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전화를 끊은 진우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일정에도 없는 외근을 나간다고 하더니 향한 곳이 집이었나 보다.
옆에 있던 양 비서가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사님, 진우 씨 집으로 간 거야?”
“……예.”
“가는 줄 몰랐어? 하긴…… 그런 걸 미리 말해 주고 움직일 양반이 아니지.”
“……하아.”
진우가 핸드폰을 뚝 떨구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겸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진겸이 꾸준히 병원에 다녀야 하기에 먼 곳으로 갈 순 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 빚을 갚고 나면 회사를 관둘 생각이다.
물론 자신의 편의를 봐준 원범에겐 미안하고 감사하다. 순수한 목적으로 도와준 건 아니라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도움이 된 건 맞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거든 지금까지 받았던 도움을 갚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평상 설치가 완전히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원범은 전에도 종종 집을 옮기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매번 거절하니 한동안 꺼내지 않던 주제라서 포기하고 넘어간 줄 알았다. 그러다가 진겸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다시 한번 물은 적이 있었다.
[지금 그 집, 백진겸이 살기엔 안 좋은 것 같은데. 이사하는 게 어때?]
[이사할 여력이 안 됩니다.]
[누가 백 비서 힘으로 하래? 집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제 힘으로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별말 없기에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더니 이럴 작정이었나 보다. 대뜸 집문서를 들이밀지 않아서 다행인데 평상이라니. 너무 뜬금없긴 했다. 집에 못 들어오게 해서 놓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회사에서 진우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진겸은 원범의 뒤를 졸졸 쫓았다.
“어디 가?”
“예?”
언덕을 내려가려던 진겸의 손목을 잡은 원범이 순간 멈칫했다. 얇은 거야 진작 알고 있었다. 확 당겨서 가려고 하다가 슬쩍 걸음을 늦추고 손에서 힘을 뺐다.
‘부러지면 안 되지.’
괜히 힘줬다가는 정말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아서 나름 조심하는 거였다.
“어디 가시려고요? 위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긴. 주차장 있잖아.”
“차 타고 가려고요? 멀리 가실 거예요? 평상 다 만든 거 같던데…….”
진겸은 한 걸음 뒤에서 원범의 옆모습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가 발이 툭 걸려 앞으로 꼬꾸라졌다. 손목을 잡고 있던 원범이 팔을 위로 들고 다른 팔로는 진겸의 가슴을 감싸 안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겸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하다가 원범이 바르게 세워 주자 숨을 후 내뱉었다. 그러고는 바로 워치를 확인했다. 역시 심박수가 빨라졌다.
훈일에게서 다치지 말라는 소리를 하도 들었던 터라 더 놀랐다. 세차게 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굵은 팔뚝을 꽉 잡았다.
“괜찮아?”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도 원범을 향해 감사 인사는 잊지 않았다. 그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엎어져서 다쳤을 게 뻔했다. 그러면 분명 피가 날 것이고 상처가 크기라도 하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 했을 터다.
“걷는 법도 까먹었어?”
“그럴 리 없잖아요! 턱에 걸려서 그런 거예요…….”
눈을 떼면 사고 치는 아이를 보는 눈빛으로 진겸을 내려다보던 원범은 제 팔을 꽉 쥔 새하얀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넘어질 뻔했던 게 무서웠던 건지 작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가지.”
원범은 진겸을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오히려 어깨를 더 감싸 안으며 자기 쪽으로 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진겸은 넘어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줬다. 원범이 잡고 있는 이상 넘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전에는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약을 먹고 나서부터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큰 상처가 나면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니요. 딱히.”
“그럼 그냥 따라와.”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걸까. 진겸은 궁금했지만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집에서 차가 주차된 곳까지는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밖에 있던 김 기사는 원범이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원범은 진겸에게 타 있으라고 하고는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청오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살짝 얼굴과 눈만 움직여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누구를 향한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진겸의 집으로 가는 동안 따라붙던 시선이 있었다. 출발할 땐 없던 것이 이곳에 온 이후부터 따라온 것이니 자신들보다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을 노리는 건지, 아니면…….
‘백진겸을 노리는 건지는 잡아 보면 알겠지.’
청오는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에 원범까지 타자 김 기사는 내비게이션을 켜고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이제 어디 가는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어.”
“…….”
“이상한 데 안 데려가.”
뾰로통해 보이는 진겸의 표정에 원범이 픽 웃었다. 고작 목적지 하나 알려 주지 않았다고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니 자꾸만 건드리고 싶다는 걸 본인은 전혀 모르나 보다.
수혁이 말했던 재미와는 결이 다르지만 요즘 원범도 느끼고 있었다.
‘백진겸이랑 있으면 심심할 틈은 없겠네.’
지금도 심심하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머리가 굵은 이후로 워낙 아등바등 살아왔던지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원범이 빤히 바라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진겸은 주머니에서 계속 울리는 진동에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진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끈질겨!’
진겸은 굳은 얼굴로 화면을 보다가 핸드폰을 엎었다.
“누군데 안 받아?”
“모르는 번호라서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진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진겸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원범에겐 말 돌리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에게 꼭 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걸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수혁이 청오에게 부탁하여 조사한 진겸과 진우에 대한 정보는 원범의 손에 먼저 들어왔다.
‘그 새끼들인가?’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연락하던 사람들에게 사과 메시지를 돌리고 있다는 것 역시 청오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굳이 해야 하나?’
차단해 놓은 거 그냥 두면 될 것이지.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원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한다 해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했다. 가뜩이나 심장도 좋지 않은 진겸이 엄한 새끼들의 말에 충격이라도 받을까 봐서 아주 조금 걱정도 됐다.
특히 아까 보였던 행동 때문에 더 그랬다. 밖에 나오려다가 멈칫하고 다시 들어가 버렸던 진겸에게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었다. 왜 그런지 몰랐다가 청오가 말해 줘서 알았다. 평상을 설치하러 온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다시 들어갔다는 것을.
‘겁도 많으면서.’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꽤 오래 이동했다.
진겸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계속 울리는 진동을 애써 무시했고, 원범은 그런 진겸의 옆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이 정도로 바라보면 시선을 눈치챌 법도 한데 다른 생각을 하는 진겸에겐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 * *
서울 시내를 벗어나길래 목적지가 가까운 곳은 아닐 거라 짐작은 했지만 집에서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카페에 올 줄은 몰랐다. 더구나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는 원범이라 더 의아했다.
경기도에 위치한 카페는 정원이 굉장히 넓은 곳이었다. 주차장도 넓어서 주차하고 카페까지 조금 걸어야 했다. 운전을 한 김 기사도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그는 차에 남았다. 진겸은 어색해하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원범과 나란히 걸어 카페로 이동했다.
“진짜 괜찮으세요?”
진겸은 진심을 담아 몇 번이고 물었다.
“여기 사람 진짜 많을 텐데…….”
주차장에 가득한 차를 보면 카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지 예상이 됐다. 다른 사람이랑 왔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오자고 한 건 아니지만 괜히 불편했다.
“여기 내가 너 데려온 거야.”
“그렇죠.”
“그럼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하지 않을까?”
“저야 괜찮죠! 오히려 데려와 주셔서 감사한걸요.”
최근에 연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참이다. 더구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팽팽 돌려 가며 공부하느라 지쳐 있던 터라 더 그랬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그럼 나한테 괜찮냐고 묻지 말고 놀아.”
“…….”
카페에 와서 혼자 뭘 하고 놀아야 한단 말인가.
진겸은 이곳에 있는 동안 자기 혼자 조잘거릴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원범을 두고 주문을 하러 갔다. 손에는 원범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메뉴판을 빤히 보던 진겸은 청포도 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원범은 다른 걸 시켜 줘야 할 것 같은데 같은 걸 먹겠다고 하길래 그냥 시켰다. 솔직히 겉으로 봤을 때 그의 앞에는 청포도 주스보다는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어야 할 것 같긴 하다.
진동벨을 받고 천천히 구경하던 진겸은 아직도 자리에 앉지 않은 원범에게 다가갔다.
“어디에 앉을까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그럼 저 좀 돌아보고 와도 돼요?”
정원에도 테이블이 있고 2층도 있다. 어디에 앉아도 좋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내부는 소리가 울리다 보니 조금 시끄러웠다.
진겸의 고민은 짧았다. 조금이나마 트여 있는 공간에 앉는 게 나을 것 같아 정원을 택했다. 물론 정원에도 사람은 많았다. 더운 날씨도 아니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있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상당했다.
정원을 쭉 둘러보던 진겸은 괜찮은 자리를 발견하고는 원범에게 알려 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가 바로 뒤에 있던 단단한 몸과 부딪쳤다. 팔을 뻗은 원범은 이번에도 진겸이 넘어지지 않게 감싸 안았다.
졸지에 원범의 품에 안기게 된 진겸이 숨을 흡 들이켰다. 그리고 그대로 들숨을 내쉬지 못한 채로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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