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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30)화 (30/92)

30화

임기표가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손에는 그저께 보여 주었던 프린트와 판매 중인 상품 목록이 든 바인더 파일이 들려 있었다.

입구 가까이에 앉았던 아까와는 달리 원범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진겸에게 했던 설명을 똑같이 줄줄이 늘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겸은 분명 그때와 같은 말인데, 다단계라는 걸 알고 들으니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 마진을 줄여서 그 수익을 준다는 부분에선 역시나 솔깃했다가 등급 이야기가 오가자 파사삭 식어 버렸다.

진겸이 혼자 뾰로통하게 있는 동안, 원범은 고개를 삐딱하게 튼 채 프린트를 내려다보다가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임기표의 앞에 있던 프린트를 제 쪽으로 가져와 직접 넘기면서 봤다.

“최고 등급이…… 다이아몬드? 이게 되려면 얼마가 필요한 거지?”

그냥 대답하면 되는데도 임기표는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진겸을 봤을 때도 느꼈던 알 수 없는 그 기분을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서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원범의 태도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특히 아까부터 뒷말을 뚝 잘라먹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예의 없는 사람을 마주한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임기표는 수상쩍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정말 영업부장 맞아요?”

“왜? 그렇게 안 보여?”

“조금요. 계속 말이 짧으셔서 그런가?”

“불만이면 그쪽도 짧게 해. 내가 그런 쪽으론 마음이 넓어.”

“괜찮습니다.”

원범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임기표는 최대한 짜증을 억눌러야 했다. 작은 회사여도 거래를 터놓는 편이 좋으니, 더는 트집 잡지 않고 질문에 답했다.

“……다이아몬드는 2,500PV가 필요합니다.”

“2천 5백만 원? 싸네. 5천만 원이면 더 높은 등급도 살 수 있나?”

“아니요. 다이아몬드가 최고 등급입니다. 고객들한테 사은품을 많이 준다고 하셨는데…… 규모가 큰 회사인가 봅니다?”

“HAM전자 몰라?”

원범의 눈썹이 꿀렁였다. HAM전자를 어떻게 모르냐는 투였다.

임기표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전자 제품은 대기업과 이름 있는 중소기업만 알고 있었다.

HAM전자는 처음 들어 본 회사명이었다.

조금 전, 나간 김에 검색도 해 봤었다. 하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나와 있지 않은 회사였다. 혹시 대기업의 자금 세탁을 위한 페이퍼 컴퍼니가 아닌가 싶었다.

영업부장이라는 명함까지 있는 걸 보면 비자금을 위한 걸지도 모른다. 괜히 헛짓거리하면 안 되니 정확히 어떤 회사인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원범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외국에선 인지도가 높아서 HAM전자 제품이라고 하면 믿고 사는데.”

원범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며 프린트를 손끝으로 툭 쳤다.

“……소식이 느리시구나?”

“아, 생각해 보니 들어 본 것 같네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모를 리가 없지.”

임기표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원범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을 깔보고 있다고 느꼈다. 여기서 모른다고 했다간 저 입꼬리에 거만함이 얼마나 묻어날지,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원범은 테이블에 올렸던 손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사은품이 뭐가 있지?”

“사은품으로 제일 많이 나가는 제품은 휴대용 티슈나 물티슈죠. 가격이 조금 나가는 것도 괜찮으시면 화장품이나 홍삼도 있고요.”

“제일 많이 나가는 거 말고. 비싼 거로.”

“그렇다면 이게 좋습니다.”

임기표는 상품이 나와 있는 파일을 펼쳤다. 비싼 것도 괜찮다는 말에 손수 손으로 짚어 가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특히나 시중에서 판매하는 유명한 상품들 말고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 쪽으로 유도했다. 이왕이면 회사에서도 마진을 많이 남기는 편이 좋으니 더 열심히 설명했다.

원범은 설렁설렁 들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진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캔버스 가방을 만졌다. 저 대화에 끼어들 필요도, 생각도 없었다.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진우는 도대체 탁 이사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건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탁 이사가 맡은 계열사는 전부 숙지하고 있다. 그중 HAM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로 손을 뻗고 있긴 했으나 아직 전자 쪽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

이미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의 기술력이 상당하고 밑바닥부터 시작하느니 중소기업을 인수 합병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다.

진겸은 몸을 비틀어 진우에게 가까이 붙어서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진짜 투자하게 둘 거야?”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다단계에 투자하는 건 정말 아닌 듯했다. 원범의 투자 금액이 자신과는 확연히 다를 것을 알기에 더 걱정됐다.

“글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가 진짜 저거 다 사면 어떡해?”

“어떡하긴. 돈 날리는 거지.”

자기 상사 일인데도 진우에게선 말려야 한다는 기색이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 중에서 걱정하는 건 진겸 혼자였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계약이 체결됐다.

거래 물품은 고가 제품인 홍삼 세트와 화장품 세트로 전부 자체 생산하는 제품이었다.

임기표는 원범의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우리 쪽도 급해서 말이야. 사흘 후까지 받아야 하는데. 아, 공장이랑 얘기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준비됩니다!”

* * *

조용했던 내부와는 다르게 밖은 차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로 시끄러웠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우는 슬쩍 눈을 돌려 진겸을 살폈다. 건물 밖으로 나올 때까지 진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환불이 목적이었고 30만 원을 돌려받았으니 기분이 나아져야 할 텐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굳은 입매가 그 증거였다.

입술을 좌우로 움직이던 진겸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새까만 원범이 걸렸다.

“진짜 거래할 거예요?”

“아까 계약서 쓴 거 못 봤어?”

“봤죠! 제가 궁금한 건…… 왜 계약서를 쓰셨냐는 거예요. 여기 다단계 회사잖아요. 수익 구조가 엉망이라 아무리 돈을 투자해도 의미가 없는데……!”

“넌 그런 곳에 투자했고.”

“그건…….”

자신이야 뭣도 모르고 한 거라지만 원범은 아니었다. 더구나 금액 차이가 심했다. 제 손에 들린 봉투에는 환불받은 5만 원짜리 지폐 6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원범이 한 계약은 금액 단위가 달랐다. 더구나 보통은 계약금만 주기 마련인데, 짧은 시일 내로 물건을 받으려면 전액을 달라는 임기표의 요구에 그 자리에서 전액 계좌 이체하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었다.

계약서를 쓰자마자 입금이라니.

물론 원범에게 5천만 원이야 당장 쓸 수 있는 돈이라지만 너무 급하게 결정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물론 자신이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물며 비서인 진우도 가만히 있었다.

새하얀 손이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다단계 사업이라도 하시려고요?”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원범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사업은 지금 하는 걸로 족해. 재미 좀 보는 것 같아서 나도 재미 좀 보려고.”

“……재미요?”

이해 못 할 말을 하는 원범을 빤히 보았다. 무슨 생각이 있으니 저런 거겠지 싶다가도, 자신이 당했던 걸 생각하면 이대로 두기에 찜찜했다.

괜히 자신을 따라와서 그가 헛돈을 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진겸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제 말에 힘을 실어 달라며 진우의 팔을 팔꿈치로 쳤다.

진우는 제 팔을 툭툭 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봤다.

힐끗, 진우의 반응을 확인한 진겸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원범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진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날 걱정하는 거야? 내 돈을 걱정하는 거야?”

“당연히 돈이죠!”

고민 없이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원범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당연히 돈이 걱정되는 건 알지만 잠깐의 망설임조차 없다니, 기가 찼다.

“……네 걱정 같은 거 필요 없어. 그 돈이나 잘 간수해.”

말을 마친 원범은 몸을 돌려 앞으로 가 버렸다.

진겸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걱정해 줘도 뭐라 그래……!”

“걱정할 만큼 돈 없는 사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진우는 진겸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방 틈 사이로 뚝 떨어트렸다. 계속 이렇게 들고 있다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차 가지고 올게.”

“……응.”

원범을 설득하는 덴 실패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

무더운 열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원범의 뒷모습이 어쩐지 그림자 같았다. 그의 그림자는 아래에 있는데도 말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괜스레 쓸쓸해 보였다.

* * *

세 사람을 태운 차가 향한 곳은 한정식집이다. 지금 위치에서 거리가 좀 있는 곳이었다. 원래 회사로 가려다가 원범의 한마디에 목적지가 변경됐다.

한정식집에 도착해 주문할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원범은 원래 말이 없었고, 진우도 그랬다.

진겸만이 두 사람 눈치를 살폈다. 특히 아직도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으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진우야 같은 집으로 갈 테니 받지 않아도 되지만 원범은 아니다. 선글라스가 참 잘 어울리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제 것, 아니 백진겸 것이다.

딱히 그가 가져갈 것 같진 않아도 밥 먹으러 와서까지 쓰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진겸은 차에 타자마자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담아 가방에 넣어 두었다. 진우에게도 벗으라고 했지만 운전하는 데 햇볕이 강해서 쓰고 있겠다고 하길래 그러라 했다.

그때 차마 원범에게는 벗으라는 말을 하지 못했더니 아직도 쓰고 있는 거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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