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열이 내리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해열제를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잠만 자는 사이 몸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음식과 물이 대령되고, 땀에 젖으면 옷이 갈아입혀졌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생활이었다. 도연은 이렇다 할 꿈도 꾸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잤다.
한동안 낯선 천장과 벽에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졌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항상 작은 등이 켜져 있었다. 흐릿한 불빛은 좁은 방을 어항 속처럼 안락하게 만들었다. 바닥난 체력은 느릿느릿 돌아왔다. 손가락 하나 들기 힘들 정도의 피로가 일어나 앉으면 찾아오는 어지러움으로 변하는 식이었다.
10시쯤 일어나 느지막이 거실로 나가니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몸을 기댄 채 영준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편안한 차림에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아직 어색했다. 이쪽을 본 영준이 씩 웃더니 식탁 의자를 하나 빼 손짓 했다. 입모양으로 ‘앉아’ 하고 말한다.
“아뇨 형.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네, 상해도 없고요.”
끓고 있던 주전자를 불에서 내린 영준이 가볍게 웃었다. 부엌에 뭔가 따뜻한 냄새가 감돌았다.
“그런 건 미드에나 나오는 이야기구요.”
앞에 머그컵 하나가 내밀어진다. 보리차였다.
“본인도 신고할 생각 없어요.”
컵을 받아 손으로 감싸자 온기가 몸으로 퍼졌다. 그는 전화 너머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영준이 자신도 컵 하나를 꺼냈다. 차를 한 입 마시고는 느긋하게 의자에 팔을 하나 올린다. 익숙한 공간이어서인지 자신 있고 편안해 보였다.
“진오 형이야. 경찰에 있다던.”
묻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설명한다. 심부름센터를 다녔다는 것은 어제 알았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영준이 일찍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참이나 쩔쩔매며 사과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사과했다가 고마워했다가, 짧은 통화로 무척 바빴다.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물어보자,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행방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자 정작 답이 궁했다. 도연은 애매하게 ‘아 그래.’ 하고 얼버무렸다.
“뭐 좀 먹을래?”
영준이 식탁에 놓여 있던 비닐봉투를 열었다.
“우유 사러 갔다가 이것저것 담아왔어. 배달시간도 애매하고, 밥할 시간도 늦어서.”
봉투 안에서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 편의점 도시락이 나왔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영준이 사온 것은 전에 도연이 한번 골랐던 것들 위주였다. 직접 끓인 죽이 완전히 대실패한 뒤로, 그는 어지간하면 밖의 음식을 사 왔다. 둘이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중간에 한 번 일어나 보리차를 다시 따라준다.
“학교 문제로 잠깐 나갔다 와야 하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
“가는 길에 빌라에 들러볼까 하는데.”
“빌라?”
“네가 살던 집. 그렇게 나온 이후 못 가봤잖아. 배낭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챙겨 와야 할 물건이 있을 텐데. 생각나는 것 있으면 적어줘. 가서 들고 올게.”
“……네가 가겠다고?”
“급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외출하는 길이고, 넌 가기 싫을 것 아냐.”
굳이 말하자면 내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한번 떠난 집에 되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열쇠를 주는 것도 어딘지 이상했다.
“특별히 필요한 물건은 없어.”
“알아, 배낭 안에 다 있지. 하지만 금방 추워질 텐데 겨울옷처럼 부피 큰 물건은 집에 있을 것 아니야.”
겨울옷이라니, 아직 9월이었다.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는데 영준이 다시 말했다.
“내가 겸사겸사 다녀올 테니 넌 쉬고 있어. 어지러우면 참지 말고 눕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말하고 영준은 다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연은 도시락을 뒤적였다. 하긴 대단치는 않지만 생각나는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싫은 일을 대신 해준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영준은 열쇠를 받아 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도연은 창가에 앉아 해를 쬐었다. 창문 너머 한낮의 햇살이 나무 마루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갑자기 한 달이란 시간을 훌쩍 넘어 버린 탓인지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생각해보니 인천에서 이 집에 온 뒤로 혼자 있는 시간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낡은 집은 조용하지만 적막하지는 않다. 옛 주택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오래된 집은 늘 그랬다. 식구가 외출을 해도 집이 완전히 텅 비지는 않는다. 마치 그들의 존재가 이 집을 구성하는 재료의 일부가 된 것처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오래 산 집은 낯선 이에게도 너그럽고 편안하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구름 하나 없는 깨질 것 같은 가을 하늘이다. 이런 날씨에는 나들이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문득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잘못된 기억에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다 잘 됐어. 아무도 죽지 않았어, 아무도 안 죽었어.”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이 정신없이 뛰는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알고 있다. 이건 잘못된 기억이다. 어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된 걸까. 도연은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것을 불안하게 자각했다. 문득 집안의 고요가 더 이상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영준이 나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도연은 얼른 창가를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서 도연이 다니는 곳은 딱 정해진 공간뿐이었다. 거실, 주방, 화장실, 영준의 방이다. 안방은 닫혀 있었고, 도저히 소영의 방에는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영준의 방은 책상과 책꽂이, 작은 장식장 정도로 단출했다. 빼곡하게 꽂힌 책과 문구류, 장식장과 벽에 걸린 야구 관련 물건들에서 생활의 냄새가 난다. 낡은 책상에는 조그만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액자도 없이 스카치테이프로 고정된 사진들은, 그 난폭한 취급에 비해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등산을 갔을 때 찍은 가족사진과 야구부 시절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어느 대회에 나갔을 때인지 모르지만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까만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 단체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한번 찢었다가 다시 붙였는지 가운데 하얗게 선이 그어 있었다.
“…….”
한참 동안 사진을 보던 도연은 떨치듯 시선을 돌렸다. 키와 비슷한 높이의 네 칸짜리 책장에는 교재와 스포츠 마사지나 추리 소설이 꽂혀 있다. 그것을 손끝으로 주르륵 훑는데, 몇 권만 꽂힌 깊이가 달랐다. 여섯 권 정도의 책이 조금씩 튀어나와 눌러도 들어가지 않는다. 한 권만 꺼내보았지만 특별히 판형이 크지도 않았다.
책이 있던 자리를 들여다보자 책꽂이가 아니라 표지 같은 것이 보였다. 망설이던 도연은 튀어나온 책들을 빼 책상 위에 쌓았다. 그리고 안쪽에 손을 넣었다. 잡힌 것은 얇은 책이었다.
“이게 무슨…….”
그것은 뜻밖에도 무속 신앙에 대한 책이었다. 무속과 무당 토속신앙에 대한 설명이 목차부터 심상치 않았다. 책장을 보자 다른 칸에도 비슷하게 튀어나온 책들이 있다. 도연은 그것을 죄다 뽑아 숨겨진 책들을 꺼냈다. ‘제3의 죽음’, ‘신과의 만남’ ‘빙의에서 벗어나기’ ‘신병과 샤머니즘’ 등 모두 비슷한 내용이다. 심지어 부적에 대한 책도 있었다.
깨끗한 표지는 최근에 산 게 분명했다. 여기저기 책갈피와 메모지가 꽂혀 있다. 마치 공부라도 한 것 같다. 문득 예전의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 조금이라도 관련된 정보라면 뭐든지 찾는다. 발버둥의 흔적인 것이다. 정돈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책들. 도연은 더러운 것을 감추듯 얼른 책을 원래대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어쩐지 있을 곳이 없어져 허둥지둥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영준이 꺼내놓고 간 해열제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도연은 멍하니 하얀 알약을 만지작거렸다. 가루가 손에 녹아든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도연은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식탁 위에 엎드렸다. 물도 없이 알약을 급히 삼키자 쓴맛이 지독하게 남는다. 도연은 눈을 감은 채 차가운 식탁 유리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휘젓는 소용돌이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굳게 닫힌 철문에는 온갖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빌라에 사는 어린애들 짓인지 군데군데 만화 스티커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현관문의 우편함은 쑤셔 박힌 마트와 패스트푸드 광고용지로 빈틈이 없다. 거기에 손잡이에는 이웃에서 붙인 쪽지까지 붙어 있었다. 떼서 보니 이런저런 불만이었다. 소음과 악취에 대해 악의적이라고 할 만큼 심한 욕설도 있었다. 긴 부재의 흔적이라 쳐도 조금 심하다.
두꺼운 광고용지를 뽑아내자 편지와 전단지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정리하는 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꺼내보니 동생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간단한 내용이었다. <몸조심하고, 밥 잘 먹고. 친척 분은 잘 있지?> 문자의 앞뒤에 생략된 투명한 물음표가 빽빽하게 들이차 있는 것이 느껴진다. 궁금하겠지.
몸이 나아질수록 소영은 자신의 기억 속 구멍에 대해 자주 물어왔다. 거짓말로 얼버무리기에는 관련된 사람도 사건도 너무 복잡했다. 결국 적당한 대답을 찾아 머뭇거리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매번 미루고만 있다. 계속해서 유보되는 진실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일의 시작이라 할 만한 집 앞에서 영준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도연에게 별 일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초인종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전히 뜯겨져 있다. 튀어나온 전선 위로 하얗게 먼지가 쌓인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집안은 고요했다. 현관에는 신발 한 켤레 나와 있지 않았다. 안으로 떨어진 몇 장의 전단지를 발로 슥 밀자 먼지가 피어오른다. 영준은 현관에 서 혹시 모를 움직임을 기다렸다.
휑한 거실은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아직 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거실 안쪽 유일하게 열려있는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이 조명처럼 바닥에 네모난 상자를 이루고 있었다. 뜯겨진 비닐은 바람이 불때마다 펄럭펄럭 커튼 마냥 흔들린다. 고요한 빌라 안에는 공기마저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진흙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대로네…….”
영준은 빌라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쌓인 박스를 피해 집안에 들어선 영준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보았다. 어떤 인기척도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쪽 방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방이었다.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 듯했다. 아무도 없다는 확신에 영준은 긴장을 풀고 집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아도 참 생활감이 없는 집이다. 유일한 생활의 흔적은 식탁위에 놓인 컵 정도다. 갈색으로 커피였던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마도 전에 왔을 때 도연이 내왔던 커피였으리라.
문득 호기심에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깜짝 놀랄 만큼 텅 비어있다. 뜯지도 않은 생수병 한 개가 전부였다. 냉장고를 닫은 영준은 이번엔 찬장을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야……?”
도연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서 지냈었는지 몰라도, 확실히 여기는 집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머무르는 장소일 뿐이다. 정말 그의 배낭만이 중요한 짐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영준은 가까운 박스 하나를 집었다. 들어있는 것이 적은지 가벼웠다. 간절기와 겨울옷이 박스 하나에 들어있다고 했다. 몇 개의 박스를 열던 중 책과 수첩, 작은 영수증 같은 것이 나왔다. 자질구레한 생활용품 사이에 섞여 있다. 영수증처럼 보인 것은 기차표였다. 행선지는 모두 제각각으로, 출발지역도 도착역도 다 달랐다.
흩어진 퍼즐처럼 각각의 기차표를 순서대로 맞추자 비로소 복잡한 여행기록이 완성되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강원도, 충청북도를 지나 다시 대구와 부산에서 전라도까지……. 묘한 것은 기차를 중간에 계속 반복해서 타고 내리고를 했다는 것이다. 마치 역마다 서서 머무르지 않고 바로 다음 차를 탄 것 같다. 수첩을 열어보았지만 보관용으로 끼워 놓은 것인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철새처럼 계속 이동해 살았다는 걸까.
개인적인 물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도연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가끔 물어도 말을 돌리거나, 대놓고 무시했다. 필시 입 밖에 내기 싫은 기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도연이 언급했거나, 영준이 판단해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옷상자에 옮겨 담았다. 다 합쳐도 중간크기 상자 하나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모두 버려도 좋은 물건이다. 상자를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영준은 집안에 흐트러진 빈 박스를 정리했다. 살림이라 할만한 게 없는 곳이다. 정리하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현관에 붙은 전단지를 뜯어내 우편함에서 꺼낸 광고용지와 함께 접었다.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지 도착한 몇 개 되지 않는 우편은 가져갈 상자 안에 넣었다.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근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것이었다.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도연의 빌라에 있기 때문인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모든 외부의 소리가 이곳에서는 배경음 정도로 전락해버린다.
그가 저 비닐도 벗기지 않은 소파에 앉아 혼자 이 소리를 듣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집을 떠나기 전 창문을 닫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열려 있던 탓인지 빗물과 바람에 근처가 엉망이었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나뭇잎마저 말라 비틀어져 있다. 휘날리는 비닐을 치우고 창문을 반쯤 닫았을 때였다.
“?”
창틀 위에 먼지가 밀려 있었다. 그때 창문으로 달아날 때 생긴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새것 같다. 최근에 누군가 창틀을 잡고 올라온 것처럼 그 부분만 먼지가 없다. 순간 오싹해진 영준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들어오거나 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둑이 들었던 것일까? 빗물받이를 통해 열린 창문으로 올라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고 보니 현관 손잡이에 붙여있던 이웃의 항의 글이 생각났다. 소음과 악취. 도연은 쭉 부재였다. 누가 이웃을 화나게 할 정도로 소란을 피웠단 말일까.
영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합리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집에 들어왔을 때 진흙 냄새가 났었다. 얼마 전에 비가 왔었지. 악취라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닫힌 화장실 문으로 떨어진다. 내가 저길 열어 봤던가? 열어봐야 하는 걸까? 갑자기 집안의 정적이 무겁게 다가왔다. 창문 너머 여전히 아이들 소리가 들려오지만 더 이상 정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영준은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화장실 문에서 최대한 멀찍이 돌아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고, 상자를 들어 올리는데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만큼 겁쟁이 같은 짓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확인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도둑이었던 것으로 하자.
영준은 현관문을 열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열쇠를 잠그고, 계단을 지나 빌라 밖으로 나올 때까지 순간순간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혹 뭔가 따라올까 모퉁이마다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 정도 건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이 가라앉았다. 박스를 한쪽 팔에 끼운 채 영준은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3층 도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다. 놀라 그냥 나온 것이다. 아차 했지만 도저히 다시 저길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올 일은 없으리라. 다소 무책임한 생각으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올라 열린 창틀 위에 앉았다.
“어…….”
영준은 입을 벌리고 비둘기가 창틀에 앉아 깃을 다듬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로 먼지가 밀린 자리였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덩치를 해서 고작 비둘기에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도망친 것인가. 혼자 오길 잘했지. 혹시 도연과 함께 오기라도 했다면 무슨 창피였을까.
한숨을 푹 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중혁이었다. 또 도연을 한 번 보자고 조르려는 모양이었다. 타이밍 한번, 하고 전화를 받으려는데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비둘기가 앉은 창문 바로 아래, 누군가 빗물받이를 밟고 오른 흔적이 있었다. 건물 벽에 발자국이 찍혀있다. 역시 도둑이었던 건가. 영준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운동화라기보다는 구두 자국 같은데, 어떤 빈집털이가 구두를 신고 벽을 오른단 말인가? 그리고 3층 높이의 자국이 이처럼 선명하게 보일 수 있을까.
구구거리며 자리를 잡던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순간 영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발자국은 비둘기의 두 배는 되는 크기였다. 첫날 도로에서 보았던 코트의 사나이의 거대한 구두가 머릿속에서 뚜벅, 하고 소리를 냈다.
영준이 귀가한 것은 오후 5시 반이 넘어서였다. 혹시 몰라 무수히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골목을 빙빙 돌며 시간을 보냈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쓰라렸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거실에는 벌써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도연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드는 이마가 빨갰다.
“여기서 잔 거야?”
이마를 문지르는 도연의 얼굴이 멍했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유난히 심해 보인다.
“씻고 올 테니까 먼저 먹어.”
영준은 오는 길에 사온 프랜차이즈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도연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영준은 젖은 머리를 대충 털고 식탁에 앉았다. 도시락을 열어 하나를 밀어 주고, 자신의 것을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도연은 찡그린 얼굴로 깨가 뿌려진 밥을 쳐다보기만 했다.
“안 먹어?”
영준이 손도 대지 않은 도연의 도시락을 보고 물었다.
“그게 제일 잘 팔리는 거라고 해서 사 왔는데, 싫으면 아침에 사 온 샌드위치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아냐.”
고개를 흔들고는 식사를 시작한다. 밥을 넘기는 게 마치 고문이라도 참는 것처럼 힘겨워 보인다. 억지로 먹기 싫은 것을 먹는 기색이 역력했다. 밀어 넣는 것 같은 식사를 끝낸 도연은 곧바로 약을 삼켰다.
“잠깐만.”
주방을 나서는 도연에게 영준이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는데…….”
“?”
벽을 짚은 채 도연은 듣고 있다는 듯 영준을 바라보았다.
“잠깐 앉아봐.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진지한 어조에 도연은 비틀비틀 의자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왜 그래, 두통이 심해?”
“됐어. 할 말 있다며, 말해봐.”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성마른 태도에 밀려 영준은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백해진 도연의 안색을 살피기만 한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아냐.”
고개를 흔들자 머리가 더 아픈지 이마를 감싸 쥔다.
“잠깐 봐.”
도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그냥, 빨리 할 말이나 해.”
“진통제 꺼내줄게.”
“됐다니까! 무슨 얘기인데 그래? 지금 당장 나가기라도 하라 이거야?”
“뭐?”
왜 갑자기 그런 결론이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왈칵 화를 내는 도연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보기만 해도 쓰라렸다. 눈 밑의 그림자까지 더 해 무척 지쳐 보였다. 어쩐지 다른 때는 코앞에 내밀어야 받아 먹던 약을 스스로 달라고 하더니.
“내일 아침 일어나는 데로 나갈게.”
내뱉듯 말한 도연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주방을 나가는 그를 서둘러 따라 잡았다.
“잠깐,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네가 똑바로 말을 안 하고 질질……!”
“아까 빌라에 갔을 때 얘기야.”
“빌라?”
빌라란 말에 도연이 멈칫했다.
“그래, 그게…….”
영준은 문득 말을 멈추고 창백한 도연을 응시했다. 종잇장 같은 안색에 퀭한 눈 밑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이 펄떡이는 것이 보였다.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예민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조금 쉬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영준은 망설여졌다. 평소의 도연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당장이라도 펄펄 뛰며 달아나려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추측만으로 도연을 더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빌라에 도둑이 들었어.”
“도-”
“열어놨던 창문으로 들어 왔었나 봐. 훔칠 물건이 없어서였는지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어. 내가 대강 치우기는 했지만 워낙 난장판이라 아마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 거야.”
도연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도둑이라고. 그 집에?”
“그래. 빈집털이겠지 아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당장 나가겠다며 펄펄 뛰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그는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내용에 긴장이 풀렸는지 훔칠 것 하나 없는 집에, 하며 오히려 도둑이 불쌍하다는 듯 조금 웃기까지 했다.
“그런 거라면, 어차피 그 집에서 다시 지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상관없어.”
“다행이네.”
영준은 도연의 등을 살짝 밀었다.
“진통제 가지고 갈 테니 방에 가 있어.”
“약은 더 필요 없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물과 함께 두통약을 내주자 도연은 순순히 받아먹었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영준은 작은 소등을 켜주고 방을 조금 어둡게 했다.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 박스에 담아서 거실에 놔뒀어. 나중에 한 번 봐.”
“…….”
“그리고 난 너한테 나가라고 할 생각 없어. 괜한 걱정 하지 말고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해. 꼭 너한테 고마워서만은 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널 찾은 데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있어. 이런 상황을……혼자 견디는 게 쉽지 않아. 말할 사람도 없고, 의지할 곳은 더 없는걸. 적어도 네가 있으면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뒷머리를 건드리는 손이 마치 남동생을 다루는 것처럼 스스럼없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남의 집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어.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어차피 나 혼자니까. 네가 편한 데로 있으면 돼.”
영준은 대답을 바라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문은 닫지 않고 조금 열어 둔 채였다. 도연은 살짝 고개를 들어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장 쪽을 올려 보았다. 비스듬하게 꽂힌 책이 그늘의 음영에 나란하다. 기분 탓인지 요철이 덜 도드라져 보였다.
다음날 소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래 예정보다 며칠 더 있게 될 것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동생이 여행을 만끽하는 것 같아 기뻤다. 마침 도연에게 마음 놓고 지내라고 한 뒤이기도 해, 여러모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응. 지내기 편한가 봐?”
전화 너머 동생의 목소리는 무척 평화로웠다. 그 평화가 전염된 것인지 영준 역시 오늘 아침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빌라에서 본 발자국에 대해 고민했기에, 분명 나쁜 꿈을 꿀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른 때보다 잠도 잘 잤다. 악몽 없는 수면은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아무래도 어제 본 발자국은 자신의 착각처럼 느껴졌다. 도연에게 섣불리 말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긴장과 원근감 문제로 착시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볼 문제였다.
전화를 받는 영준의 앞에 도연이 와 앉았다. 그 역시 어제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박스 정리를 끝냈는지 빌라에서 가져온 편지를 들고 있었다. 부엌가위를 건네주자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젓고는 아무렇게나 봉투를 뜯어낸다. 그리고는 세금고지서 몇 장을 확인한 뒤 식탁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래, 그건 그렇지.”
소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영준은 곁눈으로 도연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창백하긴 해도 어제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인다. 오늘은 두통도 없는 것 같으니 약을 먹을 필요는 없겠지. 무리하지 않고 더 쉬면 좋을 텐데. 야윈 탓에 도연은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눈 밑의 그늘도 아직 심했다. 그러나 자칫 비위에 거슬렸다가는 어제처럼 또 나가겠다고 할까 봐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도연의 존재 자체가 위안이라던 영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비록 같은 의미가 될 수는 없다 해도,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덥지 못하다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가로지르는 철길 위에 두 명뿐인 승객이었다. 그렇다면 서로 의지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만 여기까지, 하고 헤어지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연을 보는데 어쩐지 안색이 이상했다. 그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편지 한 장을 읽고 있었다. 뜯긴 봉투를 보니 우편함에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노란 편지봉투였다. 내용이 길지는 않은지 시선이 몇 번이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달싹이는 입술은 믿을 수 없다는 뭔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손에 쥐고 있던 편지가 와작, 하고 구겨졌다.
“……뭐가 어째?”
이를 악문 도연이 편지를 뭉쳐 집어 던졌다. 거칠게 뭉쳐진 종이가 부엌 구석으로 내던져졌다. 영준은 깜짝 놀라 발치에 떨어진 편지와 도연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벌떡 일어난 도연이 성큼성큼 주방을 나섰다.
“잠깐만 소영아. 내가 다시 전화할게.”
영준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대로 도연을 따라 나가려다 마음을 바꿔 편지를 주워들었다. 제대로 된 편지지가 아니라 노트를 찢어 볼펜으로 휘갈겨 쓴 것이었다. 적혀 있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내용이었다. A과수원과 근처의 산에 대한 판매가 친척들의 회의로 결정이 났으며, 도연에게 이 건에 대해 안내한다는 내용이다.
‘……하여 A과수원과 근방의 임야 5천 평에 대한 판매 결정이 났으니 진행은 전처럼 9월에 있을 친족회의를 통해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라.’
고압적이고 단정적인 편지의 논조는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다. 형식적인 인사나 안부조차 없었다. 거칠게 흘려 쓴 글씨에서는 노숙한 냄새가 났다. 나이 많은 남성의 글씨체였다.
거실로 나가자 도연이 배낭에서 지갑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A과수원이 어디기에 너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는 거야?”
“내 땅. 정확히는 우리 부모님 땅.”
도연은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영준은 편지를 다시 펴 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판매 결정이 났다고 적혀 있을 뿐, 어디에도 부탁이나 허락을 구하는 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사람들한테는 그걸 팔 권리가 없어.”
휙 돌아보며 날카롭게 대답한다. 도연은 만 원짜리 몇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벌떡 일어났다.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처럼 결연한 얼굴이었다.
“어디 가려고?”
“큰아버지 댁.”
“뭐?”
영준은 어안이 벙벙해 되물었다. 이미 평화 같은 건 머리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늘 안으로는 돌아올게.”
도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관으로 향했다. 겨우 신발만 신고 나서는 뒷모습이 불안하게 비틀거렸다. 맙소사, 영준은 급히 가스레인지에 올려 두었던 냄비를 내리고 불을 껐다. 곧바로 뛰어나갔지만 도연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큰길로 나가 두리번거리자 도연이 차도 가까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마침 지나가던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있었다. 달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차 문을 잡았다. 깜짝 놀란 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준은 그를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냉큼 차에 올라탔다.
“뭐하는 거야?”
“나도 같이 가.”
“네가 왜…….”
“도와줄게.”
“?”
“싸우러 가는 거잖아. 그럼 혼자보다야 둘이 낫지.”
도연은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눈빛이었다.
“싸우다니…… 정말 가려고?”
“그래.”
영준은 차 문을 닫은 뒤 밀어내고 싶으면 한 번 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도연은 집에서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 벌써 힘들어 보였다. 가다가 쓰러져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어디로 갑니까?”
기사가 물었다. 도연은 눈을 깜빡이며 영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준도 맞보아주었다. 몇 초간의 침묵. 기사가 다시 답변을 재촉했다. 아, 어디로 가시냐구요! 도연은 머뭇머뭇 수원 팔달구 주소를 불러주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동네였다.
역시 그가 말한 ‘큰아버지’는 두 사람 공통의 친척이 아니었다. 허긴 그들은 명목상의 친척일 뿐, 실제로는 거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차가 출발한 뒤 한참 동안 도연은 말이 없었다.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안색을 살폈지만 그보다는 다른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 뭔가를 참듯 입술을 꾹 굳히기도 했다.
영준은 엉겁결에 주머니에 넣었던 편지를 꺼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왜 도연이 그렇게 급히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편지에 적힌 친족모임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편지가 언제 도연의 빌라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공교로운 일이었다.
차가 성북구를 지나 내부순환도로에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돈벌레들 같으니.”
도연이 쓴 물을 뱉듯 욕설을 토했다. 그리고는 답답한지 창문을 반 이상 내렸다. 찬물 같은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게 자란 머리가 눈을 반쯤 가리며 흩날렸다. 돌아앉은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영준은 어쩐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네 명의의 과수원이라고 했지?”
이쪽을 돌아보는 도연에게서 약간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그래.”
“그럼 네 허락이 없으면 사고팔 수 없는 것 아니야?”
“그 인간들은 그런 것 따위 상관도 하지 않아.”
영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척, 땅, 돈에 관련된 것이라면 자신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부모님의 사망 후 이 집과 관련해 꽤 복잡한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친척이 뭐라든 토지 소유주가 너니까 선택권은 너한테 있잖아.”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명의는 그렇지만, 인감이 넘어가 있는 상태야.”
“인감이-”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처럼 매사에 능숙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증명서가 없으면.”
“…….”
“인감 증명서도 함께 있는 거야?”
침묵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준은 털썩 좌석에 등을 기댔다 다시 일어났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두고 나왔어.”
“언제?”
도연은 소리 없이 수를 헤아렸다. 다섯 손가락이 톡톡 차례대로 무릎을 두드리고, 다시 새끼손가락이 펴진다.
“6년, 아니 7년 정도.”
영준은 미간을 찡그렸다.
“7년 전이면, 고1? 중3?”
“중3이었을 거야.”
도연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때 집을 나오면서 두고 나왔어. 아니 챙길 생각을 못 했다고 해야 하나…… 필요한 줄 몰랐으니까.”
“왜 나왔는데?”
“더 이상 그 집에서 버틸 수가 없었어. 전부터 나오고 싶다고 생각은 했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러 일이 터지는 바람에 겸사겸사 결심하게 됐지.”
웬일로 도연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닐지 모르지만, 듣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일이란 게 정확히 뭘까. 어디까지가 접근해도 되는 구역일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뜻은 가출이나 다름없었다. 영준은 의식적으로 우회하는 질문을 골랐다.
“나와서 어디로 갔어?”
어디? 도연은 멍하니 눈을 치켜떴다.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검은 눈동자가 천장을 찬찬히 훑었다.
“그냥, 아무 데나. 길에도 있었고, 여관에도 갔었고. 의외로 갈 곳은 많았어. 가출한 아이들끼리 모인 숙소도 많으니까. 한번은 공원에서 잠이 들었는데 경찰이 깨워서는, 청소년쉼터를 소개해준 적도 있었지.”
밤이 오기 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밝은 곳을 찾아 헤매던 저녁이 떠올랐다. 당구장, 피시방, 찜질방 등 24시간 불이 켜져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쫓겨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영락없이 공원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것이 싫어 유흥가로 흘러 들어가 네온사인에 기대던 날도 많았다.
“학교는 어쩌고.”
“졸업일수는 채워졌으니까. 그 뒤로는 안 갔어. 몇십 명씩 한 장소에 사람을 몰아넣은 곳은 도저히 무리였어. 중학교도 힘들었는데 고등학교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으니까.”
그럼 중졸이란 말인가. 영준은 내심 놀랐다. 도연은 머리가 좋고 이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어, 모르고 본다면 충분히 엘리트로 보였다.
“그럼 그 뒤로 계속 혼자 지낸 거야?”
“돌봐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멀쩡한 인간은 없었어. 모를 수도 없지. 하나 같이 뒤에 줄줄이 무슨 흑심인지 알만한 것들을 달고 있었으니까. 가끔 정말 순수한 동정심으로 다가온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따뜻한 손이 있었다. 왜 너처럼 어린 애가 이런 데서 혼자 있느냐며 다정히 말을 걸어주는,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독과 배고픔에 그 온기를 잡고 싶었지만, 마지막 날 밤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비난과 욕설이 마음을 열지 못하게 했다. 재앙 덩어리, 집안에 화만 불러오는 귀신 붙은 아이. 매서운 눈빛은 차라리 매질이 나을 만큼 어린 가슴에 흔적을 남겼다. 다정한 이의 인생에 자신이 또 어떤 불행을 남기게 될지 두려웠다. 차라리 혼자 있으면,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영준은 도연의 침묵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영준 역시 혹시라도 자신과 같이 있다가 어떻게 엮일지 모른단 생각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도 하기 전의 소영이 여행을 원했을 때 보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후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어?”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
아마 돌아가고 싶다 한들 돌아갈 장소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얼핏 비치는 쓸쓸한 눈빛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나오면서 어지간한 물건은 다 두고 나왔어.”
“아직 미성년자인 네 인감하고 인감증명서는 왜 만든 거야?”
“큰아버지가 내 후견인이었어. 필요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지.”
“……유산 문제로?”
“뻔한 얘기지.”
영준은 알만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부모님의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친척 중 한 분이 다가와서는 울고 있는 영준에게 앞으로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 줄테니, 아무 걱정 말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었다. 몇 번 본적도 없는 낯선 어른이었다. 기댈 곳이 필요했던 영준을 안아 주고, 소영에게는 따뜻한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장례식장 구석에서 다른 친척들과 싸우고 있었다. 영준이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그들이 나누던 언쟁은 ‘누구 마음대로 쟤들을 데려갈지 말지 결정을 하느냐. 어차피 집을 노리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어허 어디서 그런 막말을, 그러는 너희는 무슨 대단한 공명심이라도 있어 그래? 오래되긴 했어도 서울에 40평짜리 주택이야, 이거 왜 이래. 지금 그게 여기서 할 말이야? 그 속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치받는 주먹질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졌다.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지저분한 싸움판이 되었다. 소란 속에서 동정에 가득 찬 눈이 영준과 소영에게 쏟아졌다. 쟤들 인생도 한참 꼬이게 생겼네. 돈 앞에선 형제고 뭐고, 눈 뜨고 도둑맞는 거지 뭐. 속삭이는 말에 현실을 깨달았다. 옆에서 울고 있는 동생을 뒤로 감추고, 귀를 막게 했다.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모든 걸 잃게 될 상황이었다. 그 후 영준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친척들에게 반 협박을 들으면서도 버텼다. 결국 그로 인해 어떤 도움이나 원조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준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세상 물정을 알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연이 부모를 잃었을 당시는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충격에 빠진 어린아이에게 재산을 빼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왜 아직까지도 지속되었느냐는 것이다.
“나중에라도 변경하지 그랬어. 그럼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할 일도 없었을텐데.”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건 어떻게 되던.”
나지막한 음성이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 사이로 묻힐 듯 말 듯 이어졌다.
“그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최소한 그 땅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 그 정도 약속은 지킬 줄 알았지.”
“의미 있는 곳인가 봐.”
도연이 영준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장소인 것 같아서.”
“그렇지도 않아.”
도연은 돌연 퉁명스러워졌다. 그러나 잠시 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 휴가 때마다 가던 곳이었어.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곳이라고…… 워낙 어렸을 때라 어렴풋이 기억나는 정도지만, 그래도 부모님에 대해 유일하게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야.”
영준이 대답을 찾지 못한 사이, 도연은 너무 말을 많이 해 지친 사람처럼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영준은 쥐고 있던 편지로 눈을 떨어트렸다. 아무 노트나 북 찢어 갈겨 쓴 것 같은 성의 없는 편지지. 영준은 이제 막 16살이 된 소년이었을 도연이 혼자 밤거리를 헤매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외롭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보호자였던 이들은 그를 다시 찾지도 않은 것이다. 도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그 무심함이 곧 상처의 증거처럼 보였다. 처음 자신이 나타나 친척이라며 소개했을 때 도연이 몹시 냉정했던 것이 떠올랐다. 집안에 소문이 자자했던 귀신 붙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