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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화 (6/92)

6화

원범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진우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기껏 잡은 진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둘이 가야지만 진겸이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손을 놓았다.

“여기엔 환자가 있으니, 나가서 얘기하시죠.”

“그러지.”

소파에서 일어난 원범이 진우의 뒤를 따랐다. 수혁이 가만히 있자 진우가 고개를 꺾었다.

“선 이사님. 안 오십니까?”

“나도 가?”

“예.”

“난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예.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수혁이 한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언가 장난스러운 몸짓이었다.

수혁은 나가면서 진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겸도 해맑게 손을 흔들며 세 사람이 나가는 걸 지켜봤다.

손바닥 뒤집듯 쉽사리 바뀐 성격에 적응이 안 되는 건 진우뿐만이 아니었다. 수혁이 나오는 걸 기다리느라 고개를 돌렸던 원범 또한 그랬다.

원범은 눈동자만 움직여 여전히 손을 흔드는 진겸을 봤다.

저걸로 관심 좀 끌려고 한 것 같은데. 정말 그게 목적이라면 반쯤은 성공이었다. 확실히 바뀐 성격에 조금 관심이 가긴 했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관심은 아니었다. 저 연기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그런 정도의 궁금증이었다.

밖으로 나온 진우는 목적지가 명확한 것처럼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병원 입구에 다다르자 멈춰 섰다.

“병문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가서 얘기하자고 하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가 버렸다.

남겨진 두 사람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진우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수혁이 어깨를 떨며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아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입구를 지나던 사람들이 뒤돌아볼 지경이었다.

“비서는 진짜 잘 구했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왔지?”

“…….”

“네가 한 방 먹었네. 와…… 탁원범 얼빠진 얼굴도 보고. 오늘 따라오길 잘했네.”

수혁이 계속해서 웃자 원범도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래서 백진우를 놓을 수 없는 거였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수혁의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그 미소는 계속 유지됐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게 되었을 때, 수혁이 슬쩍 눈을 흘겨 원범을 봤다. 그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거 진짜일까?”

“아니.”

“응? 뭘 그리 확신에 차서 대답해? 진짜면 어쩌려고.”

원범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가 그런 쓰레기 같은 연기에 속을 줄은 몰랐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진짜 같아. 눈에 독기가 없어졌거든.”

“관심 끌려는 수작이겠지.”

진짜라고 말한들 원범이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걸 밑바닥에 깔고 있는 상태라 더 말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수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에는 백진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본 그에겐 꽤 흥미가 동했다. 한동안 지켜보면 오늘만큼 재밌는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나가기 전에 손 인사한 것도 나름 귀여웠다.

‘백진겸이라…… 재밌네.’

웃고 있는 수혁의 얼굴은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진겸은 세 사람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층이 높아 시야가 탁 트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흐릿한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이 보였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배에서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슬쩍 아래를 봤다. 정신이 없어서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배고프다.”

입 밖으로 내뱉으니 더 배고파졌다. 꼬르륵 소리가 연신 울렸다.

배를 문지르려 손을 가져다 대자 환자복이 훅 들어갔다. 말랐다고 생각은 했는데 뱃살도 없다. 말랑하지 않고 밋밋한 느낌이다.

몇 번 둥글게 돌려 문지르다가 먹을 게 있나 싶어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아까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볶음밥이 떠올랐다.

‘먹어도 되나?’

백진겸을 위해 사 왔다고 했으니 먹어도 되지 않을까.

눈을 굴리던 진겸이 슬금슬금 내려와 냉장고에서 볶음밥을 꺼냈다. 온기를 품고 있었던 볶음밥은 다 식어 있었다.

병실에 전자레인지가 보이질 않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테이블을 펴고 먹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귀찮았다. 용기째 들고 먹으면 되니 아까 옆에 치워 놨던 숟가락을 쥐었다.

그사이 굳은 건지 푹 꽂히기만 했다. 힘줘서 겨우 퍼 입에 넣으려는데, 병실 문이 열리더니 진우가 들어왔다.

“형?”

“아…….”

눈을 끔뻑이던 진겸이 크게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왜 하필 크게 벌릴 때 온 건지……. 들어오는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혔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진우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진겸의 손에 들린 볶음밥과 숟가락을 가져갔다.

졸지에 밥을 뺏긴 진겸이 눈을 크게 뜨고 진우를 올려다봤다. 손에 쥔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절망한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진우가 서둘러 말했다.

“식었잖아. 새로 사다 줄게.”

“괜찮은데…….”

“맛없어. 잠깐만 기다…….”

꼬르륵. 병실을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진겸이 슬쩍 팔로 배를 감싸고 무릎을 모았다. 새하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진우를 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입을 벌린 걸 고스란히 보인 것도 민망한데, 배꼽시계 소리도 요란해서 더 부끄러웠다.

진우는 최대한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음보가 터질 지경이라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연이어 나는 꼬르륵 소리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자 진겸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쭉거렸다.

“……별로 안 웃긴데. 그냥 소리 난 건데.”

“크흡…… 으, 응.”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을 멈추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고 해서 웃길 리 없는데, 그게 진겸이라서 웃겼다.

겨우 웃음을 꾹 누른 진우가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최대한 억눌렀으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묻어났다.

“……데워 올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여기 있다간 언제 터질지 몰라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보던 진겸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내 이불을 꽉 쥐고는 그 위에 엎드려 얼굴을 푹 묻었다.

‘쪽팔려!’

처음에 꼬르륵 소리가 났을 땐 뻔뻔하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연이어 몇 번 더 나는 통에 귀까지 홧홧해졌다. 열이 몰렸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귀뿐만이 아니었다. 볼과 목까지 불그스름해졌다.

진겸은 엎드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발등이 침대에 부딪혀 팡팡 소리가 났다.

문에 등을 기대고서 가슴을 들썩일 정도로 숨죽인 채 웃던 진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안에 있는 사람은 분명 백진겸인데…….

떨리는 진우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쥐고 있던 용기가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진겸의 앞에서 웃었던 그 순간, 우습게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로를 챙겼던 그때로.

진우는 짧은 숨을 내쉬고는 눈을 떴다. 손에 있는 볶음밥을 보자 민망해하던 진겸이 떠올라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배고플 그를 위해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 * *

따뜻해진 볶음밥을 먹던 진겸은 눈을 굴렸다. 아까부터 자신만 보고 있는 진우의 눈빛은 너무 부드러웠다.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배고파서 먹기는 하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그쪽은 안 먹어요?”

먹기 전에 물어봤어야 했으나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볶음밥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놔 버렸다.

“응. 이따가 먹으면 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나만 먹고 있는데…….”

“진짜 신경 안 써도 돼. 배고프면 알아서 먹을게.”

진우는 대답하면서도 연신 올라가는 입꼬리 때문에 곤욕스러웠다. 웃으면 웃지 말라고 타박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따라 웃는 진겸 때문에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기분이 심히 들쑥날쑥했다. 진겸이 저를 못 알아봤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웃음이 헤실헤실 나온다.

이렇게 오랫동안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더구나 저 입에서 제 식사를 걱정하는 말이 나온 것 또한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선을 바닥에 둔 진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이름 알아?”

“알아요. 백진우. 맞죠?”

“……맞아.”

해맑게 웃고 있는 진겸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후부터 계속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데, 왜 전에는 웃지 않았을까?

진우가 팔을 뻗었다. 아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진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쫙 펴게 하고는 그 위에 검지로 천천히 제 이름을 써 내렸다.

진겸은 간지럽다고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손을 빼지는 않았다.

“백진우.”

진우가 한 자 한 자 강하게 발음했다. 앞으로 다시는 잊지 말라는 듯이.

“진우라고 불러 줘.”

“……응. 진우.”

이름 부른 걸 뭐 그리 쑥스러워하는지 진겸이 볼을 긁적거렸다. 다시 밥을 먹으려 하는데 진우가 손을 놔주지 않았다.

“존댓말도 하지 마. 우리 동갑이야.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가 쌍둥이라서 그래. 형이 3분 먼저 태어났거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겸은 이제 막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진우가 손에 힘을 풀어 진겸은 다시 볶음밥을 먹을 수 있었다. 숟가락을 몇 번 옮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배가 불렀다. 분명 이거 하나 정도는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느려지는 속도에 진우가 웃으며 물었다.

“배부르지?”

“……응.”

“원래 많이 못 먹어. 자극적인 건 더 조금 먹고…….”

진겸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우가 뚜껑을 닫고 주변을 물티슈로 꼼꼼히 닦고는 테이블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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