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진우는 힐끗거리는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과정에서 하상일과 눈이 마주쳤다.
차마 웃는 얼굴은 나오질 않아 고개만 까딱였다. 진겸이 이곳에서 일하는 이상 그와 계속 보게 될 텐데 불편한 사이가 되는 건 좋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진겸이 오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와 히죽 웃으며 물었다.
“방금 저 사람, 진겸 씨 동생 맞아? 아까 그렇게 들었던 것 같아서.”
“네, 맞아요. 아까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동생도 놀란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진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서 더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진우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길 바랐다.
직원은 괜찮다고 했다.
“그럼 동생이랑 애인이랑 아는 사이야? 같이 있잖아.”
잠시 애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던 진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인 아니에요. 저 진짜 애인 없어요.”
손님들이 들을세라 뒷말은 작게 속삭였다.
진겸이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우가 테이블을 정리했다.
“가려고?”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요. 이제 회사로 들어가 봐야죠. 이사님은 안 가십니까?”
“나? 난 진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진겸……이요?”
수혁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진우의 행동이 일순간 멈췄다. 눈을 찌푸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폴폴 풍겼다.
저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괜히 끈적하게 느껴졌다. 물론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라지만 굉장히 찝찝했다. 애초에 부르는 일이 생기지 않으면 참 좋겠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건 무리일 듯싶다.
진우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물었다.
“어제도 오셨다면서요. 정장도 주셨고.”
“줬지. 정장은 입어 봤대?”
“아니요. 다시 돌려드리려고 그대로 뒀습니다.”
“안 입을 거면 그냥 버려. 처음부터 진겸이 주려고 산 거야.”
수혁은 약 올리듯 일부러 ‘진겸’을 말할 때 강하게 발음했다.
그에 진우의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원래부터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엄연히 직장 상사다. 하지만 테이블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입혀 보지 그랬어. 되게 잘 어울렸는데. 그 모습이 잊히지 않더라고. 그래서 준 거거든, 그 옷. 다시 보고 싶어서.”
“…….”
“다른 것도 다 잘 어울렸는데……. 아쉬워.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분명 진우를 놀리려 꺼낸 말인데 어느샌가 진심이 담겨 버렸다. 확실히 정장을 준 이유는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탈의실에서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나왔을 때의 그 마음, 그 생각. 그게 똑같을까 싶은 궁금증도 있었다.
만약 그때와 같은 마음이 든다면…….
상념에 빠져들려는 수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우의 질문 때문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진겸이한테 진심이십니까?”
“내가 뭘 했다고 진심까지 필요해?”
“아니면 접근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카페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서 끝맺음을 맺지 않으면 수혁이 계속해서 진겸을 찾아올 것 같았다.
“그냥 잘 지내보자는 건데 그게 나쁜 건가?”
“예. 지금은 전이랑 다르니까요. 기억을 잃은 후엔 사람도 쉽게 믿는 것 같고…… 경계심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날 경계하고 믿으면 안 되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으니 접근하지 말아라?”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하던 수혁이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의자에 딱 붙었던 등이 떨어지더니 서서히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대각선으로 앉아 있던 수혁과 진우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먼저 눈을 피하면 지는 사람들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 이사님의 심심풀이를 위해서 진겸이가 이용당하는 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수혁의 접근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고 그와 얽히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컸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완전히 무너질까 봐.
기억이 돌아온 후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전까지는 진겸에게 상처가 될 만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진우의 바람은 수혁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날려졌다.
“내가 왜?”
“…….”
“백진우 비서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나 본데. 너한테 백진겸을 통제할 권한은 없어. 아무리 가족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진우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수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진겸이 애도 아니고 걔 너랑 동갑이야. 기억 상실증에 걸린 거지, 어린애가 된 게 아니라고. 알잖아?”
“그만해.”
그동안 조용히 있었던 원범이 한마디 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급박한 긴장감이 흐르던 테이블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졌다. 그건 순간의 정적을 만들어 냈을 뿐 오히려 테이블의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시끄러운 카페에서 대화한 거라지만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넓지 않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귀는 이쪽으로 열려 있었다.
원범의 한마디가 그들까지 오싹하게 했다.
테이블 주변으로 긴장감이 섞인 정적이 흘렀다.
양 비서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 끼어들기 싫어서 삐딱하게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다가 서둘러 자세를 바르게 했다.
사실 모르는 척하고 있으려 했는데, 테이블 아래로 길게 뻗힌 원범의 발끝이 까딱이는 걸 봐서 움직인 거였다.
그의 기분이 지금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몸짓이라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우리 먼저 일어날까요? 선 이사님은 계신다고 했죠? 그럼 이사님 잔은 두고 우리 것만 치울게요. 빈 테이블에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 보이잖아요.”
진우가 겹쳐 놓은 쟁반을 들고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내 잔도 놔.”
“……이사님은 가셔야죠.”
양 비서는 ‘지금 네가 그만하라고 했는데 여기 더 있을 생각이냐?’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심정을 듬뿍 담아낸 표정이었지만 원범은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바쁜 거 끝났고. 오늘 회식이라고 했잖아. 회식은 원래 3차까지 하는 거 아닌가? 양 비서.”
“아니, 왜 그걸 저한테…….”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간 원범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너무도 뻔했다.
양 비서는 들고 있던 쟁반을 다시 내려놓았다.
안 갈 거면 안 간다고 처음부터 말을 하든가. 다 정리하고 일어나니까 말하는 건 무슨 심본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원범의 앞에 다시 잔을 옮겼다.
“당연히 3차까지 가야죠. 백 비서, 들었지? 지금이 2차니까 우리 3차도 가야 해. 회식은 원래 3차가 진국인 거야. 그 진국에 형님분도 같이 가야 할 것 같아. 3시에 끝나지? 곧 끝나겠네. 같이 가. 알겠지?”
“……예?”
속사포 랩을 하듯 귓가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버려 진우는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방금 ‘예.’라고 한 거지? 그럼 다 같이 3차 가면 되겠네. 이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백 비서 형님분이랑 다 알고 계신 것 같고. 원래 회식은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운 거잖아요.”
양 비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3차 가면 곧 저녁일 거고 그러면 4차로 밥 먹고 5차로 또 카페 가면 되겠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네. 5차.”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결정된 회식이었다. 5차까지 하기로 한 회식 중 3차는 진겸이 퇴근하고 나서 이루어졌다.
진겸은 금방 간다고 하던 진우가 계속 앉아 있자 일하면서도 힐끗거리며 살폈다. 넷 중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퇴근 시간을 맞았다.
분명 되게 일이 많은 회사로 기억하는데 왜 다들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걸까?
특히 원범에게 회사란 큰 의미를 차지했다. 그의 인생 전부를 투자할 만큼 애착이 컸다.
그 모습은 《그레이》에서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주된 배경이 회사고 주인공들도 사장과 비서 포지션이었다.
아직은 이사 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장이 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진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다들 회사 안 가세요? 점심시간 한참 전에 끝났는데…….”
“진겸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진겸 씨라고 불러도 돼요? 따로 부를 만한 호칭이 없어서요.”
궁금증이 더해질 무렵 양 비서가 말을 걸었다.
“네, 괜찮아요.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진겸 씨, 우리 같이 회식하러 갈래요?”
“……회식이요?”
요즘엔 점심에도 회식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카페까지 갔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다른 곳을 또 가나 싶었다.
진겸의 시선이 진우를 향했다. 아까부터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웃기는 했으나 억지웃음이라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원범과 수혁을 살폈지만 두 사람은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전 괜찮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진우의 눈치를 보자 양 비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이 카페에서 나가고 싶었다. 지금도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온몸이 뚫릴 지경이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대놓고 쳐다보진 않아도 이 테이블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라도 궁금하겠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시간 치정극만큼 재미난 건 없다.
실제로 이 테이블에 온 신경을 쏟으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몇 없었지만 양 비서에겐 여러모로 귀찮은 상황이었다.
탁 이사, 선 이사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괜한 소란을 만들어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백 비서, 형 챙겨.”
양 비서는 진우의 팔을 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3차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