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곳에 적응부터 하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뒷일은 그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듯했다.
너무 대책 없는 것 같아도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그냥 현실을 수긍하기로 한 거였다. 이상하게도 꼭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겸이 일어나 앉았다.
“그냥…… 기억이 없네, 이런 느낌이에요.”
“걱정은 안 되나 봐?”
“해야 하는 거예요?”
“아니. 안 하는 게 낫지.”
수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진겸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의사가 기억 상실증이라고 했다지만 믿기진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앙큼한 짓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백진겸을 많이 만난 건 아니어도 볼 때마다 내숭 떠는 게 티가 났다.
자기 속내를 감췄다고 생각하는 어수룩한 어린 여우를 마주한 느낌이 강했는데 오늘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에 툭툭 건드려 보다가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게 딱 새끼 고양이다.
“답답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수혁은 몸을 다시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진겸은 이불이 제 구명줄인 양 꽉 쥔 채 두 사람을 힐끗거렸다.
병실에 들어왔을 땐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듯하더니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덕에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 * *
훈일의 진료실로 간 두 사람은 진겸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도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우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자 훈일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기억에만 이상이 있는 거니까.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문제인 거잖아.”
“……그건 그렇지.”
나름 위로한다고 한 말이지만 효과는 없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은 진우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진정이 된 듯했다.
“진겸이……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어,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럼 다행인데, 그냥 이 상황이 다 내 잘못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진짜 가족도 너만큼은 못해.”
“……하아.”
계속 풀 죽어 있을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였다. 지금 제일 혼란스러운 사람은 진겸일 테니 자신이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진우는 아까 기택에게 했던 질문을 훈일에게도 물었다.
“기억이 돌아올 순 있는 거야?”
“글쎄…… 그럴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건 정말 장담할 수가 없어서……”
“…….”
“진우야.”
아래를 향하고 있던 진우의 시선이 올라왔다.
“심리 치료부터 받자. 진겸이한텐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건 맞으니까.”
“……심리 치료하면 기억이 돌아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걔가 건강하기만 했어도 당분간은 지켜보자고 했을 거야.”
훈일이 책장을 뒤적거리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한국병원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봉투였다.
“아까는 진겸이 놀랄까 봐 말 안 했는데, 걔 자기가 아프다는 것도 다 잊었어.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관리 제대로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잖아.”
진우는 봉투를 받아 겉면을 손으로 쓸었다. 안에는 판막 이식 수술 후 주의해야 할 점이 적힌 안내지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곧 재수술해야 할 시기라 더욱더 걱정이었다.
훈일이 심리 치료를 받자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게다가 심장만 약한 게 아니었다.
약하게 태어난 백진겸은 어릴 적 독감에 심하게 걸렸다가 폐렴으로 이어져 크게 앓은 적이 있었다. 한번 약해진 폐는 조금만 피곤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바로 폐렴이 재발하곤 했다.
무엇보다 심장이 약해 폐렴에 걸리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는 몸이었다.
“내가 잘 살필게.”
“……그래.”
* * *
진우는 병실로 향하면서도 좀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기억 상실증이라니…….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인 건 맞았다. 훈일의 말대로 그가 건강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이 되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싫어하진 않았어.’
보통 기억 상실증에 걸리면 모든 게 낯설어서 주변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후…….”
진우는 병실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가 눈을 찌푸렸다.
“……아직 안 가셨어요?”
두 사람이 있다는 걸 아예 까먹고 있었다.
“여기서 퇴근할 생각인가 봐.”
수혁의 대답에 진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나절 회사를 비운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을 거다. 급한 일이 있으면 양 비서에게 연락이 오거나 병원으로 직접 찾아왔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 아니었다. 쌓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양 비서님 또 욕하시겠네…….’
양 비서는 항상 ‘타도 탁 이사’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직장인 가슴 속에는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아마 오늘도 멋대로 나와 버린 탁 이사 때문에 일하는 내내 욕을 입에 달고 있을 게 뻔했다.
양 비서에게 미안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건만 괜히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커피라도 사 드려야겠다.’
진우가 짧게 혀를 차는 동안, 진겸은 다시 한자리에 모인 주인공들을 구경했다.
‘다 같이 아이돌 해도 재밌겠다.’
평균 나이가 많아 데뷔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 본 상상이었다. 보통 아이돌 그룹마다 외모를 담당하고 있는 멤버가 따로 있을 텐데, 이들 세 명은 누가 센터를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들이었다.
게다가 잘생김의 결이 다 달랐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도 또렷해서 다양한 형태의 팬덤이 생길 것 같다는 시답잖은 상상도 해 봤다.
분명 본인이 처한 상황을 걱정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재밌기만 했다.
언제 또 이런 걸 경험해 보겠어?
진겸이 히죽 웃고 있는 걸 본 진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은 어때? 아픈 곳은 없어?”
“기분은 아주 좋고, 아픈 곳은 없어요.”
“다행이네.”
침대에 걸터앉은 진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촉촉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일 퇴원해도 되는데……. 나는 병원에 더 있었으면 좋겠어.”
“왜요?”
“집에 가면 혼자 있어야 하잖아.”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이 바라보자 진우가 쓰게 웃었다.
“……솔직히 불안해. 혼자서 밥은 챙겨 먹을 수 있을지,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나 애 아닌데요…….”
어린애 취급에 진겸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진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기억 상실증이라고 했지만, 아직도 믿기진 않았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서서히 믿음이 가고 있었다.
진겸은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하는 진우의 손을 잡았다. 그가 흠칫 떨며 빼려고 하자 더 꽉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은 꽤 오랫동안 고생한 티가 났다.
손 한번 잡았다고 정처 없이 떨리는 눈동자에 진겸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기억 못 해서 그래요?”
“……어?”
“슬퍼 보여서요. 근데 이건 내 잘못 아닌데…….”
눈치를 보며 말하자 진우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알아. 형 잘못 아닌 거.”
진우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일 혼란스러운 건 진겸일 텐데. 자신이 위로해야 하는 상황에서 위로를 받아 버렸다. 괜스레 마음이 울렁였다.
어릴 적에는 자주 같이 놀고, 같은 이불에 들어가 키득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잠들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벽이 생겨 버렸고 지금과 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진우의 손이 움찔거렸다. 진겸의 시선이 손에 닿았다 떨어졌다.
“맞아요. 내 잘못 아니에요.”
“응. ……형은 심리 치료 받고 싶어?”
진겸은 잡은 손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저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받기 싫다고 하면 안 받아요?”
“싫다면 안 해.”
“그럼 안 받을래요.”
어차피 진짜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심리 치료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백진겸의 병원비와 사치를 감당하느라,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느라 백진우는 본인의 모든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힘겨운 현실에도 아등바등 사는 이유는 백진겸 때문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탁원범을 만나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그의 품에 떨어진다. 게다가 서브공인 선수혁조차 정상 범주를 훨씬 벗어난 사람이었다.
진우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아도 고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가 선수혁이다.
진겸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진우가 안쓰러웠다. 이입해서 봤을 때도 그랬는데 실제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더 커졌다.
지금 제 쌍둥이 형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 진우에게 경제적인 부담까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되죠?”
“……응. 받지 말자.”
진우는 제 손에 겹쳐진 작고 하얀 손을 바라봤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손을 잡아 본 지가 언젠지. 계속 속이 울렁였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아예 잊은 모양이지?”
잠시 감상에 빠졌던 진우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진겸도 눈을 끔뻑이며 원범을 봤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크신데요.”
“그런데 난 왜 백 비서 등만 보고 있는 걸까?”
“그걸 제게 물으시면 안 되죠. 보고 계신 건 이사님이시잖아요.”
진겸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하는 두 사람을 힐끗 살폈다.
“바쁘실 텐데. 안 가십니까?”
“아직 퇴근 시간 안 됐어.”
원범은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진우와 진겸의 맞잡은 손에 가 있었다.
저렇게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당장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싶었다.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