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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5)화 (65/92)

65화

“아, 아니…… 바, 받으려고 했어…….”

진우가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친 건 처음이었다. 진겸이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진우가 아차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해. ……전화를 안 받길래 걱정돼서 그랬어.”

사과하면서도 진우의 눈은 진겸의 몸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워치도 확인했다. 평소보다 심박수가 높았다. 방금 놀라서 그런가 보다.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진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팔을 뻗어 진겸을 품에 안았다.

“목소리가 너무 컸지? 미안.”

“……아니야. 내가 전화 안 받아서……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놀라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알기에 진겸은 진우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일에 집중하던 진우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탕비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진겸은 그곳에 없었다.

화장실에 간다더니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화장실이 먼 곳도 아니고.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다. 아직 화장실에 있는 건가 싶어 확인해 봤지만 거기도 아니었다.

계속 전화를 걸어도 통화 연결음만 날 뿐 정작 듣고 싶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혹시 다른 층 화장실에 갔나 싶어 위아래 층도 전부 확인했다.

“어딜 간 거야…….”

다니는 곳이 한정적이라 다른 곳은 익숙지 않을 텐데 길이라도 잃은 걸까.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진겸은 보이질 않았다. 전화를 받으면 물어물어 찾아갈 텐데 여전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 들렸다.

‘어디서 쓰러진 건 아니겠지?’

진겸은 불과 며칠 전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더구나 갑자기 나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진우가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 짓눌려 터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렇게 계속 돌아다니다가 옥상 정원까지 오게 됐고, 투명한 유리문 너머 진겸을 보자마자 달려온 거였다.

품에서 느껴지는 진겸의 꼬물거림에 걱정과 두려움으로 굳었던 몸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정말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진우는 주변에 누가 있든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그저 진겸이 제 품에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

세 사람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진겸과 진우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하고 떨어져. 회사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는 선 이사였다.

세 사람은 경직된 몸으로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예, 야근하나 보네요. 고생이 많아요. 근데, 이 넓은 정원에 왜 다들 같이 있어요?”

“아! 별거 아닙니다. 작은 오해가 있어서 그걸 풀고 있었습니다.”

“오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진겸을 보던 수혁이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항상 그렇듯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무슨 오해?”

그들은 잠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로 말하라는 듯이 떠넘기느라 다들 입을 열지 않았다.

수혁은 그들이 말하길 기다려 줬다. 제 눈치를 보면서도 진겸을 힐끗거리는 꼴이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인데. 뭐라 말할지 기대가 됐다.

진겸은 아직 진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녔을 진우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 여기 있다고, 안심하라고. 한 손으로 진우의 허리를 문질렀다.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지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진우의 등허리를 문지르며 눈을 굴린 진겸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내가 말해야 하나? ……일 키우긴 싫은데.’

아까도 그냥 사과만 받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 거였다.

“둘은 좀 떨어지라니까.”

남자들이 입을 열지 않자 수혁이 몸을 돌려 진겸과 진우를 떼어 냈다. 그러다가 진겸의 어깨를 건드렸는데 움찔 떨며 인상을 쓰는 모습에 수혁의 미간도 덩달아 구겨졌다.

진우도 이상함을 느끼고 방금 수혁이 건드린 곳을 눌렀다.

“아!”

“아파? 다쳤어?”

진겸은 대답 대신에 남자들을 힐끗 봤다. 아까 송 대리가 밀친 곳이었다. 뒤로 밀릴 정도로 강도가 세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아플 줄이야. 이건 진겸도 생각지 못한 거였다.

진겸의 시선을 확인한 진우의 눈이 매서워졌다. 아까는 유리문 너머로 진겸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아예 저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진짜 왜 같이 있었을까?

수혁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 진우가 몸을 바르게 펴고는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김 대리님, 송 대리님, 박 대리님.”

진우가 그들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힐끗 보며 말했다.

“쉬러 오셨나 봐요.”

“예, 뭐. 쉬엄쉬엄해야죠.”

김 대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야근하면서 이 정도 쉬는 것쯤이야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진우가 픽 웃으며 김 대리의 행동을 지적했다.

“제 말엔 바로 답하면서 선 이사님이 물으신 건 대답 안 하세요? 무슨 오해냐고 물으셨잖아요.”

“아…….”

“그게 사실…….”

물론 그들은 사실대로 고하진 않았다. 억울하다는 얼굴로 자기들 대화에 진겸이 끼어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에 진겸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게시판에 올린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송 대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 대리가 끼어들었다.

“그쪽이 캔을 던지니까 우리도 열받아서 홧김에 한 소리죠. 설마 우리가 진짜 올리겠어요?”

어떻게 된 건지 대충 눈치챈 수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회사에 도는 소문은 진작 알고 있었다.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그냥 둔 거였다.

일하면서 상사 욕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당사자의 귀에만 안 들어가면 상관없다. 하지만 현행범으로 걸린 상황에서 적반하장으로 나온 순간부터 원만한 수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거였다.

박 대리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절대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고요……!”

“자네들이 어떤 의도로 말했건. 그따위 것 하나도 안 궁금해요. 근데, 그 말을 본인이 직접 들었고 사과를 요구했으면 깔끔하게 사과하고 끝내면 될 일을…… 이렇게 키우나? 뭐? 게시판에 올려?”

수혁의 냉소 섞인 말에 남자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올리고 나서의 상황이 궁금하면 올려요. 오늘 있었던 일도 같이 올리면 되겠네. 아, 어깨를 살짝 밀쳤다고?”

“정말 살짝이었습니다! 밀친 것도 아니고 툭 건드린 정도…….”

“뭐, 그러시겠지.”

송 대리 앞으로 다가간 수혁이 제 입꼬리를 혀로 살짝 핥았다. 꼭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전에 입맛을 다시는 모습 같았다.

긴장해서 뻣뻣한 자세로 앞에 일렬로 선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백 비서. 데리고 내려가.”

“어쩌시려고요?”

“뭘 어째. 알아서 잘 해결할게.”

“……알겠습니다.”

진우가 진겸의 어깨를 감싸 안아 걸음을 옮겼다.

“어? 우리 이대로 가? 이사님은?”

진겸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연신 뒤를 살폈다. 수혁이 웃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길래 유심히 보니 ‘내일 봐, 진겸아’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진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걸 표현했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혁의 눈빛이 일순간 돌변했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섬뜩하기까지 한 무표정에 앞에 선 세 남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수혁은 송 대리의 왼쪽 어깨를 먼지 털 듯 툭툭 건드렸다.

“나는 말이에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송 대리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내 거 건드리는 게 참…… 싫어요. 누구나 그렇지 않나?”

입꼬리만 살짝 올려 묻자 송 대리가 동의한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으….”

“아파요?”

“아, 아닙니다.”

송 대리 어깨에 닿은 수혁의 손등과 팔뚝에 핏줄이 섰다. 그만큼 힘을 주고 있는 거였다.

“……아프라고 한 건데.”

읊조려 내뱉었지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 줄게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다음에 걸리면 그땐…….”

꿀꺽.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소음 속에서도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혁은 뒷말을 잇지 않고 느닷없이 평소와 같은 온화한 얼굴로 돌아갔다.

“뇌가 없는 게 아니면 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았을 거라 생각해요. 자, 야근할 정도로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어서 가요. 빨리해야 퇴근하지.”

“네, 넵!”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수혁은 천천히 난간 쪽으로 걸어가 진겸이 던졌을 캔을 주워 들었다. 당시 상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더럽고 구겨져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캔을 던졌을지.

‘그냥 넘어가지 말 걸 그랬나.’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수혁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던 진겸은 이대로 가도 괜찮은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제 발로 걸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무시해.”

“어떻게 그래? 내 욕하는 건 괜찮아. 근데 네 욕하는 건 안 돼!”

“……형.”

“내가 진짜 힘만 셌어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주먹을 내지르자 진우의 입에서 ‘풉’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겸이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서 앞만 봤다.

“……회사에선 이런 일 많아. 탕비실, 계단, 옥상 어디든 전부 말이 오가는 곳이야. 일일이 신경 쓰면 회사 오래 못 다녀.”

“그래도 대놓고 할 소린 아니잖아.”

“내가 고졸이고 낙하산인 건 사실이잖아.”

“사실이어도! 그걸 그냥 말하는 거랑 비꼬는 거랑은 다르지.”

진우는 전부터 자기 일에 성을 내는 진겸의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연차 때 출근하게 된 날도 손수 고용노동부 번호를 검색해서 보여 줬었다. 그때도 꽤 감동했었다.

등만 바라봐야 했던 때와는 다르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세상이 전부 환한 빛으로 물든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과받고 싶어?”

“받고 싶어! ……근데 진짜로 게시판에 올리면 어떡해?”

“못 올릴 거야. 선 이사가 알아서 해결할 거거든.”

뭘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직함으로 입막음을 할 거라고 생각한 진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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