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점심은 진우랑 먹을 거예요.”
“알고 있어. 거기에 나도 끼워 달란 소리야.”
그 정도야 뭐.
진겸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너만 돌면 되는데 수혁은 굳이 데려다주겠다며 옆에서 걸었다.
“이사님은 안 바쁘세요? 진우는 아침 보고한다고 서류 잔뜩 들고 들어가던데.”
“바쁘지. 아침 보고야 진즉 들었어. 내가 비서한테도 안 듣는 잔소리를 진겸 씨한테 계속 듣는 거 알아?”
“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아.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수혁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항상 짓는 웃음보다는 조금 더 잔잔했다. 진겸이 보기에는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다.
원범이 날카롭게 생긴 미남이다 보니 서브공인 수혁을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설정했을 거다. 상대적인 느낌을 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와 참 잘 어울렸다.
“선 이사님.”
양 비서가 그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비서 아직 안에 있어?”
“예, 보고할 내용이 좀 많아서요. 오셨다고 알릴까요?”
“아니, 됐어. 데려다주면서 겸사겸사 온 거야. 점심에 올게.”
마지막 말은 진겸을 보며 했다.
양 비서는 멀어져 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둘이 어떻게 같이 왔어요?”
“복사하고 있는데 이사님이 오셨어요. 여기요.”
“어. 고마워요. 점심에 온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같이 점심 먹자고 하셔서요. 구내식당에서 먹을 건데…… 이사님도 구내식당에서 드실까요?”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진우에게 구내식당이 있느냐고 물었다. 진우가 있다고 말하자마자 오늘은 무조건 구내식당에서 먹어야 한다고 말해 뒀다.
밖에서 먹는 것도 좋지만 구내식당에서 먹어 보고 싶었다. 맛을 떠나서 북적북적한 그 분위기에서 식판으로 음식을 받아 식사하면 어떨까 기대되었다.
진겸이 걱정스레 묻자 양 비서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모인 입술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오늘은 드시겠네요. 식당이 아주 시끄럽겠어요.”
양 비서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진겸 씨. 복사한 거 이 파일에 하나씩 넣어 줘요. 한 장씩 말고 두 장을 이렇게 붙이면 넘겼을 때 바로 내용이 이어져서 보기 편하거든요. 그거까지만 하고 잠깐 쉬어요.”
“네!”
일거리를 준 양 비서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
진겸은 양 비서의 기분이 왜 좋아진 건지는 몰라도 전염이 된 듯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흥얼거리며 일했다.
원범과 양 비서가 회의에 가고 진우와 진겸만 남아 있었다.
진우는 자기 할 일이 바쁜 와중에도 진겸이 심심하지 않도록 소일거리를 줬다.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그냥 프린트 정리나 서류 정리 같은 단순 업무만 시켰다.
열심히 서류를 정리하던 진겸이 말할 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점심 먹을 때 양 비서님이랑 같이 먹어?”
“아니. 한 사람은 여기 지켜야 해서 따로 먹어.”
원범이 자리를 비우거나, 출장을 갈 때는 같이 먹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 사람은 자리를 지키는 편이다. 그래야 그 사이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먼저 먹으니까 형은 그때 나랑 나가면 돼.”
“따로 먹는구나. 그럼 이사님은?”
“드시고 싶으실 때 드시는 편이지.”
원범의 식사는 대부분 양 비서가 챙겼고 점심 약속이 없다면 근처 식당을 예약하는 편이다. 진우가 오고부터는 그가 같이 먹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진겸과 단둘이 먹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 이사도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는 말에 바삐 움직이던 마우스를 멈춰야 했다.
“선 이사랑?”
“응. 아까 복사하러 갔다가 만났어. 점심 같이 먹자고 하시더라고.”
진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선 이사는 구내식당 이용 잘 안 해. 그냥 우리끼리 먹어도 돼.”
“점심에 온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될까?”
“……온대? 여길?”
진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손에 쥔 마우스의 모양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각오하긴 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데다가 같은 건물에 있으니 당연히 전보다 더 많이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탁 이사는 바로 앞에 있으니 더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선 이사는 층이 다르기도 하고 해외 지사로 파견 나간 직원의 횡령 문제가 터져서 비상이 걸린 상황이라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지난번 수혁이 상황 파악을 위해 직접 해외 지사에 다녀오긴 했으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또 나갈 예정이라고 들었다.
출국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분간만 무시하면 될 줄 알았더니 첫날 바로 찾아온 모양이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진우는 밝게 웃으며 서류를 정리하는 진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제 정장을 입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참 잘 어울린다. 어떤 옷을 입어도 당연히 잘 어울리겠지만 정장은 뭔가 결이 달랐다.
게다가 이곳은 회사고, 제 옆에 진겸이 있으니 느낌이 묘했다.
“이렇게 같이 일하는 것도 괜찮네.”
“응?”
실수할까 봐 집중하고 있던 진겸이 못 듣고 되물었다.
“좋다고. 형이랑 있는 거.”
“나도 좋아. 너랑 있는 거.”
진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엔 진겸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소문은 ‘새로운 낙하산 비서’였다.
출처는 인사과였다. 사원증을 만드는 것 때문에 양 비서와 얘기를 나눈 직원을 통해서였다.
양 비서는 기본 인적 사항만 적힌 이력서와 함께 2주 정도 일할 아르바이트생이라고만 전했다.
당시 인사과 직원도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채 기간도 아닌 데다 제대로 된 이력서도 없는 아르바이트생의 사원증을 만들라 하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사원증 제작을 부탁하면서 시끄러워지지 않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결국은 소문이 나 버렸다.
진우가 처음 출근했을 때도 사내가 소문으로 시끌시끌했었다.
남들은 서류 전형에서부터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면접을 보고 입사했는데, 진우는 낙하산이었으니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진우를 탐탁지 않게 보는 직원이 많다. 여전히 지나가면서 대놓고 흘겨보거나 툴툴거리는 이들이 있긴 했다.
정작 진우 본인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서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양 비서는 모니터 아래에 계속해서 뜨는 비서 단톡방 메시지에 실소를 머금었다.
‘소문 빠르네.’
출근한 지 이제 3시간이건만 메신저가 있는 시대라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베이지 정장남’에 대한 얘기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거라고는 탁 이사, 선 이사와 아는 사이라는 것뿐이었다.
아침엔 백 비서와 같이 출근하고, 탁 이사가 퍽 다정하게 구는 것을 봤다면 아는 사이라는 걸 짐작할 법도 했다.
사실 아까 양 비서만 본 거였지만, 탁 이사가 진겸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본 직원이 있었다. 아마 거기서 소문이 덧붙여지지 않았을까 싶다.
선 이사와 복사기 앞에서 대화를 나눈 데다가 나란히 탁 이사의 사무실 방향으로 들어갔으니 이것 또한 진실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거기에 또 다른 소문이 무성하게 더해지고 있었다.
숨겨 놓은 회장 아들이다, 아니다. 손자다.
거래처 사람이다.
탁 이사 손님이다.
해외 바이어다.
기타 등등 온갖 헛소문이 덧붙여졌다.
그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내용은 ‘탁 이사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였다.
글을 쭉 읽어 내리던 양 비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우가 왔을 때랑 너무도 비슷한 반응이다.
양 비서는 진겸이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진우를 툭 건드렸다.
“오늘 구내식당 가서 먹는다고 했지?”
“예. 그러려고요.”
마우스 휠을 쭉쭉 내리던 양 비서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경고하듯 말했다.
“웬만하면 밖에서 먹어. 보는 눈이 생각보다 많네.”
“……그래요?”
“백 비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아는데, 진겸 씨는 어떨지 몰라서 뭐라 말을 못 하겠네.”
양 비서가 본 진겸의 마지막 모습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거였다. 월미도에서 너무 밝게 웃으면서 즐겁게 돌아다니길래 아픈 사람이라는 것도 잠시 잊었었다.
그만큼 겉으로 봤을 때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더구나 너무 해맑아서 더 그랬다.
“괜히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잖아.”
“이미 소문이 다 났나 보죠?”
“시끌시끌하다. 아주 난리 났어. 지금 횡령 건 때문에 회사 분위기 안 좋은데 잘됐다 싶은 거지. 뭐 하나 물리면 다들 거기로 몰려들 거야. 솔직히 지금 시기에 진겸 씨 오는 거 안 반가웠어.”
“양 비서님.”
진우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양 비서가 그의 팔뚝을 툭 쳤다.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 그런 의미 아니야.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가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그래.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괜히 날 선 시선 받는 것도 억울하잖아.”
맞는 말이라 차마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지금 회사 분위기가 안 좋은 건 사실이다. 해외 지사에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국내에도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대대적인 감사가 이루어질 거란 말이 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원범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오늘 회의도 그 내용이었다.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진우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양 비서가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런 거란 걸 알아서였다.
“2주지만 충분히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는 거 알지?”
“……알죠.”
“잘 챙겨. 생각보다 파급력이 셀 것 같아서 그래.”
어느 정도 시끄러워질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진겸이 워낙 튀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화력이 더 셌다. 괜히 복사를 시켰나 뒤늦게 후회도 됐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