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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묻고 싶다는 게 뭐에요? 나야 다 기억한다고 자신하지만, 나도 이젠 나이를 먹어서 아른아른한 것도 몇 가지 있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멀리서 온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찻잔을 건네주며 그녀는 걱정스레 말했다. 연한 연두색의 녹차는 떫지 않고 그윽한 향을 냈다. 그러나 도연과 영준은 지독한 짐승 누린내로 인해 아무 향기도 맡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개와 고양이의 혼령은 반투명한 것을 제외하면 살아있을 때 행동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새로 나타난 손님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며 우르르 몰려와 저마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댔다.
녀석들이 그들의 등과 무릎에 앞발을 올려놓고 몸을 킁킁대는 동안, 둘은 움직이거나 쳐다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개중 사나운 놈들은 경계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의 영역에 나타난 두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시선 속에 오롯이 편안한 것은 집주인뿐이었다.
본래 동물의 혼령은 죽은 후 거의 대부분 곧바로 사라진다. 그들은 인간처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집착 없이 현재만을 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처럼 많은 수의 동물 령을, 그것도 이렇게 생생하게 보는 것은 도연도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주인이 집 곳곳에 애완동물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두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었다.
도연은 거실 이곳저곳에 놓인 물그릇과 창가의 방석쿠션에 눈길을 던졌다. 반투명한 몸을 가진 삼색 고양이가 쿠션 위에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듯, 죽은 동물들을 기리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한 행동이든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용건을 끝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도연은 빙 돌리지 않고 곧바로 질문에 들어갔다.
“그때 제가 어떤 상태로 병원에 들어왔는지 기억하시나요? 진료기록서를 받으려 했는데, 이미 기간이 너무 오래 지나 폐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럴 거예요. 보통 10년 기한이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슬픈 눈빛으로 도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어왔느냐, 기억하구 말구. 저기, 혹시 내가 말을 놔도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나한테는 아직 그때 그 어린애로만 보이는데. 말을 높이는 게 너무 어색해서……. 만약 불쾌하다면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도연은 그런 사소한 건 상관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기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이건 왜 알려고 하는 거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닐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뭐든지 다 잊히는 법인데 지난 일을 새삼 들춰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
“응?”
대답하지 않으려는 도연을 위해 영준이 대신 설명했다.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워낙 어릴 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당시 일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로 인한 오해도 있고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니만큼 확실히 알고 있는 게 모르는 것 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양친에 대한 일도 있으니까요.”
“그래, 부모님 일도 있으니…….”
그녀는 겨우 납득한 듯했다.
“사실은 내가 먼저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말이지, 응. 우리 그 얘기부터 할까?”
다정한 제안에도 아랑곳없이 도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고 당시가 8월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여지를 주지 않고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린다.
“그래, 맞아 8월. 휴가가 막 시작된 시기였지. 유난히 사고도 잦았고, 그만큼 교통사고 환자도 많은 달이었어.”
그녀는 순순히 도연의 말을 뒤따랐다.
그녀는 당시 응급차에 실려 왔던 가족을 기억했다. 젊고 아름다운 부부와 어린 아들은 참혹할 만큼 산산조각 나 겨우 목숨만 붙은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셋 중 어린 아들이 제일 상태가 좋았는데, 그것은 아이가 그 후 받은 여러 차례의 수술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모두 잃은 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채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했나요?”
영준의 질문에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여러 차례 수술을 해야 했어요. 단순히 뼈만 상한 게 아니라 장기도 많이 다쳤었으니까. 특히 등하고 허리 쪽이 심했어요. 예후가 많이 걱정되었죠. 조그만 몸에 관이며 바늘이 어찌나 많이 연결되어 있던지, 나도 못 볼꼴이라면 많이 봤다고 자부하는 베테랑이었는데도 안쓰러울 정도였지.”
“그렇게 오래된 일을 다 기억하시나요?”
문득 드는 의문에 영준은 확인 차 물었다.
그녀는 차를 한 잔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기 보담은, 저 애가 좀 특별했죠. 우리 아들은 9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당시 나는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이었는데, 응급차에 실려 온 아이가 내 아들일 거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뒤로 오래된 가족사진이 보였다. 아직 젊은 시절의 그녀와 남편, 어린아이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일에 대한 열의를 찾지 못했던 여자가 도연을 주목한 것은 순전히 우연 때문이었다.
“너는 그때 병아리 같은 노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우리 아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색의 옷이었지. 3년 만에 피에 물든 그 바지를 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덜컹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아 이 애는 살려야 한다. 반드시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에…… 집도는 의사가 하지만 내린 처방과 실제 처치는 간호사들의 몫이라 나는 나를 네 전담 간호사라고 여기기 시작했어. 미국에서 그렇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거든. 내가 그 환자의 모든 걸 책임지는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집착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를 내 아들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정한 눈빛이 차분하게 도연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며 도연은 조금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던졌다.
“아까 셋 중 내가 제일 상태가 좋았다고 했는데요.”
“그래.”
“부모님은 현장에서 사망한 게 아니었나요?”
옆에 앉은 영준의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다. 도연의 기억 속에서 부모님은 차 안에서 ‘놈’에 의해 피를 모두 빨려 죽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그래. 두 사람 모두 심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DOA, 그러니까 현장에서 사망한 건 아니었어. 너는 그렇게 알고 있었니?”
탁자 밑에서 자신의 손을 잡는 영준이 느껴졌다. 꾹, 힘주어 감싸는 손에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도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어떻게 돌아가신 거죠?”
그녀는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두 분 모두 일주일 뒤 수술을 받는 도중 사망하셨단다. 지속적인 내출혈이 심해 아무리 수혈을 해도 회복이 어려웠어. 어떻게든 네가 부모님과 함께 퇴원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네가 깨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할아버님이 장례까지 다 치른 뒤였지.”
출혈. 현장에서의 사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의혹이 없지는 않은. 도연은 혼란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빡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나는 그럼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눈앞의 간호사마저 이토록 낯선 것일까? 내가 홀린 걸까? 그녀의 말은 믿을 수 있을까? 16년 전의 일을 정말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환자와 헷갈렸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럴 일은 없어.”
“어떻게 알죠? 16년이나 전의 일인데.”
딱딱거리는 질문에 그녀는 감싸 쥐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도연을 빤히 바라보며 ‘정말 다 잊어버렸구나.’ 하고 말했다.
“네가 깨어난 날은 우리 아들 생일이었어. 나는 항상 우리 애가 널 도울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절망적인 기분만 들고 있었지. 어차피 우리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는데, 다른 아이 하나를 살리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고. 허무주의가 찾아오더구나.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슬퍼서, 나는 하느님께 기도했지. 제발, 우리 애가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냥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는 증거를. 사람들 말대로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아기 천사가 되었을 우리 아들을 보여 달라고 말이야. 만약 죽으면 모든 게 끝이고, 세상 모든 게 우연의 산물이기만 하다면 어쩌지. 나는 점점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었어. 만약 네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니 그날 네가 깨어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그런 죄를 생각한 자신이 두렵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런데 네가 깨어나 산소 호흡기를 떼고 처음 한 말이 뭐였는지 아니?”
“?”
“넌 이렇게 말했어. ‘알았어, 이명진. 이제 일어났어.’ 하고.”
도연은 어리둥절했다. 반면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명진은 우리 아들 이름이야. 넌 나중에 내게 명진이란 아이가 자기 귀에 대고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지. 꼭 오늘 일어나야 한다고 말이야. 목이 잔뜩 쉬어 겨우겨우 한마디씩 내게 해준 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다른 환자와 널, 너희 가족을 헷갈릴 일은 없어. 알겠니?”
“분명히 어디 있는데, 찾는데 시간은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꼭 돌려주고 싶은 물건이어서 내가 잘 보관해놨으니까.” 베개와 이불을 영준에게 건네준 그녀는 연신 미안해했다. 도연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던 물건이 정작 어디 갔는지 찾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도연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했다. 본래 가족이 챙겨 가야할 물건을 정신없던 할아버지가 놔두고 갔고, 그 후로 연락을 몇 번 했지만 친척들에게서는 결국 ‘그냥 버려 달라.’는 답만 들었다. 별것 아닌 물건이지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어 보관하다 퇴사하면서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분명히 두었다고 생각한 장소에 없다며 그녀는 지난 봄맞이 대청소를 의심했다.
“분명히 내가 박스 몇 개를 창고로 치웠거든. 어쩌면 거기에 같이 휩쓸렸을 수 있겠네. 어쩌지.”
그녀는 혀를 차며 창밖을 보았다. 긴 대화로 이미 밤이 내린 거리는 무척 어두웠다. 서울보다 유난히 밀도 짙은 어둠이었다.
“마당 창고 전등이 깨졌거든. 이것저것 날카로운 물건도 있고, 밤에 가기는 좀 위험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찾아 줄게요. 왜 갑자기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처럼 전혀 생각이 안 나는지 몰라.”
거절할 새도 없이 그녀는 잠자리를 준비했다. 집에 손님이 온 것은 오랜만이라며, 특히 젊은 남자 둘이니 오늘은 든든하겠다는 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준 방은 전에 서재로 쓰던 곳이었다. 붙박이로 짜 넣은 책장에 수백 권은 될 듯한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서재로, 가구라고는 책상과 묵직한 소파 하나가 다인 방은 두 사람이 누우면 빠듯할 정도의 크기였다.
영준이 이불을 까는 사이, 그녀는 도연에게 다가가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치 아들에게 하듯 그녀는 도연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얼마나 좋은지 몰라. 사실 네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무서운 일들을 생각하면,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는데. 실은 쭉 한번 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단번에 알아 봤잖니?”
“……네”
어색한 대답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을 잡은 뒤에야 그녀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도연은 받은 옷을 그대로 방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조금 고민을 한 뒤 접힌 것을 풀어 마치 입었다 벗은 것처럼 앞뒤를 뒤집었다 돌렸다.
“그럴 거면 그냥 갈아입지 그래.”
영준의 말에 도연은 알면서 그러냐는 듯 인상을 썼다. 도연이 집에서 영준의 옷을 빌려 입기 시작한 것도 바로 얼마 전이다. 그전에는 마치 요술주머니 같은 배낭에서 매번 자신의 것을 따로 챙겼던 것이다. 육체적 결벽이라기보다는 영적 결벽이라고 해야 하나. 영준은 이불을 깔고 청바지를 벗었다. 옷걸이에 바지를 걸고 있을 때였다.
문을 그대로 뚫고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뚱뚱한 줄무늬 고양이는 말문이 막힌 도연과 영준 사이를 가로질러 유유히 소파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제자리는 듯 앉아 반투명한 몸을 핥는 시늉을 했다.
도연은 질색을 했지만 녀석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느긋한 태도에 영준은 어쩐지 어이가 없기도 해 아무래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영준의 말에 한쪽 눈 없는 늙은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캬악- 하는 위협소리를 냈다. 도연은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소파에서 멀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집에 돌아다니는 동물 령들의 정체가 궁금해, 집에 널린 애완용품의 주인은 어디 있냐고 하자 그녀는 웃으며 ‘주인’은 없다고 했다. 다치거나 병든, 오갈 데 없는 늙은 동물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버려 거리에서 죽게 생긴 동물들을 거둬 치료한 뒤 입양 보내거나 치료해주는 일. 취지는 좋지만 결국 품에서 죽는 수가 늘어날수록 집 안에 머무는 죽음도 많아지고 있었다. 사람의 혼령보다야 낫다지만 문제는 그 수였다.
“길에서 사는 동안 배를 곯아서 음식이 항상 있는 집에 집착하는 건지도 몰라. 이유야 뭐든 간에 전에도 말했지만 혼령이랑 같이 있어서 살아있는 사람이 좋을 일은 하나도 없어. 내일은 잘 말해서 용품들을 다 치우자고 해야겠어.”
단호하게 말한 도연은 흐트러트린 상의를 집었다. 그리고 무심코 그것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뭔가를 닦아내는 행동에 반쯤 누워있던 영준이 벌떡 일어났다.
“설마, 또?”
얼른 옷을 내리던 도연은 곧 감추려던 것을 포기했다. 새삼스럽게 그에게 말 못할 만한 것도 없다 싶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만졌던 이마와 머리를 다시 한 번 세게 문질러 닦아냈다.
“아무것도 없는 건 아는데, 꼭 더러운 게 묻은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어. 가까이에 오는 건 어떻게 견딘다 해도 몸에 닿는 건…….”
도연은 그녀의 호의에서 혐오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접촉을 용케도 견뎠다 싶어 영준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둔해서 느끼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걸 거야.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벌써 11시 반. 이제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누구도 전등을 끄려 하지 않는다. 어느새 밝은 곳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진 듯 영준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숨소리는 오랫동안 불규칙했다. 그것은 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웃풍이 센 집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웅웅거리는 거대한 관악기 속에 들어간 것 같이 느껴진다. 어딘지 불안한 기분에 눈을 뜨자 영준 역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영준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올린 채 그는 낮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떠오르는 게 있어?”
“아니.”
도연은 불쑥 솟구치는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모든 게 내 기억하고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워. 어느 부분은 겹치지만 또 어느 부분은 완전히 다르거든.”
“섞여있다 이거지.”
“그래.”
영준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바로 머리 위로 떨어진 형광들 불빛 탓에 이마와 코에 깎아놓은 것처럼 날렵한 그늘이 섰다.
“벌써 세 번째야.”
“뭐가?”
“네 기억이 틀린 게.”
영준의 말에 도연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소영이의 일. 그리고 네 상처. 네 부모님에 대한 기억.”
내심 생각하고 있던 바를 지적당하자 도연은 어쩐지 반론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은 아직 몰라. 심각한 내출혈이라고 했지. 그놈이 먹은 건 육체가 아니라 피였어. 어쩌면 내가 충격으로 착각한 부분은 있겠지만…….”
도연은 말끝을 흐렸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그대로니까.”
“난 자꾸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아직 가설이긴 하지만……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나쁜 쪽인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야.”
아니라고? 도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은 좋고 나쁜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은 항상 나쁜 쪽에 당첨되어왔다. 그런 것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공평한 확률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영준은 어떻게 이렇게 의연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의 삶 역시 일반 사람들에 비하면 꽤 역경이었다. 지치지 않을까?
영준은 그사이 소파에 앉은 고양이의 혼령을 보고 있었다. 꺼림칙한 편, 호기심이 생기는 듯했다.
“두렵지 않아?”
불쑥 던진 질문에 영준은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악의가 느껴지진 않아서.”
“아니, 그것 말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넌 어쩐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아. 학교도 계속 다니겠다고 하고. 그전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영준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이야기지만, 듣고 보니 그랬다.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어.”
도연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인정하고 물러나는 법을 익혔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무슨 고집이냐는 듯 도연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영준은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말했다.
“왜 어떤 일이 느닷없이 일어났을 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없는 문제가 있잖아.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 자세를 취할지 같은 것은 내가 선택이 가능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좀 충동적인 데가 있어서, 계획을 미리 세워놓지 않으면 순식간에 휩쓸려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 재치나 센스 같은 걸로 살 수 있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야, 난. 부딪혀서 깨져보기 전까지는 고집을 부려보는거지. 가진 게 적은 만큼, 최대한 내 삶을 양보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하고 싶어.”
영준은 팔을 베고 누웠다.
“내 세상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장이 되었을 때 한 번 뒤집혔어. 어릴 때는 그게 자기 세계의 전부니까,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가족, 평생 해왔던 야구, 떠나가는 친구들…… 그런 걸 한번 겪고 나니 이제는 어떻게든 뒤집히면 또 뒤집고, 다시 뒤집으면서 살아지겠구나 하는 대책 없는 배짱이 생긴 것 같아. 나 같이 고지식한 인간이 이런 유도리가 생길지 나도 몰랐어.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내가 저런 걸 방에 두고도 누워서 잘 준비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영준은 고양이의 혼령을 보며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머리를 지탱하는 팔이 접혀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문득 도연은 부러움을 느꼈다. 거의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자신과 고작 몇 달을 겪은 그를 비교했는데 왜 그가 더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걸까. 도연은 단기적인 일정을 제외하고는 길게 내다보는 식으로 인생에 있어 계획 세우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네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은 걸 거야.”
담담히 말한 영준은 어딘가 안타깝다는 듯 도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렸을 때 누군가 옆에 있어 줬다면 너도 훨씬 편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그래. 우린 만날 일 없던 먼 친척이지만, 우연히라도 알았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거야.”
도연은 무언가 여러 가지 말을 떠올렸으나 하나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갑자기 대화가 뚝 끊기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도연은 가늘게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자는 줄 알았던 영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도연의 이마에 올렸다. 그리고는 낮에 한 것처럼 뭔가를 지우듯 이마를 슥슥 문질러주었다. 커다란 손이 눈가로 내려오자 도연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와아아우오옹!’
한밤중의 정적을 깨트리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스라쳐 일어난 순간 시퍼렇게 눈을 치켜뜬 고양이가 도연의 상체를 뚫고 지나갔다. 헉, 하고 숨을 몰아쉬는 사이 고양이는 총알 같이 방문을 지나 밖으로 사라졌다. 몸을 통과한 탓에 작은 짐승이 느끼는 다급함이 도연에게 그대로 전염되듯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찾아내 결단을 지어야 할 듯한.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 잠에서 깨어난 영준을 넘어 복도로 나가 보았다. 벽을 따라 거실로 갔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동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심상치 않다는 기분이 든다.
그때 다시 쉭쉭거리는 위협소리가 났다. 안쪽 방이었다. 따라온 영준도 소리를 들은 듯 놀란 표정이었다. 조심스레 안방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안의 모든 동물 혼령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주인이 잠든 이부자리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머리맡에 모여 이를 드러내고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딱딱 턱을 맞부딪히는 놈, 온몸의 털을 다 세운 채 송곳 같은 손톱을 휘두르는 놈 등 한낮의 평화가 거짓말 같은 혼란이었다.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던 여자는 고통스러운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돌연 제일 덩치가 큰 고양이 한 마리가 껑충 여자의 배 위로 뛰어올랐다. 쿵, 하고 육중한 충격이 실제로 느껴지는지 그녀는 괴로워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체한 사람처럼 주먹으로 명치 있는 곳을 두들겼다.
연신 허공을 향해 짖어대던 개 한 마리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공처럼 몸을 말아 그녀의 등으로 돌진했다.
“우욱……!”
그녀는 속이 뒤집히는 듯 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어떤 놈은 어깨에 올라타고, 어떤 놈은 다시 등과 배로 몸을 던지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깨우려던 때였다.
“어으, 우웩.”
눈을 감고 힘겨워하던 그녀가 기어코 구역질을 시작했다. 격렬한 헛구역질 중 갑자기 이불 위로 주르륵 뭔가가 쏟아졌다. 검고 탄력 있는 천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가슴 높이까지 빠져나왔다가 도로 입안으로 추루룩 말려 올라갔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작은 개가 달려들었다. 복도에 사진이 붙어 있던 요크셔였다. 녀석은 작고 날카로운 이로 주인의 입에서 쏟아진 검은 천의 끝을 야무지게 물었다.
‘아르르르르르르르’
독 오른 소리를 내며 요크셔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개들도 달려들었다. 마치 주인의 몸에서 그것을 빼내려는 것 같았다. 꼬리를 크게 부풀린 고양이들은 구부린 주인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녀석들은 협력이 익숙해 보였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란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조그만 동물들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속된 토기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만 느릿느릿 흘렀다.
도연은 자신을 내내 괴롭히던 불쾌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 검은 형체였다. 도연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르르 몰려 있는 개와 고양이들의 영혼 사이로 끼어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몽유병 환자처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를 부축한 도연은 등을 세게 두들겼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이 가해지자 개들 쪽에 힘이 실렸다. 이제 앞에서 잡아당기는 개와 고양이의 몫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밀고 당기는 사이 여자의 입에서 마침내 좌르륵 완전한 형태가 토해졌다.
이불 위에 쏟아진 것은 몇 사람분이나 됨직한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었다. 아직 조금 남은 것이 있는지 그녀는 손으로 목에 걸린 것을 잡아당기며 계속해서 검고 긴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남은 한 가닥까지 모두 토해낸 그녀는 마침내 탈진해 쓰러졌다. 색색 숨을 몰아쉬더니 점점 숨소리가 깊어졌다. 잠이 든 것이다. 도연은 그녀를 바로 눕힌 뒤 이불 위에 쏟아진 것을 자세히 보았다.
숨죽이고 그 광경을 보던 영준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얘들이 한 거지.”
도연은 사방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가리켰다. 차분해진 녀석들은 드디어 해냈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주인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게 도대체 뭔데?”
영준은 역겹다는 듯 머리카락 뭉치를 바라보았다. 도연은 마치 징그러운 것에서 눈을 못 떼는 사람처럼 잔뜩 찡그린 채로 그것을 이쪽저쪽에서 자세히 관찰했다.
“내가 알기로 이건, 뭐라 그래야 하지. 그래, 병 같은 거야. 나도 전에 얘기만 들어본 거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병이라고?”
영준은 바닥에 쓰러진 채 잠이 든 뺨이 젖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주름이 곱게 진 얼굴에는 어떤 병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병이 아니야. 화병, 속병같이 사람 마음이 괴로울 때 생긴 틈을 타 자기도 모르게 빙의되는 거지. 다른 혼령들처럼 의식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게 달라붙은 거야. 계속 사람 생기에 기대서 점점 몸을 키워 오래 지나면 어느 순간 이런 게 되는 수가 있어.”
“그럼 이게 빙의한 혼령이야?”
영준은 젖은 머리카락 덩어리를 보며 소스라쳐 물었다.
“이정도 크기면 몸 안에 똬리를 틀고 암세포처럼 자라서 어느 순간 병이 되었을 거야. 나도 나온 걸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야. 예전에 운문사 사리암이란 곳 사람한테 지나가듯이 들었어. 그곳의 부엌보살이란 분이 사는 게 너무 안 풀리고 몸이 너무 아파 절로 들어갔는데, 매일 기도를 하며 지내자 어느 날부터 밤마다 꿈에 머리카락을 토했다고. 스님들은 그게 업장을 녹이는 거라고 했다는데, 가끔 원한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진짜 있는 일일 줄은 나도 몰랐어.”
도연은 어안이 벙벙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속 느꼈던 불쾌감이 이거였어. 이런 게 입 끝까지 올라와 있었으니.”
“이 녀석들이 빼낸 건가?”
동물의 영들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방을 속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분은 기독교인이잖아.”
“……종교와 상관없이 항상 기도하고, 다른 생명을 위해 봉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수행이나 마찬가지니까. 저 녀석들, 매일 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가 봐.”
“병을 가져온다며? 그럼 없는 게 좋은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강제로 뽑아내다니.”
도연은 새삼 기가 막혀 그것을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같던 것은 서서히 녹아들 듯 사라지고 있었다.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주인은 주인이란 건가. 동물이 사람보다 낫군.”
영준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통통한 얼룩 고양이가 이쪽을 흘깃, 보고는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여기 있네!”
승리감에 가득 찬 외침과 함께 그녀는 나무 상자를 찾아냈다. 그것을 들고 거실로 나오는 얼굴이 태양처럼 환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다더니 말 그대로 10년은 젊어 보인다.
“없어졌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아니 이게 어제는 왜 전혀 생각이 안 났지? 항상 두는 곳인데?”
그녀는 정말 못 말리겠다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갈색 오동나무 함에는 안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초침이 멈춘 손목시계와 옛날 피쳐폰, 보석이 빠졌지만 아직 아름다운 머리끈 등, 대부분은 개인적인 추억에 가치를 둔 물건들이었다. 도둑이 가져간다면 쓰레기 이외에는 안 되겠지만, 의미를 둔 사람에게는 억만금을 줘도 다시는 못 구할 그런 수집품 들이다.
“이거랑, 이거.”
그녀는 상자 안에서 검은색 장지갑과 갈색 가죽노트를 꺼냈다. 지갑과 가죽 모두 고급제품 인지, 반들반들한 단면에서 오래된 가죽 특유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노트의 쇠 장식이 약간 느슨해진 것을 빼면 아무 흠도 없는 물건들이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지갑과 노트를 뚫어져라 보면서, 도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나오리라 기대했던 영준 또한 의아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두 개 모두 도연이 부모님의 물건이에요. 사고 당일 따로 보관해 두었던 걸로, 말하자면 마지막까지 두 분이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유품이란 말에 영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미혜가 욕심 많은 친척들로 인해 남은 유품이 하나도 없다고 한 순간 얼마나 화가 났던가. 추억할 물건 하나 남기지 않다니. 그런데 여기 멀쩡히 두 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왜 정 간호사님이 가지고 계신 거죠?”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래는 본인 확인을 하러 온 가족분이 다 가져가셔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할아버님이 너무 경황이 없으셔서 도연이 병실에다 물건을 두고 다녔어요. 그러다 두 분이 사망하고 나자, 가슴이 아파 보기도 싫다며 나더러 치워달라고 했는데 그럴 권한도 없고, 또 워낙에 정성들인 것들이라…….”
그녀는 도연을 보며 말했다.
“신분증하고 주요 물품이 들어 있지 않은지 확인하려고 열어 봤었는데, 이건 일기장이었어. 네 어머니의.”
어머니의 일기장. 가죽 장정에는 아주 오래된 연도가 적혀 있었다. 안을 보여주려는 듯 그녀는 달칵, 하고 쇠 장식을 풀었다. 도연은 급히 손을 뻗어 일기장을 펼치는 것을 막았다.
“아, 나중에 혼자서 보고 싶니?”
“……네.”
“그래, 사적인 물건이니까. 미안하다. 하지만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이 일기장은 아마 네가 태어날 때부터 쓰신 것 같아. 육아일기처럼 임신 때부터 출산까지 모든 게 빠짐없이 적혀 있는지 여러 가지 표나 그림도 들어 있고. 일기장 맨 앞에 아주 갓난아기였던 네 사진이 붙어 있더라. 빨갛고 도깨비처럼 귀여운 아이야.”
그녀는 일기장을 다시 잠가 도연에게 주었다. 도연은 그것을 받자마자 뜨거운 돌이라도 되는 듯 어쩔 줄 몰라 영준에게 건네주었다. 얼결에 전달받은 영준은 할 수 없이 도연을 대신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다음은 지갑이었다. 검은색 장지갑은 끝에 은색 고리가 달려 있었다. 멋스러운 디자인에 중후한 느낌은 주인이 남자답고 세련된 사람임을 짐작케 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지갑을 열어 안을 보여주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중요하다 할만한 내용물은 주민등록증과 몇 가지 기념카드가 다야. 현금과 신용카드만 할아버지께서 가져가시고. 지갑에 사고 당시 약간이나마 피가 묻어 있어서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젠 깨끗하고, 또 손때 묻은 물건이니까 역시 네게 가야 할 것 같아. 참, 아버지도 가정적인 분이셨던 모양인지 안에 가족사진이 가득 들어 있더라.”
이번에는 지갑이 쥐어졌다. 그것은 또 빠르게 영준에게 넘겨졌다. 전달식을 끝낸 그녀는 나무 상자를 닫고는 후련한 듯 웃었다.
“항상 이 상자를 열 때마다 생각했지. 이 아이가 부모님이 자길 얼마나 사랑했는지,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눈부시게 기록하며 키워왔는지 알아야 할 텐데. 이런 물건을 함부로 버리라고 말하는 친척들이 아니라, 정말 자기 가족 손에 컸어야 했는데 하고 말이야. 하지만 어쩌면 네가 이렇게 다 커서 와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상실의 아픔도 이해하고, 차분하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나이니까. 하느님께 기도드린 보람이 있어.”
그녀는 순수한 기쁨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도연은 어딘지 핼쑥한 표정으로 그저 조그맣게 네, 네 하고 기계적인 맞장구를 칠뿐이었다. 영준은 보다 못해 나서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다 누구 건가요?”
“대부분 내 거나 친구들 것이에요.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는 편이니까. 나이가 들다 보면 남는 건 추억뿐이거든.”
그녀는 지갑과 일기를 담아 갈 수 있도록 작은 쇼핑백도 내주었다. 자연스럽게 짐을 받아드는 영준을 보고 그녀는 ‘좋은 친구를 뒀네.’ 하고 말했다.
신발을 신고 나가자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상쾌한 아침 공기에선 축축한 안개 냄새가 났다. 어느새 코가 적응해 느끼지 못했던 누린내가 싹 씻겨가는 것 같은 맛있는 공기였다.
“앞으로 다시 보기는 힘들겠지.”
그녀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강릉은 머니까, 혹 자주 오지는 못하더라도. 근처에 물놀이 하러 오거나 하면 연락해, 응?”
그녀는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도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이 바르르 떨렸다. 결코 전화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눈이었다. 밝고,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동시에 외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도연은 순간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포옹을 했다. 단 1, 2초간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오지 말고 쉬세요.”
“으응, 괜찮아. 원래 저혈압인데 오늘 아침은 컨디션은 무척 좋으니까. 요기까지만 나갈게.”
어제 새벽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이상한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고 생각하는지 사이사이 하품이었다. 집 앞으로 부른 택시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도연이 먼저 탄 뒤, 영준이 뒤따랐다. 차가 출발하자 그녀는 서운한 듯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많이 줄었었지?”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로 접어들었을 무렵 영준이 물었다. 거실에 머물던 동물들의 이야기였다. 아침에 나가보자 녀석들이 수는 반도 되지 않았다. 도연은 창에 팔을 기대 머리를 받친 채 눈을 감았다.
“할 일을 끝냈으니까. 나머지도 차례로 사라지겠지.”
“사람들도 좀 저랬으면 좋겠군.”
영준은 하품을 하고는 툴툴거렸다.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깐 마루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영준은 ‘난 이대로 잠깐만 잘게.’ 하고는 정말 그대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연 역시 눈은 감았지만 잠은커녕 자꾸만 정신이 또릿또릿해져 결국 일어나 앉았다. 휴식할 수 없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도연은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의 내용물을 살짝 들여다봤다.
‘이 아이가 부모님이 자길 얼마나 사랑했는지,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눈부시게 기록하며 키워왔는지 알아야 할 텐데.’
그녀는 자신의 말이 도연에게 얼마나 비수가 되어 꽂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분들이 나를 사랑하면 사랑했을수록, 행복하면 행복했을수록 죄는 깊어졌다. 영준은 두 분이 도로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이송 후 수술대 위에서 사망한 것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연은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두 분이 죽은 이유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과다한 출혈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자신의 약속 때문이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두 분의 영혼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는 눈으로 바라본단 말인가.
영준은 한 시간 정도 지나 눈을 떴다. 피로가 좀 풀리는지 길게 기지개를 하고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도연은 샤워를 하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영준은 뻐근한 목을 만지다 한쪽에 밀어놓은 쇼핑백을 발견했다. 영준은 아차 해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잠결에 내가 이런 걸까. 도연의 부모님 유품이 담긴 가방이었다. 이렇게 함부로 두면 안 될 물건이었다.
영준은 그것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도연은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막 냉장고 문을 닫고 있었다.
“여기.”
쇼핑백을 내밀자 도연은 빤히 바라만 볼 뿐 받지 않았다.
“중요한 물건이니까 잘 둬.”
“……그냥 네가 알아서 해.”
“무슨 소리야. 이건 네 부모님의 유품인걸. 당장 보고 싶지 않다면 다른 물건들처럼 배낭에 넣어두든가.”
도연은 마치 협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놀라 배낭? 하고 말하고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하려고?”
“…….”
“설마 그냥 한 쪽에 치워버린 뒤, 잊을 생각이었어?”
“…….”
도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 뒤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어쩐지 처음 받을 때부터 태도가 이상하긴 했다. 사고에 대한 충격과 죄책감이 큰 만큼 예상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등장한 방어막에 영준은 다소 매몰찬 말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지나치게 참견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난 네가 이걸 봐야 한다고 생각해.”
“왜 그래야 하는데?”
도연은 감정을 숨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수고에 대해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거야?”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영준은 침착하려 애썼다.
“이걸 던져버린 뒤 잊고 싶다면, 먼저 간단하게라도 훑어봐. 적어도 네가 뭘 포기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의미 없는 짓이야. 내가 사진을 봐야 할 이유가 뭔데?”
“그래야 네가 부모님을 좋은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으니까.”
영준은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초등학생 시절의 남매가 운동회에서 찍은 사진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도시락을 먹는 네 가족의 사진이 정겨웠다.
“이 사진들은 모두 소영이가 붙여 놓은 거야. 나도 처음에 싫어했어. 사진을 보는 게 괴로웠거든.”
“…….”
“처음 사고에 대해 들었을 땐 계속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하는 생각만 했어.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악몽 속에서 본 적도 없는 부모님의 모습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기까지 했지. 교통사고로 인해 차가 전복되어, 몇 시간 동안이나 차 안에 방치되어 있던 모습 같은걸. 결국 한동안은 부모님에 대한 건 얘기는커녕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슬픔보다 괴로움이 앞서서 계속 피했어. 그러다 어느 날 소영이가 사진 정리하는 걸 봤는데, 두 분은 내 기억 속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셨어. 내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래주길 바라실테고. 생전의 밝고, 건강하고, 사랑을 주고받으실 줄 알던.”
“그래서 나도 그래야 한다고?”
“너와 나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 알아. 하지만 네가 정말 기억하고 싶은 부모님의 모습이 뭔지 생각해봐.”
“난 그분들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직접 듣고, 또 봤으니까.”
그 딱딱한 어조에 자신이 위험한 선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눈치챈 영준은 한발 물러났다. 도연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영준은 식탁 위에 쇼핑백을 올려놓고 주방을 나오기 직전, 이 물건들을 처음 보았을 때 떠오른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만약 네 말이 다 맞다 해도, 난 자식 대신 죽었다고 자식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 그것도 이렇게나 사랑받던 아이에게는.”
마당으로 나온 영준은 현관 계단에 앉았다. 잠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핸드폰을 꺼낸 영준은 밀린 착신을 확인하고 소영에게 답을 보냈다. 내일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니 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지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수신 날짜는 어제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영준은 아차 했다. 그럼 오늘 오겠구나.
동생이 돌아오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영준은 휴대폰을 들고 턱을 괴었다. 자신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 언제까지고 방을 나눠 쓰거나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영준 본인이 소영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걱정하고 있는 시점에, 도연까지 함께 산다는 게 현명한 생각인지 의심스러웠다.
내 욕심이겠지 아마. 영준은 습관처럼 휴대폰에 붙은 작은 스티커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영준은 깜짝 놀라 서둘러 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소영에게 온 전화는 아니었다. 의외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전화했었냐?
“예?”
-니 거 영준이 맞지? 최영준이.
“네 아저씨. 저 맞습니다. 잘 지내셨죠?”
유일하게 연락하는 친척 중 한명인 여수 아저씨였다. 도연을 소개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발신자 표시인가 뭔가를 했는디, 부재중 전화로 니 번호가 뜨더라. 그라고 연락이 없으니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한 번 해봤다.
전화? 의아해 생각해보니 강릉으로 가기 전 혹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여수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 생각났다.
마음 써주는 것에 감사해 영준도 여수 아저씨와 다른 분들의 근황에 대해 이것저것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상대가 ‘나가 이제 회의를 가봐야 하니 그럼 나중에 보자.’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전화 너머 누군가 ‘오늘 회의는 기범이네 집에서 해요?’ 하고 묻는 말소리가 들렸다. 기범? 영준은 이상하게 낯익은 그 이름이 갑자기 걸렸다.
“잠깐만요, 아저씨.”
-어?
“방금 기범이라는 이름이 들렸는데요.
-그래?
“설마 예전에 저한테 말씀해주셨던 그 사람은…….”
전화 너머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옆을 조심하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저씨는 ‘그래, 그 양반 맞다.’ 하고 말했다. 순간 영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범은 아저씨가 처음 도연의 연락처를 건네주며 이야기했던, 뱀 혼령에 씌웠다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 살아 있었어요?”
전화 너머 뜨악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여수 아저씨는 ‘그게 무슨 소리냐 시방? 농사지으며 자알 있는 양반을.’ 하고 대답했다.
영준은 전화를 끊은 뒤 멍하니 정원을 응시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살아있다고? 도연이 부모님의 사고에 대해 이야기한 뒤, 어느 날이었나 고해성사를 하듯 그에 대해 흘린 적이 있다. 기범이란 사람이 정말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이야기의 결론은 참혹해서, 차라리 안 듣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가 살아있다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덜컹, 하고 움직였다.
“누구세요?”
놀라 묻자 아무 대답이 없다. 혹시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문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골목 끝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가려는데 대문에 한 뼘 정도 크기로 이상한 흰 선이 잔뜩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소리가 이거였나. 하지만 낙서는 흰 페인트 같은 것으로 이미 말랐는지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직직 그어진 선은 뜻 없는 낙서치고는 굉장히 복잡했다. 이걸 또 어떻게 지운담. 영준은 일단 안으로 들어왔다. 그보다는 먼저 기범에 대해 도연과 이야기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도연은 방에 들어갔는지 거실과 주방은 텅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 자신이 올려 두었던 쇼핑백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는 걸까. 만약 사진을 보는 거라면 잠시 혼자 두는 게 좋을지 모른다. 거실로 나오던 영준은 문득 욕실 문이 꼭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스위치도 올려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물소리가 난다. 샤워기를 움직이지 않고 그냥 틀어만 놓았는지 쏴아아 하는 규칙적인 물소리였다.
“김도연?”
노크를 하며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냥 말을 하면 될 텐데. 왜 하필 욕실에서? 복잡하기도 하지.
영준은 한숨을 쉬고는 거실에 놓아둔 작은 상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 위에 얼마 전부터 쭉 생각해오던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연의 상태와 의아한 부분, 또한 과연 그를 괴롭히는 존재는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한 추측이었다.
비록 지금은 비현실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준은 논리와 이성, 육체의 노력이 전부인 세계에서 살아왔다. 때문에 제 아무리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비현실의 세상에 있다 해도, 기억이나 느낌보다는 증거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그리고 그 증거들은 도연의 이야기와 몇 걸음씩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영준은 종이에 펜으로 1번부터 숫자를 붙여가며 정리해 보았다.
먼저, 도연의 부모님은 그의 기억에서와 달리 병원에 도착해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또한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사고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6개월 간 입원해 큰 수술을 치러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또 도연은 자신을 간호해주고 쭉 보살펴준 간호사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곳에서 있던 자잘한 사건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으면서 제일 가까웠던 이만 모르는 것이다.
또 하나, 갑작스러운 실종 이후 만난 도연은 소영이 죽었다고 매우 강하게 믿고 있었다. 영준이 복수심에 불타 그를 함정에 빠트리려 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제는 기범. 도연이 한때 도우려 했다 실패해 죽었다는 남자는 끔찍한 죽음은커녕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잘살고 있다고 한다.
“기억이 죄다 잘못되어 있잖아.”
영준은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이것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일들이 숨어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영준은 종이를 들고 당장 일어났다. 더 지체하지 않고 도연과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어쩌면 본인 역시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지 모른다.
영준은 문을 크게 두들겼다.
“김도연, 안에 있지? 좀 들어갈게. 중요히 할 이야기가 있어.”
침묵.
영준은 한숨을 쉬고는 그냥 문을 열었다.
“어, 너. 뭐야?”
영준은 놀라 더듬거렸다. 도연은 욕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펼쳐진 일기장과 수십 장은 될 법한 사진들이 나뒹굴었다. 욕조를 향해 틀어놓은 샤워기에서는 소나기처럼 물이 쏟아져 속절없이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영준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도연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욕조에 기대여 앉아 손에 몇 장의 사진을 쥔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소리에 가려진 흐느낌이 약하게 욕실 안을 울렸다.
“김도연!”
영준은 놀라 외쳤다. 너무나 뜻밖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도연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런 세상에, 왜 그래?”
영준은 급히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영준을 본 도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떻게든 눈물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억지로 참아내는 가느다란 흐느낌은 비애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봤지만 고개만 저을 뿐이다.
“나, 나가.”
도연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울음소리를 가리려 샤워기까지 틀었으니,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영준은 도저히 그를 이렇게 두고 나갈 수 없었다. 화가 난 얼굴로 영준을 노려보던 충혈 된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자 툭, 하고 크게 떨어진다.
가슴 아픈 광경에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저항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몇 번 밀어내다 의외로 순순히 따라온다. 등을 감싸 안자 조금 버티는 듯했지만 이내 온몸으로 기대듯 의지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영준은 그를 안은 채 바닥에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주워들었다. 정 간호사에게 들은 대로 대부분 어린 도연과 부모가 함께 찍힌 가족사진이었다. 1살, 2살, 3살 차례차례 나이 먹어가는 도연의 모습은 대여섯 살 정도에서 멈춰 있었다. 성장이 멈춘 어린아이처럼 언제까지나 7살의 도연이 사진 너머를 해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진 때문에 그래? 가슴 아파서?”
영준의 어깨에 기댄 채 도연은 이를 악물고 떨리는 한숨만 쉬었다. 진정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지만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어깨를 축축하게 적셔왔다. 어떻게든 멈추도록 달래주고 싶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다. 누구에게나 준비된 때라는 것이 있는데, 보라고 강요한 꼴이니 자신이 울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 당황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영준은 욕조에 기댄 채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달래듯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 아래 떨리는 그의 몸이 호흡할 때마다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영준은 속삭이듯 말했다.
“널 슬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너무 힘든 일만 자꾸 생기니까 네게 의지해야 할 만한 게 생겼으면 했어. 건방진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했어.”
영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도연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크게 호흡하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도연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뭔가 말하려 했지만 호흡이 엉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지, 띄엄띄엄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일이, 아니야.”
“아무것도…… 넌, 아무, 것도 상관.”
마음이 급한지 헐떡임에 말은 자꾸만 끊겼다. 답답함에 울컥해 새로 떨어진 눈물이 손등 위로 흘렀다.
“그만 울어, 제발. 곧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 진정하고 나중에 얘기하면. 응?”
“난 어린애가, 아냐. 넌 몰라…….”
도연은 갑자기 어깨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몸을 떼어내 욕조에 기대앉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이젠 어떻게 하지……?”
그는 몇 번이나 반복해 어떻게, 어떻게 하지, 하고만 중얼거렸다. 영준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끝없는 혼잣말이었다.
“뭘?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자신이 도연이 질색하는 방식의 달짝지근하고 달래는 듯한 말투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예전부터 누가 우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흐느낌 사이에 실소가 흘렀다. 그것은 금방 사라졌지만 손을 내린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도연은 바닥에 떨어진 사진 중 아무것을 하나 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본 뒤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마치 영준에게 보라는 듯 그것을 내밀었다.
영준은 사진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유치원복을 입은 도연과 젊은 부부의 사진이었다. 햇살유치원, 이란 이름의 건물 앞에서 찍은 봄날의 기념사진이었다. 하늘색과 흰색 유치원복에는 조그맣게 ‘햇님 반 김도연’이란 이름의 명찰이 달려 있었다.
젊은 부부는 키가 크고 늘씬해 준수한 외모였다. 그의 친척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란 인상이었다. 둘 다 피부가 희고 단정하게 생겨 도연이 누굴 닮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후회치고는 반응이 너무 격했다.
도연은 의아한 표정의 영준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아니야!’ 하고 말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이, 이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야.”
“뭐?”
영준은 이해가 안 가 다시 사진을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렇지만…….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도연은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과 갓난아이인 도연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일기장의 기록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도연은 영준의 어깨를 움켜잡은 채 말했다. 이를 악물고, 빨리 이해하라며 옷을 잡아 흔든다.
“알겠어? 난 이 사람들을 모른다고!”
“그거야 네가 사진을 처음 봤으니까…….”
“난 부모님 얼굴을 알고 있어!”
도연은 비명처럼 말했다.
“어릴 때라 기억이 희미하다 해도, 그 뒤로 쭉,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계속 봐 왔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도연은 아직 피부가 빨간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움켜쥐었다. 조금 지친 표정의 여자 뒤에는 눈물이 맺힌 남자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탄생일과 태명,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단 말이야!”
영준은 그가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다르다면, 하지만, 그렇다면,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모르겠어? 내가 아는 부모님은 이 얼굴이 아니라고!”
이어지는 말에 영준은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이 사람들이 정말 내 부모라면, 그럼 그건 누구지? 왜 자기들을 죽게 했냐고 피를 흘리며, 내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던, 부모님인 척 날 저주하는 사람들은 누구냔 말이야!”
도연은 당장 대답해보라는 듯 영준의 옷에 매달렸다.
“내 평생을 쫓겨 왔던 그 두 사람은 누구야? 나는 누구를 부모라고 믿고 16년간 계속.”
덜덜 떠는 그를 영준은 그저 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부모님 대신 날 데려가’ 하고 말하면 어땠을까 상상해왔어. 만약 내가 그때 포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부름에 응해 문을 연다면, 밖에서 날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나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하면 날 용서해줄까 하고.”
“……세상에.”
비로소 완벽히 이해한 영준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철저한 농락이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영준은 그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대답이었다.
“네가 말 해봐. 내 상처도, 부모님도, 모두 다 내가 틀린 거였어. 더 이상은 모르겠어.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니 내가 뭘 하고 싶어서, 뭐 때문에 이곳에 있는지 이젠 모르겠어. 죽고 싶지 않아서 싸웠는데. 계속 도망쳤는데, 뭘 피해서 지금까지.”
점점 무너지는 도연이 무서워 영준은 얼른 그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정신 차려. 알겠어? 숨 쉬어봐. 깊게, 그렇지.”
눈을 마주친 채 그는 영준이 말하는 데로 숨을 깊이 쉬고 내쉬었다.
“알았잖아. 이제 알았잖아, 진실이 뭔지! 차근차근 생각하자. 급할 것 없어.”
영준은 도연의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해. 죽기 싫으면, 살면 되는 거야. 지금처럼 살기 싫으면, 다른 방식으로 살면 되는 거야. 혼자서 다 할 필요는 없어. 내가 그랬잖아. 네가 날 도왔으니 이젠 내가 널 도와준다고. 혼자 안 둔다고. 내가 못 미더워?”
“……결국 다 죽을 거야.”
“아무도 안 죽어!”
영준은 그의 얼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안 죽었단 말이야. 나도, 소영이도, 5년이나 같이 살면서 네 재산으로 떵떵거리는 친척들도! 그래, 기범이란 사람도 살아있대. 방금 내가 여수 아저씨하고 통화했어. 결혼까지 해서 잘 산대. 아마 네 친구였다는 사람도 확인은 안 해봤지만 살아있을 거야. 다 거짓말이야, 죄다, 그, 그 새끼가 거짓말 하고있는 거라고!”
“…….”
도연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범이 살아 있다고? 그것도 놀라웠지만 영준의 눈빛에 더 놀란다. 그는 항상 밝고 친절한,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글거리는 눈에는 전에 없던 분노가 서려 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와 그대로인 줄 알았는데, 많이 변했다.
그렇다면 혹시 나도 그럴까. 도연은 그 생각에 매달리듯 얼굴을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이 시선에 걸린다. 낯설고 다정한 얼굴. 아직은 도저히 볼 수 없이 시선을 돌렸다.
영준은 젖은 바닥에서 도연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좁은 욕실에서 데리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일단 진정하고, 같이 생각해보자. 어려울 것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 되는 거야.”
“……없어. 그런 건 아무것도.”
도연은 더 이상 울거나 마구잡이로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그런 건 이제부터 생각하면 돼. 쉬운 일이야. 이젠 알 것 같아. 네 문제가 뭔지. 네가 잃은 게 뭔지.”
영준은 조금 전 정리했던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도연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계속된 기억의 상실에 대한 추측이 적혀 있었다. 기범의 일이 있은 뒤 산으로 도망쳐 며칠 만에 발견되었다는 것과, 병원에서의 실종은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영준은 도연의 상처를 발견한 이후부터 어딘지 모르게 기억이 계속해서 조작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빌어먹을,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필요한 것은 명확한 증거였고, 이 사진들보다 더 한 것은 없었다.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재회 당시 소영이 죽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도 그랬다. 희망과 성취의 자리에 죄책감과 실패를 심어 놓은 것이다.
매번 그랬다면, 그는 점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자존심이 그렇게 강하면서도 묘한 자학과 자책의 냄새를 풍기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좋아질 수 있고, 지금 슬프고 우울해도 언젠가는 다시 밝은 날이 올 것이라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희망을, 뭔가를 이뤄낼 때마다 극복해낼 때마다 얻는 용기를 갖지 못하게 지워 버린 거야.
언젠가 내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도서관 매점의 작은 TV에서 일부분을 짧게 보았을 뿐이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다큐멘터리는 아프리카의 내전 중 벌어지는 6살에서 15살 정도의 어린아이들 수만 명의 학대에 대한 내용이었다. 화면에 나오는 검고 앳된 아이들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중후한 음성의 나레이터의 차분한 말투와 그 무심한 얼굴의 대비가 강렬했다.
도연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무심함은,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게 널 이런 식으로 가지고 노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 더 이상 네 일만은 아니야.”
영준의 말에 도연은 몇 번 입을 벙긋했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듯 확신 없는 몸짓이다. 울어서 눈가가 짓무르고 평소의 단정한 얼굴보다 엉망인 꼴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무표정하다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좀 진정하고, 이걸로 얼굴도 닦아. 엉망이니까.”
거실에 그를 앉힌 뒤 영준은 젖은 수건을 이마와 눈두덩에 올려주었다. 내켜하지 않았으나 찬 수건이 얹어지자 한숨을 쉬고는 축 늘어진다. 수건 아랫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영준은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도연의 입안에 하나 넣어주었다.
“괜찮을 거야.”
확신인지 바람인지,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영준은 다시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이 있을 거야. 나나 소영이처럼, 혹은 이 기범이란 사람이나 정 간호사님처럼 네게 도움 받은 사람들이.”
“…….”
“그저 네가 모를 뿐이야. 너만 모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