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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7)화 (47/92)

47화

화장실로 들어온 진겸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아…… 하.”

빨간빛을 반복적으로 내뿜고 있는 워치가 좀처럼 진정되질 않는 진겸의 상태를 알렸다.

“후…… 후우…….”

최대한 심호흡해 가며 심박수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놀란 게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진겸은 변기 뚜껑을 내리고는 그 위에 앉아서 눈을 꾹 감았다.

큰 소리가 카페에 울린 그 순간부터 이미 워치에서는 심박수 상승을 알리고 있었다.

진우가 보면 안 될 것 같아 손으로 감싼 채 화장실로 온 거였다.

“……하아.”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이 제발 진정하길 바랐다.

차라리 심박수만 높은 거면 상관이 없는데 호흡이 가빠져서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머리도 어지러웠다.

살포시 감았던 눈꺼풀과 미간엔 어느새 주름이 져 있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쓰러졌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꽤 고통스러웠다.

“씨이…….”

왠지 억울했다.

사람이 놀랄 수도 있고 심장이 빨리 뛸 수도 있는 거지. 왜 그걸로 자신이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냥 고통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있다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것 같아 천천히 일어났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심박수 수치가 높았다.

나가기 전에 거울 앞에 섰다. 웃기게도 그사이 창백해진 건지 혈색이 없었다.

찬물로 세수하면서 손끝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붉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페이퍼 타올로 대충 물기를 닦아 내니 아까보다는 붉어져서 혈색이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창백하네.’

슬슬 나가려는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라서 뒤로 슬며시 비켜났다.

들어온 사람은 손님이 아닌 원범이었다. 그는 진겸을 보더니 이내 문을 닫았다.

“저…… 비켜 주셔야 제가 나가는데요.”

일반 화장실보다 층고가 낮아서 원범이 더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입구가 좁아서 이렇게 앞에 있으면 지나갈 수가 없었다.

비켜 달라고 했음에도 눈앞에 있는 회색빛 정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사님?”

급하신 거 아니었나?

진겸은 좁은 틈 사이로라도 지나가기 위해 옆으로 슬쩍 움직이려 했다. 그러면 원범이 비켜 주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굳건했다.

졸지에 문과 원범의 사이에 끼게 된 진겸이 울상을 지었다.

“이제 진정이 됐나 보네.”

“예?”

무슨 소리인가 싶어 원범을 올려다봤다.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네, 좀.”

이제는 원범이 무섭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단둘이 있기엔 아직 어색했다. 게다가 이런 비좁은 공간에 있으니 더 그랬다.

“…….”

“저…… 나가야…….”

진겸은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원범이 손목을 잡아 올렸기 때문이다.

워치를 직접 확인한 원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심박수가 높잖아.”

“…….”

“몇이 정상인 거야?”

대답해야 하는데 순간 멍해져서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진겸은 순간 떠올랐던 생각을 지웠다. 원범이 자신이 걱정돼 화장실까지 따라왔다는 건 너무 멀리까지 간 생각 같았다.

‘내가 진우도 아니고.’

만약 진우였다면 원범이 따라왔어도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점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긴 할 테니까.

“백진겸. 대답 안 해?”

“……조금 빠른 것뿐이에요. 이제 괜찮아요.”

물론 아직도 심박수가 빠른 건 맞았다. 정상 범주로 들어가기엔 원범 때문에 무리였다.

“……됐다, 그럼.”

원범은 잡았던 진겸의 손목을 아래로 내렸다. 이대로 힘을 주면 부러질 것같이 얇았다.

손목을 놔주지 않은 채 물끄러미 진겸의 얼굴을 응시했다. 세수를 한 모양인지 아까보다는 얼굴이 붉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진겸은 뺨에 닿은 커다란 손에 살짝 목을 움츠렸다. 뺨에 닿은 손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을 쓰다듬는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러다가 점차 강도가 세졌다.

지금 문지르고 있는 위치는 아까 하상일의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원범은 엄지로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부위만 집중적으로 문질렀다.

“아, 아파요.”

“……참아.”

“뭐 묻었어요? 저 방금 씻었는데…….”

무언가 묻어 있었다면 거울을 봤을 때 알아차렸을 거다. 하지만 창백한 피부만 보였지 다른 건 없었다.

강도 높은 문지름에 진겸의 몸이 기우뚱 움직였는데 이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냈다.

하지만 점점 더 아파져 오자 자연스럽게 눈이 찌푸려졌다.

“다 닦였어요?”

“아니. 조금만 더.”

“……됐어요?”

“어.”

더 문질렀다간 백설기 같은 볼이 너무 새빨갛게 변할 것 같아 엄지로 쓱 훑는 걸로 끝냈다. 그러다가 원범의 손이 움찔하더니 그대로 멈췄다.

‘내가 지금 뭘…….’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원범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서둘러 진겸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 당혹스러웠다. 근래에 자꾸만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이사님?”

진겸이 얼얼해진 볼을 문지르며 부르자 황급히 화장실을 나가 버렸다.

“……왜 저래? 아, 아파.”

거울로 뺨을 확인한 진겸은 붉어진 부분이 따가워 찬물로 식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여는데 그 앞에는 진우가 있었다.

‘왜 다들 화장실 앞에 있는 거지. 혹시 내가 안에 있어서 다들 못 들어오고 있었나?’

진겸은 슬쩍 옆으로 비켜났다.

“화장실 가려고?”

문 앞에서 비켜 주었음에도 진우는 들어가지 않았다.

“……많이 놀랐지?”

“아까? 당연하지. 큰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안 놀라. 근데 왜 그런 거야?”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어?”

진우가 여기에 온 건 자신 때문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소리가 꽤 컸고 놀란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걱정이 됐겠지.

진겸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응, 괜찮아. 아팠으면 진작 너한테 말했지.”

“……형, 이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내가 비켜 드리냐고 물은 게 다였는데. 왜?”

순간 원범이 제 볼을 문지르던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얘기를 한 건 아니니 그건 쏙 빼고 말했다.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겸이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진짜 아무 일도 없었을 터였다.

진겸이 화장실을 가길래 기다렸다가 상태를 확인하려 뒤따랐다. 그런데 갑자기 원범도 화장실로 가길래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진짜 괜찮아! 앞으론 아까처럼 그러지 마. 공공장소에서 그러면 안 돼.”

“알아. 그러게, 왜 이상한 놈이랑 붙어 있어?”

“이상한 놈? 누구?”

누구랑 붙어 있었는지 떠올린 진겸이 웃으며 진우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점장님이 내 옷에 뭐 묻혀서 그거 닦아 주신 거였어. 그리고 놈이 뭐야. 아무리 그래도 형이 일하는 곳 매니저고 나이도 많은데.”

“……다른 의미 없는 거면 됐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세수는 또 왜 했어. 얼굴 빨개졌잖아.”

빨갛게 변한 뺨에 진우의 손이 닿았다. 평소에도 몸에 열이 많은 진우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얼굴에는 걱정이 한 아름 묻어 있었다. 축 내려간 눈썹과 입꼬리 게다가 은근히 떨리는 눈동자까지. 진우가 지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가는 거야?”

“가야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나도 너랑 같은 직장 다니고 싶다. 그러면 점심도 같이 먹고 커피 마시러 카페도 올 거 아니야.”

“그건 같은 직장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거야 알지. 그냥 해 본 말이야.”

진겸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 입술을 삐쭉거렸다.

집에서 매일 보기는 해도 밖에서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게다가 이곳은 자신이 일하는 일터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였을지는 몰라도 진우가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 잘하려고 신경 썼다.

진겸이 아쉬운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어서 진우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걱정으로 굳어졌던 몸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놀랐을 진겸에게 미안해 이곳으로 왔건만, 이번에도 자신은 편안한 안식을 얻어 간다.

하루하루가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평생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우는 웃으며 진겸의 손목을 살포시 쥐고 워치를 확인했다.

진겸의 평균 심박수를 생각하면 높은 편이지만, 조금 전 크게 놀랐고 점차 안정을 찾는 중이라는 걸 고려하면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까 놀란 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거나 머리가 어지러우면 바로 말해. 아니다. 이따가 일 끝나고 훈일이 형한테 다녀올래? 연락해 놓을게.”

“괜찮아. 어차피 며칠 뒤에 병원 가야 하잖아. 그냥 집으로 갈래.”

수술 2주 전에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또 검진한다고 들었다. 무슨 검사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건지.

그래도 성공적인 수술을 위한 거라고 해서 이해했다. 게다가 수술 며칠 전에 입원해야 해서 최대한 병원은 가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던 진겸의 상태를 원범이 먼저 알아챘다는 게 속상했다.

자신이 진겸에 대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원범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수혁도 이상함을 느끼긴 했다. 단지 원범의 행동이 빨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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