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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7)화 (67/92)

67화

“너무 빡빡한 거 아니야? 이런 건 좀 먹어도 되잖아.”

양 비서가 잘 분리된 껍질을 제 입으로 넣으며 말했다. 그에 진겸의 시선이 따라가자 차마 씹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보는 저 눈망울에 씹기가 미안해졌다.

‘내가 왜 미안하지?’

못 먹게 하는 건 진우였고, 자신은 버려질 아까운 껍질을 먹은 것뿐이다. 그런데 실내가 어두워서 돋보이는 건지 주황빛 조명이 비친 진겸의 얼굴이 너무 아련해 보였다.

“……백 비서. 그냥 줘. 이러다 진겸 씨 울겠다.”

분리하는 치킨에 시선을 고정했던 진우가 고개를 들자 진겸이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도 아래로 내리고 일부러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기까지 했다. 더구나 마주 보고 앉아 있어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진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조금만 먹어.”

“응! 어차피 나 많이 못 먹잖아.”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뻗으려는데 진겸의 앞접시로 치킨이 툭 떨어졌다. 이어서 세 개가 더 툭, 툭, 툭 떨어졌다.

“먹어.”

치킨을 옮겨 준 건 원범이었다. 그는 포크가 아닌 젓가락을 이용해 튀김에 어떠한 상처도 내지 않았다.

당장 먹을 기세였던 진겸이 주춤하자 원범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준 건 먹기 싫어?”

“아니요!”

진겸은 서둘러 제일 앞에 놓인 치킨을 포크로 푹 찍었다. 너무 힘줘서 찍었는지 포크 끝이 접시에 닿는 느낌이 났다.

“잘 먹겠습니다!”

이내 한입에 넣자 생각했던 프라이드치킨의 바삭함이 제일 먼저 느껴졌다. 이어 입술에 묻는 기름과 함께 입 안에 퍼지는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겸이 너무 행복한 얼굴로 치킨을 먹자 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엄지로 진겸의 입술에 묻은 튀김 부스러기와 기름을 닦아 냈다.

“꼭꼭 씹어. 급하게 먹지 말고.”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입에 치킨 한 조각이 전부 들어간 통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순살이었으니 망정이지 뼈가 있는 거였으면 이내 뱉어야 했을 거다.

“자, 자! 우리는 건배할까?”

“드시죠.”

진우가 맥주잔을 들어 양 비서가 들고 있는 잔에 끝만 살짝 부딪치고는 이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잘 마시지는 않지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엔 가끔 시원한 맥주가 당긴다. 그렇다고 많이 마실 생각은 없었다. 진겸과 함께 있으니 딱 한 잔만 마시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그 명함을, 응? 새벽같이 내가 그걸……!”

양 비서가 취해 버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거라면서 한 잔, 두 잔 마시더니 아예 섞기에 이르렀다.

진우가 옆에서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근 며칠 동안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한탄을 하는데 차마 더 말릴 수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

“택시 태워서 보내.”

보다 못한 원범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같은 회사 사람들도 많아서 괜한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서둘러 보내는 게 나을 듯했다.

진우가 콜택시를 부르려 하자 양 비서가 손에 들린 핸드폰을 뺏어 갔다. 술 취한 사람치고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양 비서님?”

“진겸 씨! 이거 배경 화면 뭔지 알아요?”

당황한 진우가 서둘러 뺏으려 하자 양 비서가 ‘으헤헤’ 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다 큰 어른 둘이 핸드폰 하나를 두고 이리저리 몸싸움을 하자 다른 테이블에서도 힐끗거렸다.

진겸은 두 사람의 격렬한 움직임에 테이블이 흔들리자 위에 있는 식기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하찮은 힘이라 진겸도 덩달아 같이 흔들리는 통에 원범이 귀찮아하면서도 테이블 옆을 잡았다. 비틀거리던 진겸의 몸이 그제야 멈췄다.

“……감사합니다.”

진겸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테이블을 쥔 제 손과 원범의 손을 번갈아 보다가 살포시 입 안으로 입술을 말았다.

이미 겉으로 보기에도 덩치에서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당연히 손 크기도 차이가 나는 게 맞긴 했다.

원범의 손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물끄러미 보는데 시선이 느껴져 슬쩍 옆을 봤다.

“아…… 죄송해요. 너무 빤히 봤죠?”

“…….”

“……죄송합니다.”

원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찔려 서둘러 사과했다. 그러고는 자신은 무해한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하지만 원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진겸은 큼, 헛기침하고는 앞을 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실랑이 중이다.

“양 비서님. 계속 이러시면 내일 후회하실 거예요.”

“아닌데! 난 후회 같은 거 안 하는데!”

“애도 아니고 왜 이래요. 정신 좀 차려요!”

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양 비서를 보다가 틈을 노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역시나 날렵한 양 비서의 움직임에 핸드폰에는 손끝도 스치지 못했다.

오기가 생긴 진우가 핸드폰을 뺏기 위해 더욱 팔을 뻗었고 양 비서는 의자를 뒤로 쭉 빼며 피했다. 다행히 옆 테이블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분명 옆 사람과 부딪혔을 거다.

아직도 테이블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은 진겸은 반짝이는 눈으로 진우와 양 비서를 보고 있었다.

진우가 저렇게 당황하는 걸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저러다가 다치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원범은 두 사람의 움직임이 더 과격해지자 그대로 발을 뻗어 양 비서가 앉은 의자를 찼다.

“어? 어!”

원래도 뒤로 기울어져 있던 의자는 힘이 들어간 발길질에 아예 넘어가기 시작했다.

술에 취했어도 넘어진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양 비서가 서둘러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의자는 뒤에 있던 의자와 부딪혀 큰 소리를 냈고 양 비서는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다.

“우와…… 와……!”

양 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놀란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찮으세요?”

덩달아 놀란 진우와 진겸도 황급히 일어나 양 비서의 옆으로 다가갔다. 진우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는 동안 진겸은 의자를 세우고는 주변을 향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갑자기 난 큰 소리에 술집 안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이내 다들 고개를 돌렸다. 술에 취한 사람이 넘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보니 큰 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뿐이었다.

직원들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었다.

“네, 괜찮아요.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진우가 직원들에게 사과하고는 양 비서를 의자에 앉혔다.

“놀랐잖아요. 다친 데 없어요?”

“……너무 놀라서 아파.”

“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아니, 아프다니까?”

“놀라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게 왜 남의 핸드폰을 멋대로 가져가고 그러세요.”

진우는 핸드폰을 뺏듯이 가져와서는 이리저리 돌려 고장 난 곳이 있나 살폈다. 양 비서가 넘어지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사수한 건지 멀쩡했다.

“양원영.”

“딸꾹.”

미간에 주름이 생긴 원범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양 비서가 몸을 들썩이며 딸꾹질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온 거였다.

원범이 자신을 부를 때 양 비서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이럴 땐 무조건 줄행랑이 최고다.

양 비서가 진겸이 들고 있던 재킷을 뺏듯이 가져갔다.

“진겸 씨, 고마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백 비서 배경 화면 확인해 봐요. 너무 재밌을 거야. 이사님. 저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양 비서가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다가 다리가 꼬여 그대로 꼬꾸라졌다.

“양 비서님!”

옆에 서 있던 진겸이 놀라 황급히 그를 살폈다. 양 비서는 아프지도 않은지 벌떡 일어났다. 그에 원범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진우를 향해 양 비서 좀 챙기라며 눈짓했다.

“양 비서님, 저랑 같이 나가요.”

진우가 양 비서를 부축했다. 진겸과 원범만 두고 가기가 찝찝했지만 지금은 양 비서를 집에 보내는 게 우선이라 그를 데리고 술집을 나섰다.

남겨진 진겸이 올라갔던 어깨를 서서히 내리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취한 모습을 실제로 처음 봐서 꽤 당황스러웠다.

진겸이 터덜터덜 걸어 제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이 흔들린 탓에 흘리고 떨어지고 난리가 났다. 휴지로 대충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양 비서님이 오늘 되게 기분 좋으셨나 봐요”

“…….”

“술 먹으면 사람이 바뀐다는데 진짜여서 놀랐어요!”

진겸은 휴지를 잘 모아서 휴지통에 버리고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러다가 반쯤 남은 맥주가 보이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먹고 싶어?”

“예? 아니요. ……사실 조금 먹고 싶긴 해요.”

술이 어떤 맛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다는 건 술은 먹어 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시라고 하고 싶어도 네 몸은 네가 알 거 아니야.”

“알죠. 그래서 참고 있는 거예요.”

“……착하네.”

원범의 손이 진겸의 정수리에 닿았다. 변하지 않는 투박함에 진겸의 고개가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

진겸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런 거로 칭찬받을 줄은 몰랐다. 먹을 걸로 투덕거릴 때마다 진우는 항상 미안해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진우는 그랬다. 그래서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꾹 삼켰다. 그래도 잘 먹는 걸 보면 흐뭇한 미소를 보여 주었기에 저도 같이 따라 웃곤 했다.

진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원범이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줬다. 진겸이 퍼뜩 놀라 얼굴을 들었다.

원범은 그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어쩜 이렇게 잘 놀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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