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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0화 (80/92)

80화

퇴근하고 온 진우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수혁과 원범이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진겸이 일어났다. 맨발이 땅에 닿자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어?”

“뭐야, 나 온다고 버선발로 마중 나오려고? 됐어. 발 시려. 신발 신어.”

수혁이 진우보다 먼저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하고 슬리퍼를 신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진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더니 그대로 들어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진겸의 발바닥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반가워서 놀랐나 봐요.”

“반가우면 반가운 거지 왜 놀라?”

허리를 편 수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고는 진겸을 쭉 훑어봤다.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사이 진우가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옆으로 다가와 수혁을 슬쩍 밀어냈다.

“같이 온다고 메시지 보냈는데 못 봤어?”

“그랬어?”

이제야 메시지를 확인한 진겸이 머쓱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간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30분 전에 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느라 메시지 수신 알림을 듣지 못한 거였다.

진겸의 시선이 진우가 내려놓은 과일 바구니로 향했다.

“그건 뭐야?”

“병문안인데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사 왔어.”

대답은 수혁에게서 나왔다. 여기까지 들고 온 건 진우지만 산 건 수혁이었다. 물론 실제로 준비한 사람은 수혁의 비서였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인 진겸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원범은 병실 문을 닫고는 그 앞에 서 있기만 할 뿐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겸이 큰 소리로 인사하자 병실을 둘러보던 원범의 시선이 드디어 병실 주인에게로 향했다.

“이 병원에서 제일 좋은 병실로 하라고 했는데, 맞아?”

원범이 보기에도 지난번 병실보다 넓기는 했다.

“역시! 여기가 제일 좋은데 맞죠?”

“아마?”

“여기 너무 비싸요!”

천천히 진겸에게 다가가던 원범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안 비싸.”

앞에 긴 공백이 있긴 했지만 병원비가 원범에게 부담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진겸의 입장에서는 과한 비용은 맞았다.

다시 침대 아래로 내려와서는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은 진겸이 진우와 수혁의 사이를 가로질러 원범의 앞에 섰다.

“잠깐 지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한 달 넘게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럼 병실 비용만 억이라고요! 억!”

“그 정도로 안 나와.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쉬어.”

“아까 다 들었어요!”

병실에만 있기 답답했던 진겸은 검사를 다 끝낸 후에 병원을 돌아다녔다.

1층에 위치한 카페에 들러서 시원한 에이드를 사 정원을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병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이번에 VVIP 병실에 환자 들어왔다며?]

[응. 심장 수술 환자라서 한 달 넘게 있을 거라던데?]

[거기에 한 달씩이나? 와…… 돈 많나 보다. 한 달이면 억은 되지 않아?]

그 소리에 놀란 진겸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에이드를 놓칠 뻔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금액이 너무나 컸다. 지난번 병실도 좋았기에 굳이 더 좋은 곳에 입원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원범은 시선을 옆으로 옮기더니 짧게 혀를 찼다.

“……쯧.”

“알고 계셨죠?”

진겸은 저도 모르게 원범의 정장 재킷을 잡으며 물었다.

병실 가격을 모르고 제일 좋은 곳으로 하라고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저 병실 바꿀래요! 지난번에 지냈던 곳으로도 충분해요. 아니, 거기 말고 다른 곳도 괜찮아요.”

원범과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재킷 자락을 살포시 당기며 말했다.

진겸이 계속 잡고 흔들자 원범의 시선이 새하얀 손으로 향했다. 단호하게 옮길 수 없다고 여기 있으라고 하면 되는데,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진겸의 손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원범의 마음은 모른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수혁이 나섰다.

“거기나 여기나야.”

진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진우와 수혁이 시야에 담겼다.

“그냥 여기 있어. 그래야 우리도 편하게 오지.”

“……아?”

“매일은 아니어도 자주 올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

“왜, 싫어?”

절대 그렇지 않다. 자주 온다면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오늘은 오전에 진우와 함께였고, 반나절 검사를 받느라 혼자 있었던 시간은 짧았다. 그런데도 벌써 퇴원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게다가 여기 있어야 편하게 온다는 말에 다시금 고민이 됐다. 제 마음은 불편할지언정 지내는 건 편할 게 당연했다.

더구나 진우가 병원에서 출퇴근하겠다고 했으니, 그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으려면 이곳이 좋긴 할 거다.

진겸이 대답하지 않고 눈만 끔뻑이자 수혁이 덧붙였다.

“우리가 오는 게 싫은가 보네.”

그 말에 진겸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자주 오시면 저야 좋죠!”

다급한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수혁이 웃으며 진겸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원범의 옷자락을 쥔 손을 부드럽게 감싸 떼어 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매일 와야겠네.”

작은 손을 살포시 쥐고는 제 쪽으로 당긴 수혁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환자복을 입은 모습은 이미 몇 번이고 봤다. 앞으로는 환자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었다.

“쓸데없이 잘 어울리네.”

“네?”

“환자복 말이야. 이게 잘 어울린다는 게 말이 돼? 참…… 네 얼굴도 열일 한다.”

웃으며 말하는 수혁을 올려다보는 진겸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서서히 미간이 모이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렸다. 분명 칭찬인 것 같은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배 안 고파? 병원에선 이미 저녁 먹었을 시간인가?”

“전 아까 먹었어요.”

세 사람이 병실에 들어온 건 7시가 다 되어서였다. 퇴근하자마자 온 거였지만 퇴근길 차도는 꽉 막혀 쉽게 공간을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우는 옷걸이에 걸어 놓았던 카디건을 챙겨 진겸의 어깨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

“회사 일도 바쁜데 뭘 자주 오시려고요. 안 오셔도 됩니다.”

“난 안 바빠. 너희가 바쁘지.”

수혁이 하는 일보다 원범이 하는 일이 많으니 당연한 거였다.

병실을 쭉 둘러본 수혁이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내가 준 거네?”

그 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원범이었다. 진겸을 향해 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옮겨졌다.

주제가 인형으로 넘어가자 진겸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눈치를 보던 진우가 진겸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이제 슬슬 가셔야죠. 입원 첫날이라 정리해야 할 게 많아서요.”

여전한 축객령이었다.

입원 첫날이기에 두 사람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 인형, 선 이사가 준 거라고?”

원범이 병실을 나서기 전에 물었다.

“네. 저번 해외 출장 다녀오셨을 때 사다 주셨어요. 저랑 닮았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지만요…….”

딱히 닮은 구석은 없어 보였지만 사 준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원범은 복슬복슬한 북극여우 인형과 진겸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아무리 봐도 비슷한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인형 따위랑 닮았다는 것 자체도 이해되지 않았다.

진겸의 앞에 선 원범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 닿은 건 툭 튀어나온 인형의 주둥이였다. 커다란 손이 인정사정없이 짓누르자 진겸이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너무 놀라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 버렸다. 인형을 응시한 원범의 눈빛이 너무 흉흉했다.

‘닮았다고 했는데…… 뭉갰어!’

말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나한테 이제 악감정 없는 거 아니었나?’

그동안 보아 온 원범은 자신에게 적의를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챙겨 주는 느낌을 받았었다.

혹시 지금까지 자신이 착각하고 너무 마음을 푼 건가 싶어 인형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슬쩍 옆으로 틀어 원범의 손에서 인형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꽉 쥔 건지 빠지지 않았다.

원범을 바라보는 옅은 갈색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시선을 눈치챈 원범이 손에 힘을 빼자 진겸은 서둘러 인형을 뒤로 감췄다. 그러고는 바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겁먹게 했군.’

제 눈빛이 어땠을지 대강 눈치챈 원범이 짧게 입바람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닮았어.”

진겸의 작은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등 뒤로 인형을 꼭 쥐고 있던 진겸이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더…….”

“…….”

“……하얘.”

새하얀 인형보다 하얗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원범이 뜸을 들이고 한 말이라 무언가 둘러대는 것처럼 들렸다.

진겸과 원범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진우가 끼어들었다.

“김 기사 아래에 있답니다. 내려가시죠.”

그 잠깐 사이에 진우는 원범의 운전기사에게 차 대기시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진우가 자연스럽게 진겸을 가리고 서서는 문 쪽으로 안내하듯 팔을 뻗었다. 당장 병실에서 나가라는 몸짓이었다.

수혁과 원범은 순순히 병실 문 앞으로 갔다.

“또 올게. 그때까지 걔랑 잘 놀아 줘.”

수혁이 눈짓으로 인형을 가리키며 말하자 진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범은 나가기 전에 진겸을 빤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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