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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5)화 (15/92)

15화

수혁은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검지로 제 볼을 톡톡 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백진겸은 백진겸인데. 묘하게 거슬렸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백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는지도 궁금했다.

진겸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수혁의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조상 중에 혼혈이 있는 건지 푸른빛이 살짝 섞인 검은색이었다. 아니면 주변의 물건이 눈동자에 비쳐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뭔가 오묘했다.

그러다가 그가 한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사는 게, 왜요?”

“그러게. 네가 사는 게 어떻다고 내가 이런 질문을 했지? 잊어.”

질문은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결론을 내린다. 진겸은 황당해 입을 삐쭉거렸다. 진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서로 입을 다물자 병실에는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진겸은 아픈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간지러운 게 사라지기는 했다. 문제는 아까 너무 벅벅 긁었는지 이불에 쓸린 팔이 따끔거린다는 거였다.

계속 움직이면 더 아플 것 같아 최대한 편한 자세를 만들고는 몸에 힘을 쭉 뺐다. 그러다가 궁금한 게 생겨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안…… 가요?”

“내가 갔으면 좋겠어?”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그럼?”

“네?”

“무슨 의미였냐고.”

별다른 의미를 내포한 건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가지 않는 그에게 이유를 물은 거였다. 여기서 무어라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냥 말 그대로예요. 시간이 늦었으니까…… 안 가도 되냐고 물은 거예요.”

길게 말했더니 목이 따끔거렸다. 게다가 푹푹 찢긴 목소리는 영 적응이 안 됐다.

‘그러고 보니 나랑 백진겸이랑 목소리가 비슷하네?’

본인 목소리가 어떤지 의식하는 일은 흔치 않다. 신체 중에서 제일 늦게 늙는다는 부위가 목소리라고 했다.

당연히 2차 성징을 겪으면서 목소리는 변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나이가 들어도 본인이 가진 특유의 소리는 그대로라는 거다.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진겸은 말을 하면서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하더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수혁은 이미 반쯤 사라진 눈을 빤히 보며 물었다.

“나 걱정해?”

“……예?”

대화가 영 이상하다. 진겸은 졸린 눈을 억지로 뜨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내려오기만 했다.

“아니면 말고.”

“…….”

“사실 가고 싶어도 못 가.”

“……왜요?”

“탁 이사 데려가야 해.”

“아…….”

수혁은 이곳에 있는 것이 제 의지가 아니라는 걸 알렸다. 진우를 따라 나간 원범을 기다리는 거였다.

진겸은 그가 왜 여기에 남았는지 이해하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사실 이미 감긴 눈과 아득해지는 정신에 물을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거다.

그렇게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겸은 다시 잠들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병실로 다시 돌아온 세 사람은 침대 옆에 있는 수혁을 발견했다.

진우가 손가락을 움찔거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분명 일어난 걸 보고 나갔는데 그새 잠든 모양이었다.

“왜 여기 계세요?”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넓은 소파도 있으니까요.”

수혁이 무언가를 한 건 아니지만 그의 성격이 어떤지 지난 시간 동안 봐 왔기에 괜스레 불안했다. 그의 흥미를 끄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안다.

선 이사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제 뒤에 있는 탁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사람이 쓰러진다 해서 걱정할 이들이 아니다. 그게 아는 사람이어도.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잘 살피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진겸이 쓰러진 것에 대해 꽤 당황한 듯 보였다.

병원까지 운전한 선 이사도, 앞만 응시하면서도 뒷좌석을 신경 쓰던 탁 이사 또한 그랬다.

지뢰를 건드려 버린 건 아닐까?

진우는 탁 이사를 만난 것을 행운이자 불운이라고 여겼다. 그의 관심을 끌었기에 비서로 취직할 수 있었고, 진겸의 병원비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백 퍼센트 선의로 지원하는 건 아님을 알고 있다.

진우는 잠든 진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너무 가까워지면 안 되는데…….’

저들의 덫에 걸린 건 혼자로 족했다.

여러 생각을 하던 진우의 옆으로 훈일이 다가와 섰다.

“그새 잠든 거야? 우리 얘기한 지 10분밖에 안 되지 않았어?”

진우에게 진겸의 몸 상태에 대해 말을 했으니, 깨어나면 그가 전하면 되긴 했다.

“문제 생기면 바로 호출해.”

“응. ……미안해.”

“나 의사야.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깨어나기도 했으니 너도 이제 좀 쉬어라. 네가 쓰러지면 안 되잖아.”

“……응.”

“너네는 안 가냐?”

아직 의자에 앉아 있는 수혁과 침대 아래쪽에 멀뚱히 서 있는 원범을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덩치 큰 사내놈들이 정장을 입고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니 또다시 장르가 변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겸이는 병약한 도련님이고 너네는 똘마니 같아.”

“그럼 난 병약한 도련님과 사랑에 빠진 역인가?”

“아니, 넌 서브야, 서브. 넌 짝사랑만 하다가 끙끙 앓아야 해.”

수혁의 대답에 악담이나 다름없는 말을 태연스럽게 내뱉은 훈일이 고개를 돌렸다.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원범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훈일도 그가 진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진겸의 병원비도 지원하는 거였으니까.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담당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 못 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자신이 아는 진우와 진겸의 집 형편으로는 더욱 그랬다.

보험을 들어 놓은 것도 아니어서 병원비도 상당했다. 진우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보험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이미 진겸의 병이 명확해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채빚. 그게 제일 문제였다.

원범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공은 쟤지.”

훈일의 말에 수혁의 시선이 원범을 향했다.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한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야.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

“그럼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데려왔는데.”

“아니. 넌 안 돼. 사실 쟤도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한 훈일이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너네 같은 악마 새끼들한테 우리 천사들 못 줘.”

“……소설책 좀 적당히 읽어.”

계속 대꾸해 주려던 수혁이 닭살 돋는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에도 원범의 시선은 옮겨지지 않았다. 진우 또한 계속 진겸을 보고 있었다.

훈일의 눈이 곱게 휘었다. 지금 이 방에서 진겸을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원범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이 달라진 걸까. 갑자기 동하는 흥미에 훈일의 눈이 반짝거렸다.

훈일이 나간 후에도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수혁과 원범이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한 시간이 더 지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우가 허리를 바르게 펴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작은 소리였으나,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난 당사자한테 따로 들을게.”

“…….”

수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를 만큼 진우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나중에 또 진겸을 만나겠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탁 이사의 비서인 이상, 선 이사와는 계속해서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같은 회사니까. 하지만 진겸은 아니다. 어떠한 접점도 없다. 굳이 형제의 직장 상사와 얽힐 필요는 없었다.

진우는 무표정하게 수혁을 바라봤다.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그거야 모르는 거지.”

“선 이사님.”

곱게 모인 미간에 수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우가 저렇게 본다 해서 수혁의 마음을 바꿀 순 없었다.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원범도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도 따로 듣지.”

“……이사님?”

원범까지 그러자 진우가 당황하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하는 원범이 집에 온 것도 이상했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간 것도 이상했다.

가끔 그와 여러 가지 일을 함께하기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단둘이었다. 수혁이 끼어들려고 해도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가끔 백진겸이 비집고 들어오려 했으나 절대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게 진우의 신경을 콕콕 찔렀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왔다.

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범은 그 눈을 봤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어.”

수혁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별로 없던 참이었다.

“내일 보지, 백 비서.”

“…….”

진우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병실 문을 연 원범은 나가기 전에 잠시 침대에 시선을 두었다.

두 사람이 가고 나자 병실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익숙한 쓸쓸함이었다.

깨어날 법도 한데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는 진겸은 고른 숨을 내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바르게 누운 채로, 들썩이는 가슴이 아니라면 다른 생각이 들 정도로 숨도 얕았다.

진우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제 손보다 작고 새하얀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제 손등에 이마를 붙였다.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겸아.”

잠든 진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말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새벽녘에 일어난 진겸은 손이 답답해 슬쩍 시선을 옮겼다.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진우가 보였다. 건너편에 보호자용 침대가 있는데…… 왜 여기서 불편한 자세로 자는 걸까.

움직이면 그가 깰까 봐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피곤한 모양이었다.

어제오늘, 병실에서 자는 데다가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았으니…….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겸의 표정은 멍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잠이 덜 깬 상태였다.

그대로 손을 뻗어 진우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건드리면 깰 것 같았는데 몸을 조금 들썩이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겸도 그대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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