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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2)화 (2/92)

2화

정면에서도 위아래 속눈썹이 다 보이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햇빛을 못 보고 산 사람처럼 창백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악.”

세게 꼬집어 보니 통증이 그대로 느껴졌다. 게다가 볼에 붉은 자국도 남았다.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며 아픔을 달래는 동안에도 역시나 거울 속 남자는 같이 움직인다.

“……이게 나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다.

혹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체질로 변하기라도 한 건가?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는 걸 안다.

깊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심각한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을 들어 이리저리 뒤집어 봤다.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말랐다. 손등을 움직일 때마다 뼈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위로 시퍼런 핏줄도 보였다. 손가락도 무척이나 가늘었다.

아기들이 잼잼 놀이하듯 열 손가락을 쫙 폈다가 오므리길 반복했다.

입술을 쭉 내밀어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가 바르게 서서 몸을 내려다보았다.

슬리퍼를 신어 빼꼼히 나와 있는 발가락도 꼼지락거려 봤다. 움직이는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난데…… 나 맞는데?”

분명 제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몸도 얼굴도 제 것이 아니었다.

“뭐가 뭔지…….”

하도 생각을 많이 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건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빙글빙글 돌렸다. 왼쪽 눈이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

팔을 뻗어 세면대를 짚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점차 괜찮아졌다.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드니 역시나 낯선 얼굴이 보인다.

“……예쁘긴 되게 예쁘네.”

세면대에 딱 붙어 거울 가까이에서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가며 오밀조밀 살펴보았다. 이왕 바뀐 거 평생 이 얼굴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도 작고 유약해 보이긴 한데, 얼굴로 다 커버가 가능할 듯했다. 특히 피부와 대조되게 붉은 입술이 유난히 튀어 보였다.

빤히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분명 심각해야 할 상황인데 왜 걱정이 하나도 안 되지?

분명 볼을 꼬집었을 때 통증을 느꼈다. 그렇다는 건 꿈은 아니라는 거다.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각몽도 있다는데. 고통을 느낀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두통도 진짜였다.

그간 꽤 많은 소설을 봐 왔다. 보통 이런 상황은…….

“……설마.”

이내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나서 언제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겸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화장실 문을 응시했다.

혹시라도 저 문을 열고 이곳에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지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조금 멀어졌다.

“후…….”

갑자기 빠르게 뛰는 심장에 가슴을 꾹 눌렀다. 두통이 사라지니 이제는 머리가 어지러워 심호흡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귀를 문에 착 붙였다.

아직 아프긴 해도 지금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병실을 찾아온 건 진우의 연락을 받은 훈일이었다.

“미안. 예약 환자가 있었어.”

그는 병실을 둘러보았다. 진겸은 보이지 않았고, 진우만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게다가 보기 드물게 진우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진겸이는?”

“……화장실.”

진우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훈일이 슬쩍 화장실에 시선을 줬다.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곧 밖으로 나오겠지 싶어 진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널 못 알아본다니? 장난치는 거 아니고 진짜로?”

“응…… 사실 잘 모르겠어.”

진우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큰일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동요하는 일이 없는 그가 이러자, 훈일도 어느새 걱정이 앞섰다.

깍지 낀 양손에 힘을 준 진우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아니었어.”

아직도 폴대를 꽉 쥐던 진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게 겁먹은 적이 없었던 그가 한순간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진짜 날 못 알아봤어. ……이게 말이 돼?”

올려다보는 진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훈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온 거였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은 듯했다. 진우에게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백진겸이 오늘도 심술을 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상하긴 했었다. 백진겸이 아무리 짜증을 부려도 진우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아픈 척을 하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게 의학적인 도움을 바라서였다. 사실 진우가 전화로, 진겸이가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말했을 땐 뜬금없어서 참으로 신박한 방법으로 괴롭힌다고 생각했었다.

“진우야…….”

“검사 결과 괜찮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마 보기가 힘들어 훈일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픈 사람 앞에서 자기가 더 힘들어하면 안 된다며 항상 덤덤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진우였다.

그런 백진우를 약하게 만드는 사람은 백진겸이 유일했다.

백진겸은 그걸 알고 잘 이용했다. 진우는 항상 이용당하는 입장이었다.

백진겸도 소중한 동생이지만, 백진우도 똑같았다.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길 원했다.

훈일은 불안해하는 진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 좋았으면 너한테 제일 먼저 얘기했어. 판막도 잘 움직였고 소리도 괜찮았어. 면역력이 조금 떨어져서 그렇지, 다른 건 전부 정상 수치였고 문제될 건 없었어.”

오늘 진겸이 받은 검사는 6개월마다 받는,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정기 검진이었다. 요새 밥을 잘 챙겨 먹지 않아 면역력만 약간 저하되었을 뿐 모든 게 괜찮았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면 제일 먼저 진우에게 말했을 거다.

진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보였던 진겸의 행동에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훈일은 손에 힘을 줬다. 어깨에 가해지는 압력에 진우의 떨림이 점차 멈춰 갔다.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겁먹지 마. 진겸이 나오면 내가 얘기해 볼게.”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겸은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병실에 있던 잘생긴 남자가 ‘진우’인 모양인데,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애처로워서 저도 모르게 그의 감정에 동화될 뻔했다.

대화를 유추해 보면 방금 들어온 사람은 의사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까 남자가 말한 ‘백진겸’이라는 사람은 몸이 약한 듯했다.

‘진우?’

뭔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눈을 꾹 감고서 머리를 팽팽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

순간 진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그레이》에 나오는 수 이름인데?’

소설 《그레이》는 고수위 BL 피폐물로 꽤 인기가 많았다. 자신도 열혈 독자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메인수의 형 이름이 자신과 같았다.

백진겸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툭하면 쓰러지기 일쑤고 메인수 백진우를 괴롭히는 악역이다. 그러다가 메인공 탁원범을 만나게 되는데. 그 후 그에게 반해 구애한다.

딱히 호감 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서 개의치 않고 재밌게 봤었다.

“……설마.”

우연이겠지.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희귀한 것도 아니니 충분히 겹칠 수 있는 거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하는데 불현듯 소설 속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백진겸 죽잖아. 어제 내가 본 거 죽는 장면이었는데? 탁원범이 자기 수하들 시켜서 매장하잖아!’

물론 자신이 소설 속 백진겸은 아니지만 괜스레 오싹한 기분이 들어 팔을 벅벅 긁었다.

‘아닐 거야.’

머리를 좌우로 턴 진겸은 이곳에 더 있고 싶었지만 슬슬 나가야 할 것 같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살살 문을 열었다.

그런데 덩달아 병실 문이 같이 열렸다.

“……어?”

놀란 진겸이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들었다.

덩치 큰 두 남자가 보였다. 둘 다 키가 커서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했다.

순간 앞에 있는 남자와 진겸의 시선이 얽혔다.

‘와…… 잘생겼어!’

지나가다가 부딪치면 죄송하다고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에 몸이 굉장히 다부진 미남이었다. 진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그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겸이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올려다보고 있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서늘한 눈빛에 진겸의 어깨가 절로 말렸다. 그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찡그렸을 뿐인데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빠르게 시선을 옮기다가 맹수 같은 이의 뒤에 있던 또 다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꽃봉오리들이 싱그러운 봄이 온 줄 착각하고 너도나도 활짝 필 것처럼 화사한 사람이었다. 분명 온화한 인상인데 묘하게 만만치 않은 위험한 향기를 풍겼다.

그는 눈썹을 한 번 들썩이고는 입만 웃어 보였다. 따라 웃어야 할 것 같은 미소인데 괜히 소름이 돋았다. 앞에 선 남자와 키가 비슷해서 이쪽도 올려 봐야 했다.

여기도 저기도 눈길을 사로잡는 미남들뿐이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

도대체 여기는 뭘까?

잠시 내려앉은 정적은 훈일로 인해 깨졌다.

“너넨 또 왜 왔어?”

진우에게 말했던 것과 다르게 까칠한 투였다. 그러자 진겸을 빤히 보고 있던 수혁이 고개를 돌렸다.

“탁 이사가 오자고 해서 운전기사 좀 했지.”

“수혁이 네가 고생이다. 돈도 많은 놈이 택시를 타든가. 왜 자꾸 널 부려 먹어?”

“나 얘한테 얹혀살잖아. 이렇게라도 해야 안 쫓겨나.”

이내 진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익숙한 이름들이 진겸의 귓가로 들려왔다.

원범.

수혁.

그리고 아까 들었던 진우.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나…… 진짜 빙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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