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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심하게 열이 났다. 고열에 들떠 잠든 사이 꿈을 꾸었다. 오래되고 익숙한 악몽이었다. 매미가 지독하게 우는 외딴 고속도로와 부모님에 대한 내용이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준을 괴롭혔다. 눈을 뜨면 매번 뺨이 젖어 있었다.
집에 있는 것이 괴로워 중혁을 만나러 갔으나 잔소리만 들었다. 일 할 상태가 아니니 쉬라며 쫓겨났다. 면도나 좀 하라며 등이 떠밀려 별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으나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다시 열이 난다. 차라리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고 싶어 미뤄두었던 정원을 정리하고 먼지 쌓인 집을 청소했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움직인 탓에 어지러워 다음 날까지 꼬박 앓고 말았다. 영준은 미지근한 무기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하루 종일 벽에 기대어 앉아 생채기 난 자신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조용하던 집안에 전화벨이 울린 것은 오후 4시쯤이었다. 전화를 받자 낯선 번호는 학교 과사였다.
-일원대학교 체육교육과 최영준 학생이죠? 이번 학기에 등록을 안 했는데, 이대로는 제적 됩니다.
사무적인 음성이었다. 제적이란 단어가 뺨을 후려쳤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연의 일에 정신이 팔려 학교 문제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휴학하겠습니다.”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결론은 하나였다. 영준은 옷을 갈아입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내 받은 데로 휴학연장신청을 선택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으로썬 학교에 다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우선순위는 분명했다. 그런데도 휴학 신청을 하고 나자 감당할 수 없이 울적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등록금을 내기 직전까지도 내가 학교를 다닐 상황인가를 수십 번 고민했었다. 부모님이 생전에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일찌감치 직업을 구해 사회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아르바이트와 좋은 학점, 졸업이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때가 까마득했다.
학교 사이트를 끄고 나자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온갖 게임 광고 창이 떠 있었다. 게임도 현실도피도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도 영준에는 낯선 것이었다. 볼 일은 다 봤지만 혼자 집에 돌아가는 것이 싫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신음 등 게임 효과가 사방에서 들렸다. 부수고, 죽이고, 터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백색소음처럼 이상한 안정감이 들었다. 영준은 푹신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합숙비는 돌려주마. 야구는 더 이상 못하게 됐으니까.’
코치는 영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네가 살 사회는 공부하지 않은 자와 공부한 자로 나뉘기 마련이다. 이젠 보호자도 없고, 깡패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장학금도 날아갔고 네 사정이 안 됐긴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못한 사람도 많다는 것 잊지 말아라. 내 말이 지금은 와 닿지 않겠지만 살다 보면 알게 될 거다. 열심히 해라. 포기는 죄다. 그것도 대가가 큰 죄. 코치는 비장한 얼굴로 말하고는 열권이 넘는 문제집과 참고서를 안겨 줬다.
‘앞으로는 네가 가장이라는 걸 잊지 마. 네 책임이 무거워.’
‘전 한 번도 가장이라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해야 해.’
‘이걸 다 가져가요? 책이 너무 많아서 가방이 닫히지도 않아요. 이렇게 무거운 가방은 매본 적이 없어요.’
‘그건 가방 무게가 아니다.’
코치는 목에 난 구멍으로 담배를 대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는 몸에 나쁘니 넌 평생 피지 마.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해. 네 폐를 썩게 만들 거다. 잠깐 기다려 전화를 받아야 하니까. 네 동기가 벌써 프로구단의 관심을 받고 있거든. 어차피 이제 너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목이 어떻게 되신 거예요?’
‘폐암이다. 온몸에 전이가 됐지.’
‘아……’
‘뭐냐 그 얼빠진 얼굴은. 죽는다는 게 생각처럼 나쁜 건 아니야. 자, 전화나 받아.’
‘전화 같은 거 안 왔어요.’
‘왔어. 그러니까 받아라.’
“드드드드드드드드”
갑자기 들리는 진동 소리에 영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잠시 쉰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꿈을 꾼 것 같은데. 영준은 뭉친 근육을 풀며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코치님과 교무실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영준을 알게 모르게 계속 챙겨주던 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 후에는 통 연락을 못 했지.
“드드드드드드드”
핸드폰이 다시 한 번 격렬하게 진동소리를 내며 떨렸다. 언제 설정이 바뀌었는지 벨소리는 나지 않았다. 영준은 전화를 들어 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낯선 지역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최영준 씨 되십니까?
“……예. 누구시죠?”
-인천 서부지구대 김영호 순경입니다. 혹시 김도연 씨 아십니까?
“예? 예!”
전화 너머로 들리는 이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영준은 전화기를 꽉 쥐었다. 시끄러운 피시방 소음 사이로 무뚝뚝한 음성이 분명히 말한다.
-현재 김도연 씨가 성모병원 응급실에 와 있습니다. 신원보증인이 필요한데 오실 수 있으십니까?”
“으, 응급실이요?”
-예 지금 멀리 계십니까?”
“아니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네. 자세한 건 오셔서 들으시면 됩니다. 주소는……
“잠시만요!”
영준은 급히 데스크로 가 종이와 펜을 빌렸다. 펜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렁이 기어가듯 엉망인 글씨로 겨우 주소를 받아 적은 영준은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소가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서둘러 자리를 나섰다.
피시방을 뛰어나가는 영준의 뒤에서 아르바이트생이 고함을 질렀다.
“잠깐만, 돈 내고 가야죠!”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가던 영준은 다시 올라와 지갑을 뒤져 손에 잡히는 데로 지폐를 꺼내 주었다. 아르바이트생의 황당한 표정을 뒤로하고 계단을 마구 달려 내려가다 결국 마지막 층에서 발을 헛디뎌 구르고 말았다. 무릎이 시큰거렸지만 아파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절뚝거리며 도로 쪽으로 뛰어든 영준은 손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택시를 불렀다.
차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 비가 뿌렸다. 가늘던 비는 병원에 도착할 쯤에는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영준은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응급실까지 달렸다. 큰 병원이어서인지 사람들로 몹시 북적댔다. 안내 데스크로 달려가 경찰에게 들은 대로 설명하자 안쪽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사방이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로 웅성거렸지만 영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연한 녹색 커튼이 쳐진 병상들이 보였다. 그 제일 안쪽, 검은색 경찰복이 어른거렸다.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를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지나쳤다. 머리가 깨지고, 손을 피에 젖은 옷으로 감은 채 덜덜 떠는 사람, 어린아이를 안고 의사가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항의하는 흥분한 젊은 엄마……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생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떠도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인파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울 틈이 없었다.
영준은 큰 보폭으로 단숨에 병상 가까이 다가갔다. 반만 쳐진 커튼 안쪽, 누군가 앉아있었다. 다가가 얼굴을 확인하려 할 때 경찰이 앞을 막아섰다.
“최영준 씨?”
“네.”
“잠시 질문 드릴 게 있습니다.”
“먼저 확인 좀 할 수 있을까요?”
급히 묻자 경찰은 한발 물러섰다. 커튼을 젖히자 병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대일병원이 적힌 환자복 차림이었다. 얇은 옷은 여기저기 몹시 더러웠다. 한쪽 발목을 감싼 깁스가 시커먼 족쇄처럼 묵직하게 매달려 있다. 마지막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곧은 코 위로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그늘을 드리웠다.
“김도연…….”
영준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조금 야위긴 했지만 분명 그였다. 몇 번이나 잘못된 정보로 허탕을 쳐왔건만, 정말로 찾은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없이 딸려온 몸은 인형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는 데로 흔들린다. 어딘가 이상했다. 언제나 날카롭게 사방을 살피며 빛나던 긴 눈이 넋 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그저 탁했다. 영준은 며칠 전 밤 자신이 보았던 광경이 떠올라 오싹했다.
얼굴을 똑바로 보며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시선은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외부로부터의 모든 정보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링거를 맞고 있는 손등을 손끝으로 가만히 건드려 보았다. 놀랄 만큼 차가웠다. 영준은 침대 옆에 있는 담요를 들어 도연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경찰이 이제 됐냐는 듯 다가왔다. 영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경찰이 이끄는 데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러나 도연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또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을 거란 불안이 있었다.
“김도연 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지요?”
잠시 머뭇대던 영준은 쉬운 대답을 찾았다.
“친척입니다.”
간단한 신분 확인이 이뤄졌다. 연락처와 집 주소, 다니는 학교 이름을 받아 적은 경찰은 도연이 어떻게 실종되었는가에 대해 물었다. 정직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바보 같아 적당히 자신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없어졌고, 이후 신고를 내려 했으나 가족이 아니라 어려웠다는 답에 경찰은 납득한 듯했다. 중간중간 빠진 고리가 있었으나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메우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영준이 질문할 차례였다.
“어디서 어떻게 발견된 거죠?”
“오늘 오전 중 주민 분이 신고했습니다. 새벽 내내 행색이 이상한 사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고 해 출동해서 거리를 걷고 있던 김도연 씨를 발견했구요. 이름과 나이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고, 의사들도 심신상실 상태 같다고 합니다. 환자복에 적힌 병원 이름으로 조회해 해당 병원 측에 연락해보니 보호자 분인 최영준 씨 연락처와 함께 발견된 즉시 연락 달라는 부탁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재 건강상태와 기타 문제에 대해서는 의사분께 설명을 듣구요, 보호자께서는 인도서와 간단한 서류 작성을 해주셔야 합니다.”
경찰은 무뚝뚝하지만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시키는 데로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하는 사이 의사 한 명이 다가왔다.
의사는 현재 도연이 외부 자극에 아무 반응이 없고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 등 개인 정보에 대한 기억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의사 표현이나 결정능력 역시 없어 충격에 의한 장애가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의사는 입원치료를 권했다. 그런데 젊은 의사의 입에서 ‘입원’이란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연에게 반응이 나타났다. 힘없이 늘어뜨렸던 손을 들어 영준의 손을 잡은 것이다.
손 이외에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표정도 없었으나 영준은 어쩐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하자 보호본능이 울컥 치밀었다. 영준은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입원은 하지 않겠습니다. 퇴원 후 집이 가까운 병원에서 따로 진료 받을게요.”
영준은 응급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조금 전 혼자 들어왔을 때보다 많은 수의 혼령이 보였다. 도연 옆에서는 항상 그랬다. 약해진 그는 이렇게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다.
더러워진 깁스를 풀고 간단한 진단을 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외부적으로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탈수와 가벼운 영양실조, 오랫동안 차고 있던 깁스로 인해 걷는 것이 불편한 정도였다. 도연은 실물 등신대 인형처럼 자기 안에 갇혀 있었으나 영준이 잡아끌자 고분고분 일어섰다.
도연을 부축해 응급실을 반쯤 빠져나갔을 때였다. 돌연 뒷목이 서늘해졌다. 이끌리듯 돌아본 곳은 중증 외상치료실 방향이었다. 혼잡한 사이로 덩치 좋은 보안요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119 구급대에 실려 온 사람 둘이 진료를 받고 있었다. 네가 내 차를 박았네, 네가 커브를 돌았네 하는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덩치가 큰 남자는 화가 난 듯 손을 들어 무어라 거칠게 흔들어댔다. 시끄러운 광경이었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때 남자의 몸을 가리고 있던 간호사가 자리를 비켰다.
“이런…….”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교통사고를 당한 남자의 몸 위에 몇 명의 사람들이 올라앉아 있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50대 정도 된 아주머니가 마치 고양이처럼 배 위에 쪼그리고 있다. 그 옆에는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그리고 런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할아버지 한 명…… 아무 공통점도 없는 모임이었다. 창백한 혼령들은 서로의 존재에 무관심해 보였다. 그저 남자의 뱃속에 물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양손을 담근 채 휘젓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때마다 남자는 괴로운 듯 몸을 꿈틀거렸다.
“가자.”
영준은 도연을 재촉했다. 뭔가가 심상치 않았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도연은 생각처럼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반쯤 질질 끌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안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의식이 있던 구조자였다. 발작하듯 상체를 마구 뒤틀며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쉰다. 고통을 호소하던 남자는 의사가 어떻게 대응을 하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다.
근처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비상에 걸려 달려왔다. 멈춰 선 영준의 옆을 간호사 몇 명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그 뒤를 혼령들이 따랐다. 의사 한 명이 급히 심장마사지를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내내 지루하게 응급실 안을 배회하던 혼령들이 거짓말처럼 활기차게 움직였다. 마치 고기 냄새를 맡은 개떼 같았다. 소동이 일어난 침대를 빙 둘러싸고 모여,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난 양 죽음과 싸우는 남자를 들여다본다. 네가 불행해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을, 죽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음험한 만족감이 넘실거린다.
바글바글 넘치는 혼령들에게 에워싸인 모습은 개미에게 산채로 뜯기는 곤충 같았다.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탔던 세 명을 생각하면, 그가 살아남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영준을 움직였다. 가지 않으려 버티는 도연을 들어 올리다시피 하여 정문으로 향했다.
‘옳지!’
‘넘어간다! 넘어가!’
기뻐하는 탁한 음성이 경박한 웃음소리 사이로 터진다.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묻힐 정도의 소란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환자들 몇이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욕지기를 했다. 품 안의 도연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모여 있던 혼령들 몇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반투명하던 몸이 먹물이라도 퍼진 것처럼 검었다. 무력하고 손쉬운 사냥감을 발견한 얼굴이었다. 영준은 다급히 도연을 어깨에 들쳐 멨다. 응급실 문을 빠져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택시를 잡았다. 급한 마음에 도연을 던지듯 밀어 넣고 좌석으로 뛰어들었다.
“출발해요!”
고함을 지르자 행선지를 물으려던 기사가 놀라 부웅 하고 액셀을 밟았다. 완만한 커브를 도는 순간 영준은 응급실 정문을 흘깃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 몇 개가 빗속에 서 있었다. 놓친 것이 분한지 마치 시계추처럼 크게 좌우로 흔들리며 이쪽을 바라본다.
택시가 도로로 접어들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병원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영준은 추격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서야 의자에 푹하고 쓰러지듯 기댔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대로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택시 기사는 자신은 인천 택시이고 서울 지리를 모른다며 거부했다. 아마도 아직 환자복을 입은 도연과 타자마자 고함을 친 영준이 수상쩍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도 어려워 차를 잡기 쉽도록 시내에 내렸다.
해가 진 인천 시내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올 때보다는 가늘어졌으나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확연히 짧아진 낮의 길이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멈춰주는 차가 없었다. 도로를 지나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발치를 쓸고 지나갔다. 고인 물 위로 주황색 불빛이 반사된다. 순식간에 밤이 올 것이다. 번화가라 해도 서울에 비하면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콜택시를 부를까 고민했지만 무섭게 창백한 도연의 모습에 마음을 바꿨다. 비를 맞아 추운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영준은 가까운 모텔을 찾았다. 대게 그렇듯 유흥가 골목 안쪽으로 모텔거리가 펼쳐졌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조명 사이로 제일 깨끗해 보이는 곳을 골랐다.
모텔 직원은 둘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여전히 직원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방에는 없지만 복도는 CCTV 다 찍히는 거 기억하시구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죠?”
열쇠를 건네주며 직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준은 복도에 도연을 남겨 둔 채 혼자 모텔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 안에 침대 하나와 TV, 데스크탑 컴퓨터가 갖춰져 있었다. 욕실 문을 열어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도연을 데리고 들어왔다.
“잠깐 앉아봐.”
영준은 침대에 도연을 끌어다 앉혔다. 땀을 흘리는 자신과 달리 그는 파랗게 질려 가늘게 떨고 있었다. 얇은 병원복은 젖은 채 몸에 달라붙었다. 뺨과 턱에 생긴 검은 얼룩에 눈에 띈다. 도연에게서 큼큼한 냄새가 났다.
영준은 창가로 가 커튼을 전 잠시 밖을 살폈다. 거리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 몇이 보일 뿐이었다. 혹시 모를 검은 그림자나 흔들리는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병원에 묶인 존재들이었던 모양이다. 제때 도착해 제때 탈출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빗물이 스며든 창문에서 냉기가 스며들었다. 걷어 올린 팔에 소름이 돋는다. 도연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저렇게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안 될 텐데.
“그 옷은 벗어야 할 거야. 그리고 몸이 너무 차니까 목욕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
“김도연. 내 말 이해하겠어?”
다가가 눈을 맞추며 다시 말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자세히 들여다본 도연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커다랗게 열려 있었다. 무언가에 몹시 놀란 사람 같으면서, 동시에 깊이 잠이 든 몽유병 환자 같았다. 불안해져 뺨에 손을 가져가 대고,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의사의 말에 반응했듯 어떤 식으로든 제스처가 있기를 바랐지만 그는 마치 여기에 없는 사람 같다.
“괜찮을 거야.”
영준은 그의 무릎을 부드럽게 두들긴 뒤 욕실로 갔다.
목욕물이 어느 정도 받은 뒤 방으로 돌아온 영준은 조심스럽게 도연의 상의를 벗겼다. 하얗고 조금 야윈 몸이 드러난다. 하의를 마저 벗긴 영준은 그것들을 뭉쳐 치웠다. 그리고 도연을 일으켜 욕실로 데려갔다.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영준은 도연을 알몸 채 번쩍 들어 욕조에 넣었다. 어깨를 눌러 앉히자 따뜻한 물 덕에 떨림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샤워기를 틀어 어깨와 머리를 적시는 동안, 도연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망연히 앉아 있었다.
하얗고 마른 어깨 아래 견갑골이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머뭇거리던 영준의 손이 어깨와 가슴을 타고 움직였다. 맨몸을 만지는 처음의 어색함은 조금씩 익숙해졌다. 오랫동안 감지 않은 탓에 쉽게 젖지 않던 머리도 샴푸를 두 번 하고 나자 부드럽게 풀렸다. 타월에 바디워시를 발라 어깨를 문지르자 순식간에 물이 탁하게 변한다.
등을 닦던 영준의 손이 멈칫했다. 도연의 등과 허리에 걸쳐 큰 흉터가 보였다. 비눗기가 남아 반들거리는 흰 피부 위로 마치 용접한 것 같은 흔적이 선명했다. 오래된 흉터였다.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필시 참혹한 상처였을 것이다. 손끝으로 흉터를 따라 가자 허리를 지나 엉덩이 바로 위까지 이어져 있다. 아직 붉은 기가 돌았다. 아프지는 않겠지. 머리로는 알아도 손이 절로 조심스러워진다.
이런 흉터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들을 만한 시간도 없긴 했지만, 있었다 한들 말해주었을 것 같지 않다. 어쩐지 복잡한 기분에 그의 얼굴을 흘끔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영준은 서둘러 홀쭉한 아랫배와 다리까지 마저 씻긴 뒤 욕조의 물을 뺐다.
“가만히 있어 봐…….”
몸이 식지 않도록 그를 큰 타월로 감싸 안아 올렸다. 비틀거리며 침대로 가는 동안 젖은 머리에 닿은 어깨가 흠뻑 젖었다. 조금 전과 달리 혈색이 돌아온 도연의 얼굴은 약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에 비치된 드라이기를 찾아 켜자 우웅 하는 낮은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다소 굵은 자신의 머리와는 달리 가느다란 도연의 직모는 뜨거운 바람에 금세 물기를 잃었다. 바스락거리는 부드러운 머리를 구석구석 말리다 보니 산에서 잠든 그를 무릎 위에 재웠던 것이 생각났다. 마치 백 년은 지난 옛날이야기 같다. 몸이 따뜻해지자 잠이 오는지 도연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영준은 서둘러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잠자기 전에 식사는 무리라도 목이라도 축여줘야 할 것 같았다. 컵을 입술에 기울여 주었지만 제대로 마시지는 못했다. 반 이상이 턱으로 흘러내렸다. 영준은 한숨을 쉬고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무릎에 흐른 물을 닦는데 불편하게 한쪽으로 뻗은 다리가 신경 쓰였다.
깁스 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발목이 다른 한쪽에 비해 가늘었지만 한 달이 넘는 기간을 생각해보면 비교적 정상적이다. 말끔하게 나았는지 건드려도 아픈 기색은 없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투성이다.
영준은 바닥에 앉아 무릎 위에 도연의 발을 올렸다. 얇은 발은 가벼웠다. 맨발로 발견되었다더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살그머니 뒤집어보자 뒤꿈치가 빨갛게 까진 것이 보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물이 들어가 따끔거릴 것 같았다. 약을 사서 올 것을, 영준은 뒤늦은 후회에 입술을 깨물었다.
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가운이 벌어져 그늘진 다리 사이가 보였다. 흰 허벅지 사이로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음모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무방비한 것이 원래의 도연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기분에 영준은 얼른 가운을 여며 주었다.
눈이 반쯤 감기는 것이 곧 잠이 들 것 같다. 영준은 도연을 이끌어 침대에 눕혔다. 베개에 머리를 대주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문득 그의 무력함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기억 속의 도연과의 괴리 탓인지, 아니면 상상했던 재회가 아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숨 돌렸다 생각하자 뒤늦게 자신의 모습이 자각되었다. 도연을 씻기는 도중 옷이 젖고 땀이 나 엉망이었다. 씻고 싶었지만 그를 방에 혼자 두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영준은 일단 젖은 옷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 두고,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몸을 움직여서인지 속옷만 입고 있어도 별로 춥지 않았다.
TV를 트는 것도, 음악도 내키지 않아 침묵 속에 편안했다. 빗소리가 갇힌 커튼 너머로 나지막하다. 멍하니 허공을 떠돌던 도연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영준은 손에 턱을 올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봉긋한 이불이 움직인다. 깊이 잠이 든 모양이다.
몸은 지쳤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무척 맑다. 영준은 오늘 아침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도시의, 상상도 못 했던 장소에 와 있는 자신이 새삼 신기했다. 쭉 그를 괴롭혀왔던 무기력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영준은 손을 뻗어 이불 위로 도연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꿈이 아니다. 그가 정말 여기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일단 좋았다. 괜찮아질 것이다. 약간의 불안은 남아 있었지만 내일이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잃었던 낙관적 사고가 돌아와 어깨를 다독였다.
꾸벅꾸벅 졸던 영준은 소파에 앉은 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밤새 몇 번씩이나 깨어나 그때마다 침대를 확인했다. 그가 바로 여기,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그렇게 새벽에 밀려가는 저 어둠이 그를 데려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눈을 감았다.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볕에 모텔 방안이 부드러운 아이보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따라가자 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흘러내린 머리 사이로 보이는 것은 어제와는 달리 맑고 분명한 시선이었다.
“정신이 좀 들어?”
“…….”
도연 역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어제 입혀놓았던 가운이 흐트러져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스스로의 차림을 확인한 도연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어제의 껍데기만 남은 것 같던 무표정과는 달랐다. 놀람과 당황에 이어 탐색과 경계가 떠오른다. 아니면 단순히 어리둥절한 것일까.
“좀 괜찮아?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영준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어제 널 병원에서 데려온 것 기억나?”
대답은 없었지만 맑은 눈은 영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비도 오고 네 상태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묵었어. 솔직히 어제는 좀 걱정했지만, 하루 푹 자고 나면 정신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
모텔을 둘러보는 도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정보를 수집하듯 꼼꼼히 주변을 살피는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영준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도연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방어적으로 한 손을 올린 채였다. 뜻밖의 반응에 영준도 놀라 그대로 멈췄다. 눈이 마주친 상태로 침묵이 흐른다. 마주 보는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꿀꺽하고 목울대가 움직인다.
“왜 그래?”
대답이 없다.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걸까. 왜 나를 저렇게 낯설게 보지.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혹시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
“…….”
“김도연 너--”
이럴 수가. 당장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한 것이 무리였을까. 맙소사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이라면 어쩌지. 의사가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영준은 고민에 빠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잊은 것일까.
“네 이름이 뭔지는 기억나?”
조심스런 질문에도 답이 없다. 이걸 어쩌지.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된다. 역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최영준.”
“어?”
도연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네 이름 정도는 기억해.”
이불을 걷어낸 도연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흘러내린 가운을 추슬러 허리끈을 묶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영준은 그야말로 십년감수를 한 사람처럼 얼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 그만 좀 해줘. 놀라는 건 이제 충분하니까.”
오싹하니 소름이 돋은 양팔을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영준은 말려둔 옷을 걷어 입었다.
“여기가 인천이라고?”
잠긴 목소리로 도연이 물었다.
“그래.”
“내가 왜 인천에 있지?”
“기억 안 나?”
영준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연은 슬그머니 침대 헤드에 기대어 둘 사이에 거리를 벌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침묵.
“오늘이 며칠이고,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는?”
도연은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비로소 기억의 공백을 자각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통을 느끼는지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꾹 누른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게 뭐야?”
“병원에서--”
갑자기 중간에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흘끔 영준의 안색을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는 무엇을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기억상실은 아니라도, 다 돌아오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혼란한 그를 당장 재촉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차곡차곡 쌓였던 수많은 질문들과 의혹들, 해결하지 않으면 그만 죽어버릴 것만 같던 미스테리들이 재회의 반가움에 얼마나 쉽게 희석되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괜찮아. 천천히 생각날 거야.”
도연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옷하고 짐은 어디 있지?”
“옷은 저기 있긴 한데 입긴 힘들 거 같아.”
구겨진 환자복을 본 도연의 눈이 커졌다. 비에 젖고 더러워진 병원복은 걸레 같은 꼴이었다.
“내 물건들은?”
“넌 빈손이었어.”
도연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내 배낭 말이야.”
“아, 그거라면 우리 집에 있어.”
“뭐?”
“서울에 올 때 가지고 올라왔어. 찾으면 돌려주려고 잘 모셔뒀으니 걱정 마.”
“왜?”
“네 짐을 맡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그대로 차 안에 둘 수도 없고. 우리가 타고 갔던 건 도난 차량이라…….”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챙겼냐고 묻는 거야.”
공격적인 말투에는 희미한 분노가 배어있다. 챙겼다는 표현에 마치 자신이 도둑이라도 된 양 추궁당하는 것 같아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영준은 곧 도연의 기억에 공백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차근차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건 잘 못하는데……
“김도연. 지금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넌 실종상태였어.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없어진 뒤로 지금까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다가 어제 발견된 거야. 경찰 말로는 인근에서 배회, 아니 걷고 있는 걸 주민이 신고했다니까. 저 병원복 보이지? 대일병원에서 네가 입고 있던 그 옷이야. 나도 네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 오히려 네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묻고 싶은 거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거고. 네 물건들은 고스란히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거야.”
도연은 의심에 찬 얼굴로 영준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뭘 근거로 실종이라는 거지? 내가 스스로 떠난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 안 나?”
영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반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갑자기…… 말 그대로 허공으로 연기처럼 사라졌어. 그건 정상적인 게 아니었어. 내 말 이해하겠어? 그건 뭔가 다른 게 작용해서 널 말 그대로 집어삼킨 것 같았단 말이야. 배낭을 찾은 건 그 이틀 정도 뒤였어. 스스로 떠났다면 전 재산이 들어있다는 배낭을 이틀이나 지나서까지 그대로 둘 리 없었지. 그 뒤로 널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어. 아무 흔적도 없이 시간만 흘러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어.”
“얼마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도연이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었는데?”
“……한 달 정도.”
“뭐?”
“오늘이 9월 23일이니까 네가 없어진 지 한 달하고 조금 더 지났어.”
도연은 영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음에 화가 났는지, 영준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 화가 났는지 확실치 않았다. 도연은 의심스럽게 한 달, 하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단어 속에 숨겨진 음모를 캐내려는 사람 같았다.
“어제 경찰이 널 발견하고 전화를 했어. 넋이 나간 사람같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고.”
“……네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고. 왜 너한테 연락이 간 거지?”
“서울로 오면서 대일병원에 내 번호를 남겨뒀었어. 어떤 소식이든 좋으니까 들어오면 반드시 나한테 연락해달라고, 보호자 이름으로 등록도 해두었으니까.”
영준은 발견 당시 입고 있던 병원복을 통해 입원했던 병원을 찾아내고, 다시 자신에게 연락이 오기까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고 싶어 피시방에서 전화를 받고 자신이 얼마나 급히 뛰어나왔는지를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왜?”
“뭐가 왜야?”
도연은 입을 꼭 다문 채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분석하는 눈빛이었다.
“꼭 네가 나를 찾았단 이야기 같은데.”
“당연히 찾았지.”
“왜 찾았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그는 한번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기가 막혔다.
“병원에서 그런 식으로 없어졌는데 내가 무슨 사이코 냉혈한도 아니고 왜냐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럼 내가, 난 또 네가…….”
말문이 막혀 잠시 헐떡였다. 갑작스러운 정전과 비틀린 복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고, 위험에 빠진 거라 여겼어. 혹시 무사하다 해도 연락하지 못할 상황에 처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 걱정하는 게 당연한 상황 아니야?”
도연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을 보듯 영준을 바라보고 있다.
영준은 더 이상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겉보기와는 달리 도연이 완전히 정신 차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가서 갈아입을 옷 좀 사 올게.”
영준은 지갑을 챙기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 좀 더 쉬고 있어.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가능한 무리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자 밤새 비로 씻겨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린다. 영준은 제일 처음 보인 보세옷가게에서 청바지와 티셔츠 하나를 샀다. 도연의 사이즈는 알 수 없었지만 어제 본 바로는 자신보다는 확실히 작은 치수였다. 흰 무지 티셔츠를 고른 뒤, 망설이다 가게에 비치된 샌들 하나를 골랐다. 이런 거라면 사이즈를 몰라도 신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국에서 연고 하나와 반창고를 구입해 모텔로 돌아왔다.
도연은 예의 가운을 입은 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희고 단정한 얼굴에는 미끄러운 싸구려 가운도 그럴듯했다. 사온 옷을 건네주자 냉큼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대실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영준은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제일 속이 편해 보이는 음식을 두 가지 시켰다. 주문을 끝낸 뒤에도 도연은 욕실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 자신이 몸을 씻겼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영준은 한숨을 쉬었다. 도연을 찾아 너무 기뻤지만, 한편 생각지도 못한 거리감에 당혹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부둥켜안고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흔들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펄쩍 뛰며 방구석으로 도망칠 것이 뻔했다. 기억이 미화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고독으로 꾸며낸 감정인 걸까? 내게는 그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었는데……. 하지만 도연이 자신처럼 반가워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본래도 쿨한 성격이었다. 괜히 섭섭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온도의 차이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욕실에서는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안해져 노크를 하자 대답 없이 문이 열렸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욕실을 나온 도연은 무뚝뚝하게 영준을 지나쳐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음식이 도착했다. 식사를 앞에 두고도 도연은 남의 일처럼 버텼다. 그러나 억지로 수저를 쥐여주고 재촉하자 떠밀리듯 계란찜을 한 입 먹더니,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비웠다. 식사가 끝난 뒤 내켜하지 않는 도연에게 연고를 넘겼다. 그리고 약을 바르는 것을 다 본 후에야 모텔을 나섰다. 누군가 억지를 부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도연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비에 씻긴 유리알 같은 하늘이 맑았다. 아침 특유의 아릿한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가자.”
차도 쪽으로 나서는 영준의 뒤에서 도연이 물었다.
“어디로?”
“우리 집으로 가야지.”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도연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멈춰 섰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유난히 높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전의 쌀쌀한 바람이 길어진 머리를 이마 위로 넘겨 올렸다. 도톰한 가디건과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둘의 옆을 지나갔다. 맑은 가을 날씨였다.
도연은 비로소 영준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정말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 계절이 바뀐 것이다. 불신에 의지해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하던 평정이 깨지자 약해진 몸이 비틀거렸다. 영준이 급히 다가와 ‘괜찮아?’ 라며 팔을 잡았다.
“건드리지 마!”
도연은 손을 뿌리치고는 혼자 일어났다. 하지만 깁스를 푼 지 얼마 안 된 다리는 다시 휘청거렸다. 출근하던 사람들 몇이 이쪽을 흘끔거렸다. 영준의 손이 팔꿈치를 잡고 지탱했다.
“불안하고 놀라는 게 당연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돌아올 거야."
어린아이를 달래듯 영준은 ‘부탁해.’ 하고 등을 밀었다.
서울로 가는 내내 도연은 침묵했다. 몇 번 말을 걸어 보았지만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준은 그 조용함이 신경 쓰였다. 도연의 얼굴은 예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감싸여있었다. 혼자만의 장막 안에 숨어버린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즈음이었다. 긴 이동에 도연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현관문에 들어서 신발을 벗자마자 영준은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한잔 들고 왔다. 도연은 창가에 걸터앉았다. 내미는 물을 받아 벌컥벌컥 순식간에 비우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빈 잔을 내민다. 한 잔 더 달라는 것인지 이제 그만 치우라는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점심도 시켜먹어야겠다.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
어쩐지 변명조가 된다. 영준은 펼쳐놓은 앉은뱅이 상을 발로 슥 밀어 치웠다. 무리를 해서라도 집과 정원을 정리해두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도연은 다른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마루 한쪽만 바라보았다. 그의 배낭이 있는 곳이었다. 푸른 배낭은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했잖아. 내가 챙겨뒀었다고.”
별로 안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집에 흐르는 정적이 불편한 듯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좀 쉴래?”
영준은 침대가 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소영이 방이긴 하지만 지금은 집에 없으니까 네가 썼다고 화내지는 않을 거야. 시트도 다 새거고.”
“……됐어.”
안색이 좋지 않다.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데 이쪽이 뭘 해도 불편해하는 것 같다. 도연은 창문 너머로 마당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 온 첫날도 그랬었다. 한사코 밖에만 시선을 뒀었다. 마치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우거진 대추나무에는 파란 대추가 알알이 매달려 있었다. 다른 해보다는 적었지만 꽤 근사한 광경이었다. 몇 주 더 지나면 붉은빛이 돌아 단맛이 강해질 것이다.
“난 샤워 좀 하고 나올 테니 편히 있어.”
혼자 있게 해주는 게 낫겠다 싶어 영준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갔다. 웃옷을 벗고 수납장을 열자 수건이 하나도 없었다. 대청소를 한답시고 멀쩡한 빨래까지 싹 돌려버린 것이다. 이런, 하고 혀를 차고 욕실을 나오다 막 신발을 신고 있던 도연과 눈이 마주쳤다.
“어?”
현관을 나서려던 도연은 배낭을 어깨에 맨 채 얼어붙어 있었다. 크게 홉뜬 눈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담고 있다.
“어디 가려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다. 우당탕 급히 신발을 꿰어 신은 도연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대문에 닫기 직전 앞을 막아섰지만 반항이 만만치 않았다. 날뛰는 그를 겨우 붙잡아 진정시키려 했지만 무리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이 관자놀이를 스쳤다.
“그만,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놔!”
헐떡이며 발버둥 치는 도연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반항이 멈출 때까지 놓지 않았다. 다소 거친 방법이었지만 이성을 잃은 도연은 그 자신마저 다치게 할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몇 번이고 속삭이는 동안 기력을 다 했는지 품 안의 몸이 축 늘어졌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는 도연을 집 안으로 다시 데려왔다. 그는 볼모처럼 잡힌 배낭에서 한사코 손을 떼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래?”
도연을 앉힌 영준은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그는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영준을 노려보았다. 적대감이 온몸에서 들끓고 있었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를 적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똑바로 노려보는 눈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빛났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상기된 얼굴이 따져 물었다.
“날 찾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냔 말이야!”
영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거야 말했다시피…….”
“거짓말하지 마!”
도연이 바로 옆에 놓인 작은 상을 내리쳤다. 정리되어 있던 서류들이 푸스스 흩어졌다.
“그저 걱정했을 뿐이야. 지금도 그렇고.”
“너에겐 날 걱정할 이유가 없어.”
“왜 이유가 없어!”
참지 못하고 영준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내 참고 있던 것이 둑을 넘치듯 쏟아져 내렸다. 속수무책으로 사라져버린 도연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공포 속에 갇힌 채 지냈던 날들. 속으로만 억누르며 삼켜야 했던 고민, 매일 밤 자신의 잠으로 파고들어 오는 악몽, 자신이 기어코 미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매일……
“그래, 어쩌면 백 퍼센트 걱정만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몰라. 내가 필요해서 그랬는지도, 내가 원해서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애쓰며 영준은 다시 말했다.
“조금 진정하고 대화를 해보자. 네가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날 찾은 진짜 이유가 뭐지? 보복을 원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해 복수 하려는 거잖아!”
“뭐…….”
집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이른 가을의 빛이 큰 창으로 쏟아져 먼지가 춤추는 것이 금가루 같았다. 한편으로는 옅은 어둠이 집의 구석구석 그늘마다 드리웠다. 붓을 씻은 물처럼 연하고 무해한 어둠이었다. 어둠은 얇은 베일처럼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도연은 결코 속지 않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내가 네 말을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무슨 속셈으로 날 찾아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난 분명히 몇 번이나 네게 물러날 기회를 줬었어. 날 믿지 말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몇 번이나……!”
“그만, 그만!”
영준은 손을 내저어 도연의 말을 잘랐다.
“내 말을 안 들은 건 바로 너야! 네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순순히 당하고 있을…….”
“잠깐만!”
이번에는 영준의 손이 상을 내리쳤다. 불끈 힘이 들어간 손등 위로 푸른 정맥이 튀어나왔다.
“누가 죽어?”
기가 차 묻는 말에 도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 맘대로 멀쩡한 남의 동생을 죽이는 거야. 같이 병원에 있는 거까지 봐놓고 무슨 소리야?”
그러나 도연은 한사코 ‘네가 하는 말은 손톱만큼도 믿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도연의 기억에서 소영과 영준은 한탄강에서 같이 강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는 자신을 본 도연은 처음에는 영준을 죽은 사람, 즉 혼령이라고 생각하다,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살아남은 영준이 복수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여긴 것이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순순히 말을 듣는 척하다 기회를 보아 달아나자, 그것이 계획이었다. 그의 묘한 태도를 이해하고 나니 이번에는 어쩌다 그런 황당한 착각을 하게 되었는지 기가 찼다.
“아니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오히려 네놈이 이렇게까지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였나는 듯 쓴웃음을 짓는다. 영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소영의 번호를 눌렀다. 눈앞에서 보여줘야 믿을 것이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 아니 잠깐 일이 있어서 전화했어. 너 김도연 기억나지, 병원에서 만났던. 그래, 그 친척. 내가 찾는다고 했던, 맞아. 지금 집에 와 있거든? 너 잠깐 통화 좀 해라. 아니아니, 일단 받아봐.”
밀어내는 도연의 귀에 억지로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별로 귀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 하는 눈빛이었다. 결국 다시 전화를 뺏어 영상 통화를 걸었다. 마침 산책 중이었다는 소영은 조금 그을린 얼굴이 건강해 보였다. 시골을 배경으로 밝은 미소가 전화 너머 집까지 밝혀주는 것 같다.
-김도연 씨? 오빠가 찾았다더니 정말이네요. 그때 인사도 못 드리고 가셔서…….
서글서글한 인사말 중 화면에 다른 여자아이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까르륵, 웃어 넘어가는 것이 십 대 소녀 같다. 몇 마디 이어진 안부와 서울에 올라가면 꼭 봬요, 라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은 뒤 영준은 어때, 하고 물었다. 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반신반의하던 도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현관 쪽으로 갔다. 긴장한 영준이 따라가기도 전에, 도연은 신발장 위에 놓인 액자를 들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도연이 불쑥 중얼거렸다.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어.”
“?”
“네 동생의 웃는 얼굴이 익숙해.”
“당연하지. 일이 끝난 다음에 병실에서 만났으니까. 둘이 악수도 했어.”
악수란 말에 도연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아까 그 사람이 네 동생이야?”
“그래. 최소영, 내 동생이야. 보다시피 안 죽었고, 그날 강에서 우리 둘 다 살아서 나왔어. 난 도대체 네가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 빙의 문제는.”
“해결됐어.”
네 덕에, 란 말을 덧붙인다.
“……해결됐다.”
“그래. 다 잘 됐어. 소영이도 다 나아서 퇴원했고, 지금은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가 있어. 요양 겸 여행 겸, 내 옆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필요도 있어서…….”
영준은 오른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부자연스럽게 피부가 튀어나와 붉게 이어진 부분이 보인다.
“이건 여전하지만 그거야 예상했던 거고. 이제 알겠지?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무도 죽지 않았어.”
“그래. 네가 착각한 거야.”
“내가 착각한 거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영준은 다가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도연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너 열나는 거 봐.”
이마를 짚자 말 그대로 펄펄 끓는다. 거기에 오한이 나는지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안 되겠다. 좀 누워야겠어.”
“그, 그 방은 싫어.”
소영의 방으로 가려 하자 한사코 버틴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납득 했어도 아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영준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바닥에 요를 깔아준 뒤 눕히자 잠자코 이불을 덮는다. 이마에 올릴 수건을 적셔 왔을 때 도연은 손으로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아직 몸도 정상이 아닌데 난폭하게 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괜찮을 거야.”
낮게 말하자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붉게 충혈된 눈이 영준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넌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어.”
“맞아.”
영준은 흣,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