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카드를 썼다는 메시지를 받지 못했으니, 아마도 선 이사가 사 준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가 진겸에게 사 줄 이유는 없었다.
가장 익숙한 로고의 쇼핑백을 열어 보니 곱게 포장된 가방이 들어 있었다.
그걸 꺼내 들었을 때 진겸이 깨어나 밖으로 나온 거였다.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면서 가방을 다시 쇼핑백에 넣었다.
“선 이사가 사 준 거야?”
“……응.”
진겸은 느리게 말하면서 크게 하품하더니 진우의 옆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아직도 얼굴에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진우야…….”
힘없는 목소리에 쇼핑백을 옮기던 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나 속이 이상해…….”
배랑 가슴 게다가 목구멍이 아직도 답답하다. 확실히 많이 먹긴 했다. 조금 움직이다가 잤어야 했는데 너무 바로 누워서 그런가 보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워치는 또 왜 안 찼어?”
“……오자마자 잤어.”
진우가 일어나더니 장식장에 놓여 있던 워치를 진겸의 왼손에 채웠다.
충전을 안 한 워치의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인상이 절로 써졌다. 손을 뻗어 진겸의 이마에 붙이자 따끈했다.
“정확히 아픈 곳이 어딘데?”
백진겸이 아프다는 말을 무기처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진우는 백진겸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모든 걸 다 주고, 원하는 걸 해 주며 편안한 삶을 살게 해 주려 했다.
백진겸의 입에서 나오는 아프다라는 단어는 날카로운 칼로 변해 진우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최대한 단단하게 단련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진우의 온 신경은 언제나 백진겸을 향해 있었으니까.
진겸은 배를 문지르다가 진우의 표정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픈 게 아니라 아까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진겸이 서둘러 말했다.
그의 앞에서는 ‘아프다’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까 전화했을 때, 진우의 목소리에는 온갖 감정이 묻어났었다.
아프다는 말은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진겸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냥 체한 것 같아. 속만 그렇지, 다른 덴 다 괜찮아. 이것 봐. 심박수도 괜찮잖아.”
워치 화면을 보여 주며 괜찮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저번에 처방받았던 소화제 남았을 거야.”
진우는 이마에 붙였던 손을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고 했으나, 굳은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진겸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며 소화제를 찾는 진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백진겸에 대한 진우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서로에게 절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빙의된 백진겸이 악역이라는 것과 소설의 전반적인 스토리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챙겨 주는 건 굉장히 운이 좋은 거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걸까?
진겸은 입술을 쭉 내밀며 좌우로 움직였다.
우선 진우가 과하게 챙기거나, 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챙기려 하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걸 첫 번째 목표로 세웠다.
방금도 자신이 잔다고 불을 켜지 않고 저 약한 불빛을 내는 오래된 스탠드를 켰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바로 한 소리했지만 아마 몇 번은 더 말이 오고 가야 고칠 수 있을 게 뻔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것들은 습관처럼 굳어지기 마련이다. 그걸 단시간에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랬기에 천천히, 학습하듯 바꿔야 했다.
“형, 이거 먹어.”
진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진우가 소화제와 생수가 든 물컵을 함께 건넸다.
알약을 보고는 뚱한 표정을 짓던 진겸이 물을 입 안 가득 넣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모인 입술 사이로 알약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꿀꺽 삼켰다가 붙어 버린 알약에 혀를 쭉 내밀고 ‘웩’ 소리를 냈다.
진겸은 울상을 지으며 컵에 담긴 물을 다시 입에 머금고는 눈을 꾹 감고 억지로 삼켰다. 이번에는 알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긴 했는데 입에 남아 있는 쓴맛이 너무 심했다.
“우웩…….”
속을 게워 낸 건 아니지만 한 번에 물을 꿀꺽 삼킨 데다가 쓰디쓴 알약을 먹어서 그런지 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우가 선반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포장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진겸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아!”
진겸은 어서 제 입에 넣으라며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초콜릿은 진겸의 입이 아닌 진우의 입으로 들어갔다.
“……뭐야!”
“뭐가?”
“나 주는 줄 알았잖아!”
뾰로통하게 말하자 드디어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체한 것 같다는 진겸의 혈색이 나쁘지 않아서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다니,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진우는 입에 있는 초콜릿을 혀로 밀어 다른 쪽으로 옮겼다. 단걸 좋아하지 않아 한동안 먹은 적 없는 쌉싸름한 단맛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맛이었지.’
이 초콜릿도 사 놓은 지 꽤 된 거였다. 초콜릿에도 카페인이 들어 있다 보니 잘 먹지 않았다.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진겸이 초콜릿을 꺼냈던 선반을 살폈다. 눈을 데구루루 굴렸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또 없어? 마지막이야?”
“응. 마지막이었어.”
“……맛있어?”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슬쩍 진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초콜릿이 먹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우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사탕은 있는데.”
“나 먹어도 돼? 많이 안 먹고 하나만 먹을게. 응? 입이 너무 써……!”
애절하기까지 했다. 정말 먹고 싶은지 두 손을 모아 말하는 모양새에 결국 진우의 웃음보가 터졌다.
쇼핑백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이 아프다는 소리에 곤두박질을 쳤었다. 그런데 또 자신을 올려다보며 사탕 하나만 달라는 진겸의 모습에 모든 게 상관없어졌다.
그저 건강하게, 영원히 제 옆에만 있길 바랐다.
진겸은 침대에 눕고 진우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진우는 방에서 자는 게 어색한지 계속 뒤척였다.
“침대에서 자라니까…….”
“난 바닥도 괜찮은데 형은 아니야. 침대 말고 바닥에서 자면 다음 날 아파서 안 돼.”
“우리 이사 가면 침대 넓은 걸로 바꾸자. ……아니다. 그땐 각자 방이 있겠구나.”
진겸은 방 문패도 똑같은 걸로 해서 걸어 놓고 거실에 넓은 소파와 텔레비전도 놓자고 했다. 주방에 식탁도 놓고 간식 창고도 만들자며 연신 쫑알거렸다.
천장을 보고 있던 진우가 가볍지만 행복감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세탁기도 드럼 세탁기 놓고, 건조기도 사는 거야. 그럼 바로 건조시켜서 입을 수 있대.”
“편하겠네.”
“그치? 그리고 스타일러도 놓고…… 아, 방 세 개짜리로 가야 하나? 하나는 옷방으로 해서 네 옷을 가득 걸어 두자.”
“내 옷보다 형 옷이 많지 않을까?”
옆으로 누워 진우를 보며 말하던 진겸이 베개에 얼굴을 푹 묻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말이 사실인지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몇 번 삐쭉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백화점 돌아다니다가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옷 무지 많았거든? 근데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는 거야.”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지 그랬어. 카드 쓰라고 했잖아.”
바르게 누워 있던 진우도 옆으로 몸을 틀었다. 침대 위에 있는 진겸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을 전부 껐어도 밖에 있는 가로등에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은 충분히 보일 만한 밝기였다.
“나도 사고는 싶었지. 근데 사이즈를 몰라서 나중에 가서 사려고 매장 외워 놨어.”
정장을 골랐던 그 매장. 비싸긴 했는데 확실히 태가 예뻤다. 원단 촉감도 괜찮았다. 진우에게 참 잘 어울릴 것들이 꽤 많았다.
밖에 있는 것들을 팔면 정장 살 수 있는 돈이 생길 게 분명했다.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으로 정가를 알아보고 캐럿 마트에 올릴 계획이었다.
그걸로 진우 고기도 사 주고, 옷도 사 주고, 신발도 사 줄 거다. 일해서 빚 갚는 것도 같이할 생각이었다. 이 몸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다.
* * *
처음으로 집에서 잠을 잤다. 이틀 동안 병원에서 자다가 집에서 눈을 뜨니 느낌이 새로웠다.
어젯밤,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깐 깨어났다가 진우가 다시 자라며 토닥거리고 간 것도 옅게 기억났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였다.
진겸은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누운 채로 팔다리를 쭉 펴 기지개를 켰다.
“으으…… 으아!”
일부러 소리를 내가며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뒷머리가 잔뜩 눌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몸을 바르게 폈다.
“아자!”
오늘 무엇을 할지 미리 계획을 짜 놨기에 서둘러야 했다.
출근 준비로 바빴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밥도 해 놓고 갔다. 찌개에 반찬까지.
이제 막 일어나 배가 고프진 않았다. 게다가 소화제를 먹긴 했는데 아직도 어제 먹은 게 전부 내려가진 않았다.
밥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따가 먹어야겠다 싶어 먼저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보일러를 켤 줄 몰라 달달 떨다가 겨우 찾아서 따뜻하게 씻을 수 있었다.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감싸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미세먼지조차 없어 너무도 깨끗한 하늘이 눈에 담겼다.
어제 이사 가자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탁 트인 전망을 더는 못 보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아쉬울 것 같았다.
진겸은 히죽 웃으며 지난번 정리하면서 찾아 놓았던 신문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안에서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찍어야 더 잘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배경이 신문지일 수는 없으니 물건을 놓을 공간만큼 깔아 놓고 안에 있던 것들을 차곡차곡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