지가 못했다. 있는 힘을 다해 영준의 발목을 잡으려는데 소영이 발을 들어 도연의 손등을 꾹 밟았다.
“가자, 가자 이리온 모다 나와 함께 헤엄치고 있어 모다 우리 함께 있어 내 다솜도 우리 아고도 이리오렴 생은 생이되 거름거름 더훈 날만 힘들지 이리온 우리 아고…….”
흥얼거리는 노래와 함께 소영을 안은 영준이 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정신 차려!”
억지로 일어나려 하다 다시 쓰러졌다. 그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기어서라도 가면, 그의 발을 붙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겁이 났다. 강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수귀가, 사로잡혀있는 그가. 외친다고 생각한 부름은 작게 기어들어가는 속삭임에 불과했다. 영준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소영의 얼굴이 뒤를 돌아본다. 도연을 향해 그녀는 길게 혀를 내밀고 웃어 보였다.
찰랑이는 강물 속으로 서서히 머리가 잠겨든다.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던 두 개의 머리가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매끄러운 혀로 두 사람을 삼킨 강이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바꾼다. 갑작스럽게 사방을 울리던 곡조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지독하게 귀를 울리는 이명뿐이다.
도연은 멍하니 영준이 사라진 강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업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꿈속의 일인 듯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저 속으로 사라진 건가? 정말로?
“……아.”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 도연은 혼자뿐인 강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도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인적이 없는 곳으로 오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의 말대로 그냥 병원으로…….
“누, 누구 없어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사람 살려요! 도와줘요!”
도연의 목소리는 허무하게 빈 강가를 울릴 뿐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작았던가. 있는 힘을 다해, 누군가 올 때까지 외쳐야 하는데, 큰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또 실패했어. 누군가 속삭였다.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말했다.
넌 또 실패했어. 익숙한 목소리다. 나의 첫 친구, 첫 배신자 그리고…….
넌 날 실패했고, 최영준을 실패했고, 최소영을 실패했어. 그리고 넌 앞으로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실패할 거야. 네가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허튼 생각일 뿐이지.
“아니야!”
그 남자도- 뱀에게 사로잡혔던 남자도 실은 네가 구한 것이 아니잖아? 그래, 그는 내가 구한 게 아니었다. 처음 영준이 왔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그 남자는 산에서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 그리고 그 고기를 구워 먹었다. 정력에 좋다는 한심한 이유로, 알을 품은 암구렁이 머리를 깨부숴 죽였다.
칭칭 감긴 구렁이의 영혼, 뱀독이 올라 시커멓게 변해가는 남자를 보고 무서워 울고 있자 이웃집 할머니가 백반가루를 타 먹였다. 남자는 그렇게 나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뱀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더 독하고, 더 많은 수가 되어 돌아왔다.
남자는 이번에는 단숨에 죽었다. 손을 써볼 기회도 없었다. 때문에 누구도, 도연을 제외한 누구도 그 남자가 결국 뱀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뱀들은 이내 집으로 옮겨붙었다. 서서히 시간을 들여, 독이 퍼져 나갔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지, 안 그래? 모두가 널 기분 나쁜 귀신들린 아이라 불렀을 때도, 그 사람과 가족들만큼은 너에게 고마워했으니까. 신통한 아이라고 불러줬으니까. 결국 네가 한 것은 고작 며칠 명만 늘려주다 화만 더 불러온 일이었다는 걸 말할 수 없었지? 그래서 한사코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할머니가 한 일이라고 말하는 거지?
“입 닥쳐!”
도연은 귀를 막았다. 이건 다 수귀의 짓이다. 어디선가 내가 물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다. 듣지 말자, 듣지 마.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도연은 엎드린 채 모래를 움켜쥐었다. 어쩌면 처음 그녀의 말에 대답했을 때부터 꾐에 넘어갔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그래 술을 못하는 그녀에게 소주를 먹였다.
도연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물은 여름이라고 해도 차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왜 소영이에게 술을 먹였지? 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오자고 했지? 아무 계획도 없었으면서 왜?
“안 돼……. 아니야!”
도연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강은 두 사람을 삼키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흰 날개를 펼친 백로 한 마리가 유유히 물 위를 날았다.
물이 머리를 덮기 직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품에 안은 소영의 몸은 젖은 해초처럼 몸에 착 감겨왔다. 밤사이 기온이 뚝 떨어진 강은 몸서리쳐지게 차가웠다. 영준은 소영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물속에서도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동생은 수영장을 다니면서도 수경이 없으면 눈을 뜨지 못했다. 이건 소영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물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준과 소영의 몸은 마치 돌덩어리처럼 강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느리게, 그러나 꾸준하게 수면에서부터 멀어진다. 그녀가 이끈 곳은 정말 사람이 죽기 딱 좋은 곳이었다. 갑자기 발밑이 사라지는 극단적인 경사, 그 밑으로는 시커멓게 입을 벌린 깊은 강이 펼쳐진다. 저 아래 두꺼운 모래 위에는 수초가 넓게 펼쳐져 있다. 가라앉는다면 시체를 찾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을까. 강물 속에서는 밖에서 보았던 수많은 눈들이 더 크고 강렬하게 떠올랐다. 분명 해가 비추고 있었지만 강물 속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빛을 턱밑에 비춘 것처럼 기괴하게 드러난 흑백의 거대한 얼굴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구멍 난 그 이목구비들은 웃고 있었다.
소영의 입에서 부그르 하고 거품이 솟아올랐다. 내가 죽기 전에는 그녀를 놔주겠다고 했으면서.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비열한 본능을 탓하며 결국 숨을 뱉어낸다. 코와 입으로 물이 왈칵 들어왔다.
이제 됐지? 하는 눈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생의 눈은 감길 줄을 모른다. 오히려 이쪽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랑스럽다는 듯 영준의 뺨을 쓸었다. 입술이 다가와 영준의 입술을 비벼 댔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이, 그녀는 영준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숨을 뱉어냈다. 조용한 물속, 더 이상 마음을 파고드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둥글게 올라가는 기포를 보자 갑자기 멍하던 정신이 돌아온다.
같이 죽을 셈이구나. 거짓말을 했구나, 갑자기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왜 내가 이런 바보 같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거지? 정신을 차리자 너무나 앞뒤가 빤한 속임수였다. 뒤늦은 깨달음에 영준은 있는 힘을 다해 수면 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위처럼 무거운 몸은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소영의 팔이 영준의 목에 감겼다. 잔뜩 힘을 준 채 그녀는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거품만을 뿜어대는 말은 조금도 와 닿지 않는다.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영준은 있는 힘을 다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격렬한 발장구에 조금씩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억--!”
수면 위로 솟구친 영준은 정신없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동생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 끌어올렸다. 출렁이는 강물이 얼굴을 계속해서 핥는다. 영준은 억지로라도 숨을 쉬게 하기 위해 소영의 입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아악!”
소영이 입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으득, 하고 깨물었다. 그리고 영준의 어깨를 잡아 다시 물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작정을 하고 매달리는 사람을 안고 헤엄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울컥하고 다시 강이 머리 위를 덮친다. 물이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도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영준은 필사적으로 다시 위로 떠오르려 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는 영준과 물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소영의 몸싸움이 계속되었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팔을 움직이려 해봐도 들어지지가 않는다.
마지막 힘을 다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급하게 공기를 삼키자 폐가 뒤틀리는 것만 같다. 소영은 악에 받쳐 어깨에 매달려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뜨거운 감촉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흐른다. 강물 속에 시뻘건 피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발로 급소를 차고, 이를 더욱 세게 박았다. 개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첨벙대는 물 사이로 전염될 것 같은 무서운 악의를 퍼트린다.
불현듯 익수자의 구조요령이 머리를 스친다. 영준은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며 신음을 흘리는 소영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나 때리자 결국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목에서 뜨거운 것이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영준은 소영의 몸을 위로 눕힌 뒤 고개를 뒤로 젖혀 숨을 들이마셨다. 몸 어딘가에서 그륵그륵하는 소리가 울린다. 마치 오열을 한 뒤처럼 숨이 턱턱 막혀 잘 쉬어지지 않는다.
그때 동생의 얼굴에 겹쳐진 다른 여자의 얼굴이 쑥 떠올랐다. 마치 투명한 비닐봉지로 가면을 만들어 얼굴에 씌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눈이 길고 찢어진 퉁퉁한 얼굴, 여자는 원망이 담긴 매서운 눈으로 영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울분에 차 소리쳤다.
‘거짓말쟁이!’
‘약속했으면서! 함께 죽어주겠다고!’
언제 이렇게 멀리 떠내려 왔는지, 강가가 너무나 멀게 보였다. 짙은 녹색의 강에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힘이 빠진 몸은 자신도 모르게 동생의 몸에 달라붙으려 하고 있었다. 격해진 물살이 머리 위를 자꾸만 타 넘는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영원히 함께 하자고 해놓고, 결국에는 너도 배신하는구나, 같이 죽기로 해놓고 왜 도망치려고 하니?’
발밑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누군가 발목을 세게 움켜쥔다. 덜컥, 무서운 힘이 물속으로 영준을 다시 끌어들였다. 반항할 수조차 없는 힘에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몇 미터나 되는 강 밑으로 끌려 들어왔다. 밑을 보자 수초 속에서부터 수많은 긴 팔이 올라와 영준의 발을 잡고 있었다. 몇 미터는 될 것 같은 그 미끈하고 탁한 손은 물뱀처럼 길게 솟아 뻗어왔다. 그리고 영준이 지켜보는 중에도 계속해서 활짝 손을 펼치고 더 많은 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광경에 순간적으로 영준은 정신을 놓을 뻔했다. 물이 왈칵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편해질 거야, 죽으면 모든 것이 바뀌어,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요.’
달래듯 여자가 다시 말을 한다. 의식을 잃은 소영의 손이 영준의 몸에 갈고리처럼 달라붙어 딸려왔다. 소영의 얼굴에 겹쳐진 채 여자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약속을 지켜! 같이 죽는 거야,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발을 붙잡는 손을 마구 걷어찼다. 투명한 손은 걸리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그러면서 영준의 몸을 잡아당기는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또 있을까. 이미 소영의 몸은 축 늘어진 짐에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소영의 얼굴에서 자신의 머리를 거의 다 빼놓은 상태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승에서 이룰 수 없다면 저승에서라도 이뤄야지. 같이 죽는 거야, 죽어서 함께 하는 거야!’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너 같은 건 사랑하지 않아 누구도 너를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너와 같이 죽는 일은 없어 넌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영준의 머릿속에 분명한 문장이 되어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고스란히 소영의 몸을 사로잡은 수귀에서 전달되었다. 퉁퉁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영준은 악에 받쳐 다시 한 번 외쳤다.
넌 괴물이야 어떤 남자도 네 곁에 있어주지 않을 거야 이대로 죽는다 해도 너와 같이 있지는 않겠어 이 추하고 비참한 귀신
‘닥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하지만 누구도 네 곁에 자의로 머물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넌 추한 괴물이야 누구도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닥쳐! 닥쳐!’
영원히 넌 혼자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강바닥에 쳐 박혀 있을 거야 아무리 남자를 찾고 구걸해도 소용없어! 넌 괴물이야, 역겨운 괴물! 괴물!
‘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눈이 크게 부풀었다. 악을 쓰던 여자의 몸이 소영에게서 빠져나와 강 속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거대한 물고기처럼 부풀어 오른 여자의 혼령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영준의 주변을 8자 모양으로 돌았다.
‘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
여자의 혼령이 몸을 통과할 때마다 콘크리트 덩어리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수백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변한 여자가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단숨에 영준을 삼키겠다는 듯 덥석 물었다. 바위 같은 이가 가슴을 물어뜯는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거짓 통증이다. 마음으로는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폐사찰을 깨끗한 암자로 만들고, 맹물을 차로 변화시키고, 죽은 후에도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낸다.
영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소영을 물 위로 밀어 올렸다. 그 반동으로 자신의 몸은 밑으로 내려갔다. 영준은 끌려들어 가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팔다리를 늘어트리고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엎드린 채 서서히 떠오른 몸은 등을 물 밖으로 내놓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살에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절망적으로 흔들렸다. 내가 동생을 죽이는구나, 죽이고 마는구나. 정신 차려, 제발,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도록. 누군가 제발, 제발!
갑자기 소영의 몸이 쑥 올라갔다. 물 아래로 늘어진 그녀의 팔꿈치를 붙드는 손이 보였다. 길고 커다란 둥근 그림자가 수면 위에 떠 있다. 노란색의 고무 보트였다. 힘찬 손길에 소영의 몸이 보트 위로 끌어올려졌다.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몰려든 손이 영준의 발목과 종아리를 칭칭 감아 당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영준은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갔다. 의식이 희미해진다. 사방이 장막처럼 시커멓게 변하고, 눈의 핏줄이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이란 단어가 거품처럼 떠올랐다 터졌다. 어느새 신발이 벗겨진 맨발에 수초와 모래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이 갑자기 누군가 불을 내린 것처럼 하얀 선만 남기고 어두워졌다.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꼿꼿이 선 채로! 누구도 네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악을 쓰던 여자가 영준의 몸을 통과하듯 다시 한 번 후려쳤다. 그리고 흐릿한 정신을 틈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죽어! 죽는 거야! 죽어!’
여자가 빙의된 순간 영준의 의식에 그녀의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12살부터다. 내가 12살 때부터 그는 내 남자였다. 첫눈에 본 순간 알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내가 웃으면, 그도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걸으면 눈길이 따라붙었다. 그는 가끔 일부러 우리 집 앞을 가로질러 갔다. 특별한 이유도 없으면서 거리를 서성거렸다. 내 눈에 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비밀스러운 연인이 자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키가 크고, 어른스러운 그는 고을의 자랑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위에 내놓으라 하는 예쁜 여자들도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남자였다. 그는 때로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행동과 말로 내게 마음을 전달하곤 했다.
우리는 고백도 없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말 한마디 없이도 사랑을 키웠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늘이 한 짝으로 만들어놓은 운명이었다. 이토록 완벽한 사랑이 세상에 또 있을까.
18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언제쯤이면 그에게 시집을 갈 수 있을지 매일매일 세며 기다렸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루가 한 달 같이 무거웠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왔는지, 우리 사이에 눈빛으로 이루어졌던 그 수많은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이 정해준 데로 혼인해 매일 입에 풀칠하는 것만을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런 아름다운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괜찮았다.
나는 이겨낼 수 있었다. 곧 나는 빛나는 꽃처럼 양 뺨에 붉은 연지를 붙이고, 날아갈 것처럼 고운 신을 신고 혼인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그 사람이 혼인을 한다고?”
“그래, 이 잡것아! 혼인을 한단다! 내가 뭐라든, 헛 꿈꾸지 말라지 않아!”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그는 내 남자다. 이건 분명 잘못된 거야. 거짓말이다. 음모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커다란 대문 앞에는 온갖 선물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었다. 비단으로 된 보자기에 싸인 상자들이 무수히 쌓여 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썼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배신감에 눈물이 흘렀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종이를 적신다. 일부러 그 위에 글자를 덧썼다. 번진 글자를 보면 그는 아마 내 눈물의 흔적에 마음이 메어져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
열장이 넘는 종이에 그를 향한 내 마음과 지난 6년간의 사랑의 기억들을 낱낱이 적는다. 애절한 내용에 글을 쓰는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리다. 나는 다시 엎어져 눈물을 쏟았다. 글자들이 흐리게 번진다.
편지를 접어 가슴에 품고 나는 다시 그의 집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를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일꾼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신신당부를 하며, 그의 손에 꼭 직접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나는 모아두었던 돈까지 탈탈 털어 주었다.
나는 그와 항상 우연을 가장하여 스쳐 지나며 서로 눈길을 나누었던 외진 다리에서 기다렸다. 그에게도 자시에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적었다. 어두운 밤에 혼자 밖에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서웠지만, 그만큼 그에게는 내가 애처로워 보일 것이다.
그는 한참 만에 나타났다. 다리 저편에 나타난 그는 내게 미안한지 머뭇머뭇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달려가고 싶었지만 일부러 못 본 척 고개를 꼬았다. 표표히 흐르는 강물 위로 달빛이 부서지듯 내려앉는다. 그 서늘한 달빛에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오뚝한 코와 단정한 이마, 옥으로 빚은 것처럼 눈부신 미남자다.
“무슨 일이니.”
“내 편지는 보았지요, 오라버니?”
“그래, 보았다.”
나는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혼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저를 두고 그러실 수가 있으세요?”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도취된 기분에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런데 얼른 다가와 나를 안아 일으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겠다고 다짐해야 하는 그가 꼼짝을 하지 않는다. 울며 그를 살피자 주먹을 꽉 틀어쥐고는 나를 굳은 얼굴로 내려 보고 있다.
“왜 그렇게 매정한 얼굴을 해요 오라버니,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나도 참고 참았다.”
굳은 결심을 한 듯 그의 말은 단호했다. 옳거니, 이제 드디어 정약 혼인을 깨고 내 사람이 되겠다 하겠구나.
“몇 번이고 네가 보내는 얼토당토 안한 편지와 선물들, 고을 사람들에게 퍼트리고 다니는 헛소문을 참고 또 참았어! 어린 처녀의 귀여운 망상으로 여기고 네 짝사랑이 가엽다고도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 더는 못 참겠다. 너는 병이야!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적어 보낼 수가 있니!”
그는 품에서 내가 쓴 편지를 꺼내 양손으로 구겼다. 그리고 내게 편지를 집어 던졌다.
“마치 내가 너와 몰래 정이라도 통한 것 같더구나! 어쩌면 이렇게 수치도 모르고 이런, 이런 내용을……! 집안 일꾼들이 이 편지를 돌려가며 읽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아니? 너는 정말이지 부끄러움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나는 멍하니 그가 내게 퍼붓는 폭언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그가 무어라 하는지 모르겠다. 왜 저런 말을 할까. 내게 화가 날만한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진저리를 치며 뒤돌아섰다.
“다시는 이런 편지도 쓰지 말아라. 나에 대해 어떤 말도 하고 다니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라!”
“오, 오라버니!”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발 앞에 나는 얼른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발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왜 이러세요. 제게 화가 난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고칠게요, 고치겠어요.”
“그만! 그만둬라 제발. 지긋지긋하다!”
세게 밀쳐내는 힘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넘어지지 않으려 손을 내젓다가 그의 허리를 붙들자 다시 매섭게 내쳐졌다. 내가 수치를 모른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토록 수치스러운 일은 다시 없다. 흉하게 쓰러진 나를 그는 본체도 하지 않고 가버린다. 다른 여자에게 가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을, 운명을 배반하고.
“주…… 죽을 거예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썼다. 그가 멈춰 선다.
“그대로 오라버니가 가버리면, 나는 그만 칵 물에 빠져 죽어버릴 거예요! 물귀신이 되어버릴 거예요!”
“네 마음대로 해라!”
고함을 지른 그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다. 나는 악을 쓰며 욕을 하고, 데굴데굴 구르고, 가슴을 내리치며 울어도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어도 돌아올 기색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단숨에 안면을 바꾸고 나를 버릴 수가 있을까. 남자의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귀신같구나.
눈물을 훔치는데 다리 끝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조그만 각낭(角囊 전통복주머니)이다. 조금 전 몸싸움 와중에 잡아 뜯어진 모양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비단 주머니를 집어 만져보니 안에 길고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잘 비춰보니 도장이었다.
옳거니, 하늘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 이것을 들이대면 그가 나와 종종 이렇게 몰래 만나왔다는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도장같이 중요한 물건을 증표로 주고받은 여자가 있다 하면 이 혼담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신이 나 벌떡 일어났다.
즐거운 마음에 도장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이것이 그의 살 같고, 정 같은 마음이 절로 든다. 도장은 제 이름이 아닌가. 그는 나에게 이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름처럼 소중한 것은 또 없는 법이다. 기쁨이 솟구쳐 도장을 뺨에 대고 부비다 그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바닥에 떨어진 도장이 대굴대굴 구른다.
“아이고, 아이고!”
뻗은 손 사이로 빠져나간 도장이 그만 다리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앞뒤 없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동아줄, 급한 마음에 다리 밑으로 몸을 내밀었다. 소리도 없이 강물은 도장을 냉큼 삼킨다.
“안 돼! 안 돼!”
몸을 빼고 아래를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강물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도장은 나무로 만들어져 가벼웠다. 분명 물에 뜰 것이다.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굴렀다. 이 순간에도 저놈은 멀찌감치 떠내려가겠지. 그럼 나는 그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에잇!”
치마를 들춰지고 나는 눈을 딱 감는다. 그리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도장만 찾으면, 저 도장만 손에 들어오면……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요란하다. 얼굴이 잔뜩 얽히고 못생긴 여자가 가슴을 내려치며 운다. 그 옆에는 담배만 뻑뻑 피는 남자가 돌아앉아 있다. 저기 흰 천에 싸진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리 서러워 울지?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개를 숙인 젊은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다, 그가 울고 있다. 나를 찾아 왔구나, 돌아온 것이다. 걱정 말아요, 그렇게 울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어. 그의 옆에 앉아 등을 감싸 안아본다. 이제 돌아왔으니 우린 영원히 함께야. 그런데 그가 일어나 돌아간다. 언제 나를 데리러 오려는 걸까. 담배를 피던 남자가 바닥을 손으로 내리치며 고함을 질러댄다.
‘에이 동네 창피해서 내가 살 수가 없다! 에이, 에이!’
그는 울화가 치미는 듯 다시 제 가슴을 두들겼다. 그리고 발로 천으로 쌓인 것을 밀어버렸다. 곰보인 여자가 울면서 그것을 감싸 안는다.
‘아이고, 아이고, 딸년 하나 있는 것이, 아이고!’
그녀가 얼굴을 비비는 와중에 얼굴을 덮어놓은 천이 미끄러진다. 드러난 것은 퉁퉁 불은 얼굴이다. 저것은…….
그는 결국 혼례를 치렀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나를 두고, 내가 이렇게 죽었는데. 남자는 믿을 수가 없다. 거짓말쟁이. 사랑한다고, 그렇게 사랑한다고 약속해놓고, 함께 있겠다고 해놓고, 나를 배신했다. 모두 거짓말이다. 죽어, 죽어, 나만 두고 행복해질 순 없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
여자의 기억은 썩은 물처럼 음습하고 독한 맛을 남기고 몸을 빠져 나갔다. 이기적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남을 원망할 줄 밖에 모르는.
더 이상 막힐 것 없이 꾸룩꾸룩 계속해서 물이 넘어간다. 경련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곧 의식을 잃고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영준은 어쩐지 이상할 정도의 편안함을 느꼈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몸의 괴로움은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저 이따위 것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는 미약한 의지만이 실낱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이토록 비참하고, 구원의 여지도 없는, 졸렬한 것에게.
네가 복수하고 싶어 하는 남자는 벌써 이 세상에 없다. 오래전에 죽어 이미 땅에 묻혔다. 부인과 자식,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한 여생을 살다가 이곳에서부터 먼 땅에 묻혔다.
행복하게 얼굴로 웃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덕 많은 아내와 세 명의 아들딸이 함께 하는 풍요로운 삶이다. 남자는 고을을 떠나 다른 곳에 터를 잡았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살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를 완전히 잊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축복받은 죽음으로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그를 애도하고 눈물 흘렸다. 그곳에 여자나 여자의 존재가 낄 자리는 없었다.
‘싫어--------!’
더 이상 인간의 얼굴로도 보이지 않게 변한 여자의 혼령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기억을 들켰다는 사실이 광기를 불러온 듯 혼령은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거대한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잔잔하던 강물 속에 소용돌이처럼 급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영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강한 손아귀 힘이 영준의 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목에 칭칭 감긴 수초들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준의 입에 숨을 불어넣어 졌다. 후욱, 하고 강한 숨에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것은 아주 낯선 광경이었다. 마치 옆에서 다른 사람에게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이었다. 계속해서 남자는 영준의 발에 감긴 수초를 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네 인생은 불쌍하기까지 해, 하지만 네가 죽인 사람들로 인해 넌 동정 받을 자격도 잃었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죽여도 영원히 너는 혼자일 거야 구원받을 자격도 없이 언제까지고 남을 미워하고 그런 너 자신을 또 끊임없이 미워하겠지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울부짖던 혼령은 결국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바닥으로 깊숙이 가라앉은 여자는 납작하게 엎드렸다. 한쪽으로 몰려, 남을 노려볼 줄만 아는 눈, 그녀는 이제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넙치처럼 보였다.
발을 감고 있던 수초가 풀어졌다. 영준의 몸을 감싼 사내가 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채로 솟아오른다. 보트 위에서 사람들이 정신없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눕혀지자마자 계속해서 숨이 불어 넣어졌다. 심장 위를 커다란 주먹이 반복해서 내리친다. 쿵, 쿵 하는 강한 충격에 평온하던 온몸이 떨려온다. 갑자기 눈앞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온다. 영준은 허억 하는 숨과 함께 다시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았다!”
와아- 하는 함성이 터졌다. 눈앞에서 태양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머리 위를 감싼 새카만 얼굴의 사람들이 안도와 기쁨이 섞인 얼굴로 활짝 웃었다.
강가에 닿은 보트에서 사람들이 내리며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말이 되풀이했다. 보트에 쓰러져 있던 영준이 몸을 일으키자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부축의 손을 내밀었다.
“소……동, 생…….”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고꾸라지는 머리를 겨우 가눠 보트를 보자 남자 하나가 축 늘어진 동생을 양팔에 안고 내렸다.
“숨은 붙어 있어! 아직 살 수 있어!”
기운차게 말한 그는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켜요! 119 구조대원들 들어올 수 있게!”
마침 상류에 와 있던 119차가 덜컹거리며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귀가 찢어지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것을 든 사람들이 달려왔다. 영준은 그대로 모래 위로 엎어져 누웠다. 게워낸 물은 아직도 덜 나왔는지 쉬지 않고 입에서 흘러내렸다.
대원 하나가 다가와 손을 올렸다.
“난……됐……동생…….”
손을 휘젓자 굵은 목소리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 가 있습니다. 내 말 들리세요?”
폐가 끊어질 것처럼 기침이 나왔다. 눈물이 흘러 팔에 얼굴을 묻는데 누군가 등을 매달리듯 붙들었다.
터질 것 같은 눈을 뜨자 도연이 있었다.
“고마……워……역시, 네가…….”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얼굴이 왜 저렇게 엉망진창일까.……. 일그러진 얼굴이 빙빙 돌기 시작한다.
“최영준!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메아리친다.
의식을 잃은 영준이 신속하게 들것에 실렸다. 산소호흡기가 두 사람의 입에 대어지고, 상태가 급한 소영이 먼저 차에 태워졌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쇼크를 막기 위해 두꺼운 담요가 영준의 몸에 층층이 겹쳐졌다.
도연은 영준의 몸을 꽉 붙들었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우연히 레프팅 하던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숨만 몰아쉬는 사이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가버렸다.
다른 구급차에 실리는 그를 망연자실 보고 있자 119 구조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두 사람 보호자이십니까? 병원으로 신속히 이송해야 합니다. 탑승하시겠습니까?”
“네, 네!”
이를 악물고 일어서자 구급대원이 팔을 잡고 도와주었다.
“보호자 분도 다치셨습니까?”
“아니요.”
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