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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화 (4/92)

4화

“해리성 기억 상실증이 맞아.”

“……이렇게 갑자기 걸린다고? 검사 마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어. 뇌에 충격이 가해진 일도 없었고…… 진우가 잠깐 자리 비운 시간 동안 기억 장애가 생기는 게…… 가능해?”

훈일은 제 동기인 윤기택의 말에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모종의 일을 계기로 해리성 기억 상실증에 걸릴 순 있다. 하지만 대부분 뇌를 다쳐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거나.

그래서 더욱더 진겸의 상황이 뜬금없게 느껴졌다. 수액을 맞으며 자는 사이에 기억 상실증에 걸리다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던 훈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원래 이런 건 갑자기 나타나. 그래도 모든 걸 잊은 건 아니야. 생활하는 덴 지장 없어.”

기택은 진겸과 상담을 하면서 적어 놨던 것들을 다시 살폈다.

검사를 마친 후 여러 테스트를 해 보니 사람에 대한 기억을 비롯한 일부분이 사라졌을 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많이 아팠잖아. 그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다는 거겠지. 당장 문제될 건 없고. 쉬면서 심리 치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올 거야.”

“평생 안 돌아올 수도 있잖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우리는 작은 가능성도 크게 봐야 하잖아.”

훈일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이 검사했을 때 무슨 문제가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시 실수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괜히 제 실수로 벌어진 일처럼 느껴졌다.

기택은 당장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축 처진 훈일의 팔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놀란 훈일이 고개를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애 아니야. 옆에 진우도 있잖아.”

“…….”

“네가 그러고 있으면 더 불안해할 거야. 너한테 많이 의지하잖아.”

“……맞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애들 데려올게.”

마음을 다잡은 훈일이 일부러 으쌰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겸과 진우를 불렀다.

기택은 두 사람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려 했다.

“다른 곳은 멀쩡해.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스트레스 수치도 높지 않아. 단지…… 기억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

진료실 의자에 앉은 진겸은 자신에게 내려질 진단명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덤덤히 듣고 있었지만, 진우는 몸에 힘이 풀린 건지 살짝 비틀거렸다.

그걸 느낀 진겸이 손을 뻗어 진우의 팔을 잡았다.

“앉을래?”

진우는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했다. 확실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평소 그였다면 자신을 빤히 보지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병실에서부터 위화감이 들긴 했다. 그리고 지금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그의 행동이 점차 이해됐다. 그렇다고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덜 놀랐을 뿐이다.

“……아니, 괜찮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 진우는 기택의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고, 진겸은 관심이 없는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기택이 집중하라며 테이블을 툭 쳤다. 그제야 진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해리성 기억 상실증이야.”

“……기억 상실증이요?”

맞게 들었다는 듯 기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눈을 꾹 감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진겸은 평생을 병원과 가까이해야 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거고.

게다가 최근 들어 식사도 대충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냥 둘 수가 없어 검사받기 싫다는 그를 억지로 데리고 왔다.

그런 상황에서 해리성 기억 상실증이라니.

진우는 자기 탓인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이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졌다.

오른손이 잘게 떨리자 옆에 있던 진겸이 살포시 손을 잡아 왔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기택은 짧은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쌓아 온 기억은 없지만, 지식은 남아 있어서 일상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을 거야. ……기억이라는 게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계속 지켜봐야 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거든.”

“평생…… 기억을 잃은 채 살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안타깝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지금은 둘 다 당황스러울 테니 가서 좀 쉬어. 괜찮아지거든 그때 심리 치료하자.”

기억 상실증에 대한 치료법은 다양하지만 기택은 그중 심리 치료를 제안했다.

백진겸과 아예 모르던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어떤 치료법이 좋을지 고려해 보았는데, 심리 치료법이 조금이라도 더 세밀하게 그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심리 치료를 하면 나아지나요?”

“그것도 장담할 순 없어. 기억이란 게…… 예민한 부분이거든. 환자 본인의 의지도 무척이나 중요하고.”

기택의 시선이 진겸에게 닿았다. 분명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건데도 그는 어떠한 관심도 보이질 않았다. 진료실 이곳저곳을 살펴볼 뿐이었다.

백진겸을 자주 본 건 아니지만 그가 병원에 올 때마다 보았고, 훈일과 같이 식사도 몇 번 했다.

정신의학과 전문의로서 많은 환자를 만나 본 기택이 보기에는, 진겸에게 정신의학과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일전에 훈일한테 슬쩍 백진겸에게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훈일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였지만 본인도, 보호자도 그 주변인조차 거부하는 듯해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리고 지금 기억 상실증이라는 진단과 함께 기택은 다시 한번 정신의학적 치료를 제안했다.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생각해 봐.”

* * *

진료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훈일과 함께 병실로 향했다.

“형.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나 잠깐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

왜냐고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진겸이 병실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밀었다가 슬그머니 뒤로 뺐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가지 않은 건지, 흉흉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원범과 핸드폰을 하는 수혁이 병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들어가야 하는데 자신을 보는 두 맹수의 눈빛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진겸이 다시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진우와 훈일이 코너를 돌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긴 무서우니 두 사람 뒤를 쫓아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수혁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어디 가?”

“어…….”

“들어와. 우리도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백 비서는?”

“……의사 선생님이랑 할 얘기 있다고 갔어요.”

“아, 그래?”

한쪽으로 물러난 수혁이 안으로 들어오라며 머리를 까딱거렸다.

진겸이 슬쩍 안을 살폈다.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원범 때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노려보는 게 아니라 눈매가 날카로워 그렇게 보일 뿐이었는데, 진겸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수혁이 손을 뻗어 진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안으로 당긴 후 문을 닫았다.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저기서도 계속 쳐다보는데요.”

수혁의 몸을 방패 삼아 슬쩍 숨은 진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자신이 뭘 했다고 저렇게 보는 건지. 진짜 프로필에 나온 대로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대상은 자신이겠지.

오싹해진 진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수혁의 뒤에 바싹 붙었다.

‘……뭐지?’

수혁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백진겸의 관심사는 언제나 탁원범이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이상한 짓을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었는데, 무서워하는 모습이 꽤 신선했다.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수혁이 원범을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탁 이사. 눈에 힘 좀 풀어라. 무섭다잖아.”

“……무섭다고는 안 했어요!”

놀란 진겸이 손에 쥔 옷자락을 당기며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무서운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전하면 원범이 더 흉흉해질 것 같았다.

수혁은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눈치를 보던 진겸이 쭈뼛거리며 벽 쪽에 붙어서 침대까지 겨우 도착했다. 살살 움직이는 동안에도 원범과 수혁의 시선은 진겸을 향해 있었다.

진겸이 후다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탁원범이 얼마나 냉정한 인간인지 알고 있기에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수혁은 이불 더미가 꼭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양 같아 픽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침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사가 뭐래?”

“…….”

“기억 상실증 맞대?”

“…….”

“거짓말한 거 들통났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 눈만 빼꼼히 내민 진겸이 샐쭉하게 수혁을 봤다.

“……거짓말한 적 없는데요.”

뚱한 목소리에 수혁이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해리성 기억 상실증이래요.”

“……진짜 기억을 잃었다고?”

“의사가 그런 거면 그런 거겠죠.”

여전히 뚱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했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수혁이 고개를 돌려 원범을 향해 입만 움직였다.

진짠가 본데?

원범은 눈을 찌푸리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확인했으니 이제 가야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고 갈까, 고민하던 수혁이 다시 진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기억이 없는 건 어떤 기분이야?”

“어…….”

진겸은 꽉 쥔 이불을 살포시 놓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진짜 기억을 잃은 게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긴 했다. 검사를 마치고 의사가 여러 질문을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말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가족에 관한 질문에 ‘화목한 가정’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가족의 얼굴은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했다. 강아지도 키운 건 알겠는데 갈색이었다는 것만 기억났다.

그 순간, 이게 바로 빙의 부작용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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