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9화 (89/92)

89화

훈일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겸을 향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까먹으면 안 되니까 사진으로 찍어 놓든, 핸드폰에 써 놓든 해.”

소독을 끝내고 침대에 궁둥이를 걸친 훈일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전에도 크게 움직이는 일은 없어서 그런 걱정은 없는데. 다치지는 마. 네가 먹는 약, 뭔지 알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도 조심하고 있어요.”

항응고제.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그러다 보니 한번 피가 나기 시작하면 잘 멎질 않는다. 그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꽤 조심해야 한다. 심장만 아픈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말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을 텐데 그게 아니라 자꾸만 걱정이 앞섰다.

진겸은 자신을 걱정하는 훈일에게 웃으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다가 진우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쌤. 저…… 수술했을 때요. 꿈을 꿨어요.”

“무슨 꿈?”

“병원에 있는 꿈인데…… 지금보다 손도 더 마르고 푸석했어요.”

찰나였지만 뇌리에 박혀 버린 손이다. 꿈이라는 걸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으나 자꾸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직도 그저 꿈인지, 자신의 기억인지, 백진겸의 기억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환자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거야?”

“……제 손이 지금보다 마른 적이 있었어요?”

조심스럽지만 진지한 물음이었다.

훈일이 허리를 바르게 세우더니 진겸을 향해 몸을 꺾었다. 그러고는 꼼지락거리고 있는 손을 보며 말했다.

“아니, 그 손이 그랬던 적은 없어. 항상 이랬지.”

“그럼 제가 본 건 뭘까요?”

“네 입으로 말했잖아. 꿈이라고. 그럼 꿈인 거야. 네가 아무리 걱정이 안 된다고 해도 수술이었어. 심적으로 지쳐서 그게 꿈으로 나온 걸지도 몰라.”

“……꿈.”

역시 꿈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꿈이 희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한 번 더 같은 꿈을 꾼다면 이번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도 든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그것이 자신의 기억인지, 백진겸의 기억인지 알고 싶었다. 현재 빙의 전의 기억이 희미하다 보니 궁금했다.

백진겸에 빙의된 후엔 여러 일이 많아 크게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다. 딱히 궁금하거나 옛 기억을 찾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빙의 부작용이라고 믿었고 언젠간 원래대로 돌아갈 때가 되면 자연스레 떠오를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엔 이곳에서 지내는 게 너무 행복해서인지 자꾸만 여기에 남아서 평생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

언제 갑자기 빙의가 끝날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허황된 바람일 수도 있지만 이곳이 너무 좋았다.

현재가 너무 행복했다.

다시 꿈을 꾸면 뭐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진겸의 바람과 달리 며칠이 지나도 꾸지 않았다. 그때 꿨던 꿈을 열심히 생각하면서 자도 소용없었다. 자꾸만 마음에 찝찝함이 남기는 했으나 진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 퇴원 날이 다가왔다.

“다 챙긴 거 맞지?”

“……챙기긴 했는데 우리 짐이 이렇게 많았나?”

사복으로 갈아입은 진겸은 팔짱을 낀 채 곤란하다는 얼굴로 쌓여 있는 짐을 봤다. 입원할 땐 분명 가방 하나였는데 그동안 산 물건과 수혁이 사다 준 물건이 더해지니 몇 배나 늘어나 버렸다.

“택시 타고 가야겠는데?”

짐이 적었으면 버스로 갈 수 있었으련만 이걸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건 무리였다. 진겸은 빠르게 버스를 포기했다.

“차 가지고 왔어.”

“차? 어디서?”

“이사님이 오늘 쓰라고 하셨어.”

“원범이 형이? 그럼 그거.”

회사 거잖아…….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회사 차를 이렇게 막 써도 되나 싶으면서도, 자신이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서 그냥 두었다.

“형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 들어가니까 괜찮아. 짐 두러 한번 갔다 와야겠다. 형은 여기서 기다려.”

“아니야. 뭐 하러 그래. 같이 들고 가면 되지.”

“아직 환자잖아. 잘 아물었어도 최대한 조심해야 해. 알지?”

“잘 알지. 그래도 가벼운 건 괜찮아.”

짐이 무거운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주차장까지만 가면 돼서 들고 걷는 시간은 짧을 거다.

잠시 고민하던 진우가 그래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사이 훈일이 병실로 들어왔다.

“퇴원 준비는 다 했어?”

“응. 거의 끝나가.”

진우가 정리하다가 훈일을 보며 인사했다.

“지금 진료 시간 아니야?”

“맞아. 잠깐 짬 내서 왔지. 와, 여기서 살림을 차리더니 짐이 한가득하네.”

훈일의 말에 진겸이 머쓱하게 웃었다. 확실히 짐이 많아지긴 했다.

“나도 좀 도울까?”

“아니에요. 저도 들고 갈 거라서 괜찮아요. 의사쌤 손은 소중하잖아요.”

“저번부터 내 손이 자꾸 소중하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야. 수술하는 의사한테 손은 생명이거든.”

히죽 웃는 훈일을 따라 진겸과 진우도 웃었다.

“약이랑 드레싱 밴드는 잘 챙겼고?”

“네. 가방에 잘 넣어 놨어요.”

진겸은 자주 메는 캔버스 가방을 톡톡 치며 말했다. 다른 가방도 꽤 많은데 유독 이 가방에 손이 간다. 이유는 모르겠다. 편해서 그런가.

“약 꼬박꼬박 먹는 거 잊지 말고, 다 먹기 전에 미리미리 들러서 다시 받아 가. 온 김에 검사도 좀 하고 가고.”

“네!”

“아, 그리고 진겸아.”

“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항상 장난스레 웃던 훈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진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제 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진우도 덩달아 떨리는 눈으로 훈일을 응시했다.

“나한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예?”

뜬금없는 말에 진겸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수혁이나 탁 이사한테는 꼬박꼬박 형이라고 하면서 난 왜 맨날 쌤이야?”

“…….”

“네가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걔들보다 나랑 더 오래 알았어. 그럼 나한테도 형이라고 해야지.”

도대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왜 형이라는 호칭에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진우가 형이라고 안 불러 줘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훈일에게는 진우가 형이라고 부르는 걸 알고 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진겸은 어서 불러 보라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훈일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훈일이 형, 감사합니다.”

“오냐. 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형이 좋네. 아프면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 아직 네 몸 회복되려면 멀었어.”

“네. 명심할게요!”

* * *

병원에 입원할 땐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반팔만 입기엔 추운 날씨가 됐다. 아직 단풍이 들려면 멀었지만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볕과 달리 선선한 바람은 초가을이 왔음을 알렸다.

진겸은 오랜만에 온 집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병실보다 좁은 집을 보고 있자니 느낌이 묘했다. 병원 생활을 너무 오래 한 모양이다. 그래도 진우가 가끔 와서 청소를 해 집은 깨끗했다.

데려다주고 회사로 가야 한다더니 진우는 정말 짐만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가면서도 밥 챙겨 먹어라, 아프면 바로 119에 전화해라, 약 꼭 먹어라 등 현관을 나설 때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 많이 들으니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집에 혼자 남겨진 진겸은 상을 펴고 캔버스 가방에서 꼬깃꼬깃해진 노트를 꺼내 펼쳤다.

병원에서 틈틈이 한 덕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문제는 연락을 하면 할수록 무섭다는 거였다.

처음에 연락했던 사람들과도 약간의 언쟁이 오갔었다.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어차피 연락 안 할 거지만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보자는 사람들에겐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고, 끈질긴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다시 차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일기 앱에 적어 놨다. 주고받은 메시지도 삭제하지 않았다. 언젠간 백진겸이 볼 수도 있으니까. 진우가 없을 때 연락하기는 했으나, 전화나 메시지는 시도 때도 없이 오는 통에 결국 들켜 버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진우는 이때다 싶어 왜 연락을 하느냐며 무시하라고 했지만 진겸은 그럴 순 없어서 최대한 몰래 하고 있다.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핸드폰을 하고 있어도 진우의 눈총이 따가워서 웬만하면 그가 퇴근한 오후에는 공부만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연락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백진겸이 왜 좋은 거지?’

얼굴이 취향이라면 처음에야 호감을 느낄 순 있겠지만, 그게 쭉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물론 자신도 처음 백진겸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얼굴을 보고 감탄하긴 했다. 지금도 거울을 볼 때면 혼자 만족감에 심취해 있기도 하다.

‘성격만 아니었으면 진짜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악역을 맡은 캐릭터지만 확실히 백진겸이 다른 포지션이었다면 인기가 상당했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근데 진우 괴롭히는 거 말고 또 뭘 했더라?”

이제는 소설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애초에 완결이 나지 않은 소설이라 더 그랬다.

백진우를 괴롭히는 형제. 그게 백진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자잘한 괴롭힘만으로 탁원범에게 매장당할 리는 없었다.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원작 따위 상관없긴 했다. 이미 자신의 개입으로 틀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묘하게 찝찝한 구석이 자꾸만 머릿속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나가질 않았다.

분명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어디쯤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게 기억날 리가 없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진겸은 노트를 보며 차근차근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연락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백진겸은 어떻게 이런 연락을 다 주고받았나 싶다.

선물을 준 사람들의 반응은 너한테 준 거니 알아서 하라는 사람과 주소나 통장 계좌 번호를 알려 주면서 다시 돌려 달라는 사람. 딱 반반으로 나뉘었다.

진겸은 전부 노트에 적어 가며 한 사람이라도 빠트리지 않으려 애썼다.

마지막까지 연락을 미뤄 두던 번호들은 백진겸과 꽤 친분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는 일회성의 만남이 아닌 나름대로 교류라는 걸 하고 있었다.

“아빠…….”

백진겸, 백진우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이 사람만큼은 어떤 식으로 연락을 취해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산호. 차단하지 않은, 이름으로 저장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주고받은 메시지는 단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았고 통화 기록만 가득했다.

처음에 몇 번 전화가 와도 받지 않자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주일 전에 메시지 하나가 왔다.

정산호

준비 끝났어

오후 4:2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