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1/24)

8

영준은 벌써 4시간째 꼼짝도 하지 않는 등을 바라보았다. 둥글게 구부린 채 무언가를 정신없이 쓰고 있다. 그러다 다시 지우고, 긋다가, 다시 쓴다. 풀과 스테이플러를 사용해 뭔가를 붙이고, 박고, 다시 오린다. 옆에 둔 음료와 빵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오전 내내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쳤다. 그러나 아직 남은 눅눅한 습기가 집 안에 가득해 여기저기 놓아둔 물먹는 하마 정도로는 감당이 안 된다. 오래된 집은 항상 누군가 손을 대고 관심을 기울여줘야 유지가 된다. 아파트와는 달리 주택은 때로 거기 사는 사람들보다 빨리 늙을 때가 있다. 하다못해 집마저 그런데 사람은 어떨까. 영준은 도연이 필사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 일종의 일기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이 자꾸만 소거되고 있다는 것을 빠르게 납득했다. 전환이 빠르고 뭔가에 길게 붙잡혀 있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끔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는 것을 영준은 알았다.

뭔가를 삼키듯 침묵의 끝에서 최대한 질 좋고 튼튼한 노트와 펜을 달라고 한 도연은 무작정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혹은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이 사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정리하기로 했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도와주고 싶지만 먼저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함부로 참견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이것만은 스스로, 혼자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는 부모님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몇 장이나 노트에 붙였다. 최대한의 모든 기록을 남겨 놓아 여차했을 상황에 그것을 보고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영준은 그가 어느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몸에 문신을 남기겠다고 할까 봐 겁날 지경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뭔가를 써내려가던 도연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너 사진 한 장만 줘봐. 동생이랑 같이 찍은 걸로.”

“나?”

“그래. 한 장정도면 될 거야.”

나에 대해서도 쓰는 건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영준은 얼른 일어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뒤지기 시작했다. 뭐가 마땅할지 찾는데 답답하게도 성인이 된 후에는 이렇다 하게 사진을 찍은 게 없다. 사진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찍는 법인데, 학비와 생활비 등에 쫓겨 워낙 바쁘게 지내느라 마땅히 어딘가 놀러 간 적도 없던 것이다.

차라리 소영이 고등학교 졸업사진이 나을까. 영준은 교복을 입고 꽃다발을 든 소영과 자신의 기념사진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썼다. 아르바이트 중에 급하게 나오느라 빌려 입은 양복과 흐트러진 머리 등 바보같이 보이는 사진이다. 이런 걸 줄 수는 없지. 영준은 작은 서랍을 열어 혹시 더 굴러다니는 것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영준이 나오지 않자 도연이 방문을 열고 찾아 들어왔다.

“뭐하는 거야?”

“아니, 마땅한 게 없어서…….”

“이건 다 뭔데?”

도연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진들을 가리켰다.

“다 너무 어릴 때거나 아니면 좀, 이상한 것들뿐이야.”

영준의 말에 그는 하필이면 조금 전 한쪽으로 치웠던 졸업사진을 집어 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자세히 보더니 ‘이거면 될 것 같은데.’ 하고 말한다.

“아니 아니, 안 돼, 그건.”

차마 이 와중에 사진이 못 나와서 안 된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영준은 거의 반강제로 그의 손에서 사진을 뺏어 왔다.

“소영이 오면, 그때 같이 찍어서 줄게. 기왕이면 최근 사진이 좋잖아.”

“이것도 괜찮아. 빨리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던 도연의 눈이 앨범에 꽂혔다. 어쩌지 흥미를 가진 것 같아 영준은 마음대로 보라며 밀어주었다. 몇 시간만의 대화였다. 도연은 오래되고 두꺼운 가족사진을 이리저리 넘기더니 아예 맨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낡은 흑백 사진 속 부모님의 모습이, 그다음에는 아래를 훤히 드러낸 갓난아기 영준이 있었다. 백일과 돌 사진, 마당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이어진다. 통통하고 건강한 사내아이다. 유난히 아랫도리를 벗은 사진이 많아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곧 소영의 사진이 나온다. 머리에 핀을 꽂은 여자아이는 애교가 많은 대신 고집도 센지 툭하면 우는 얼굴이 많다. 유치원 입학식과 초등학교 입학식, 기념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온 가족이 함께 사진을 찍는다. 놀이공원과 등산, 운동회 등 자잘한 행사 때마다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고 왔다.

중학생 야구부에 들어갔을 무렵의 사진에는 선수복을 입은 영준의 뒤에서 아버지가 어찌나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계신지 웃음이 나올 정도다. 누가 보면 프로선수단에라도 들어간 줄 알 지경이다. 영준은 어느덧 오랜만에 보는 사진에 빠져들었다. 추억이 새삼스럽게 애절하다. 앨범을 넘길수록 사진 속 남매는 자라나고, 부모님은 나이를 들어갔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이후를 기점으로, 더 이상의 사진은 꽂혀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소영만이 참석한 영준의 졸업 사진, 그리고 소영의 졸업식에 참석한 피곤한 얼굴의 영준. 그 후 유일한 사진은 대학에 입학한 후 찍은 것들인데, 어딘지 모르게 독기를 품은 표정이 부모님의 부재라는 전과 후가 분명했다.

도연은 텅 빈 사진첩을 확인하듯 몇 번인가 넘기더니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

“?”

혹시 뭔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도연이 손에 몇 장의 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나눌 생각이야 이걸. 몇 장은 저 노트에, 몇 장은 배낭 속에, 몇 장은…….”

도연은 영준의 사진첩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으면 여기에 같이 보관해도 될까?”

“그, 그래. 네 마음에 드는 곳에 넣어.”

영준은 얼른 앨범을 앞으로 더 가까이 밀어 주었다. 도연은 싫으면 말하라는 듯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세 장의 사진을 골라 앨범에 끼워 넣었다. 그것은 갓 태어난 도연을 안고 있는 부모님이 모습과 첫 돌, 유치원 입학 사진 세 장이었다. 마치 영준의 것을 따라하듯 그는 한 페이지마다 하나씩을 끼워 넣었다.

“……모아 뒀다가 다 잃어버리면 큰일이니까.”

도연은 변명처럼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또 잊게 되면 이게 필요할 거야.”

“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영준의 질문에 도연은 그늘진 얼굴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결국 이번이 처음도 아닌 거야. 그렇다면 마지막도 아니겠지. 난 상황이 그렇게 쉽게 변하리라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다시 앨범을 들여다본다.

“……이것저것 길게 써봤는데 너무 쓸 게 없어서,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다 욱여넣었어.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가진 것들 중에는 잃어도 크게 아까울 게 없더라. 그나마 네 덕에 되찾은 것들이 많아. 그러니까 몇 장은 너한테 두고 가는 게 좋겠지.”

이미 포기한 것 같은 말투였다.

“마치 곧 다 잊을 거라는 식이잖아 너.”

“나라고 그러고 싶은 것 같아?”

앨범을 탁, 닫은 도연이 말했다. 아차 하는 영준을 두고 도연은 다시 거실로 나갔다. 서둘러 뒤를 따르자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알아.”

도연은 짧게 대답했다.

“화풀이한 거야. 사실은 굉장히 초조해. 또 다 잊게 될까? 지금 알게 된 것도 다 잊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될까? 부모님 얼굴도, 사고도, 사람들도, 너도…….”

도연은 펜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도연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이 그러듯 편집증적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무서워, 세상 무엇보다 그게 제일 무서워. 지금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데. 심지어 다시 그 당시로 되돌아간다는 게…….”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는 약한 소리를 한 것이 부끄러운지 얼른 몸을 추슬렀다.

“어쨌든, 만의 하나는 언제나 있는 거니까.”

노트는 몇 시간 동안이나 열심히 쓰더니, 뭔가 빼곡하다. 신경질적으로 펜을 물어뜯던 도연이 영준의 시선을 느끼고는.

“볼래?”

하고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도연이 스스럼없이 노트를 내밀었다. 깜짝 놀란 영준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네 앨범을 봤으니까. 공평하잖아.”

생각해보니 자신의 일생 사진을 다 본 것이긴 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노트를 받아 대강 훑어보던 영준은 몇 가지 눈에 띄는 단어를 발견했다.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돼?”

“그래. 뭐가 궁금한데?”

영준은 일단 도연의 손에서 펜을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을 보게 했다.

“심문도 아니고 대화니까 보면서 얘기 하자.”

도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노트를 한 번 보고는 영준을 다시 보았다. 그냥 읽으면 될 것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해봐. 중학교 후 안 갔다고 했지? 더 다니고 싶지는 않았어?”

“전혀. 난 첫 등교 때부터 이미 싫었어, 학교는.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사춘기로 불안정한 아이들을 한 장소에, 그것도 그렇게 오래된 건물에 모아놓으면 사람끼리만도 힘겨운데 난 더 했으니까. 수업을 받는 건 커녕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어.”

도연은 어느 비 오던 날 자신을 따라 왔던 덩치 큰 혼령을 기억했다. 학교를 가던 중 마주친 거인 같은 덩치의 여자는 익사해 죽었는지 온몸이 퉁퉁 불어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키에 몸이 서너 배 정도 부어오른 상태라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 같았다. 그녀는 거대한 풍선 같은 몸을 씰룩이며 느릿느릿 도연을 따라 학교로 왔다. 따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지만, 1교시가 시작되기 직전 정문에 다다르고, 수업 중간쯤 운동장 가운데에, 수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부들부들 떨며 고민에 빠졌던 도연은 2교시가 시작하는 순간, 복도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그대로 일어나 뒷문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정신없이 습기로 가득 찬 복도를 달려 1층으로 내려갔지만 중간에 마주오던 교사에게 잡혔다. 그는 도연이 유명한 말썽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대로 멱살을 잡고 교실로 끌고 올라갔다. 발버둥을 치고 고함을 지르다 결국 교사에게 주먹으로 한 대 맞아 복도를 굴렀다. 머리를 벽에 부딪쳐 잠시 아찔하던 사이 여자는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연은 빙의된 채 학교 유리창을 맨손으로 깨고 있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의 이름을 외치고, 그를 데려오라고 악을 쓰며 난동을 부린 것이다.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그 후유증은 남아 온몸이 무섭도록 아팠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완전히 또라이 취급을 받았고, 학교로 불려 와야 했던 큰어머니는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사건에서 좋았던 점을 하나 찾자면, 덕분에 학교의 유명한 날라리들이 도연만은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 새끼는 내버려 둬라. 골치 아파.

“친구는?”

전부터 궁금했던 친구의 존재를 묻자 도연은 약간 말을 골랐다.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어. 지나고 보면 그 시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착각이나 싸움이었는지 몰라. 다만 내가 면역이 안 되어 있던 거지.”

단경호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쉽게 꺼낼 수가 없다. 도연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넌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을 거라 했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해. 관련된 사람이 너무 많았는걸. 학교, 친척들까지. 내가 그 집을 나오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어. 내가, 사소한 복수심으로 그 애를 끌어들였어.”

“확인해줄까?”

영준이 말했다.

“전화 몇 통화면 가능할 거야. 요즘 세상에 못 찾을 사람이 없거든.”

“됐어.”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만약에 그 녀석만 예외였다면? 그런 가능성이 있는 한 싫어.”

도연은 내심 자신이 이토록 평범하게 단경호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지독한 죄책감 대신 만의 하나의 희망이 생겨서인지 모른다. 어쨌든 영준의 집으로 온 후 단 한 번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쩌면 그 덕인지 모른다.

“친했어?”

“친구가 아니었다니까.”

“하지만 넌 특별히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계속 따라오는 질문에 도연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혼자 착각에 빠져서 친구 놀이를 했을 뿐이야. 얄팍한 동경이…….”

문득 말을 멈춘 도연은 새삼스럽게 영준을 바라보았다. 운동부에 반듯해 보이는 외모, 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 자신이 처음에 영준에게서 단경호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도 이제 보니 알 것 같다.

“그리고 보니 너하고 닮았던 것 같아.”

“그래?”

영준은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 아마 난 운동하는 녀석들이랑 잘 얽히나봐. 너한테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떠벌렸으니, 이제 너한테 호모가 아니냐는 말을 들은 다음 뒤통수 한 대 맞으면 순서가 완벽하겠어.”

호모란 말에 영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

“그 다음에는 내가 널…… 왜?”

얼굴이 붉어진 영준은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아냐.”

살짝 찡그린 채 영준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갑자기 끊긴 대화에 도연은 잠시 멀뚱하니 앉아 있었다. 모처럼 기분이 풀려 뭐가 됐든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영준은 일어나서 휙 가버렸다.

상당히 심란한 꿈에 새벽 내내 머릿속이 혼란했다. 수없이 흩날리는 사진과 중학생 교복을 입은 도연,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영이 나오는 꿈이었다. 영준은 계속 잠든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나봐.”

눈을 뜨자마자 봉투 하나가 내밀어 졌다. 영준은 눈을 껌뻑이며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받아.”

도연이었다. 밤새 기록을 작성하느라 한숨도 안 잤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뭐, 뭐야?”

얼결에 받아들자 뭔가 두툼했다.

“내 생활비.”

잠이 번쩍 깬다.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보자 안에는 만 원짜리가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이걸 어쩌라고?”

“식비나 전기세, 뭐가 됐든. 잠깐이지만 얹혀살았던 만큼 생활비는 내야 할 것 같아서.”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세상에…….”

끙, 하고 신음을 한 영준은 봉투를 확 밀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전에 없이 거칠게 도연의 옆을 지나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 후에 세수를 끝내고 나온 영준은 밤새 덧붙여놓은 노트를 펴서 훑어보았다. 별다른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수없이 지우고, 쓰고, 또다시 지운 흔적이 있었다. 다 같은 내용이었다. 이건 거의 편집증이야. 도연이 지금 얼마나 기억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이런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영준은 도연이 다시 내민 봉투를 뺏어서는 이번에는 그의 배낭에 쑤셔 넣어 버렸다.

“옷 입어. 잠깐만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싫어하는 도연을 억지로 끌고 15분 정도 걸었다. 집에서 역으로 가는 중간쯤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한가했다. 영준은 햄버거 세트 두 개와 간단한 치킨 정도를 추가해 내려놓았다. 도연은 콜라를 앞에 두고 짜증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먹어.”

“이럴 시간 없어.”

“괜찮아.”

영준은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 크게 한입 물었다.

“그런 노트 없어도, 네가 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면 내가 찾아서 하나하나 알려줄 테니까. 사진도 나한테 있고, 내내 같이 다녔잖아. 기억해둬야 할 것 있으면 나한테 말해. 기억해둘 테니까.”

“…….”

영준은 도연의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 주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몇 번이든 다시 찾아줄게. 한 번 찾았는데 두 번은 못할까. 네가 하지 말래도 할 거야. 네가 어디서 뭘 하건 간에 찾아서 그때마다 도로 데려와줄게. 약속할 수 있어.”

“왜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그러지 못할 건 또 뭐야.”

답을 피하며 영준은 도연의 입에 햄버거를 거의 밀어 넣다시피 했다.

“그리고 생활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마. 주변 정리 하는 것 아닌 이상 그런 식으로 돈 주는 거 고마운 일 아니야. 너한테 돈 받을 생각 없어. 아니, 애초에 너 돈이 어디서 그렇게 생기는 거야? 유산도 다 빼앗겼고 특별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연은 음료수를 한 입 먹고는 큰 비밀도 아니라는 듯 쉽게 대답했다.

“경마를 했어.”

“뭐?”

어이없어 지른 소리가 꽤 컸는지 가게 내 사람들이 이쪽을 흘깃거렸다. 아차 하고 주변을 둘러 본 영준은 소리를 낮춰 다시 추궁했다.

“겨엉마?”

“그래, 경마. 그럼 내가 뭘 할 줄 알았는데? 편의점 알바라도 할 것 같았어? 너처럼 노가다를 뛰기도 힘들고 내가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너도 지금 상황에서 예전처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

특별히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직장을 구해도 유지가 어렵다. 더구나 학력도 문제였다. 도연이 할 수 있는 일 중 제대로 된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은 몇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하게 된 것이 경마였다.

“도박이잖아?”

“나한텐 아니야.”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우연히 지나게 된 경마장에서 도연은 묘하게도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몸에 붙여 다니는 혼령을 보았다. 그들은 주로 도박중독자들이었다. 생전에 자신의 인생을 탕진하고 타락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거울 속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들어보면 어떤 말이 이길지 알 수 있어. 보통 초반에는 따게 해주거든. 그래서 맛을 들이게 되면 서서히 혼란을 주는 거야. 점점 흔들리게, 세 번 지고 한 번 이기는 정도로 아슬아슬 만회를 시키는 거지.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꼭두각시처럼 자기 인생이 어디로 타락하는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폐인처럼 거기 쳐 박혀서 말만 보고 있는 껍데기가 완성돼.”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나는 그냥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초반 운 정도에 얹혀 갔어. 그러다 행색이 점점 초라해지면 그 사람이 곁에는 안 가면 되는 거야. 어차피 못 딸 테니까. 크게 따거나 잃은 일은 없지만 생활비가 부족한 적은 없어. 그렇게 보지 마. 어차피 좋은 일 하나 없는데, 그 정도 이득은 챙길 수 있잖아.”

가끔씩 보여주는 도연의 이런 면은 그가 정서적으로 어떤 환경에 처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기가 막히고 조금 감탄스러웠다면, 이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게 아…….”

다른 이야기를 하려던 도연은 문득 입을 뚝 다물었다. 마침 매장에 새로 들어온 커플이 이쪽 테이블로 오고 있었다. 팔짱을 낀 연인들의 어깨 위에 등이 굽은 중년의 여자가 업히듯 매달려 있었다.

‘내 아들은 안 돼! 내 아들은 안 돼!’

여자의 귀에 대고 크게 말하는 혼령은 안달하듯 몸을 비틀어댔다.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여자가 답답한 듯 중년의 혼령은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 또 편두통.”

“약 먹을래? 저 앞에 약국 있다.”

“됐어, 먹어봤자 듣지도 않아.”

“넌 나만 만나면 항상 머리 아프다고 하더라.”

“진짜야. 장난 아니란 말이야.”

토닥대는 대화가 옆 테이블에서 들려온다. 영준은 도연에게 눈짓을 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를 빠져나왔다.

“돌아가자.”

불쾌한 것을 봤다는 듯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잡는 도연에게 영준이 손짓했다.

“잠깐만, 한군데만 더.”

“어딜?”

“따라와 봐.”

영준은 씩 웃고는 앞장서 걸었다. 잠시 망설이던 도연은 별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열쇠도 그가 들고 있고, 혼자 돌아가 봐야 별수 없었다.

깡깡 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녹색 그물과 철조망 안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공을 향해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젊은 남자들 위주로 꽤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여기저기 야구선수들 사진이 걸려 처음 와봤음에도 한눈에도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영준이 가게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콜라를 나눠 마시던 이들 몇이 아는 체를 했다. 살짝 손만 들어준 영준은 도연에게 따라오라며 눈짓을 했다. 그는 제일 안쪽으로 가 기계에 돈을 넣고 돌아왔다.

“천원에 공 15개야. 공이 빠른 편이라 치기 쉽진 않은데, 대신 한방이 재밌어. 한 번 해봐. 배트도 알루미늄이라 별로 무겁지 않으니까.”

다짜고짜 타석에 세운 뒤 대강 치는 폼을 알려준다. 뒤에서 감싸듯 팔을 감은 뒤 자세를 잡아 준 영준은 몇 번 허공에 스윙을 대신 해주고는 내려왔다. 도연은 거의 떠밀리듯 나와 장갑을 꼈다. 기계에 불이 들어온 순간 공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헉!”

도연은 말 그대로 얼어붙어 몸을 잔뜩 움츠렸다. 눈이 동그랗게 된 그를 보고 영준이 웃었다.

“방망이를 꽉 쥐어야 해, 두 손으로. 아까 가르쳐준 대로 해봐. 헛스윙 무서워하지 말고.”

“이걸 내가 왜 하는 거야?”

도연은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영준은 탕탕하고 철망을 두드리고는 옆에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럼 네가 해!”

“난 이미 여기 끝냈어. 내가 나서면 쪽팔려서 어디들 하겠어? 장사 접는 거지.”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우우 하는 소리가 났다. 영준은 집에서 그랬듯 자신의 구역이라는 편안함에 무척 즐거워 보였다. 영준은 웃으면서 빨리 공 오는 것 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공이 날아오자 도연은 일단 어설프게나마 배트를 휘둘러보았다. 헛스윙. 또 헛스윙. 다시 헛스윙. 이쯤 되니 억지로 시작했어도 오기가 들었다.

영준이 옆에서 무어라 지도를 해주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 도연은 이를 악물고 공이 튀어나올 기계만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지!”

이번에는 공이 배트에 스치기는 했는데 땅볼로 떨어졌다. 옆에서 영준이 얄밉게도 파울이라거나 땅볼을 외쳐대는 통에 진땀이 솟구친다. 결국 15개의 볼 중 마지막 하나에 와서야 도연은 배트에 제대로 공을 맞출 수 있었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반대편 철망으로 날아갔다. 친 본인이 깜짝 놀랄 정도로 깨끗한 안타였다. 안타깝다는 눈으로 도연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와! 하며 웃음 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영준은 신이 나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시늉을 하고 다가왔다. 손바닥이 얼얼해 하이파이브고 뭐고, 한마디 하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절로 손이 위로 올라간다.

“한 번 더 할래? 이제야 요령이 붙나 본데. 이게 결국 타이밍 문제라, 해볼수록 칠만해.”

대답도 하기 전에 당장 가서 또 천원을 넣고 온다.

“이번에는 더 잘 해보자고. 지금으로는 너 방출 1순위야. 그 타율로 밥 벌어 먹겠어?”

“허우대는 멀쩡한데.”

“배트 짧게 잡고, 무릎 굽히고!”

“공 온다 생각하고 치면 안 되고, 그냥 미리 돌려!”

사방에서 야유와 조언이 쏟아졌다. 어느새 구경거리처럼 되어 버렸지만 하도 공이 빨리 튀어나와 다른데 정신을 쏟을 수가 없다. 맙소사, 뭐 이런 게 다 있는지. 도연은 땀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배트를 꽉 움켜잡은 뒤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배트를 휘둘러댔다.

“따악!”

다시 한 번 연습장 위로 오오오오 하는 소리가 길게 터졌다.

“재밌었지?”

싸구려 슬러시 한 잔을 뽑아주며 영준이 물었다. 컵을 받는데 손이 덜덜 떨려 보라색 슬러시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린다. 목이 말라 겨우 입에 대고 마시는데 영준이 살짝 밑을 받쳐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맙게 마셨다. 땀을 흘려 몸이 찝찝할 만도 한데 묘하게 개운하다.

영준은 자기 몫의 노란 슬러시를 한 잔 따른 다음 할머니에게 이천 원을 건네주었다. 이가 거의 없는 할머니는 높은 의자에 앉아 돈을 받아 얼른 앞치마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어디서 쓰다 버린 스톨 같은 다리가 긴 의자는 할머니와 마치 한 몸처럼 어울렸다.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배팅 연습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음료수를 팔아왔는지 영준과도 허물없이 인사를 나눈다.

돌아가는 길은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양쪽으로 길게 가로수가 늘어진 길은 뒷산과 이어져 산책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운동기구가 놓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보기 좋은 벤치 취급이었다. 운이 좋게도 평소에는 가끔 어슬렁대던 객귀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도깨비 같은 짓이야?”

도연은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꽉 잡으며 말했다. 바람이 불어 땀이 난 몸이 금방 식어 더위는 오래 남지 않았다. 내내 무겁던 체중이 내려간 것 같은 이상한 상쾌함에 마치 개운하게 씻고 나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햄버거를 먹고, 배팅장에 가서 연습을 하다가, 천 원짜리 슬러시 말이지?”

영준은 음, 하고 수줍게 웃었다.

“사실은, 이게 내 평범하게 즐거운 하루야. 애써 노력해서 지켜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좋은 것들 중 하나 말이야.”

강릉에서의 대화를 떠올린 도연은 앞서 가는 영준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런데?”

“그냥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해서.”

영준은 그걸 꼭 입으로 말해야 하나 멋쩍어했다.

“네가 쓴 노트를 봤는데, 물론 중요한 건 다 넣었겠지만 어떻게 된 건지 즐거웠던 기억이나 재밌던 일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이더라. 나하고 있던 잊지 말아야 할 기억 중 하루쯤은 이런 날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그냥 노는 거. 계속 힘든 일만 있었잖아. 사실 너무 내 취향이라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아는 게 이런 것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별로 유흥 같은걸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로 세련된 것도…… 어?”

따라오는 줄 알았던 도연의 기척이 없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몇 발자국쯤 뒤에 서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영준을 보고 있다.

“왜 그래?”

조심스레 묻자 도연은 무어라 말하려다 달싹이는 입을 도로 닫았다. 슬픈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묘한 표정으로 숨을 고른다. 손에 든 슬러시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손등을 타고 흘렀다. 싸구려 식용색소로 인해 도연의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조금 색이 변해 있었다.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고……?”

도연은 멍하니 영준의 말을 반복했다.

“넌……어떻게 매번.”

설마 화가 난 건가. 영준은 당황해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도연은 한쪽 손을 뻗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아.”

“왜, 내가 뭐 말실수라도…….”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도연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세게 저었다.

“넌 어떻게…… 대신 사과를 하지를 않나…….”

무어라 혼잣말을 하는데 영준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다.

“재미없었어?”

풀 죽은 목소리에 도연이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하하 웃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터진 웃음이었다. 그런데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도연이 눈가를 닦아내고는 빨개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재밌었어.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어. 그래, 오늘 일은 잊혀지지 않으면 좋겠어.”

도연은 최대한 진지하게 말한 뒤, 진심이라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눈이 휘어지고, 고른 이가 드러나는 웃음에 눈 속에서 부드러운 빛이 반짝였다. 눈물 탓일까, 아니면 이렇게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처음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일까. 웃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남자에게 칭찬의 말이 아닐지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어쩐지 자꾸 웃게 해주고 싶어 남자를 광대로 만드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영준은 멍하니 도연의 미소를 보며 이거 정말 큰일 났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야?”

도연은 영준이 건네준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검고 둥근 모양에 손가락 반개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끝에는 원통형 유리가 달려있다. 뭔가 굉장히 작고 귀엽게 생긴 장난감 같았다.

“거기 버튼을 눌러봐.”

“?”

작은 스위치를 누르자 작은 크기에는 깜짝 놀랄 정도의 폭발적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손전등? 이렇게 작은 게?”

“아까 철물점에서 봤어.”

영준은 또 다른 한 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비상용으로 열쇠고리나 아가씨들 핸드백용이라는데, 평소에 가지고 다니기 좋겠기에.”

꽤 맘에 드는지 도연은 그걸 이렇게 저렇게 켜보고 돌려보고 하더니 금세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철물점에는 왜?”

“누가 대문에 페인트로 낙서를 해놨어. 소영이 오기 전에 지우든지, 새로 칠하든지 해야지 지저분해서 안 되겠더라고.”

도연은 난 못 봤는데, 하고 갸우뚱했다.

“꼴 보기 싫어서 전단지로 가려뒀거든.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어서.”

귀찮아서 미루느라 만든 한심한 대책이지만. 하고 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온다고 했지.”

도연은 가지고 놀던 손전등을 끄며 물었다.

“오늘 저녁일 거야. 출발하면서 문자 준다고 했는데 아마 까먹었을 수도 있어. 워낙에 덤벙대니까.”

동생 흉을 은근히 보는 것은 영락없이 오빠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라 신경이 쓰이는지 온 집 안을 청소하고, 마당 잡초 뽑기에 이어 이젠 대문 청소까지 하겠다고 나선다. 돕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가만히 있으란 말만 들었다.

“일하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잖아. 소영이 오면 셋이서 같이 밥이나 먹자.”

영준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페인트 통을 들 즈음에는 굳은 얼굴로 자책의 혼잣말을 끊임없이 뱉어냈다.

“어쩌려고 이래.”

“돌았구만.”

“어느 정도로 해야지.”

미니 손전등을 이리저리 보는 도연의 머리를 하마터면 만질뻔 했다. 손을 직전까지 뻗을 뻔한 것이다. 돌았어, 너. 정말 제대로.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후려갈기고서야 영준은 대문을 나섰다. 동생이 오기 전에 앞으로 거처 문제나 계획을 세워놓겠다는 생각은 어디가고, 이제는 어떻게 하면 도연을 이 집에서 함께 살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처음부터 일반인이자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영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하던 문제였는데. 그걸 미루고 미루다 결국 당일에 되어서까지 정하지 못하다니.

도연 본인이야 언제든지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듯해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다. 그러니까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느냔 말이지. 영준은 대문을 닫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전단지를 떼려 할 때였다.

“이게 뭐……!”

대문을 본 영준은 순간 헉, 하고 얼어붙었다.

깊은 청색의 대문에는 며칠 전 처음 그려진 것과 비슷한 모양의 낙서가 수백 개는 되게 늘어나 있었다. 바로 조금 전 나갔다 왔는데, 그 짧은 새에 생긴 것이다. 모두 하얀 색으로, 가지각색의 크기였다. 어찌나 빼곡하게 썼는지 원래의 철제문의 색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심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범인일지 모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영준은 기가 막혀 대문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집에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혹시 소영의 병이 소문이라도 나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뭐지. 영준은 손으로 흰 낙서 표면을 만져 보았다. 매끄럽다. 벌써 다 말라있군. 바닥에는 페인트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다.

이래서야 일이 커진다. 거기다 애써 다 새로 칠한다고 해도 또 이러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영준이 망연자실 대문을 보고 있는데, 마침 바로 옆집인 복덕방 최 씨라는 할아버지가 지나갔다. 영준은 급히 그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저희 집에 낙서하는 사람 못 보셨나요? 누가 자꾸 대문에 뭘 이렇게 써 대서…….”

“그래? 못 봤는데. 우리 복덕방이 요기라 한눈에 어지간한 집은 다 보이는데.”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하나였는데 눈 잠깐 뗀 사이에 이렇게 늘어나서…… 혹시 근처에서 누구 페인트 가지고 다니는 사람 못 보셨나요?”

“페인트?”

최씨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영준의 발치에 있는 페인트를 쳐다봤다.

“아뇨, 처음에 낙서가 하나만 생겨서 그걸 지우려고 사 왔는데, 나와서 보니 이 꼴이잖아요.”

영준은 대문을 가리키며 억울해했다. 그러나 최 씨는 돋보기를 한 번 치켜 올리더니 되물었다.

“무슨 낙서?”

“네?”

“어디에 낙서가 있느냐고.”

“…….”

영준은 천천히 하얀 선으로 온통 도배가 되다시피 대문을 가리켰다. 가장 큰 것이 있는 곳을 정확히 지목하며.

“안 보이는데. 그렇게 작은 낙서면 그냥 놔둬도 되겠는데 뭘.”

아무리 봐도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영준은 순간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어졌다.

최 씨는 거 별일 다 본다는 듯 자신의 복덕방으로 되돌아갔다. 영준은 멍하니 대문을 보며 한참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골목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영준은 가리지 않고 일단 그를 잡아 자신의 대문을 보게 했다. 마찬가지로 그도 어떤 낙서나 흰 페인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럴 수가. 그럼 뭐지 이건. 문득 자세히 보다 보니 고개를 기울여 보면 그것이 마치 어떤 한자나 글씨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전단지를 꺼낸 영준은 마당의 글자를 보이는 데로 최대한 비슷하게 옮겨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복덕방 앞 비질을 하는 최 씨에게 달려갔다.

“혹시 이게 무슨 글인지 아시나요?”

“보자.”

그는 돋보기를 추켜세우며

“무슨 한자 같은 데요”

“이게 그러니까, 획이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아마 차처 (此處) 란 글자 같은데, 이건 보통 말할 때 쓰는 글이 아니거든. 이건 글로 쓸 때나 사용하는 한자야.”

“무슨 뜻인데요?”

“이곳.”

“……네?”

“이곳, 이란 뜻이라고. 이곳이다, 할 때의 이곳. 여기.”

“이곳……?”

영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대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글씨. 누군가에게 바로 여기, 여기다, 라고 알리려는 듯 흰 한자 수백 개가 대문 가득 쓰여 있었다.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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