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순간 ‘내 거’가 아니라 ‘백진겸 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진겸이 눈을 굴리다가 정장을 꺼내 몸을 돌렸다. 집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웃던 진우의 표정이 또 가라앉았다.
진겸은 손에 쥔 정장을 진우에게 내밀었다.
“갈아입어.”
“지금 안 가도…….”
“원래 준비는 미리 해야 하는 거야. 나 방에 들어가 있을까? 아니다. 진우, 네가 들어가서 입고 나와.”
그렇게 강제로 옷을 갈아입게 된 진우는 넥타이까지 매야 했다.
티와 청바지 입은 걸 보다가 정장을 입혀 놓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진우는 진짜 정장이 잘 어울렸다. 이 형편에 맞춤 정장도 아닐 텐데, 모자라거나 넉넉한 것 없이 딱 맞았다.
진겸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연신 감탄하자 진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눈만 굴렸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건 좋은데 어색해서 그런지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간다.
“진짜 잘 어울린다. 캐주얼한 것도 좋은데, 와…… 진우 너, 인기 많겠다.”
“……별로.”
“네가 철벽 치는 거겠지. 회사에서도 너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 많겠는데? 몰래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을지도 몰라. 같은 직장에 네가 있으면 나 같아도 계속 볼 것 같은데?”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근육은 있지만 과하지 않아서 정장을 입으니 날씬한 몸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구부정하지 않아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화보였다.
작중에서도 예쁘장한 미남이라고 몇 번 언급 되는데 진짜였다.
진겸이 너무 예쁘게 생기다 보니 진우가 미남으로 보이지만, 탁원범, 선수혁과 있으면 또 다른 느낌이 났다.
계속 구경하던 진겸이 정신을 차린 듯 순간 몸을 떨더니 진우의 손을 잡았다.
“잘 다녀와.”
“아니, 진짜 지금 안 가도 되는데…….”
“아니야. 가야 해. 점심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 넌 회사 가서 먹어. 거기 구내식당 공짜 아니야? 아닌가? 돈 내나? 아무튼! 가서 먹어. 자, 자!”
현관까지 진우의 등을 쭉 밀었다. 처음엔 다리에 힘을 주던 진우가 결국 제 발로 걸었다. 집이 좁아 몇 걸음 옮기자 금방이었다.
“진짜 혼자 있어도 되겠어?”
“괜찮아. 내가 애도 아니고. 집 지키는 거 못 할까 봐?”
“밥…….”
“알아서 잘 챙겨 먹을게. 나 라면도 끓일 줄 알아.”
라면 끓이는 게 뭐 대수겠냐마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혼자서 뭐든 먹을 수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그렇게 강제로 출근하게 된 진우는 찝찝하다는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골목을 지나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옥상 난간에서 손을 흔드는 진겸은 그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집으로 들어온 진겸은 주변을 쭉 둘러봤다. 거실은 너무 깔끔해서 건드릴 게 없었다. 당장 시급해 보이는 건 신발장과 방이었다.
“백진겸 나쁜 놈…….”
지금은 저 자신이지만 백진겸은 진짜 나쁜 놈이었다.
아까 진우가 구두를 신는데 닳아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에 비해 신지도 않은 백진겸의 신발은 한가득했다. 사치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심히 과했다.
여기서 팔 수 있는 건 팔아야겠다 싶어 거실에 쫙 늘어놓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을 골라냈다. 반 이상이 새것이었다.
이런 거 살 돈으로 빚 갚는 것을 도와줬으면 진작에 이사했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직접 사기보다는 받은 게 훨씬 많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악역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조차 굳이 이래야 하나 싶었다.
진겸은 툴툴거리면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배고픈 줄 모르고 정리하는 데 열중했다.
신발장을 정리하고 팔 것들을 한곳에 잘 쌓아 놨다. 그리고 다음은 방이었다.
방에 있는 물건 반 이상을 정리해서 거실이든 밖이든 어디로든 옮겨 진우가 잘 공간을 마련해 주려 했다.
침대는 슈퍼 싱글이라 둘이서 못 잘 것 같고, 바닥이라도 치워 놓으려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나중에 백진겸이 돌아오면 어쩌지?’
빙의했다가 간혹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그곳에 남았다. 그동안 추억을 쌓아서이기도 하고,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서이기도 했다.
자신은 전자일지, 후자일지 몰라도 정말 만약에 백진겸이 돌아온다면…….
‘……미리 편지라도 써 놓을까? 진우가 한 게 아니라 잠깐 온 내가 한 거라고…….’
정말 만약에 상상하던 일이 벌어졌을 때, 백진겸이 드잡이할 사람은 너무도 뻔했다. 진우는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하겠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백진겸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줄곧 살펴본 핸드폰 메시지를 통해 이미 파악했다.
백진겸은 또라이고 나쁜 놈이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차단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들은 백진겸의 어장에 살게 된 불쌍한 물고기에 불과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자신은 없어서 나중에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낼 생각이었다.
그다음에는 초기화해서 깨끗한 핸드폰을 만들 거다. 무음으로 해 놨는데도 계속해서 오는 메시지 때문에 보기도 싫었다.
백진겸에게 남길 편지는 방 정리를 다 끝내고 나서 쓰기로 하고 다시 분주히 일했다.
정리가 끝난 건 네 시간이 지나서였다.
지쳐서 침대에 걸터앉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배고픈 줄도 모른 채 계속 움직였나 보다.
조용한 집을 울리는 배꼽시계 소리에 진겸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 배는 부끄러움도 모르나 보다. 왜 항상 크게 소리를 내는 건지.
거실로 나온 진겸은 순간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에 멈칫거렸다. 분명 정리한다고 한 건데, 방에 있던 물건들을 거실로 옮겼더니 이곳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어쩌지?”
뒤를 돌아보니 진우가 누울 수 있는 공간만큼은 나왔는데 그 외 공간에는 물건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름 정리한다고 잘 분리해 놓은 건데도 이렇게 보니 엉망이었다.
“……진우가 도와줄 거야.”
진우를 위해 한 일이지만, 결국 그가 도와주게 생겼다.
원래 사람은 못 하는 일은 혼자 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거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제일 좋은 법이다.
진겸은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는 냉장고를 열어 봤다. 반찬이 가득했다. 밥솥을 보니 밥은 없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 때문에 진우가 밥을 해 놓지 않아서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겸은 주방을 뒤적거리며 먹을 게 있나 살폈다.
인스턴트를 잘 먹지 않다 보니 집에는 그 흔한 라면조차 없었다. 쌀이 있긴 했는데 밥 짓는 법을 몰라서 다시 닫았다.
배를 살살 문지르던 진겸은 정리하면서 찾은 지갑을 들었다. 안에는 만 원짜리 몇 장과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이름으로 된 체크 카드도 있었다.
“……써도 괜찮겠지?”
즉석밥을 사 올지, 다른 걸 먹을지 고민하면서 문 옆의 고리에 걸린 열쇠도 챙겼다.
밖에 나와 문을 잠갔다. 문고리를 몇 번 당겨 잘 잠겼는지 확인도 했다.
벌써 다섯 시다.
진우가 퇴근하고 오기 전에 다녀오려고 서둘러 발을 뗐는데, 그 순간 철제 계단 밟는 소리가 났다.
계단 쪽을 보고 있자 짙은 검은 머리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였다.
그는 굉장히 언짢은 듯 얼굴을 구기고 있다가 밖에 나와 있는 진겸을 발견하곤 표정을 풀었다. 너무 한순간에 바뀐 탓에 진겸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위로 올라온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겸이 밖에 나올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손에 들린 지갑과 집 열쇠를 발견했다.
“형. 어디가?”
“즉석밥 사러…… 뭐야? 벌써 퇴근이야?”
어안이 벙벙한지 진겸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보통 직장인들 퇴근 시간이 여섯 시일 텐데, 다섯 시인 지금 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사실 집에 혼자 있을 때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정리하다 문득문득 두리번거렸다.
진우와 함께 병실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낯선 곳에 혼자 남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내심 그가 빨리 오길 바라고 있었다.
진겸은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 가까워 목을 꺾어서 올려다봐야 했지만 괜찮았다.
“오늘 연찬데 나간 거라 일찍 퇴근한 거야?”
“응. 회의만 참석하고 바로 왔어. 즉석밥은 왜? 아…… 집에 밥이 없었겠네.”
그제야 밥솥과 냉장고에 밥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밥을 할 때 6인분 정도 해서 유리그릇에 1인분씩 나눠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둔다. 그러면 진겸이 배고플 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진우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는 듯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는 건 점심도 먹지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배고프겠다…….”
“조금 고파.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응. 그 전에…… 먼저 해결할 게 있어서. 그것만 하고 가자.”
당장 진겸의 주린 배를 채워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뒤따라온, 아니 같이 온 불청객들 때문이었다.
“여긴 진짜…… 올 때마다 주차할 곳이 없어서 너무 불편해. 이사 좀 시켜.”
“안 한다잖아.”
“네가 억지로 시켜. 아니면 올 때 둘이 오든가.”
“오늘은 네가 온다고 한 거잖아. 시끄러우니까, 입 닫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진겸의 귓가에 들렸다. 동시에 머리 두 개가 계단 쪽 난간에 보이더니, 이내 커다란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겸은 저들이 왜 이곳에 온 건지 의문을 품었다가 진우를 따라온 거란 생각에 눈을 굴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도 직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원범과 수혁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