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2권)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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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과 함께 폭발하듯 깨진 여러 개의 전등으로 복도는 엉망이었다. 사람들은 이게 웬 사태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각난 파편을 피해 구석으로 선 환자와 보호자들 사이로 불안한 술렁임이 일었다.

“대답해! 김도연!”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던 영준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부러진 갈비뼈에 무리가 간 탓인지 숨이 막혔다.

“김도연!”

텅 빈 비상구를 겉돈 외침은 벽에 부딪혀 그대로 사라졌다. 정신없이 위층과 아래층을 살펴본 영준은 다른 층 비상구를 확인했다. 모두 닫혀 있었다.

급히 가까운 문을 열고 나가보았지만 그곳에도 도연은 없었다. 휠체어를 밀고 지나가는 환자와 보호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전은 오직 5층에서만 일어난 일 같았다. 영준은 마침 가까이 서 있던 간호사를 붙잡았다. 데스크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간호사는 갑자기 팔이 잡히자 놀랐는지 움츠려들었다.

“여기, 젊은 남자 한 명 오지 않았어요? 환자복 입고, 다리에 깁스 하고 있는.”

“아뇨.”

“방금 전에 비상구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여기 지나가지 않았어요?”

“안 왔어요. 환자분 진정하시고 이것 좀 놔주세요.”

잡힌 팔을 빼내며 간호사가 말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복도는 일직선으로, 비상구 계단은 바로 간호사들의 데스크 앞이었다. 누군가 나온다면 보지 못할 위치가 아니었다. 다른 층으로도 가보았지만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방이 자신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영준은 급히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입구에 선 경비들을 모두 붙잡고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병원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불편한 몸으로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병원을 빠져나갔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에 자신만큼 무서운 가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영준은 서늘한 비상구 계단에 선 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단한 벽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콘크리트의 감촉만이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로웠는데……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자 뭔가 미끌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펴보니 온통 피투성이였다. 머리에서 유리가루 조각 같은 것이 떨어졌다. 형광등이 깨질 때 바로 밑에 있던 것이 기억났다. 문득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뜩 고개를 든 영준은 급히 계단을 올랐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복도에 나와 서 있던 사람들이 주춤 비켜섰다. 어깨가 부딪친 이들이 무어라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영준은 서둘러 소영의 병실로 향했다. 깨진 유리들이 걸음마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오빠?”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베개에 기대앉아 있었다.

“너 괜찮아? 아까 소리 지르지 않았어?”

영준은 병실을 빠르게 살폈다. 조금 전과 다를 것 없이 모두 그대로였다.

“무슨……. 오빠, 머리에 피, 피!”

뜨끈한 감촉이 이마를 타고 눈썹 위를 지나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 닿기 전에 슥 문지르자 오른손이 금세 피투성이로 변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손의 상처 위로 붉은 피가 방금 솟구친 것처럼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데자뷰 같이 느껴졌다. 병원, 깨진 유리 조각들, 오른손의 상처와 피……

“어쩌다 그런 거야?”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살난 전구를 치우는 사람들 사이로 형광등의 수은이 어쩌고 온도가 어쩌고 하는 대화가 간간히 들려왔다.

“오빠!”

고개를 들자 소영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큰소리를 낸 것이 괴로운 듯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친척분은 어디 계시고?”

영준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 서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동그랗게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소영의 눈동자가 망연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도연의 눈이 떠올랐다. 크게 확장된 채 무엇도 비추지 않던 텅 빈 눈. 온몸에 소름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순간 누군가 팔을 건드렸다. 영준은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밀쳐진 것은 간호사였다. 소영이 어느 사이엔가 너스콜을 누른 것이다.

“이런 세상에. 무슨 짓이에요?”

뒤에서 트레이를 몰고 들어온 수간호사가 버럭 화를 냈다. 영준은 무어라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고는 병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수그린 이마에서 뚝, 하고 핏방울이 떨어졌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 머리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혈관이 많은 곳을 다쳐 피가 많이 흐른 것뿐이었다. 몇 바늘을 꿰매야 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자꾸만 일어나는 영준을 덩치 큰 보안요원이 눌러 앉혔다. 그는 영준이 복도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은 뒤 병실을 떠났다.

복도에서는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데스크에서 항의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을 요구하는 보호자들에게 젊은 의사는 형광등의 열팽창 가능성과 전구 안 소량의 수은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설득력은 별로 없었다. 파편에 단순히 생채기를 입은 사람뿐 아니라 꽤 크게 손이나 팔을 다친 이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어떻게 줄줄이, 병원에서 시공을 어떻게 했기에, 하는 격앙된 어조가 이어졌다.

한 시간 후 푸른 옷을 입은 직원들이 부서진 전구를 교체하러 왔다. 박살이 난 파편들은 모두 치워졌고, 수은에 불안해하는 보호자들을 위해 환기가 이뤄졌다.

노을이 사라지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즈음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정리되었다. 당장 눈에 띄는 흔적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흥분도 빠르게 식었다. 그러나 영준의 마음은 진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준은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밤을 새웠다. 병원 창문 너머에는 서울과는 다른 소도시 특유의 어두운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돌아오지는 않을까, 자신의 불길한 상상이 틀렸음을 빌면서 마음속에서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확신을 억눌렀다.

두 번의 밤이 더 지난 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가능성인 동시에 확인사살이기도 했다. 아침 회진이 시작되기 전, 영준은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환자복 위에 낡은 셔츠를 걸친 채 병원 앞에 늘어서 있던 택시를 잡아 무작정 한탄강으로 향했다.

강은 이틀 전 그들이 떠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뭔가를 기대했던 영준에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곳의 풍경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텐트 주변에서 라면을 끓이던 휴가객들 몇이 의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환자복에 샌들 차림이 이곳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울에서 타고 온 흰 자가용은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도심이었다면 견인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장소였다. 한쪽 바퀴가 도로 쪽으로 내려앉아 아무렇게나 방치된 꼴이 영준이 주차해 놓은 그대로였다.

영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차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영준은 시트 위에 놓인 푸른 배낭을 집어 들었다. 기울어진 배낭 사이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이프가 떨어졌다. 영준은 그대로 차 옆에 주저앉았다. 자갈 위로 샌들이 미끄러졌다. 시커멓게 멍든 발톱은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 이 배낭 안에 있다고 했었다. 병원에서도 쭉 두고 온 것을 불안해했다. 만약 그가 무사히 병원을 빠져나왔다면, 차도 배낭도 아직까지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영준은 도연이 남긴 짐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강가 나무에서 매미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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