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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50)화 (50/92)

50화

양 비서가 알려 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꽤 많은 양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평일 낮이어도 찾아온 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항상 집 근처나 아르바이트하는 곳만 오가던 진겸은 차를 타고 멀리 왔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고개를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하는 모습에 진우가 손을 뻗어 진겸의 얼굴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가다가 모자 하나 사자. 이러다가 얼굴 빨갛게 익겠어. 선크림은 챙겼어?”

“가방에 있어. 아침에 출근할 때 많이 발랐어.”

“지금 5시 다 되어 가는 거 알지? 선크림은 2시간에 한 번씩은 덧발라야 한다고 했어.”

종일 알로에 수딩젤과 함께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능한 한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지 않게 잘 관리해야 했다.

“나중에 아프지 않게 자주 발라.”

“알았어. 이따가 바를게. 지금은 구경 먼저!”

처음에 양 비서가 회식이라고 하길래 너튜브에서 본 드라마에 나오는 고깃집 같은 데 갈 줄 알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서 동영상을 자주 보는 진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영상으로 배우는 중이다.

“무슨 재밌는 대화를 하길래 둘이서만 속닥거려? 같이 좀 듣자.”

수혁이 다가오자 진우가 슬쩍 진겸의 앞을 막아섰다. 티가 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일일이 반응해 주기가 귀찮았다. 앞으로도 자주 이럴 텐데 그럴 때마다 부딪치면 제 손해일 게 뻔했다.

진겸에게 백진우는 가족이고, 자신은 타인이니까.

옆으로 다가간 수혁이 진겸에게 향하는 해를 가리고 섰다. 수혁의 큰 키 덕분에 온몸에 그늘이 드리워진 진겸은 한순간에 더위가 사라지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제부터 계속 수혁에게 챙김을 받고 있는 듯했다. 괜히 온몸이 간지러워 몸을 떨었다.

평소라면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사람들이 보이자 양 비서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서둘러 내렸다.

수혁은 햇볕이 눈부셔 눈을 반쯤 찌푸렸다.

“양 비서. 이다음은 뭐 할 건데?”

“잠시만요!”

사실 양 비서에겐 카페에서도 가깝고 회사에서도 가까운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장소를 찾아보다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사람이 하나 늘었다는 이유로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곳을 선호하는 원범이 이곳까지 순순히 따라오려고 할지 궁금했다.

‘진짜 여기 올 줄은 몰랐지.’

오는 동안 뭘 해야 상사에게 구박받지 않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뭐라고 하면 도망가야지, 뭐.’

방패로 삼을 사람이 둘이나 되니.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양 비서는 웃는 얼굴로 두 팔을 쫙 벌렸다.

“놀이기구 먼저 타실까요?”

진겸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담았던 바이킹을 떠올렸다. 그 옆에 있는 것들도 하나씩 쭉 훑어보다가 진우에게 물었다.

“우리 같이 놀이동산에 온 적 있었어?”

“……아니. 없었어.”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놀이동산만이 아니다. 같이 어딘가를 간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가족과 함께 놀러 다니긴 했었다. 기억엔 없지만 아마 그때 갔을 수도 있겠다.

“그럼 오늘이 처음이네.”

활짝 웃은 진겸이 손으로 바이킹을 가리켰다.

“저거 타자!”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하자 진우는 단호히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저런 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안 돼. ……계속 안 된다고 해서 미안한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냥 왔다 갔다 몇 번 하는 건데도?”

“흥분하며 심박수가 올라가잖아. 형한텐 위험할 수도 있어.”

진겸은 여기까지 왔는데 눈앞에 있는 놀이기구를 못 탄다는 현실에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이게 진우의 탓은 아니었기에 그의 팔을 잡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알았어. 그런 얼굴 하지 마.”

“……미안해.”

“내 몸이 아픈 게 네 탓은 아니잖아. 그럼 네가 나 대신 타 줘.”

“……응?”

그렇게 바이킹을 제일 타고 싶어 했던 진겸을 제외한 네 사람에게 선택권이 돌아갔다.

진우는 당연히 타는 쪽이었다. 양 비서도 바로 긍정을 표했다.

“당연히 타야지. 진겸 씨 몫까지 제가 열심히 탈게요. 맨 뒤에 앉을 테니까 잘 봐요.”

“네!”

진겸은 그저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애들이나 타는 거잖아.”

“이사님. 무슨 소리세요! 이건 애, 어른 할 것 없이 다 탈 수 있는 겁니다! 애들은 저거 타는 거고요.”

양 비서의 손끝이 향한 곳은 큰 바이킹 옆에 있는 진짜 어린이들을 위한 미니 바이킹이었다.

그걸 본 수혁이 픽 웃으며 진겸을 향해 장난스레 말했다.

“이거 못 타면 저거라도 타는 게 어때? 저 정도면 심박수가 올라갈 일은 없지 않아? 아…… 저건 애들 거라 안 되나? 아니지. 애잖아.”

“……저 애 아니에요!”

진겸이 눈에 힘을 줬다. 아무리 바이킹을 타고 싶다지만 애들용을 뺏어서 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수혁의 시선이 머리끝에 닿았던 걸 떠올리고는 매서운 눈으로 네 남자를 휙휙 돌아봤다.

그들의 키가 큰 편이어서 더 작아 보이는 거지. 자신은 평균보다 조금 작은 거였다.

“형은 안 탈 거예요?”

“흥미 없어. 저런 거.”

“무서워요?”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진심이 아닌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헛웃음을 내뱉은 수혁이 입매를 삐딱하게 올렸다.

“애가 못 타서 대신 타 달라는데, 타 줘야지. 그게 어른 된 도리겠지?”

“…….”

“타고 나서 어땠는지 말해 줄게. 너무 아쉬워하진 마.”

그 ‘애’라는 게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알아차린 진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수혁을 올려다보다가 원범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이사님은요? 안 타세요?”

“내가 탔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원래 이런 건 다 같이 타야 재밌잖아요. 저는 못 타지만요…….”

진겸이 시무룩한 투로 말했다. 원범을 보던 시선이 바닥을 향했고 입술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못 타서 실망한 모양이다.

딱히 탈 생각이 없었던 원범은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탈게.”

딱히 간절하진 않았지만 다 탄다는 말에 진겸은 기대감에 차올랐다. 대리 만족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진우가 이용권을 사러 매표소로 향하자 진겸은 목이 꺾일 정도로 치켜들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거대한 바이킹을 따라 고개가 움직였다.

그때 뒤통수를 받치는 느낌이 나 고개를 돌리자 수혁이 보였다.

“목 꺾이겠다.”

“재밌겠죠? 진짜 재밌어 보이는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 목소리였다.

진겸이 왜 탈 수 없는지 알기에 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뒤통수를 받치기만 했다.

“별로 재미없어. 그냥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끝이야.”

“형은 이거 타 봤어요?”

“옛날에 타 봤지.”

한국에서는 아니지만.

진겸은 부럽다는 얼굴로 수혁을 빤히 바라봤다.

“전 한 번도 타 본 적 없어요!”

“네가 뭘 해 본 기억이 있겠어?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나 마찬가질 텐데.”

그건 그랬다. 기억을 깡그리 잊었으니 뭐든 처음인 게 너무도 당연한 거였다.

수혁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기억이 없기에, 어쩌면 그래서 세상이 더 즐겁고 해맑은 건지도 모르겠다.

바이킹 타기는 금방 끝이 났다.

양 비서만 양팔을 들고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 세 사람은 어느 각도로 움직이든 무표정했다. 관리자도 오기가 났는지 기구를 더 많이 작동시켰음에도 열광하는 건 양 비서뿐이었다.

밖에서 구경하던 진겸이 손을 흔들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자 진우와 수혁이 웃어 주기는 했다.

진겸은 바이킹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멈추기 전까지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이사님도 카메라 보셨네.”

안 보는 줄 알았는데 카메라를 보고 있는 원범이 찍혀 있었다.

참 다 다른 사람이라는 게 제대로 포착된 사진들이었다. 비록 자신이 사진 속엔 없어도 추억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소중했다.

놀이기구 타는 건 바이킹 하나로 끝이 났다. 양 비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진겸이 타길 원했기에 탄 거지 본인들이 원한 건 아니었다.

진겸이 계속 바이킹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진우가 슬며시 의견을 냈다. 아까 수혁이 했던 말과 같은 거였다.

“그네는 잘 탔으니까 작은 바이킹이라면 타도 괜찮을 거야. 속도도 저 정도면 빠르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탈래?”

“너까지 왜 그래.”

“타고 싶어 했잖아. 뭐 어때,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른은 타면 안 된다고 적힌 것도 아니잖아.”

물론 어린이를 위한 바이킹이지만 어른이 못 타는 건 아니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키가 큰 것만 아니면 말이다.

결국 진우의 손에 이끌려 미니 바이킹 앞에 서게 된 진겸은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미니 바이킹 앞에 옹기종기 모인 성인 남성 다섯. 그중 가장 새하얀 진겸은 유독 튀어 보였다.

그중 넷이 정장을 입고 입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거리거나 아예 대놓고 보기도 했다.

그렇게 뒷좌석에 앉아 안전띠를 착용한 진겸은 관리자가 확인하러 오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와…….”

분명 너무 작아서 긴장 따윈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애초에 큰 바이킹이 목적이었다가 이렇게 작은 걸 탔으니 어쩌면 시시할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그건 오산이었다.

분명 타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왼쪽 손에 찬 워치를 확인했다.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화면에 표시된 수치도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진우에게 워치가 보이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만약 봤으면 가차 없이 내리라고 했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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