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점심이 되자 선 이사는 약속했던 대로 찾아왔다.
때마침 나온 원범도 같이 움직이게 됐다.
진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참으로 편했다. 아침에 끼어서 올라온 기억 때문에 조금 걱정했었는데, 탁 이사와 선 이사가 타고 있는 걸 본 직원들이 인사만 할 뿐 같이 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내식당으로 내려와 줄을 설 때도 먼저 가시라며 비켜서는 직원이 많아 배식을 받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진겸은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둘러볼 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식판을 들고 빈자리에 앉으려는데 거기서부터 말 없는 기 싸움이 오갔다.
네 사람이니 둘씩 앉으면 되건만, 기어코 진우와 수혁이 진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한걸음 물러선 채 가만히 보고 있던 원범은 짧은 숨을 내쉬고는 진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 이사님. 너무 주목받는 것 같은데 앞으로 가시는 게 어떠세요? 자리 배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진우가 최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하지만 수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젓가락을 들 뿐이었다.
진겸은 중간에 끼인 건데도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사님, 맛있게 드세요.”
맞은편에 앉은 원범에게 웃으며 말한 진겸은 이내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떠서 입에 넣으려는데 옆에서 ‘나는?’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벌렸던 입을 다물고는 수혁에게도 잘 먹으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도 진우와 수혁의 눈싸움은 지속됐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진우였다. 진겸이 잘 먹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양을 적게 담아 온 진겸은 천천히 먹으면서 주변을 보다가 자꾸만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예 휙휙 고개를 돌려 가며 보는데 줄을 선 사람들도 이쪽을 힐끗거렸다.
‘주인공들이라 시선을 끄는 걸까?’
진겸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셋이 너무 잘나서 사람들이 자꾸만 쳐다보는 줄 알았다.
‘매일 봐도 새롭긴 할 거야.’
혼자 멋대로 생각을 마친 진겸은 기분이 좋은지 살랑살랑 다리를 흔들었다. 그 여파로 몸이 덩달아 움직이자 수혁이 몸을 뒤로 빼더니 슬쩍 아래를 살폈다.
진겸이 구두 앞코를 바닥에 붙인 채 발꿈치는 들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리듬을 타듯 가끔 몸도 흔들었다.
‘종일 기분이 좋나 보네. 뭐가 그렇게 좋지?’
첫 출근이라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밥을 먹어서 그런 걸까.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씹느라 툭 튀어나온 볼이 귀여웠다. 먹이를 양 볼에 저장한 다람쥐 같았다. 푹 찌르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 가며 물끄러미 감상하고 있자 시선을 느낀 진겸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급식실에서 급식 먹는 것 같아요. 학교도 이렇던데.”
“학교 다닌 거 기억나?”
수혁의 물음에 진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가 닿은 곳이 눌려 살짝 휘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 수혁을 향해 있는 진겸의 머리를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건너에 있는 수혁의 눈에 그게 보였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원범에게도 보였다.
“아니요. 너튜브에서 봤어요. 학교도 이런 느낌이더라고요. 식판 사용하고 밥 받아서 먹고요.”
진겸의 대답을 듣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진우의 모습에 수혁은 묘한 기류를 느꼈다.
‘이것 봐라?’
기억상실증에 걸린 진겸을 봤을 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힘들어하더니, 이젠 기억을 찾을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수혁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잘하면 또 다른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촉이 섰다.
“그렇긴 하지. 너튜브 좀 그만 봐. 계속 보고 있었어?”
“아까 복사기 사용법도 너튜브로 봤는걸요.”
“그런 것도 나와?”
“그거 말고도 많아요. 회식 자리에서 만들면 사랑받는 폭탄주 비법도 나오고요.”
진겸은 밥을 먹는 동안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를까 수혁이 옆에서 계속 ‘그랬어?’, ‘오!’, ‘다른 건?’ 같이 계속 듣고 있다는 추임새를 해 주어서 더 쉬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진우는 식판만 응시한 채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정신 차려. 백진우. ……정신 좀 차리자.’
분명 기억이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인데 자꾸만 돌아오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선 안 되는 건데. 지금의 진겸이 너무 좋아서 자꾸만 제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다.
퇴원하고 집에 온 진겸이 앨범이나 사진이 있냐고 물었을 때 바로 나온 대답에 본인도 놀랐었다.
[이사 올 때 잃어버렸어.]
진겸은 정말 아쉬워했지만 이미 잃어버린 앨범을 다시 찾을 순 없으니 넘어가는 눈치였다.
사실은 기억을 잃기 전 백진겸이 보기 싫다고 버리라고 한 것을 차마 그러진 못하고 상자에 담아 구석에 숨겨 놨었다. 그곳으로 시선이 갔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길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진겸과 수혁의 대화는 이어졌다. 간간이 진우와 원범에게도 동의를 구하듯 말을 걸면 대충 대답하는 형태였다.
진겸은 어느새 다 먹은 식판을 보면서 배를 통통 쳤다. 이제는 얼마를 먹어야 배가 부른지 대충 파악이 되어서 남기지 않을 만큼만 받았었다.
깨끗한 진겸의 식판과는 다르게 수혁의 식판은 아직도 음식이 가득했다.
“안 드세요?”
“먹고 있어.”
“……하나도 안 드셨는데요.”
아까 젓가락을 든 다음부터 움직이질 않았다. 계속 대화를 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안 먹으면 배고플 텐데…… 점심시간 끝나면 나가서 먹지도 못하잖아요. 이따가 배고프면 어떡해요? 어서 드세요.”
“왜? 나 걱정돼? 쫄쫄 굶을까 봐?”
“그렇다기보단…… 남기면 아깝잖아요.”
제 딴엔 걱정이 되어 한 말이지만 주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에겐 진겸이 하는 모든 말이 다르게 해석되고 있었다.
“지금 선 이사한테 밥 남긴다고 뭐라고 한 거야?”
“어. 진짜 회장 아들 아니야?”
“저 나이가 아들이겠냐? 손주겠지!”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데다가 주변이 시끄러워서 어떤 말을 하는지 들리진 않아도 좋은 말이 아니라는 건 대충 느껴졌다.
그건 진겸을 제외한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기 식당 밥 되게 맛있다. 진우야, 우리 매일 구내식당에서 먹자.”
“회사 주변에도 맛집 많아. 거기도 가야지.”
“아…… 그래? 맛집 탐방도 좋겠다.”
외식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진우가 먼저 제안한 거니까 나중에 딴말하기 없다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나랑은?”
“이사님도 계속 같이 드실 거예요?”
“어. 왜? 나 이 근방 맛집은 전부 꿰고 있는데. 나랑 먹기 싫어?”
“아니요! 저 그런 말 안 했어요.”
생사람 잡지 말라는 듯 외치자 수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확실히 즉각적인 반응이다. 더 놀리려고 하는 순간 원범이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수혁의 것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의 식판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원범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지 끌리는 소리가 구내식당에 울리자 대화하던 직원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상사가 있는 자리에서 식사한다는 게 불편해서인지 네 사람이 있는 주변으로는 아무도 앉지 않아 비어 있었다.
“카페 가고 싶다고 했지? 가자.”
진우가 일어나 진겸의 식판까지 같이 들었다. 진겸은 자신이 든다고 했지만, 진우가 먼저 앞으로 가 버려 그 뒤를 졸졸 쫓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수혁이 주변을 쓱 둘러봤다.
회사에서 선 이사는 인상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직원들 인사도 잘 받아 주고 먼저 아는 척도 하는 상사. 설렁설렁 회사에 다닌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의 비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게 자기 상사를 지키기 위함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 처리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서 소문은 금세 사그라지기는 했다.
게다가 구내식당에선 보기 힘든 탁 이사와 선 이사가 같이 온 것도 신기한 판국에 오늘 화제의 주인공과 함께 등장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혁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직원들에게 웃어 보이곤 이내 세 사람 뒤를 쫓았다.
네 사람이 나가자 구내식당은 할인하는 마트처럼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구내식당에서 올라온 진우는 진겸의 손목을 잡아 제 옆으로 당겼다.
“저희는 카페에 들렀다가 올라가겠습니다.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해 주시면 사 오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해. 같이 가면 되지.”
수혁이 말하면서 진겸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
“그렇게 노려보지 마. 여기 회사야.”
웃으며 말한 수혁이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원범의 등을 툭 쳤다. 노려본 건 진우건만 수혁은 원범을 보며 말했다.
“후…….”
“커피는 제가 살게요!”
“갑자기?”
“두 분께 감사한 일도 있었고…… 전 아무것도 못 해 드렸으니까 커피라도 사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커피로는 너무 적나요?”
진겸은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아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아니다. 아니에요. 제가 다음에 더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됐어. 비서 보조한테 뭘 바라. 난 아메리카노 먹을래. 그거 사 줘.”
“……그러실래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한 진겸이 앞장서서 유리문을 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맴돌던 로비로 더운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투명한 유리문으로 한여름의 태양이 눈이 부시도록 내리쬈다. 그곳에 가까워진 진겸의 모든 것이 옅은 색이라 빛에 파묻힐 것 같은 형상이었다.
아스라이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순간 진우의 눈이 커지더니 다급히 다가가 진겸의 손목을 낚아챘다.
“……형?”
“응?”
눈앞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다.
진우는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에 호흡이 가빠졌다. 입으로 숨을 내뱉으며 내려다보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 들어왔다.
‘잘못 본 건가? 하긴…… 형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헛웃음을 내뱉은 진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