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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4)화 (64/92)

64화

“어. 누가 회사에 그딴 걸 입고 오냐?”

“에이씨.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걔 낙하산이라며?”

“또? 이번엔 어느 부서로 갔는데?”

“탁 이사 비서란다. 하! 아니 누가 지 실세인 거 몰라? 그렇게 자기 사람들로 꽉꽉 채워야 해? 선 이사도 탁 이사가 데려왔잖아. 맞지?”

이번엔 두 사람이 언급되자 발끝을 보고 있던 진겸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그때도 말 겁나 많았지. 그래도 선 이사는 일 잘하잖아.”

“암만 일 잘해도 낙하산은 낙하산이지. 선 이사뿐이야? 백지…… 뭐지? 그 비서.”

“백진우.”

“그래, 아무튼 걔도 탁 이사 빽으로 들어왔잖아.”

진겸은 자신이 무얼 듣고 있는 건지 순간 이해가 되질 않아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러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지금 우리 진우 뒷담 까는 거야?’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점점 안으로 말리더니 주먹이 만들어졌다. 다리 위에 올려 둔 앙상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세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열을 올렸다.

“아직도 비서들끼리 말 많잖아. 고졸이라던데? 뭐, 그딴 애를 비서로 데려와? 탁 이사도 미친 거 아니야?”

“야, 말도 마라. 걔 엄청 싸고돌잖아. 우리 회사 정직원도 아니라던데?”

“그럼 뭐야, 개인 비서. 뭐 그런 거야? 개인 경호원처럼?”

“그렇겠지. 와…… 뭐가 그렇게 특별하길래 개인 비서가 된 거지? 혹시…….”

송 대리가 음흉한 얼굴로 웃자 김 대리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질색했다.

“아, 미친놈!”

“저거 또 지랄이네.”

박 대리까지 한마디 얹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좋다고 낄낄거렸다.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진겸의 귓가에 정확히 박혔다.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진우가 저들 입에 담겼던 순간부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박수가 서서히 평균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흥분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이건 제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진겸은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아직도 웃고 떠드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베이지. 걔도 어리더만.”

“얼굴 봤어?”

“어. 나 탁 이사랑 같은 층이잖아. 복사하러 왔더라고. 우리 부서 직원들 난리 났었다. 피부는 하얗지, 얼굴은 예쁘지. 처음엔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뭐야, 그 정도야? 궁금하네. 아, 아깝다. 나도 구내식당 갈걸. 오늘 거기서 점심 먹었다던데?”

대화의 주제가 진우에서 본인에게로 다시 넘어오자 진겸이 걸음을 멈췄다. 뭘 얼마나 더 말할지 지켜볼 요량으로 팔짱을 낀 채 세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들은 아직도 진겸의 존재를 몰랐다.

한 명이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겼다.

“젠장. 누군 비싼 등록금 내 가며 4년제 나와서 연수까지 갔다 오는데. 고졸 주제에 빽으로 들어오고. 진짜 세상 더럽다.”

“꼬우면 너도 빽 쓰든지.”

“있어야 쓰지, 인마!”

“크크큭.”

“아니면 탁 이사 앞에서 알짱거려 봐. 누가 알아? 너도 그 자식처럼 탁 이사 눈에 들지.”

“아, 짜증 나.”

“진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

“낸들 아냐?”

진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캔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집어서 꽉 쥐고는 냅다 그들을 향해 던졌다. 정말 있는 힘껏 던져서인지 송 대리 등에 정확히 명중했다.

“악! 뭐, 뭐야?”

“아이씨!”

“누구야?”

그들은 연달아 소리치며 범인을 찾으려 몸을 돌렸다가 노려보고 있는 진겸을 발견했다.

“베이진데요.”

베이지색 정장에 예쁘장한 얼굴.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캔에 맞은 송 대리는 얼굴을 구겼고 옆에 있던 박 대리는 뒷담화하던 걸 들킨 게 머쓱한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김 대리는 제 셔츠에 묻은 갈색 음료를 툭툭 털어 내며 미간을 구긴 채 말했다.

“……있었으면 인기척 좀 내지.”

“말이 짧으시네요?”

“아, 뭐. 기분 나쁘시면 길게 해 드리죠. 왜 숨어서 듣고 그러세요? 우리 민망하게.”

진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애초에 사과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을 보면 은근슬쩍 자리라도 피할 줄 알았다.

뒷담화하다가 들켰을 때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

진겸이 미간에 힘을 주고 물었다.

“민망만 하세요? 미안하진 않으시고요?”

“우리가 그쪽한테? 왜 미안하지? 오히려 우리가 사과를 받아야지. 이게 뭐야! 다 튀었잖아!”

김 대리가 소리쳤다. 얼굴을 왕창 구기고 있는 게 확실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캔에 맞은 송 대리는 제 옷에 묻은 걸 손으로 털어 내면서 중얼중얼 짜증을 냈다.

캔을 던진 건 엄연히 잘못된 행동이다. 어쨌거나 사람에게 물건을 던진 거니까. 하지만 진겸은 그것에 대해 전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린 그쪽 예쁘다고 칭찬한 것밖에 없어. 오히려 칭찬받은 걸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캔을 던지는 게 아니라!”

김 대리의 외침에 진겸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들이 무섭다기보다는 큰 목소리 때문에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뭐 이런 나쁜 사람들이 다 있지?’

이내 어깨를 편 진겸이 남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진겸보다 큰 키였지만 주눅이 들거나 위축되진 않았다.

다 같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걸 보니 회사 직원은 확실한 듯했다. 이 시간에 옥상 정원에 올 정도면 당연한 거겠지만 제대로 확인하려고 본 거였다.

셋 중에서 제일 키가 큰 김 대리가 위협이라도 하듯 일부러 몸을 가까이 붙이며 진겸을 내려다봤다.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이쪽은 셔츠랑 바지까지 다 버리고, 내 셔츠에도 튀었잖아요.”

“세탁비 드릴게요. 얼마 드릴까요? 5천 원? 만 원?”

“하!”

진겸은 기막혀하는 김 대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세탁하면 되지만 그 입으로 한 말은 어떻게 할 건데요?”

“뭐요? 뭐, 무슨 말?”

“입에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거든요.”

“하, 나 참.”

김 대리는 기가 찬 듯 진겸을 응시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이 생겨서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따지는 게 같잖았다.

“세탁비 드릴게요. 사과하세요!”

“사과?”

“백진우 비서 고졸이라고 욕한 거, 낙하산이라고 한 거! 탁 이사님이랑 선 이사님 뒷말한 거! 전부요!”

진겸이 턱을 치켜들고 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그래 봐야 남자들에겐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셔츠에 얼룩이 진 걸 확인한 송 대리가 짜증을 내면서 진겸의 어깨를 퍽 밀쳤다. 세게 밀쳐진 탓에 뒷걸음질을 치게 된 진겸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뭐 있나 본데?”

“그러게. 탁 이사? 선 이사? 아니면 백 비서? 셋 중 누구?”

“…….”

진겸이 입술을 꾹 다물고 계속 노려보기만 하자 조용히 있던 박 대리가 두 사람을 말렸다.

“야, 야. 그만해. 어린애 데리고 뭐하냐. 우리가 너무 뻥 뚫린 곳에서 얘기한 건 맞잖아. 서로 실례한 거 같은데, 그쪽도 이쯤에서 그만하죠?”

“사과 안 하셨잖아요.”

“후…… 일 크게 키우지 말자는 거잖아요. 뭐, 우리가 욕한 거 이르기라도 하려고요?”

“못 할 것도 없죠.”

박 대리는 중재하려 나선 거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겸은 콧바람을 크게 내뿜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에는 이미 진우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찍혀 있었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지금까지 안 오니 걱정이 돼서 전화한 모양이다.

“지금 전화할까요? 지금 언급된 사람 다 모아 볼까요?”

“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저 그쪽 새끼 아닙니다! 사과하면 저도 일 크게 안 키워요!”

“아니, 지금 그쪽이 당당할 때가 아니라니까? 빽으로 들어온 거잖아. 우린 회사에서 도는 소문을 말한 것뿐인데 왜 혼자 오버하고 그러지? 안 그래?”

김 대리의 말에 진겸이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러자 박 대리가 대충 사과하고 넘어가자고 눈짓했다.

사실 세 남자는 진겸이 핸드폰을 드는 순간 움찔 떨었다. 백 비서까지는 자기들 선에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사들은 아니었다.

“소문을 사실처럼 말했잖아요! 우리 진우, 탁 이사님이랑 아무 사이 아니거든요!”

“……우리 진우?”

놀란 진겸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던져진 말이다.

순간의 실수가 사그라질 뻔한 불씨에 다시 불을 지폈다.

남자들은 이때다 싶어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체급 차이가 있어서 진겸이 만만해 보이긴 했다.

“와, 이거 봐라? 진짜 뭐가 있었네. 자기도 빽으로 들어와 놓고 다른 사람까지 꽂은 거야?”

“…….”

“왜? 다시 말해 봐. 우리 진우라고.”

“이거 회사 게시판에 올려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게 부정 취업이지.”

진겸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도통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혹시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진우에게 피해가 갈까 봐 무서웠다.

이대로 계속 말을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당장 회사 게시판에 올릴 기세라서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럼 저도 회사 게시판에 올릴 거예요. 옥상 정원에서 이사님들 욕했다고!”

“올리세요. 그래 봐야 우린 상사한테 깨지고 끝이지. 그쪽이 빽으로 들어온 거 알려지면 탁 이사는 타격이 클 텐데?”

진우가 아니라 탁 이사에게 타격이 간다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진겸은 갑자기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화들짝 놀랐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진우였다.

‘어쩌지?’

괜히 나섰다가 일을 크게 키운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진우를 진짜 이곳으로 부를 순 없었다. 첫 출근 날부터 사고를 거하게 친 것 같다.

하지만 진겸의 걱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핸드폰을 든 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겸을 발견한 진우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무서운 기세로 다가왔다.

“왜 전화를 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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