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진겸이 눈을 찌푸리며 말하자 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하네. 가지 싫어하는 건.”
“내가 가지를 싫어했어?”
“응. 다른 건 잘 먹는데 가지만 유독 안 좋아했어. 식감도 별로고 맛도 없다고 안 먹더라고.”
“먹은 기억은 없지만…… 그래 보여. 젓가락이 저기론 안 가.”
백진겸이 가지를 싫어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진겸은 은근히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물건들도 그렇고 옷, 신발, 그 외 액세서리를 살폈을 때, 취향이 아닌 것도 있지만 대체로 마음에 들었다.
그냥 백진겸의 센스가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 익숙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진겸과 진우가 화기애애하게 식사하는 동안에도 원범은 제 앞에 놓인 것만 묵묵히 먹었다.
세 사람이 먹는 양으로 나온 상차림이었지만 다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남은 반찬들을 보고 진겸이 아쉬운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이미 배가 불러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소스가 강해 먹지 못했던 떡갈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대로 포장해서 가져가고 싶었다. 그렇게 했어도 간이 세 진우가 먹지 못하게 했겠지만 말이다.
식사가 끝난 후 진겸은 자신이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에 섰다.
“얼마예요?”
“아까 계산하셨어요.”
“네? 누가요?”
분명 자신이 제일 먼저 방에서 나왔다. 먼저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의아해하며 묻자 직원은 웃는 얼굴로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이사님이 계산하셨어요.”
여기서도 이사로 불리나 보다. 얼마나 자주 왔으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청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진겸은 직원과 이야기하는 중에 뒤로 지나가는 원범을 쫓아가기 위해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사님!”
다리 길이의 차이인지. 아니면 그냥 걸음 속도의 차이인 건지는 몰라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사님!”
두 번이나 부르고 난 후에야 원범이 멈추어 섰다.
“점심 사 주셔서 감사해요. 맛있게 먹었습니다!”
“섭섭할 뻔했어.”
“예?”
그냥 고맙다고 인사하면 대화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섭섭하다니? 뭐가?
진겸이 무슨 말인지 몰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원범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은 곳은 이번에도 머리였다.
정수리에 놓인 묵직한 무게에 진겸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타인과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원범이 자꾸만 자신에게 손을 뻗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이대로 힘을 주려고 하는 걸까? 섭섭해서?
혼자서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진 몰라도 꽤 복잡해 보이는 진겸의 표정에 원범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고민을 그리하는 건지.
“사 준 건 난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건 직원이었잖아. 그게 섭섭할 뻔했다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제야 이해한 진겸이 머쓱해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원범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살살 문질렀다. 사락사락 거친 손에 머리카락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더 촉감을 즐기고 싶었지만, 진우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손을 거뒀다.
‘……아쉽다고? 이게?’
순간 자신에게 생긴 감정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쉬움을 선사한 진겸에게선 자신과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진우를 발견하곤 그에게 달려가는 뒷모습만 보였다.
“……미쳤군.”
작게 읊조린 소리는 곧장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진짜 회사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진겸은 대중교통으로 집에 간다고 했다.
“여기 버스도 잘 안 다녀. 시내까지만이라도 타고 가.”
외근이 아니라 연차였다면 같이 갔을 텐데, 진우는 진겸을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와중에 원범이 해결책을 내밀었다.
“타고 가.”
“예?”
“나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해. 타고 가라고.”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은 원범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환자를 그냥 보낼 정도로 매정하진 않아. 이것도 받았고.”
원범은 턱을 살짝 치켜들어 까딱였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진겸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받았다는 것이 선글라스라는 걸 깨닫고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제 것이 아니기에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타이밍을 잡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설마 저걸 가져갈 생각을 할 줄이야.
게다가 자기 입으로 스스로 매정하지 않다고 말하다니.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고, 바늘로 쿡 찌르면 녹색 피가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겸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 원범이 답을 들을 생각 않고 뒷좌석에 타더니 문을 쾅 닫았다.
진우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는 원범과 진겸을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점심도 먹자고 하지 않았다면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을 거다.
원범이야 식당으로 안내하면 되고, 자신은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해결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덕분에 진겸과 점심을 먹을 수 있었으니 오늘만큼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진우가 슬쩍 웃으며 보조석 문을 열었다. 같이 타고 가도 된다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형.”
“그럼…… 회사까지만 부탁해.”
괜히 또 신세를 지는 듯해 진겸은 마음이 불편했다. 점심은 맛있게 얻어먹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다른 의미였다.
한정식집까지 오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버스가 지나가는 걸 보긴 했으나 정류장은 보질 못했다. 지도 앱을 이용하면 집에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야 있겠지만 낯선 곳이라 헤맬 게 뻔했다.
그나마 익숙한 곳에 내려서 집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 회사까지만 동승을 부탁했다.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회사로 찍으려 하는데, 이번에도 원범이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
“……저희 집 말씀이십니까?”
“그럼 우리 집이겠어? 제시간에 퇴근하고 싶으면 빨리 움직여.”
“네. 알겠습니다.”
진우가 익숙하게 주소를 찍자 보조석에 타고 있던 진겸이 캔버스 가방을 꽉 쥐었다. 회사까지만 가면 알아서 집에 갈 수 있었다.
“회사로 가도 돼……!”
몸을 길게 빼 진우 쪽에 붙여 속삭였으나 좁은 차 안에서 원범이 못 들을 리 없었다.
“또 쓰러져서 백 비서 불러내지 말고 그냥 가.”
“죄송해서 안 돼요! 오늘 도와주신 것도 일부러 시간 내신 거잖아요.”
“내 시간은 내가 관리해.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네.”
매정하리만큼 딱 잘라 말하는 원범에 진겸은 진우를 향했던 몸을 바르게 해 정면을 응시했다.
아까도 걱정하지 말라더니 이번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너무 서운했다.
자신은 걱정이 돼서 그런 건데 제 마음 씀씀이가 거절당한 느낌이었다.
목적지를 설정한 진우가 슬쩍 진겸을 살폈다. 아랫입술이 삐쭉 나온 게 기분이 조금 상한 듯했다.
원래 원범의 말투가 저렇다는 걸 알지만 굳이 진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원범이 흥미를 가졌다 해서 당장 무언가를 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언제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 * *
벌써 오후 4시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차량이 늘어난 탓에 시내에서는 조금 막히기도 했다.
집까지 가려면 좁은 언덕길을 올라야 하기에 진겸은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올라가기 힘들잖아.”
“마트 들렀다가 가게. 전단지 봤는데 오늘 수박 할인하더라고.”
“수박? 먹고 싶으면 내가 퇴근할 때 사 갈게. 무거운데 그걸 어떻게 들고 가려고 그래.”
“에이. 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집까지 수박 한 통 못 들고 가겠어? 치약 박스도 들고 갔는데…….”
물론 그 여파로 아직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긴 하지만 수박 한 통 들고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은 수박보다는 할인 전단지에 있는 삼겹살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을 꺼내지 못한 거였다.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는 게 전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영 미덥지 않다는 얼굴로 진겸을 응시했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때때로 팔을 주무르고 있는 걸 목격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작고 새하얀 손으로 팔뚝을 내내 주물렀는데, 저 팔로 수박을 들고 갔다간 오늘 밤과 내일 더 고생할 게 뻔했다.
원래 근육통은 더 움직여서 풀라고들 하지만 애초에 근육이 별로 없는 사람은 쉬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럼 큰 거 사지 말고 작은 걸로 사.”
자신이 사 가면 되지만 진겸이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결국 마트 앞에 깜빡이를 켜고 멈춰 섰다.
진겸은 안전띠를 풀고 진우에게 먼저 인사를 하려고 하다가 아까 일이 떠올라 몸을 돌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범은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어디를 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들었으리라 생각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고마워. 이따 집에서 봐.”
진겸이 내리려 하자 조용히 있던 원범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못 먹은 냉수. 오늘 먹으러 가도 되나?”
“될 리가요.”
진겸이 말하기도 전에 진우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잘랐다.
“30만 원 받아 내는 것도 도와줬는데 냉수도 못 줘?”
“그건…….”
“좀 야박한 거 아닌가? 백 비서.”
“전혀 야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사님.”
원범이 없어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동행해서 조금 더 수월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집으로 그를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