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22/24)

9

영준은 거실로 들어가는 동시에 도연에게 한자가 적힌 쪽지를 전해준 다음,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옷장에서 제일 큰 배낭을 꺼내 들었다. 급한 데로 갈아입을 옷가지와 양말을 챙겨 넣고, 책상 제일 안쪽에 넣어두었던 비상금을 깊숙이 넣었다. 우당탕거리며 되는 데로 물건을 쓸어 넣고 마루로 나오자 도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영준을 보고 있었다. 망할, 그 역시 그 한자 뜻을 모르는 것이다.

“그 한자, ‘여기’라는 뜻의 한자가 지금 대문에 빼곡하게 쓰여 있어. 나만, 아마 우리만 보이는 글자일 거야. 일반 사람들은 못 보는! 백 개도 넘게 갑자기 나타났어. 기분이 이상해. 일어나, 지금 당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무섭도록 사태 파악이 빠른 만큼 영준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한 눈치였다. 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붙잡고 있던 노트를 배낭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꺼내놓았던 돈과 몇 가지 물건들도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 문득 영준이 자신의 배낭을 들고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딱, 하고 동작이 정지했다.

“너 뭐하는 거야?”

바쁘게 다니는 중 갑자기 도연이 다가와 앞을 막았다.

“보면 몰라? 짐 챙기잖아.”

“네가 왜 짐을 챙겨.”

도연은 영준의 손에서 배낭을 뺏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배낭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마루에 거꾸로 쏟아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뭐라고 하지도 못한 채 영준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연은 굳게 다짐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 노리고 온 거야. 가도 나 혼자 가. 내가 떠나고 나면 곧 사라질 놈들이니까, 넌 여기 있어.”

영준은 가타부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배낭 안에 물건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난 같이 갈 거야. 한 번만 더 네 일이니까 상관 말라고만 해봐.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빨리 가져갈게 있으면 챙겨. 한동안 못 올지도 모르니까.”

“소영이는 어쩌려고!”

뒤돌아서던 영준은 도연의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맞다. 동생이 오늘 귀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둘러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길게 음을 끄는 클래식 음률이 오래된 집을 통과한다. 둘의 눈이 신호처럼 마주쳤다.

도연은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것 같았다. 영준은 손짓으로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인터폰을 받았다. 살짝 든 인터폰에는 머리가 긴 여자 하나가 비췄다. 공교롭게도 카메라 가까이에 서 있는 그녀는 소영이었다.

“소영이니?”

기가 막혀 묻자 그녀는 피곤하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오빠. 문 열어줘요.”

맙소사, 하필 이 타이밍에. 전화를 하고 오라니까 이제 어쩌나. 뭐라고 설명하지. 일단 문을 열어주려 인터폰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 도연이 영준의 손을 막은 뒤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킨 그대로 그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아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인터폰 속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 소영이가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은 뒤 졸음을 못 참고 크게 하품을 한다. 그리고는 킁,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이내 소영은 인터폰과 대문 근처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끔찍하게 낯선 행동을 하는 광경이 가지는 공포에 영준은 인터폰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마치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소영이 모니터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영준은 눈을 부릅뜬 채 소영의 이마 부분을 보았다. 거기에는 마치 이상한 띠처럼 이루어진 선이 있었다. 조금 두툼한 선 위로 부자연스러운 굴곡이 나 있다.

마치 누군가 소영의 얼굴 모습을 한 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은 꼴이었다. 그녀는 연신 인터폰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오빠?’ ‘문 열어줘’ ‘오빠?’ ‘문 열어줘’를 반복해 말하고 있었다.

저건 절대 소영이 아니야. 영준은 조용히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조금 후 다시 벨이 울렸다.

문득 누군가 뒤에서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도연이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단번에 이해한 영준은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시선을 도연에게 고정한 채 영준은 소영이 전화를 받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제발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를. 도착하지 않았기를. 무사히 전화를 받아야 한다. 일단 집으로 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해야 한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됐다.

-오빠?

“그래 너 어디…….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소영이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 죽겠는데 아무 데도 전화를 안 받아서 내가 정말…….

“왜 무서워, 무슨 일인데?

-서울 가는 기차를 탔는데, 좀 이상해.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모르겠어…….

“어디가 이상한데, 자세히 설명해 봐.”

긴장한 목소리에 도연이 다가왔다.

-기차가 지금 터널을 벌써 1시간째 지나고 있어 오빠.

“1시간?”

영준은 놀라 도연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기차가 터널만 1시간째라니 말이 안 됐다.

-거기다 주변 사람들 모두 자고 있어. 전부 다, 한 명도 남김없이! 나만 빼고 다 잔단 말이야. 한 시간 째 새카만 터널만 달리는데 승무원도 오지 않고 너무 이상해.

영준은 등 뒤로 식은땀이 좍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도연을 바라보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서성이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해, 생각해 내자. 얼른…….”

머리를 손바닥으로 치던 도연이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듯 전화를 대신 받았다.

“그래요, 나 김도연이에요. 급하니까 인사는 됐고, 묻기부터 할게요. 지금 한 시간 째 터널이라고 하는데 안내 방송은 나왔어요? 다음 역? ……소영 씨 신경주역에서 탔죠? 거기에 그런 이름의 역은 없어요. 소영 씨, 생각해봐요. 누가 역 이름을 육시 (戮屍:죽은 사람의 목을 베던 일 또는 형벌)로 짓겠어요. 다른 역이요? 시실? (屍室:시체가 있는 방) 한자가, 맞아요. 아뇨, 내리지 말아요.”

도연은 전화를 잠시 내려 영준을 바라보았다. 기괴한 단어의 나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여보세요, 네. 맞아요. 소영 씨 지금 이어폰 있어요? 전화 끊은 다음 귀에 꽂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잠을 자도록 해요. 네, 꿈이에요. 당연히 꿈이죠. 이런 게 그럼 꿈이 아닐 리가 없잖아요. 걱정 말아요. 한숨 자고 나면 서울역일 테니까. 자기 전에 내릴 역하고 본인 이름, 학교 이름, 학번 외우는 거 잊지 말구요. 양 세는 것처럼, 네. 잠들기 직전까지.”

도연은 다정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당부한 뒤 전화를 그대로 끊었다. 놀란 영준이 끊긴 전화를 가져가려 하자 도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화하지 마. 이제부터 소영이는 자기 이름하고 학교, 학번처럼 굉장히 현실적인 것만 생각하면서 버텨야 해. 저런 거짓말에 자꾸 속으면 안 돼. 지금 우리하고 또 전화하게 되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서 결국에는 엉망이 되어버려.

지금 안내 방송에서 계속 다음 역에서 내릴 사람은 내리라고 하고 있다는데, 역 이름이 말도 안 되는 것들뿐이야. 과두역(裹肚:염할 때 시체의 배를 싸는 수의) 이니 시왕청 (十王廳:저승에서 시왕이 거처 한다는 곳) 이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도연은 아직 부어 있는 눈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다 말린 모양이야. 절대 어떤 역에서든 내리면 안 되는데, 똑똑한 아가씨니까 괜찮을 거야. 잘만 버티면, 곧 집에 올 수 있을 거야.”

영준은 도연의 양팔을 잡은 채 얼굴을 들여다봤다. 괜찮을 거라 말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않다.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 집에서 나가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인터폰을 들지도 않았음에도 멋대로 화면이 커지더니 밖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소영과 기타 알 수 없는 사람들 몇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 얼굴만을 화면 가까이 대고 있었다. 어설픈 위장은 비율과 육체의 크기가 맞지 않는 기묘한 광경을 불러왔다. 머리가 또는 몸의 일부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작다. 모두 무표정하게 화면에 얼굴을 바짝 붙어서 무언가 조그맣게 쉬지 않고 속삭이고 있다. 영준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도연에게 향하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은 불시에 표식을 달고 몰려들었다. 도연이 기억을 되찾고 가장 최상의 희망을 가지는 시기까지 기다려, 말 그대로 수확에 나선 것이다.

도연은 이미 수많은 인파 중 낯익은 이를 찾아냈는지 작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만 봐.”

“아, 알고 있어.”

가만히 기다리면, 이곳에서 모르는 척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지 않을까, 잠깐 헛된 기대를 해보지만 벨소리는 계속 울리고, 점점 기세가 흉악해졌다.

도연은 어느새 배낭을 메고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 중인 듯 거실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상태는 첫날 빌라에서와 거의 흡사한 패닉 상태였다.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생각. 아무리 해도 어린 시절부터의 공포에는 속수무책인 듯 도연은 불안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다시 뭔가에 불려가는 듯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영준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가리고 품으로 끌어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귀를 막았다. 그의 몸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잘 들어 김도연, 저 사람들은 네 부모가 아니야. 기억나지? 네 진짜 부모님의 얼굴이 어떤지.”

“……내 부모가 아니야.”

“너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어. 다 거짓말이야. 속지 마. 저기 소영이 있는 것 보여? 소영이는 지금 경주에서 집으로 오고있는 중이야. 저건 다 거짓말이야. 널 보여주려는 거야. 날 보여주려는 거야. 속지 마.”

“아, 알았어.”

도연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안고 있자 열기가 전해진 듯 조금씩 체온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연은 잠시 눈을 감고 따뜻한 어깨에 기댔다. 그렇게 잠시 있던 도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 너 말야.”

도연이 영준의 팔을 꽉 붙들었다.

“만의 하나의 이야기야.”

“?”

“너, 만약에 먼저 죽게 되면…… 날 찾아와. 넌 사람이 좋으니까 죽게 되면 아마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거야. 가끔 그런 사람을 볼 때가 있어. 숨을 거두자마자 빛을 따라가는 이들. 하지만 네가 아직 이 세상에 머물고 싶다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붙어야 한다면, 나한테 와. 너라면 괜찮으니까.”

“…….”

영준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중요한 뜻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연에게 그러겠다고도, 그러지 못하겠다고도 할 수 없었다. 울렁이는 가슴에 뭔가 이야기하려던 순간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소영이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엄청난 벨소리가 소음에 가까웠다. 영준은 도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귀를 막은 채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소영아!”

-오빠, 나 이제 곧 서울역이야. 생각보다 차가 빨리 왔어. 내가 오다가 얼마나 황당한 꿈을 꿨는지 알아? 아마 오빠는 못 믿을걸. 근데 핸드폰 약이 간당간당 다 떨어져가서 할 말만 하고 끊을 것 같아! 아, 지금 끊어질 것 같아. 선물 사 왔으니 바로 집에-.

전화는 돌연 뚝 하고 끊어졌다.

“잠깐, 잠깐!”

순식간에 끊긴 전화에 영준은 놀라 얼른 재다이얼을 걸었다. 그러나 약이 없다더니 정말 전화는 연결이 되던 중 꺼져버렸다.

“집으로 오겠대.”

영준은 하얗게 질린 채 도연을 바라보았다. 둘은 동시에 인터폰 속 광경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더 이상 소영도 누구도 아니게 변해버린 외양의 것들이 모니터 가득 얼굴을 쳐 박고 있었다. 더 이상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이 뭉개진 얼굴로, 무언가 가늘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도연이 갑자기 자기 뺨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시뻘겋게 자국이 남는다.

“……나가야 해. 역으로 가자. 네 동생이 오기 전에 역에 도착해서 다른 데로 보내야겠어.”

“어디로?”

“어디든!”

나가고 싶어도 정문이 막혀 있다. 혹시 모르니 다른 기회도 있어야 했다. 영준은 급히 전화를 꺼내 먼저 진오 형에게 전화를 해봤다. 그러나 근무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다음은 중혁이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기도하는데 달칵, 하고 전화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흐릿하게 꼬인 말투는 이 시간까지 잠기운이 가득했다.

“중혁아! 나 영준이야. 너 지금 집이지?”

-어? 영준이……. 어. 집이야.

그의 옆에서 무어라 여자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영준은 다 무시하고 무조건 본론만 이야기했다.

“너 지금 차 몰고 서울역으로 가. 소영이 곧 역에 도착한대. 빨리 가서 애 픽업해서 집으로 오지 말고 다른 데로 가. 얼마나 걸려?”

드디어 잠에서 깬 듯 그는 비몽사몽 하는 목소리를 걷고 뭐? 어디? 지금? 하고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영준은 일단 챙긴 가방을 들고 도연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래, 부탁해!”

전화를 끊고 둘은 시간에 맞춰 배낭을 맨 채 조심스레 마당으로 나섰다. 정작 마당으로 나오자 밖은 고요했다. 그러나 철문 너머 좁은 문틈으로, 수많은 눈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아래로, 위로, 틈만 있으면 어디든 눈이 위치했다. 수십은 되었다. 침묵과 시선에 휩싸인 채 둘은 그대로 마당 뒤쪽으로 가 담을 탔다.

택시를 잡는 것만도 한참 걸렸다. 그들은 도로를 계속 쉬지 않고 뛰며 손을 흔들었고, 그때마다 차는 이상하게도 설 것처럼 서행을 하다가 그대로 가버렸다. 혹시 뒤에 뭔가 따르는 것은 아닌가 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밤의 숲이 아니라 대낮의 서울이었다. 아스팔트와 쇠, 콘크리트의 세계는 너무나 단단해서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영준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이해가 안 되었다. 조금 전 소영의 전화처럼 ‘이런 게 현실일 리 없으니 꿈이다.’ 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서 뛰고 있는 남자는 엄연히 현실이었고, 자신 또한 그랬다.

몇 대의 승용차가 짜증스러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빈 차 표시를 한 택시가 또 멈추지 않고 달려가 버린다. 영준은 미친 듯이 뛰는 틈틈 핸드폰을 확인했다. 집에서 나온 지 벌써 30분 때. 중혁은 도착했을까?

“여기, 이리로!”

그때 기어코 도로로 뛰어들다시피 해 택시를 잡은 도연이 영준을 불렀다. 택시를 잡았다기 보다는 강제로 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기사는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두 남자에 식겁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차 문이 닫히자 어리둥절해 말했다.

“저 분들은 합승 아니신가요?”

“출발해요!

“출발하세요!”

둘은 뒤도, 저분들도 확인하지 않고 소리부터 질렀다. 기사는 놀라 아, 네네! 하고는 도로를 올라탔다. 둘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역으로 가달라는 짧은 요구 이후로 택시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기사는 이상한 손님들로 인해, 손님들은…….

영준은 귀를 잠시 막았다 떼어 보았다. 그리고 급히 주변을, 자신의 어깨와 옆에 앉아 반쯤 쓰러져 헐떡이는 도연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도대체 아까부터 누가……

잘 생각해 봐. 이 모든 게 그가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이라면, 그를 넘겨주면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누군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그만 넘겨주면 이 모든 사단이 다 가라앉고 예전의 평화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동생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김도연.”

“왜.”

“조금 전부터 누가 자꾸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해.”

도연이 핼쑥한 얼굴을 돌려 영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 뒤로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마구 지나갔다.

“내가 미친 것 같겠지만,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날 버리라고?”

“……그래.”

“나도 그래.”

도연이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웃음의 끝은 창백하고 핏기없는 얼굴에 유일하게 충혈된 눈이었다.

“대문에서부터 내가 쉬지 않고 들은 게 바로 그거야. 내가 나오든, 널 내보내든 하라고.”

“…….”

“아무래도 이번에 그쪽에서 원하는 게 너인 모양이야.”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택시 안에서 크게 들렸다.

기사는 연신 백미러로 뒷좌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시팔 요즘 젊은 것들은 왜 이렇게 또라이들이 많지. 느닷없이 도로에서 단체로 마라톤을 하지를 않나, 멀쩡히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서는 무슨 연극연습도 아니고 사이코드라마라도 찍는 건가.

“나?”

영준은 자신이 타겟이 되었다는 말에 놀랐다기보다는 의외였다. 그들이 처음 생명을 인질로 삼아 도연을 협박한 상대는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자신이 된단 말인가.

“왜 나지?”

“너밖에 없잖아.”

“뭐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담담한 말은 고백 같기도 하고, 그냥 사실의 나열 같기도 했다. 택시 안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것을 입 밖에 낸 순간 영준은 그게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생이 소중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도연이 소중했다. 그것은 누가 누구보다 더 위다 아래다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성격과 방향이 다른 종류의 소중함이었다. 영준은 갑자기 뭔가를 떨쳐버린 사람처럼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그럼 결론은 하나네. 우린 누구도 안 넘기면 되는 거야. 넌 내 은인이고,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야.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을 겪을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야. 난 네가 필요해. 하지만 필요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널 좋아하고 그래서 네가 신경 쓰이고, 널 걱정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엔 너도 내가 필요하다고 봐.”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리 철인이라고 해도 혼자라는 건 겁나는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왜 날 신경 쓰고 걱정하는데?”

“널 좋아한다고 했잖아. 미친놈 보듯이 하지 마. 같은 뜻은 아니더라도 네가 먼저 한 말이니까. 내 좋아와 네 좋아가 어떻게 다른지는 우리 이번 일이 끝나면 생각해보자.”

영준은 양손으로 얼굴을 세게 비벼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것이 잠깐사이에 참 별거 아니다 싶다. 이러면 어떻게 저러면 어떤가. 중요한 건 내가 어떤지에 대한 본질 문제였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항상 마지막에 남는 법이었다.

의욕을 돋우려는 듯 양 뺨을 손으로 세게 쳤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이 일이 끝나면? 도연은 영준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말로 이 일이 끝날 거라고, 그럼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 믿고 있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한 번 그래 봤으니까. 문득 도연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그래, 우린 이미 한 번 끝내 본 적이 있다. 소영의 일을 해결했다. 하지만 사실상 영준이 다 하지 않았나. 나는? 그래, 뱀독이 올랐던 기범은 이제 가정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했지. 괜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영준은 중혁에게 전화를 걸며 언제든지 차가 멈추면 뛰어내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연은 깊이 호흡을 했다. 그리고 몰래 가방 뒷부분에 달아놓은 나이프의 끝을 살그머니 매만졌다. 여차했던 순간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살린 물건이다.

택시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재빨리 차에서 내리고 나자 기사는 문을 닫자마자 에이 시팔, 하고 욕을 내뱉었다.

“어디서 호모새끼들이 남의 차에 타가지고 씨발…….”

그는 아주 몸서리를 쳐가며 욕을 했다. 어디서 저런 잡놈들이 나와가지고 하필 내 차에 탔을까. 이걸 어느 라디오 사연으로 보내가지고 상품을 좀 타볼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순찰차 하나가 따라붙었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를 한쪽으로 세우라는 표시를 한다.

천천히 서행해 인도 쪽을 차를 세우자 경찰 하나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가온다. 그럴 만한 일이 없다 생각하는 기사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도리어 배짱을 튕겨볼 결심을 했다. 그러나 운전석 가까이 다가온 경찰의 얼굴이 바보 같이 얼빵해졌다. 그는 계속 어? 어? 하며 택시 안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모자를 벗어 머리를 마구 긁었다.

“거 미안합니다. 아까 도로에서 볼 땐 적재오버로 너무 많은 사람이 탄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잘못 봤나보네요.”

“아니 거 순경님 무슨 적재오법니까. 손님 한명도 없는데에.”

“그러게요. 거 이상하네. 아까는 안에 사람이 너무 꽉 차서 무슨 기네스기록이라도 세우려는 괴짜들인가 했는데.”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며 텅 빈 창을 휘이 둘러보았다.

다행히 중혁은 소영이 개찰구를 빠져나가기 직전에 잡았다. 그는 영준이가 너 잡아놓으라 그랬다며 믿지 않는 소영을 겨우겨우 설득하느라 용을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안 그래도 별 신뢰가 없는 중혁의 꼴이 방금 술독에서 기어 나온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야 너 놓치면 내가 영준이한테 죽어어.”

죽어도 오빠랑은 안 간다며 야무지게 버티던 소영은 낯이 하얗게 변해서 달려오는 오빠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영준은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소영의 팔을 잡고는 제 빨리 위로 훑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무슨 일이야 오빠?”

“조금 탔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머!”

소영은 뒤에 선 도연을 발견하고는 한눈에 알아본 듯 반가워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도연이 병상에서만 보았던 소영의 건강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긴 여행으로 푹 쉬고 즐긴 탓인지 살도 오르고 조금 타 많이 건강해 보였다. 활짝 웃는 모습이 제 오빠를 많이 닮았다. 역시 핏줄이라 남매는 다르구나. 도연은 묘한 감탄을 했다.

“근데 뭐야, 나 마중 온 거야. 셋이서?”

“그래. 마중이다. 그런데 잘하면 배웅도 되겠어.”

“방금 온 그게 사람한테 무슨 소리야.”

“그게…….”

영준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도연은 역내를 조심히 살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당장은 집에 못 가.”

“왜?”

“그게 그렇게 됐어.”

“뭐 무슨 일인데, 불이라도 났어?”

“…….”

“오빠?”

농담으로 한 말에 영준이 대답이 없자 소영은 식겁을 한 듯 놀라 대답을 추궁했다. 차라리 불이 났다고 할까, 고민하던 때였다.

“도둑이 들었어요.”

내 가만히 있던 도연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여러 명이 들어와서 구둣발로 집 여기저기를 다 헤집어 놨어요. 짐도 많이 만지고, 뒤져놔서 수습하려면 며칠 걸릴 거예요. 특히 소영 씨는 여자니까, 방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소영은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한 듯 입을 막고 헉, 하는 숨소리만 냈다.

“경찰이 와서 증거도 봐야 하고, 수습도 해야 하니까 그동안은 다른데 가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봐서 좋을 것도 없구요.”

“아, 네 네. 어머 근데 손님으로 와계신 동안 일이 생긴 거라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간결하게 답한 도연은 잠깐 보자고 손짓을 했다.

“왜?”

구석으로 간 둘은 잠시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원래는 도로 기차에 태워서 보내려고 했는데, 이젠 태울 용기가 안 난다. 아까 같은 일 생길까 봐. 본인은 기억 못 하는 것 같은데. 일단 친구네 가 있으라고 할 생각이야.”

“같이 가 있어.”

“됐어. 다 큰 성인이야.”

“난 이대로 기차 아무거나 하나 잡아서 지방으로 갈 거야. 예전처럼 계속 따라오지 못할 거리를 벌릴 때까지 이동하면서 다닐 거야. 무계획적이고, 의미 없는 생활이야. 네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영준은 도연의 팔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래서, 이대로 여기서 안녕하자 이거야?”

“그게 최선…….”

“웃기지 마.”

영준은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짙은 눈썹이 일자로 모여 매서웠다.

“넌 방금 소중하다고 말하고 다음 순간 그걸 내려놓는구나. 하지만 난 아냐. 난 소중한 게 있으면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뭘 감당할 수 있고 없는지는 내가 정해. 같이 간다고 이미 정했으니까 네가 그게 ‘싫다’ 가 아닌 이상 더는 말하지 마.”

“……알았어.”

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준의 몸에서 살짝 긴장이 빠져나갔다.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내심 싫다는 말이 나올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뭐 그랬어도 어떻게든 해봤겠지만.

소영은 결국 다른 친구의 집에 며칠 가 있기로 했다. 중혁이 차로 데려다주기로 해 영준은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신신당부를 한참이나 전했다.

소영이 떠난 뒤 둘은 곧바로 차표를 하나씩 샀다. 일단은 제일 최근의 표가 남은 광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다시 또 어디를 가 헤매다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미끼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냥처럼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최종적으로 돌아올 장소를 흐리는 식이었다. 도연은 그렇게 오랫동안 다녔다고 했다.

“네 방에서 무수히 많은 차표를 봤어.”

“아무 곳에서나 내리고, 아무 곳에서나 탔지.”

“정 가던 장소는 없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도연은 픽 웃기만 했다.

그들의 표는 입석이었다. 어차피 오래 앉아있지도 못할 거라며 도연이 구매한 것이다. 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있는 동안 도연은 자신의 옆에 영준이 따라온 것이 싫은지 좋은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배회에 누군가가 동행한 적은 없었다. 그래, 어색하기는 하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곧 차가 들어온다는 전광판 표시가 떴다. 반대편 방향이었다.

나란히 앉은 발치로 소주병이 느리게 굴러왔다. 내버려두었더니 기어코 발에 와서 닿는다. 신발 끝에 걸린 술병 입구에서 맑은 액체가 천천히 흘러 검게 고였다. 젖지 않도록 발을 들어 치우자 병이 살짝 흔들리다 멈춘다.

붉게 충혈된 눈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옆 벤치에 앉은 추레한 차림의 노숙자였다. 평소라면 성가신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 몸을 웅크린 채 선로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옆에 다른 일행이 있다는 것이, 그것도 누군가 육체적 시비를 걸기 어려운 덩치라는 것이 참 편했다.

기차가 곧 들어온다는 방송이 역내에 울려 퍼졌다. 반대편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바짝 붙인 젊은 남녀, 혼자 오롯이 선 사람들과 가족단위의 여행객들 사이로 초췌한 양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선다.

반대편 선로에서 기차가 진입하며 바람과 소음이 일었다. 아직 속도를 줄이지 않은 기차의 머리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기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기차는 미처 멈출 새도 없이 투신자를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퍽 하는 뭉툭한 소리, 충격에 산산조각난 사지가 선로 이곳저곳에 떨어졌다.

“…….”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붉은 피가 선로에 흐르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고 타는 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영준의 손이 도연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도연은 그 광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도연이 보고 있던 것은 그들의 차선에 기차가 들어오는 장소였다. 검은 터널 같은 어둠이 내려져 있다. 물론 지하에 뚫은 만큼 어두울 수는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다소 지나친 어둠이라고 할까 뭔가가 너무 과했다. 저긴 왜 저렇게 혼자 검고 둥근 걸까.

그때 기차가 들어왔다. 그 검은 싱크 홀 같은 곳에서부터 기차가 솟아 나왔다. 기분 나쁜 광경이야. 마치 저곳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잖아.

도연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두렵지 않을까? 내가 자신을 넘기게 될까 봐. 도연은 문득 궁금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넘기게 될 거란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본인이 그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도연은 그것을 잘 알았다.

만약 그 산에서 혼자 남아 다리를 다쳤던 것이 영준이었다면 그는 그곳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것이다. 실종 후 그토록 애타게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나도 똑같이 해주리라 생각하겠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인 것이다.

“왜 그래?”

갑자기 영준이 도연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우울해 보여,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아.”

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연이 발치의 소주병을 툭 하고 건드리자 빙그르 돈다.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노숙자는 흥미를 잃었는지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영준은 진오 형에게 전화가 왔다며 잠시 일어나 벤치 근처에서 전화를 받았다. 혹 배낭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쪽 손잡이를 손에 끼우고 있었다.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안전선 안에 머물러 달라는 당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졸고 있던 노숙자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 선로 가까이에 다가갔다. 무어라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다 팔에서 힘을 쭉 빼고는 앞뒤로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끼들…… 개새끼야…… 지들 밥그릇만…… 어? ……새끼…….”

위치상 싫어도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앞에 선 노숙자의 몸에는 어느새 길게 늘어난 회색 뱀이 감겨 있었다. 건너편의 자살자였다. 한때는 깨끗했을 회색 양복은 더러운 물에 담가 놓았던 것처럼 색이 변해 있었다. 정말 있는 천이 아님에도 마치 수백 수천의 투신을 통해 옷이 상한 한 것 같았다.

언제 이쪽으로 건너왔는지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찾은 것 같았다. 노숙자의 몸에 뱀처럼 달라붙어 연신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얼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열함이 어려 있었다.

길게 늘어진 더러운 머리 너머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노숙자의 눈은 풀려 있었다. 그 탁한 눈에 물기가 어려 짓무른 눈 주변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갔다.

도연은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들어오는 알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노숙자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플랫폼의 노란 선을 넘어섰다. 낡고 더러운 신발이 플랫폼의 가장자리에 멈췄다. 반쯤 잘린 나무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흔들리는 움직임에 맞춰 연신 대상 없는 욕을 씹어뱉듯 토해냈다. 그 위태로운 행동에 몇 명의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노숙자의 행동에 설명이나 이유를 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으로, 그것은 도연도 마찬가지였다.

영준은 아직 전화 중이었다. 한동안의 부재에 대해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섰다.

강한 바람에 앞머리가 흔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완만하게 구부러진 선로 밖에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길게 몸을 튼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도연은 가만히 바닥을 내려 보았다. 누군가 ‘어떻게 해?’, ‘에이 설마’ 하고 주고받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쿵쿵대고 으르렁대는 것 같은 요란한 소음이 그 위를 덮기 시작했다. 기차가 들어오는 충격으로 바닥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익숙한 목소리는 오랫동안 들어왔던 음성의 재회였다. 단경호, 하지만 넌 안 죽었을 수도 있지.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이제는 생긴 거야.

이런 상황에 처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린 그냥 어쩌다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야.

넌 그렇겠지, 넌! 하지만 난 아니야. 난…… 너무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관심 가지지 않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기억 되지도 않은 채, 누구와도 관계도 친분도. 내가 다른 이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되어야 할 건……

“어머!”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노숙자가 철길 위로 몸을 구부정하게 숙였다. 툭,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난 도연은 손을 뻗어 그의 허리춤을 잡았다. 있는 힘을 다해 당기자 노숙자의 몸이 철길 위에서 더 이상 기울지 않고 올라왔다. 성공했다, 고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상대방이 도연의 몸을 잡았다.

“어……?”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노숙자는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도연의 몸에 매달렸다. 균형을 잃고 크게 휘청거리는 아주 잠깐, 플랫폼에서 손을 뻗고 달려오는 영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표정에 확연한 공포가 떠올랐다. 간발의 차이로 도연은 영준이 품에 안겨 플랫폼 위에 쓰러졌다.

한 뼘도 남지 않은 바로 뒤는 낭떠러지처럼 철로였다. 내 모른 척하던 이들도 흥미진진한 활극이나 되는 것처럼 놀라 구경했다.

노숙자는 이제 흐릿하던 눈에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곧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나 주춤주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곧바로 우렁찬 소리와 함께 기차가 빠르게 철로 위를 지났다. 양복의 영혼은 원한에 찬 표정으로 도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자.”

먼저 몸을 일으킨 영준이 도연의 팔을 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화난 사람처럼 질질 끌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뒷모습으로는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반쯤 뛰다시피 하는 정신없는 걸음 사이로 도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구한 노숙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춰 멈춰 섰다. 사람들이 각자 표에 적힌 칸을 찾아 움직였다. 말없이 도연의 손을 잡고 끝 칸 쪽으로 가던 영준이 갑자기 벽의 구석 진 곳으로 들어갔다.

“왜……!”

벽 쪽으로 도연을 민 영준은 그대로 와락 끌어안았다. 숨 막히는 포옹에 얼굴이 어깨에 파묻혔다.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 있는데 뒷머리를 잡은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너, 다시는…….”

영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닿은 뺨에서 격렬하게 뛰는 심장에 쿵쿵 온몸이 울린다.

“안 하던 짓 하려거든 나한테 말하고 해, 알았어? 다시 이렇게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하지 말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영준은 떨어지려는 몸을 다시 한 번 세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밀어내지는 못했다. 도연이 놀라 달려오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래.”

하고 대답하자 영준은 마지못해 팔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찡그린 얼굴로 도연을 바라보다 완전히 멈춰선 기차를 향해 눈짓했다.

“가자.”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둘은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마지막 칸에 올라탔다. 혹시 몰라 긴 플랫폼을 살폈지만 수상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가 천천히 출발하자 영준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도연은 계속 창밖을 살피고 있었다. 기차는 더 이상 사람의 힘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그래, 사람의 힘으로는.

“불안해?”

묻자 도연은 기차역 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들처럼 도망치기 위해 기차에 탄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모르겠어.”

영준은 맨 뒷자리 구석에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손짓으로 도연에게도 앉으라고 하자 그는 창밖에 시선을 한 번 더 던지고는 순순히 앉았다. 집을 버리고 도주의 길에 오르다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시선이 낮아지자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둘은 좁은 공간에 무릎을 굽힌 채 발을 나란히 해 앉았다.

“……사진을 완성을 못 했어.”

갑자기 도연이 불쑥 말했다.

“네 사진. 동생하고 너에 대해 적어는 놨는데, 사진이 없으면 얼굴을 기억 못 하잖아.”

“그런 걱정보다 잊지 않겠다는 생각을 먼저 해.”

“그렇게 쉽지가 않아.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게.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도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연습하면 되지. 안 될게 뭐 있어. 지금 여기 이렇게 무사히 있는 것도 굉장한 거잖아.”

영준의 말에 도연은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딨냐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놓고, 그것도 이렇게 목표 없이 헤매게 되었는데. 하지만 곧 그것이 영준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이끄는 것은 자신이어야 하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도. 도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영준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낮게 덜컹거리는 기차가 규칙적으로 흔들거린다. 어쩐지 피로에 눈이 감겼다. 5분만 졸게, 하고 말하려는데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만 나온다. 도연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혼자가 아니니 괜찮겠지. 영준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나 1초도 안 되어 덜컹! 하고 갑자기 몸이 크게 흔들렸다.

“어?”

느닷없는 흔들림에 눈을 뜨자 도연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둘은 몸을 엉거주춤 일으킨 채 주변을 살폈다. 승객들 중 이상을 느낀 몇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기차는 급격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멈춰 섰다. 도연은 얼른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곧 출발합니다.”

승무원이 말했지만 으레 있어야 할 안내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거의 5분가량 정차한 뒤에야 차가 서서히 다시 출발했다. 뒤늦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철도 상태 이상에 의한 정차라는 안내가 나왔다. 그런데 어떤지 느낌이 이상했다.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어깨에 멨다. 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가 서서히 출발해 속력을 붙이기 시작하려나 할 쯤, 다시 느려졌다. 열차는 거대한 동물이 몸을 비틀 듯 움찔거리며 다시 멈춰 섰다.

“열차 고장 난 것 아니야?”

여기저기서 불안한 목소리가 터졌다. 안전사고에 대한 불안감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문득 도연이 손짓을 했다. 앞칸으로 가보자는 뜻이었다. 둘은 상황을 알기 위해 빠르게 앞으로 이동했다. 맨 끝에서 다시 맨 앞칸까지 이동하는 긴 시간 동안에도, 열차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앞쪽 칸에 도달하자 열린 문 너머로 승무원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무전기로 무언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없다니까 그러네! 아무것도 없다고!”

“있긴 뭐가 있다고 아까부터 그래요. 지금 다 확인하고 있는데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 마리 없어요.”

“열 명? 아까는 두세 명이라며, 그사이 왜 그렇게 늘었어, 또!”

짜증 섞인 대화가 오갔다. 승무원 중 한 명이 다른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굴리는 것이 보였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하듯이 머리에 손가락을 빙빙 돌린다.

“과로해서 그래. 과로해서.”

누군가 투덜거리며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승무원 대기실 쪽에 서 있는 둘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얼른 다른 승무원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영준들에게 말했다.

“잠시 안전 확인을 위해 정차한 것 뿐이니 곧 출발합니다. 좌석에 앉으세요.”

그때 밖에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승무원들 몇이 문밖을 내다보고는 무어라 대꾸하는 소리가 왁자하게 났다. 소란에 앞을 막아선 직원이 이쪽에 주의를 놓쳤다. 도연은 얼른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열린 문 너머 기관사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기관사가 철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저기 봐! 저기 있잖아! 아까부터 저기 사람 열 명은 되게 서서 안 비키고 있는데 어떻게 출발을 하냐고!”

기관사는 조금 전부터 계속 철로 위에 버티고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손가락질했다.

“아 저기 있잖아 저기! 안 보여?” 그러나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정신 차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없다니까요, 거기. 아무도 없다구요!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럼 저게 뭔데? 기관사는 철로 위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어린애와 여자를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 장대처럼 큰 키의 사내들이 마치 어디 지나가려거든 한 번 해보라는 듯 그를 말없이 응시한다.

처음은 역에서 출발한 지 얼마간 지나서였다. 느닷없이 철로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기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멈추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이미 급정거는 불가능했다. 밀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부딪히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설마 내가 헛것을 본 것인가 싶으면서도 일단 관제센터에 사고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10분도 지나자 두 번째 사람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아이의 손을 잡은 여자였다.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철도 위에 나타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속력을 줄였지만 소용없었다. 두 번째로 인명사고가 난 것 같다며 관제센터에 연락하자 그쪽도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지금 차가 지나는 곳은 인적도 없고 사람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다.

기어코 세 번째로 일가족이 나타났을 때는, 반미치광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그냥 열차를 세워버렸다. 더 이상은 못해. 관제센터에 다시 연락을 하자 뭘 잘못 본 것 아니냐고만 되물었다. 30분 사이에 세 번째, 그것도 일가족이라니. 자신이 듣기에도 황당한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지금 저렇게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못 가, 못 가! 저기 눈 벌겋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밀고 가!”

한사코 운행을 거부하며 기관사는 이대로 후진해 다시 역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버텼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무전 너머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거기 거기! 여기서 내리면 안돼요!”

승무원이 부르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영준과 도연은 철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상황이 파악되자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미 따라잡힌 것이 아니라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잠시 주의가 돌아간 사이를 틈타 열린 문으로 뛰어내렸다. 복잡하게 얽힌 철로 위를 달리는 동안 뒤에서 외치던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쉬지 않고 뛰면서도 앞과 뒤를 살폈다. 그들이 피해야 할 것은 기차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방향을 잡았는지 도연은 철로 변으로 향했다.

“여기!”

헐떡임 사이로 도연이 방음벽 한쪽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자 벽 한쪽을 헐어 조그만 철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철도 수리를 위해 직원들이 임의로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사용되던 문이었는지 자물쇠가 걸려 있기는 했지만 작은 것이었다. 바깥쪽에서 나무판자가 헐겁게 못질 되어 벽을 가장하고 있지만 허술해 얼마든지 뜯어낼 수 있어 보였다.

“비켜 봐!”

영준은 도연을 한쪽으로 비키게 한 뒤, 철문을 발로 걷어찼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지르자 결국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 나자 나무판자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들은 헐떡이며 부서진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철로에서 벗어나자 정확히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주택가에 가깝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로로 가야 해. 차를 탈 수 있도록.”

도연이 불안하게 말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날지 모를 위험을 경계하며 다시 달렸다. 숨이 턱에 닿게 힘들었지만 뒤가 오싹해 멈출 수가 없었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해 안심하면 그 순간 다시 몰아간다. 딱 반 발자국 앞서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는 거리였다.

밭은 숨을 내쉬며 걷는데 갑자기 짐이 가벼워졌다. 영준이 도연의 배낭을 들어 올린 것이다. 뒤로 당겨져 비틀거리는 사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예 뺏어 들었다.

“내가 들…….”

“너 아직 제 체력 아니야. 그냥 가.”

영준은 굳은 얼굴로 도연의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멨다. 힘들었던 만큼 짐이 없어지자 한결 달리기 편했다. 영준은 다른 사람의 짐을 들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자꾸만 쳐다보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등을 밀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고, 고마워.”

헐떡임 사이로 작게 말하자 영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으쓱했다.

주택가를 지나자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사람들 몇이 역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 아무거나 타고, 큰길로 가자. 거기서 고속버스를 타든 뭘 하든 하면 될 거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두색 버스 한 대가 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그 버스를 타는지 여기저기에서 짐을 챙겼다. 둘은 맨 마지막에 버스에 올랐다. 의외로 내부는 사람이 적어 둘은 뒤쪽 두 자리가 붙어 있는 의자로 가 나란히 앉았다. 계속 쉬지 않고 뛰었던 만큼 숨 고르기에 바빴다.

차가 고만고만한 동네를 벗어나 도로로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히히, 이히히힛 하핫 하핫?”

운전 중이던 기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우스운 일이라도 있는가 몇 명이 쳐다 보았지만 도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은 입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기사가 이번에는 끙끙 잃는 시늉을 내더니 머리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흥이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차도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기사양반 아까부터 거 왜 그래?”

“운전을 참 요상하게 하네.”

앞쪽에 앉은 노인들에게서 항의가 터졌다. 운전이 왜 이렇게 거치냐는 꾸지람이 쏟아졌다. 그러나 버스 기사는 들은 체 만 채 속력을 점점 높였다. 이제는 도로를 완전히 지그재그로 제멋대로 주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졌다.

무섭도록 가속한 버스는 우우우웅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를 위태롭게 질주했다. 그만두라고 외치는 소리에도 기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연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겨우 손잡이로 균형을 잡고 운전석에 도착했다. 기사는 이미 말 그대로 맛이 간 상태였다. 그는 이상하게 흐려진 눈빛으로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뱀단지가……. 엎어졌어. 뱀단지가…….”

흐릿한 눈에는 빙의된 사람 특유의 탁한 빛이 감돌았다. 위험천만한 운전에 앞서 오던 승용차 한 대가 빠아앙 하고 크게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벗어났다. 운전대를 잡고 뺏으려 하자 한사코 버틴다. 밀고 당기는 사이 앞에 파란색 용달차 하나가 나타나자 기사는 눈을 빛내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이런…….”

“나와 봐!”

마침 도착한 영준이 주먹으로 기사의 턱을 내리쳤다. 머리가 휙 꺾이더니 기사는 핸들 위로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급히 그를 끌어내는 동시에 도연이 운전대를 잡고 얼른 발을 끼워 넣었다. 운전석에 겨우 앉아 길가로 차를 세우려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밟아도 뭔가 걸린 것처럼 눌러지지 않는다.

“뭐가…….”

아래를 본 순간 검은 그림자가 발치에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수의 뱀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악문 도연은 발을 털어내며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노력했다. 종아리가 서늘해지더니 먼가가 타고 올라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운전자가 바뀌고도 버스가 멈추지 않자 사람들이 사이로 아우성이 터졌다. 손잡이를 잡은 승객들이 이리저리 휩쓸렸다.

“가방! 가방에서 백반가루……! 맨 앞 주머니!”

급히 외치는 말에 영준은 곧바로 메고 있던 배낭을 열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사이로 작은 비닐봉지 몇 개가 튀어나왔다. 그중 하나를 발치에 마구 털어냈다. 순간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바닥 전체로 싸악- 흩어졌다. 앞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이 흐억 하고 놀라 발을 들어 올렸다.

그 틈에 브레이크를 누르자 마구 폭주하던 버스는 그대로 갓길로 치달았다. 끼기기기긱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도연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홱 꺾었다.

심한 요동과 충격 끝에 버스가 멈췄다. 바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핸들을 움켜쥔 채 엎어졌던 몸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터졌다. 도연은 서둘러 영준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바닥에 앉은 그는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의식을 잃은 기사가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감싸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누군가 구급차와 경찰을 부르라고 외쳤다. 기사를 내려놓은 영준이 도연에게 급히 다가왔다.

“괜찮아?”

“그래.”

도연은 서둘러 운전석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허겁지겁 내렸다. 노인들 몇은 부축을 받아야 했다.

“잠깐.”

차에서 내린 영준은 주변을 한 번 보고는 도연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뒷걸음질 쳤다. 곧 도연 역시 무슨 일인지 눈치챘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았다.

둘은 도로를 따라 뛰었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목격자를 요구하는 승객인지 혹은 그들을 쫓는 존재인지 확실치 않았다.

몇 대의 택시가 옆을 지나쳤지만 세워주지 않았다. 설령 탄다 해도 안전할지 알 수 없었다. 둘 만이면 모를까 이제 더 이상의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운전사를 때린 주먹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하마터면…….”

그 사람은 무사히 깨어날 수 있을까? 그들은 일단 달리고는 있었지만, 목적지는 마땅히 없었다. 다만 도로를 따라 일단 밝은 곳으로 가야 했다. 분명한 목적이 없다는 것이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도로를 따라갔을까,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어졌다. 푯말을 보자 익산 근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름을 알아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늦은 오후, 몇 시간 후면 해가 질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띄엄띄엄 지나는 차에 손을 들었지만 세워주는 이는 없었다.

“그만둬.”

도연이 급히 팔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또 누군가 말려들 거야.”

“곧 해가 질 거야. 잠깐이라도 시내로 가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길 끝에서 흰 승용차 한 대가 나타났다. 차는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다가왔다. 차창을 내리고 얼굴을 내민 것은 중년의 부부였다.

“젊은이들 혹시 국토대장정 중이에요?”

“내 말이 맞다니까. 보도 여행 중이죠?”

호기심에 찬 시선이 둘의 가방을 훑는다.

“우리 아들도 작년에 그거 했거든. 혹시 아니면 요 앞까지 태워다 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생긴 기회는 싸움이 무색하게 반가웠다.

“그게…….”

갑자기 뒷좌석에서 개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와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왈왈! 으르르…… 왈!”

개는 둘을 보자마자 뭔가에 찔린 것처럼 짖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의 안전에 위협이 될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것 같았다. 유리창 너머 하얗게 입김과 침이 튀었다. 순해 보이던 눈에서 푸른빛이 번쩍거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괜찮으니까 뒤에 타요.”

부부는 개를 잡아 앞좌석으로 데려갔다.

“……괜찮습니다.”

“정말? 여기선 숙소도 마땅히 없는데.”

부부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개는 여전히 침을 튀기며 몸부림쳤다.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그녀는 다시 뒷좌석을 가리켰다.

“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계속된 사양에 차는 결국 ‘그럼 수고해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출발했다.

“…….”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도로에 남은 둘은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뛸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길 양쪽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이 이곳이 얼마나 인적 없는 곳인지 말하는 것 같았다.

“너만이라도 타고 갈 걸 그랬어.”

앞서 걷던 도연이 불쑥 말했다.

“그럼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괜찮아.”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달라. 한 번도 이정도 까지 가본 적은 없었어. 기차에, 버스에! 그게 정말 끝장을 보려는 거야. 더 이상은…….”

“그러면 더 같이 있어야지!”

앞서 가던 도연을 잡아 얼굴을 마주한 영준이 말했다.

“더 이상 약한 소리 안 하기로 했잖아, 우리.”

도연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을 빛내며 영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저하다 애원하듯 말했다.

“너는, 제대로 된 인간이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자격이 있어.”

“그게 무슨…….”

도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김도연!”

“이대로 가란 말이야! 처음부터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마지막도 나 혼자…….”

“시끄러워!”

영준은 한 대 칠 듯이 화가 나 외쳤다.

“몇 번을 말해, 혼자 있게 안 한다고 했잖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너만 혼자 보내면 어떻게 될지 다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너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알아? 다 포기한 것 같아. 전에 산에서 더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 안했어. 지금은 그보다 두 배는 더 나은 상황이야. 그런데 왜 자꾸 포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이렇게 약한 소리 하는 놈이 아니잖아!”

“모르겠단 말이야!”

도연 역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 외쳤다.

“이젠 모르겠어! 자꾸만, 이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기가 끝이라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누군가 자꾸, 머릿속에서…….”

영준은 손으로 도연의 귀를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댄 채 다시 말했다.

“그딴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 너한테 계속 날 넘기라고, 나에게 널 포기하라고 하는 헛소리일 뿐이야. 그런 식으로 자꾸 널 꺾으려는 거야. 네가 소영이에게 한 말 기억나지? 잘만 버티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우리도 마찬가지야. 다른 사람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으면서, 왜 정작 너 자신은 못 믿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기어코 도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믿으라고?

“난 널 믿어. 넌 나를 넘길 수도 있는데 하지 않잖아.”

“그거야……!”

“정 널 못 믿겠으면, 날 믿어봐.”

영준은 도연의 몸을 당겨 어깨를 감쌌다.

“한 번 시도해 봐. 내가 네게 의지하고 기대는 것처럼, 너도 내게 그렇게 해봐. 우리만 단단하면 그걸로 되는 거니까. 둘 뿐이니까.”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쉬운 일처럼 말하는 거지. 어쩌면 이렇게 유혹적으로 들리는 말일까.

“조금 더 가자. 버스가 가던 길이니 정류장이 있을 테고, 그럼 사람 사는 곳이 나올 거야.”

따뜻한 손이 다독이며 잡아끈다. 그러나 그 손도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십분 정도 걷자 곧 정류장이 나왔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이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낡은 다리를 건너자 작은 슈퍼와 철물점 간판이 보였다. 그 옆으로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이 세워 있었다. ‘석불사’라는 표지판 뒤로 卍 자가 사찰의 방향을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둘 다 별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일반 사찰은 아무 소용없었다. 교회도,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가는 곳은 다 똑같았다. 괜한 피해만 끼칠 뿐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걸 걱정했다고. 도연은 문득 우스워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깊은 곳을 항상 찔러 오던 고통이 실은 많은 부분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마치 결벽증처럼 몸을 사리게 된다.

“잠깐 물 좀 사자.”

영준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부터 계속 뛰기만 해 목이 탔다.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마땅히 먹은 것도 없었다.

“갔다 와. 조금만 쉬고 있을게.”

도연은 더는 못 걷겠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영준은 못미덥단 얼굴이었다.

“힘들어. 한발자국도 못 가겠어.”

숨김없이 약한 소리를 하자 단번에 누그러진다. 영준은 그럼 기다리고 있어, 하고 말한 뒤 조금 떨어진 슈퍼로 갔다. 끝까지 배낭은 주지 않고 가네. 도연은 그 철저함에 한편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까짓 것 포기하면 그만인데. 도연은 멀리 영준의 모습이 작아져 슈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대로 사찰 쪽 길을 따라가다 산으로 숨어들면,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대로 밤이 되고 나면 아침에는 무슨 결론이 나든 나겠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 하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몸이 거부했다. 발에 힘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겁쟁이 같은 새끼가. 아무리 스스로 욕을 퍼부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양손을 확인한 도연은 기가 막혀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을.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도연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잠깐 틈을 타 혼자 떠나려 했는데, 그래야 한다고,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도로 끝을 향하자 조금 전부터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영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도연에게는 보였다. 마치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지평선처럼 먼 곳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혼령의 무리들이. 그들은 마치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는 듯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로 나를 몰아가려는 걸까, 도연은 차라리 달려 부딪히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면, 그럼 영준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서워. 마음속의 어린아이가 울부짖는다. 무서워, 혼자가 된다는 것이, 무서워, 어둠 속에 또 혼자 남게 된다는 것이.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도 않고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그게 왜 잘못이지? 날 긍정해주는 사람을 원하는 게, 그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게! 난 그렇게 강하지 않아, 나 혼자서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어.

도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팔로 감쌌다. 괜찮아, 영준은 스스로 선택해서 내 옆에 있는 거라고 했어. 자기가 원해서 그러는 거라고. 그러니까……

도연은 순간 헉하고 고개를 들고 슈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왜 이렇게 오래 돌아오지 않는 걸까. 설마 날 두고 혼자 가버린 것은 아니겠지.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떠나겠다는 생각을 자신만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영준이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은 아닐까 생각하자 꼼짝도 하지 않던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바위에서 일어난 도연은 비틀거리며 슈퍼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그때 음료수를 고르는 듯 아이스박스 근처를 서성이는 영준이 보였다. 흰 셔츠는 멀리서도 확연히 빛나고 있었다. 떠난 게 아니야.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며 무섭도록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 하하…….”

도연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이런 주제에 계속 너라도 무사히 가라고 뻔뻔한 소리를 했구나. 만약 정말 그가 떠나면 어쩌려고. 아니,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자꾸만 확인받고 싶었던 거겠지. 몇 번이고 그가 자신의 선택으로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도연은 영준이 자신에게 특별히 친절하다는 것을, 유난히 소중한 취급을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기뻤다. 좋아한다고도 말해주었다. 도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런 호의도, 믿음도 애정도 처음이었다. 자신 있게 그 마음을 받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내게.

‘흑…… 흐흑…… 윽…….’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자신 안의 생각에 갇혀 있던 도연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석불사로 가는 산길 앞이었다. 이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절에서 가져다 놓은 듯한 돌부처 아래, 누군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반쯤 찢긴 옷을 입은 소녀였다. 맨발에, 흐트러진 머리, 찢겨진 옷은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해 죽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15,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는 이미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지, 자꾸만 드러난 알몸을 숨기려 했다.

‘엄마…… 엄마…… 흑…… 엄마…….’

애정에 대해 생각하던 도연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도 가지 못한 채, 자신의 고통에 갇혀 언제까지고 울고만 있는 혼령.

도연은 천천히 티 위에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근처로 다가가 모르는 척 옷을 혼령 위에 떨어트렸다. 근처의 잡목에 걸린 옷은 마치 그녀의 몸을 가리듯 펼쳐졌다.

도연은 이목구비가 거의 남지 않게 닳아버린 오래된 돌부처를 바라보았다.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은 돌부처 앞에는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돌맹이가 탑을 이뤄 세워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만 아기 부처 인형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도연은 누군가 놓고 간 성냥갑을 집어 들었다. 단 한 개 남은 성냥이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칙, 하고 불을 켜 반쯤 녹아내린 양초에 불을 붙였다. 겨우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길이만 남은 초에도 모두 불이 붙었다.

비바람에 깎여나간 이목구비는 그가 원래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혹은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해학적으로 웃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 덕에서 이쪽에서 멋대로 상상할 수 있었다. 얼굴 없는 돌부처는 도연의 바람으로 자비로운 용서의 표정을 지었다.

‘제발, 그의 말대로 모든 게 잘 끝나기를. 그래서 추억이 서려 있을 그의 집으로, 무사히 동생에게 되돌아갈 수 있기를.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하는 데로 학교에 돌아가 선생님이 되어 살 수 있기를.’

도연은 불을 붙이며 태어나 처음으로 남을 위한 기도를 했다. 문득 머릿속에 사진으로만 본 진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언젠가 두 분이 묻힌 산소에 갈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두 분은 죽음 후 평화를 찾았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죽음이 그렇다면, 어떤 혼령도 세상에 남아 삶의 고통을 계속 이어갈 필요가 없다면. 그저 모두 평온하고 안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뜬 순간 도연은 옆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옷을 벗어준 소녀였다. 그녀는 눈물로 가득 찬 시선을 들어 도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멍과 피투성이의 얼굴은 죽음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그 참혹함에 놀라기도 전에 혼령이 입을 열었다.

‘오고 있어 고통을 즐기고 아이를 먹는 놈이. 오고 있어 나쁜 아이를 먹는 놈이. 나쁜 아이는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먹히고 말거야.’

빨려드는 듯한 커다란 눈, 숨죽인 속삭임에 도연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나는 아이가 아니야.”

혼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활짝 열린 동공으로 도연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그래? 하는 듯 어딘가 비웃는 것도 같은 시선이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침묵을 깨는 익숙한 음성에 도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영준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뚜껑을 연 물병을 든 채였다.

“아니…….”

도연은 다시 혼령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벗어둔 옷만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슈퍼에 물어봤는데, 이 근처에는 마땅한 숙소나 하숙이 없대. 조금 더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기왕이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기차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잠깐 내 말 먼저 들어 봐.”

영준은 얼른 반론을 제기하려는 도연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조금 전 슈퍼에 갔을 때 알았어. 우린 이대로 남의 집에 못 들어가.”

영준은 슈퍼에 들어가 물건을 사던 중 보았던 발자국에 대해 설명했다. 작은 구멍가게에는 할머니 한 명이 안쪽 방에서 몸을 내밀어 돈을 받고 있었다. 손님은 분명 자신 혼자였다. 그런데 물과 빵을 몇 개 사서 나오려다 더러운 발자국이 슈퍼 앞에 무수히 찍혀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수십은 되는 수였다. 그뿐 아니었다. 물을 고르려고 손을 댔던 아이스박스에도 어느새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들어갈 때는 분명 못 봤던 발자국이었어. 나 혼자서 그랬을 리도 없고. 우리가 달고 다니는 거라면 어설프게 남의 집에 들어가선 안 될 거야.”

무수한 발자국은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슈퍼 할머니 말로는 여기서 삼십 분 정도만 더 가면 기차역이 있대.”

“기차역?”

“그래, 오래된 역이긴 하지만 아직 사용되는 곳이라는데.”

도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버스나 승용차면 모를까, 큰 기차라면 그렇게 큰 사고는 안 날 거야. 바로 다음 역까지만 가서 내리자. 그다음에 거기서 차를 훔치든, 빌리든 해서 계속 이동하자.”

“좋아.”

언제까지, 혹은 목적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영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 그뿐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도연은 의식적으로 물을 더 마셨다. 영준은 잘했다는 듯 웃으며 빈 빵 봉지를 구겨 가방에 밀어 넣었다.

“가자. 저쪽이라고 했어.”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를 빠르게 달렸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해가 지면서 점점 거리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슈퍼 할머니 말대로 길을 따라 한참 가자 역사가 나왔다. 연한 베이지색 벽면에 푸른 지붕의 기차역은 마치 오래된 집 같은 인상이었다. 시골 역 특유의 문에서 바로 철로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차표를 사기 위해 문을 열었지만 열리지 않는다.

“설마 문을 닫은 건 아니겠지.”

영준은 닫힌 문을 잡아당겼다. 안쪽에선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왔지만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정말 닫혀 있다는 걸 깨달은 영준이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이봐요! 안에 누구 없어요?”

부술 듯 문을 두들기고 당겨도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다.

도연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은 아직 6시 반, 벌써 문을 닫았을 리는 없었다. 적어도 직원 한 명 정도는 남아 있어야 했다.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이상하다, 적어도 9시까지는 사람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당황한 영준이 어두운 역내를 살피며 말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리는데, 역에는 흔한 전등 하나 켜지지 않았다.

“무인역인 것 아니야?”

“아니야, 직원도 있고, 기차가 계속 다닌다고 했어.”

영준은 고개를 들어 역 이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

영준은 깜짝 놀라 눈을 찡그렸다. 역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역사 간판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얗게 여백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이곳에는 처음부터 이름 따위는 없었다는 듯.

“…….”

“여기서 나가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기분에 뒷걸음질로 역사에서 멀어진 둘은 허겁지겁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길이 끊겨 있었다. 거기에는 조금 전 그들이 왔던 길도, 오던 중 보았던 가로등도 없었다. 오직 뚝 끊긴 것처럼 완전한 암흑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곳만 먼저 밤이 온 것 같았다.

바람이 얼어붙은 둘의 방향으로 불어왔다. 비릿하고 축축한 냄새가 나는 기분 나쁜 바람이었다. 이마를 넘기는 미지근한 바람이 핥는 것처럼 얼굴을 지난다. 도연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둠의 벽을 응시했다.

“들려?”

숨을 헐떡이며 도연이 물었다. 다급한 어조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사방은 고요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안 들린다고?”

도연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영준은 다시 한 번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침묵뿐이었다.

“방울 소리, 방울 소리가 들려!”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선뜩한 밤공기가 젖은 풀 내음을 풍겼다. 선로를 따라 달리는 영준과 도연은 손을 꽉 움켜쥔 채였다. 도연은 놀란 짐승처럼 숨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짐을 두 배로 들고 있는 영준으로서는 따라가는 것만도 벅찼다. 그는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점점 커지며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악몽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준 역시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무서운 압박감이 어둠 속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멀리서부터 조금씩 다가와 마침내 한입에 삼켜버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둠이 바로 등 뒤까지 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를, 발뒤꿈치를 낚아채는 어둠이었다. 더 이상 달아나는 것은 무리였다.

“김도연!”

주변을 물들이는 어둠 속에서 영준은 비명처럼 외쳤다. 도연은 대답 대신 헐떡이는 신음을 흘렸다. 영준은 잡은 손을 힘껏 당겨 도연을 끌어안았다. 거칠게 부딪히는 몸에 격렬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영준은 그를 있는 힘껏 안은 채 말했다.

“정신 차리는 거야, 알았지? 겁먹지 마, 겁먹으면 안 돼! 내가 여기 있으니까, 어두운 길이 무섭다고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럼 그보다 어두운 길은 없는 거야. 넌 더 이상 8살 어린애가 아니야, 잊지 마!”

도연은 그의 몸을 꽉 붙든 채 헉헉대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야 하는데, 그러겠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자 영준은 알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큰 손으로 감싸주었다. 영준이 괜찮아, 하고 속삭이는 순간, 그것이 무색할 만큼 완전한 어둠이 커다랗게 벌려 덥썩, 주변을 온통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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