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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75)화 (75/92)

75화

다른 테이블에 비해 연기도 많이 났다. 환풍기가 열심히 빨아들이는데도 옆으로 새어 나오는 양이 상당했다.

낡은 고깃집에는 손님이 북적였고 테이블 간의 간격도 좁았다. 벌써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많아 주변이 시끄러웠다. 공간이 좁아 다른 소음에 목소리가 묻히기 일쑤라 대화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큰 소리를 내거나, 몸을 가까이 붙여야 했다.

수혁과 원범의 취향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장소였다. 애초에 진겸이 아니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곳이다.

“…….”

진겸이 들고 있던 집게를 살포시 아래로 내렸다.

“더 태워도 되니까 굽고 싶은 만큼 구워. 하고 싶은 거 다 해.”

“태우면서 나는 연기가 몸에 안 좋아서 안 돼요.”

“그냥 구워 주는 거 먹어.”

수혁은 태운 고기들을 보고 의기소침해진 진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바로 덧붙여진 진우의 말에 빠르게 말을 바꿨다. 그러고는 진겸의 앞에 놓인 집게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태우는 건 상관없는데 몸에 안 좋다는 걸 굳이 할 필요는 없다.

그에 진겸의 입술이 앞으로 더 튀어나왔다.

“형, 아.”

진우는 집에서 하던 대로 쌈을 싸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진겸의 입술에 붙였다. 속상해도 먹을 건 먹어야 하니 입을 크게 벌려 쌈을 받아먹었다.

조그맣게 싸기는 했어도 쌈의 기본 크기가 있다 보니 진겸의 볼이 볼록해졌다. 열심히 씹다가 제게 쏠린 진득한 시선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입에 쌈이 들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로 물음을 대신했다. 다들 안 먹고 왜 자신만 보고 있냐는 의미였다.

“작은 입에 그 큰 게 잘도 들어가네.”

수혁은 말하면서 손바닥에 상추를 올리더니 그 위에 밥 조금, 잘 구워진 삼겹살, 쌈장 등 쌈 재료를 올렸다. 그리고 둥글게 뭉쳤다.

“……큰가?”

진겸에게 주려고 싼 건데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딱 봐도 저 작은 입으로는 안 들어갈 것 같았다. 아쉽지만 그 쌈은 본인의 입에 넣어야 했다. 진우가 싼 쌈을 받아먹는 진겸을 보고 자신도 먹여 주고 싶었는데 실패였다.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원범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이런 냄새를 맡고 있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냥 일어날까 하다가 진우도 잘 먹고, 진겸도 맛있게 먹고 있어 꾹 참았다.

더구나 고기를 먹는 진겸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걸 더 지켜보려 인내심을 가지고 궁둥이를 붙이고 있었다.

“탁 이사, 아.”

“……미쳤어?”

“우리도 오붓하게 서로 좀 챙기자는 거지.”

뜬금없는 수혁의 행동에 원범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미친 소리도 정도, 읍!”

히죽거리던 수혁은 원범이 입을 열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쌈을 강제로 쑤셔 넣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수혁은 웃는 낯으로 원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에게 이런 행동을 해도 무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본인도 알기에 한 거였다.

평소의 원범이라면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 않았을 거다. 잠시 다른 쪽으로 모든 감각이 쏠려 있었던 탓에 미처 방어하지 못했다.

원범은 지난번에 ‘개소리’라고 말했을 때 진겸이 떨떠름해 했던 게 기억나, 차마 쌍욕은 입에 담지 못하고 수혁이 준 쌈을 억지로 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싸한 마늘 향이 거침없이 입 안을 헤집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강력한 향에 결국 얼굴을 왈칵 구겼다.

“아하하!”

그에 수혁의 웃음보가 터졌다. 손바닥으로 자기 다리를 내려치면서 숨넘어갈 듯 웃던 수혁은 당장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원범의 매서운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들썩이는 어깨는 숨길 수 없었다.

수혁이 웃는 이유를 몰랐던 진우와 진겸은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다가 작은 그릇에 담겨 있던 마늘의 반 정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서 상황을 이해했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진겸이 서둘러 물을 건넸다.

“…….”

“어떡해…….”

마늘이 얼마나 매운지는 몰라도 원범의 구겨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씹지 말고 뱉으세요!”

테이블을 둘러보던 진겸이 여기에 뱉으라며 빈 접시를 내밀었다.

원범은 접시를 받아 제 앞에 내려놓고는 입에 있던 걸 이내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직도 입 안에 매운맛이 남아 있다. 집에 가서 양치질을 몇 번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게 뻔했다.

수혁은 너무 웃어서 눈에 눈물이 맺히기까지 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넋 나간 채로 보고 있으래?”

“……후.”

원범은 올라오는 화를 식히기 위해 컵에 담긴 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조금이나마 마늘 향이 희석되길 원했으나 소용없었다.

“보답으로 나도 싸 주지.”

“됐어. 나는 쌈 안 좋아해. 그냥 먹을래.”

정중히 거절했지만 원범은 남은 마늘을 상추에 전부 올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잘게 잘린 고추도 넣었다.

“……인간적으로 그건 너무하지 않아? 난 밥이랑 고기 정돈 넣었어.”

“그건 따로 먹어.”

몸을 뒤로 빼려는 수혁의 목덜미를 빠르게 낚아챈 원범은 어떻게든 저 입에 쌈을 쑤셔 넣으려 했다. 하지만 수혁도 지지 않고 원범의 팔을 잡았다.

장난이라곤 모를 것 같던 원범의 행동에 진겸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혁이야 남 놀리는 걸 좋아하니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원범은 너무 의외였다.

기어코 수혁의 입으로 들어간 쌈은 다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원범이 턱을 꾹 눌러 가며 뱉지 못하게 해서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진우는 고기를 열심히 구웠고 작은 쌈을 싸서 진겸의 입가에 가져갔다.

“형. 먹어.”

“어? 어…….”

진겸은 두 사람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됐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 이대로 두면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약간 무섭기도 했다.

여전히 서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모습을 진겸이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자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진겸이 계속 신경 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팔을 뻗어 들고 있던 집게를 두 사람의 시야로 집어넣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애도 아니고 뭐 하십니까?”

진우의 중재에 원범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제야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던 수혁이 바르게 앉을 수 있었다.

“하, 죽는 줄 알았네. 조금만 더 빨리 말리지.”

“그냥 두려다가 형이 무서워해서 말린 겁니다.”

진우는 일부러 ‘무서워해서’라는 말에 힘을 줬다. 그 말에 원범이 멈칫거렸다. 이제 진겸이 자신을 편하게 여기나 보다 했는데 또 무섭게 만든 모양이다.

이건 순전히 수혁의 도발에 넘어간 제 잘못이었다. 알고 지낸 시점부터 지금까지 항상 옆에서 깔짝거려도 무시했었는데, 주변에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탓에 짜증이 쌓인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움직여 버렸다.

원범의 짧은 한숨을 느낀 수혁이 낄낄거렸다.

“아. 재밌었다.”

“……괜찮으세요?”

진겸이 조심스레 묻자 수혁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있던 쌈을 다 먹었음에도 매워하는 기색은 보이질 않았다.

“나 매운 거 잘 먹어. 이 정도는 거뜬해.”

그 소리에 원범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싱글거리며 말하는 수혁의 꼴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그래도 한차례 작은 소동을 제외하면 나름 평화로운 식사였다.

진작에 집게를 내려놓은 진겸은 고기 굽는 걸 완전히 포기했다. 대신 진우가 구워 주는 걸 맛있게 먹었다.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던 원범은 마늘이 잔뜩 들어간 쌈을 수혁이 먹인 통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어야 했다. 입에서 맴도는 마늘 향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배부르게 먹은 진겸은 아까 봐 두었던 아이스크림 냉장고로 다가갔다. 호기롭게 냉장고 앞에 서서 왼손에는 콘 과자를 오른손에는 스쿱을 쥐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해 본 적이 없어서 괜스레 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스쿱을 써 본 적 없었고 딱딱한 아이스크림은 잘 퍼지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하다가 고깃집 사장님이 다가와 퍼 주는 걸 얌전히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깃집을 나온 네 사람은 옷에 밴 냄새를 빼기 위해 잠시 걷기로 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길거리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란히 걷기엔 골목이 좁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서, 진겸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은근히 신경을 썼다.

네 사람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는데, 진겸이 퍼 온 거라 먹고 싶지 않아도 다들 군말 없이 받아 든 거였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수혁이 콘 과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진겸의 손만 닿은 거면 괜찮은데, 가게 사장이 쥐었던 걸 본 탓에 먹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스크림도 취향이 아니었다. 진겸이 보는 앞에서 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먹은 거였다. 물론 진우와 수혁만 먹었을 뿐, 원범은 여전히 손에 들고 있기만 했다.

수혁은 앞니로 과자를 조금씩 깨물어 먹는 진겸을 보다가 슬쩍 물었다.

“주말에 뭐 할 거야?”

“음…… 밀린 청소도 하고 병원 갈 준비도 하고…….”

“하루면 끝나겠네. 남은 하루는 나한테 내주면 안 되나?”

“네. 안 됩니다.”

진우는 언제나처럼 진겸이 말하기도 전에 칼같이 잘라 냈다. 거창한 계획은 없지만 주말엔 진겸과 단둘이 보낼 생각이었다.

근 2주 동안 수혁과 원범, 게다가 양 비서에게 시달렸더니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혁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물었다.

“어차피 할 거 없잖아. 진겸이가 나랑만 노는 게 싫으면 백 비서도 같이 놀든가.”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진겸은 왜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이럴까 싶어 손뼉을 치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이사님, 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어. 영화나 보자고. 어차피 돌아다니는 건 힘들잖아. 너튜브 많이 보니까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영화란 소리에 진겸의 눈이 반짝거렸다. 확실히 너튜브에서 영화 리뷰도 꽤 즐겨 보았다. 나중에 볼 영화 리스트를 따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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