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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2화 (82/92)

82화

‘백 비서, 선 이사. 누구지?’

핸드폰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진우지만, 수혁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을 터였다.

원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단 번호 목록을 살폈다.

“……뭐 이리 많아?”

“아…… 사정이 좀.”

귀찮은 연락을 피하기 위함이었기에 진겸은 더 묻지 말라는 듯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몸을 흠칫 떨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형 것도 차단돼 있어요?”

“어. 내 번호 차단한 거 맞는지 확인하려고 물은 거야?”

“네? 아니에요! 이상하다. 저번에 수혁이 형도 거기에 있더니 왜…….”

원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 비서였군.’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백 비서가 차단했고 그걸 먼저 알아챈 수혁이 자기 번호만 홀랑 해제한 거였다.

“이제 번호 알았으니 저장하면 되겠네.”

“……네.”

진겸은 ‘이상하다……’를 계속 중얼거리며 원범의 번호를 저장하려 했다.

“뭐라고 저장할 건데?”

“원범 형이요.”

“나는 별 안 해 주나?”

“별이요?”

진겸이 의아하게 보자 원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 비서는 앞뒤로 별이 있던데.”

최근 통화 목록이 죄다 ‘☆진우☆’라서 안 볼 수가 없었다.

“형도 별 해 드려요? 진우가 하얀 별이니까…… 까만 별로 할까요?”

“……그래. 선 이사는 뭐로 저장했어?”

“수혁 형으로요.”

“별 없이?”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과 자주 메시지는 주고받아도 통화는 하질 않아서 원범이 최근 통화 목록에서 보지 못했다.

저장을 끝낸 진겸이 핸드폰 화면을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원범형★

원범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렸다. 앞뒤로 검은 별이 붙은 것뿐인데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괜스레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수혁에게도 없는 별이 앞뒤로 붙었다는 것이 알 수 없는 성취감을 안겨 주었다.

“가끔 게임 초대 보내도 돼요?”

“무슨 게임 초대?”

“핸드폰 게임 하다 보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거 공짜로 얻으려면 친구 초대를 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제가 아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

“게임 초대 때문에 번호 물어본 건가?”

“에이, 설마요!”

진겸은 그런 거 아니라며 양손을 휘적거렸다. 절대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게 아니었다. 그저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였어요!”

“그래, 그런 거로 해 줄게.”

“진짠데…….”

팔을 뚝 떨군 진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처연해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귀여워?’

원범은 자신이 한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귀엽다고 여겨 본 적이 없었는데…….

제 눈치를 보는 진겸은 확실히 귀여워 보이긴 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냉철해지는 게 좋다고 여겼다. 애초에 타인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더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궁금해졌다.

자신이 이 눈앞에 있는 작은 생물에게 갖는 마음이 무얼까.

도대체 뭘 하고 싶을 걸까.

제 눈치를 살피는 진겸을 빤히 바라보던 원범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게임 덕에 아는 사람에서 친구로 격상했네.”

“……진짜 그런 거 아닌데.”

“그래. 그렇다고 그런 것만 보내지 말고 다른 메시지도 보내. 게임 초대만 보내면 내가 서운하지.”

입을 삐쭉 내민 진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정정하고 싶어도 이미 원범이 그렇게 믿는 것 같아서 조금 속상했다.

* * *

진우가 사 온 저녁 메뉴는 초밥이었다. 탱글탱글 윤기가 흐르는 흰 밥알 위에 영롱한 빛깔을 머금은 회까지 너무도 맛깔스러운 자태였다.

진겸은 눈앞에 놓인 초밥을 바라보기만 했다. 회는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이 있어서 수술 전에는 먹으면 안 됐다. 괜스레 입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제 몫의 죽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침 죽집 옆에 초밥집이 있길래 원범의 저녁으로 사 온 거였는데 괜한 짓을 했나 싶었다. 저렇게까지 먹고 싶어 할 줄 알았으면 죽으로 메뉴를 통일할 것을 그랬다.

뚫어지게 초밥을 바라보던 진겸의 시선이 진우와 맞닿았다.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것 같던 진겸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에 원범까지 덩달아 진겸을 쳐다보았다.

“먹어! 형, 편하게 드세요!”

서둘러 외친 진겸이 등을 돌려 앉았다. 괜히 자신이 보고 있어서 먹는 데 방해가 된 것 같아 미안했다.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죽도 진겸이 먹기 편하게 소분한 터라 적은 양 하나로 배가 불렀다.

원범은 슬슬 가야 할 것 같아 일어났다. 병실에 와서 한 거라곤 진겸의 핸드폰에 제 번호가 차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과 저녁 먹은 것밖에 없었다.

“가시게요?”

진겸이 묻자 원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계속 병실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산책도 할 겸. 형 가는 거 볼래요.”

진우가 따라 나오려 하자 진겸은 옷 갈아입고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하고는 원범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옷이 너무 얇잖아.”

“긴 팔이잖아요. 지금 여름이고요!”

“여름 끝나 가고 있어. 저녁에는 기온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뭐라도 걸치고 다녀.”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에 진겸이 입을 모았다. 그에게서 걱정 어린 말을 들어 본 적 없어서인지 괜스레 간질거렸다.

저도 모르게 팔을 긁적이면서 병원 앞까지 원범을 배웅했다. 그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보던 진겸은 메시지 알림 소리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수혁형

뭐해?

오후 9:24

오후 9:24

그냥 있어요ㅎ

수혁형

오늘 가고 싶었는데 미안ㅠㅠ

탁 이사는 갔어?

오후 9:25

오후 9:25

네! 방금 가셨어요~

수혁형

오래 있었네

몸은 괜찮아?

오후 9:25

오후 9:25

네! 아직 회사예요?

수혁형

응ㅠㅠ 일이 많네..

오후 9:26

오후 9:26

ㅠㅠ 저녁 꼭 드세요!

수혁형

먹었어^^

오후 9:26

수혁형

인형이랑 적당히 놀고 푹 쉬어~ 내일 갈게

필요한 거 있어??

오후 9:27

오후 9:27

아니요! 없어요!

수혁형

그래^^ 내일 보자

오후 9:28

(궁둥이를 흔드는 이모티콘)

오후 9:28

넹~ 내일 봬요!

핸드폰 화면을 보는 진겸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만발했다. 병실로 올라가는 길에 원범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후 9:33

(웃으며 온몸을 흔드는 이모티콘)

★원범형★

오후 9:34

답장은 한 글자였지만 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 * *

수혁과 원범은 병실에 자주 들렀다. 못 오는 날도 있었지만 그럴 땐 메시지로 안부를 물었다.

수혁에게선 종종 전화가 걸려 왔다. 분명 업무 시간에 거는 것 같은데 수혁은 그 문제에 있어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일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물어도 괜찮다며 한참을 아픈 곳은 없는지,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물어보다가 전화를 끊었다. 퇴근하고 해도 된다고 했으나 수혁은 늘 혼자 있을 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혹시나 일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이제는 그런 걱정 없이 통화에 집중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서인지 말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병원에서의 생활에 활력이 되었다. 중간중간 메시지도 계속 주고받아 나중엔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이러다 회사에서 잘리는 건 아닐지 괜한 걱정이 들 정도였다.

종종 원범에게도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메시지를 보내긴 했다. 대부분 돌아오는 회신은 없었으나, 가끔 답장이 와도 달랑 ‘응’ 한 글자라 연락을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것이 없는 일과에 수혁의 연락은 선물과도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심심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수술 당일이 되었다.

전날부터 금식한 탓에 진겸은 배고프다며 찡얼거렸다.

“수술 끝나고 어느 정도 회복하면 떡볶이 해 줄게.”

“……고추장으로?”

“응. 고추장으로.”

무작정 달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정말 해 줄 생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긴장한 진우와는 다르게 진겸은 배고파서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기만 했다.

수술 직전까지도 진겸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수술이 잘될 거라고 믿어서 이제는 혹시라도 결과가 안 좋을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단지 마취가 풀리고 나서 묵었던 고통이 밀려온다는 소리를 훈일에게서 얼핏 들어 그게 걱정이었다.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에 누운 진겸이 해맑게 웃으며 진우의 손을 꽉 쥐었다.

“나 수술할 동안 앞에 있지 말고 병실에 가 있어. 밥도 꼭 챙겨 먹고. 알았지?”

“……알았어.”

“인형 괴롭히지 말고.”

진우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하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진 못한 모양이다. 진우의 얼굴은 극도의 걱정과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빤히 보던 진겸이 콧잔등을 찌푸렸다가 다시 헤실헤실 웃었다.

“그럼 조금만 괴롭혀.”

“……그럴게.”

어느덧 같이 갈 수 없는 곳에 도달했다.

“다녀올게.”

“……응.”

수술실 문이 닫히고 수술 중이라는 글자가 붉게 빛났다.

병실로 가 있으라고 했지만 진우는 수술실 앞을 떠나지 못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시각, 원범은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회의하느라 바빴고, 수혁도 현재 진행 중인 회사 감사에 바빴다.

본인들이 맡은 바를 위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늘 진겸이 수술한다는 사실이 콕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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