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안전한 장소로 도망친 줄 알았건만 그곳에 발을 들이고 흉신의 눈에 든 이상 이미 낙인찍혀 버린 몸이었다. 흉가에서 그의 넋을 불러들였고, 그 뒤로는 쓰러져서 줄곧 혼수상태였다.
서창경이 준비해 준 제물을 들고 가서 목적한 넋과 바꾸어 왔다.
「교환만 하고 말아요? 이번엔 사령으로 삼지 않을 거?」
「그럴 수준이 아냐. 저건 어지간한 만신도 못 건드리는 신령이다.」
「아니, 그럼, 그런 위험한 데엘 왜 나를 보내?」
네가 직접 가라, 새끼야.
「강지헌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다른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일 하지 않고 살아도 돼. 그런데 윤상현 같은 게 붙은 너는 네 목숨을 걸고 절실하게 타인을 구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하늘이 감동해서 너도 살려 주는 거야. 목숨 연장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좀 위험하긴 해도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하라고 시키는 건 아니잖아?」
「…….」
「범죄 아니잖아, 그렇지?」
「…….」
소방관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었던 순간이다.
7교시 강의 시간에 맞추어 놓은 알람이 울려 눈을 떴다. 동문 선배는 이제야 의식이 돌아오는지 머리가 빠개질 거 같다고 낑낑거리며 잠꼬대하고 있었고, 김재원은 수업에 들어가고 없었다.
김재원이 남긴 문자에는 [강지 씨(하트) 용돈 필요하면 언제든 너의 베프한테 상담하세요(하트하트)]라는 글귀가 농담처럼 적혀 있었다. 돈이 필요해서 하는 알바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내가 답지 않게 골골거리니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다.
일이 해결되면 김재원에게 제일 먼저 말하겠다고 약속했기에 녀석은 내가 뭘 하며 싸돌아다니는지 계속 추궁하지 못했다.
아무에게나 돈을 준다고 말하는 놈이 아니라서 잠시 감동에 젖었다.
동문 선배를 일으켜 앉힌 후 김재원의 냉장고에서 꺼낸 포도 주스를 마시게 했다.
“강지, 꿀물 없어? 3일 연달아 마셨더니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 으아아, 내장이 타오른다! 나 꿀물 줘, 꿀물!”
이틀 수업을 모조리 짼 주제에 꿀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제주도에 계신 어머님, 아버님, 일가친지분들께 영상 통화 돌리기 전에 닥치세요.”
“넵.”
충혈 탓에 딸기코가 된 데다 몰골이 말이 아닌 동문 선배는 즉시 조용해졌다. 굳이 거울을 보고 확인하지 않더라도 제 상태를 짐작하는 거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잘 나가던 미남 선배였건만 알코올로 몸이 망가져 겨우 스물하나에 우리 아빠도 튀어나오지 않은 술배가 불룩하게 나온 모습을 보니 짠했다.
“포도가 원래 꿀로 만들잖아. 꿀포도 얘기 못 들어 봤어요?”
술주정뱅이에게는 아무 말이나 막 던져도 된다.
“어, 진짜?”
“포도가 자연산 위장약이에요. 해독에도 좋다니까 얼른 마셔요. 여기 생수도 한 병 원샷 하시고.”
역시 아무 말.
이때쯤 수분 섭취를 시켜 주지 않으면 지인 한 명을 골로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 김재원은 밤늦게 돌아올 예정이고, 내가 나가면 이 선배의 상태를 들여다봐 줄 사람이 없었다.
달게 낮잠을 자고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를 걷다 보니 어젯밤의 일이 꿈속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꿈이다.
의뢰를 수행하고자 서창경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귀안을 틔웠다. 일시적이었지만 평소라면 보지 못했을 것을 눈에 담아야 했다.
그것은 몸집이 큰 사람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직립 보행을 하지는 않았다. 등을 똑바로 펴지 않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엉금엉금 걸어 다녔다. 내가 쳐 놓은 결계 주변을 밤새 탑돌이를 하는 것처럼 빙빙 돌며 어슬렁거렸다.
거래 신청서와 넋을 대신할 희생 제물인 돼지의 머리가 놓인 임시 제단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줄곧 살아 있는 인간인 나만을 노렸다.
신청서에는 가져간 넋과 희생 제물을 교환하자는 요구보다는 반성문에 가까운 문장들이 나열돼 있었다. 잘못했다, 다시는 네 휴식을 방해하지 않을게, 죽을죄를 지었지만 용서해 줘, 넋을 돌려받으면 소를 진상하겠다, 이런 구질구질한 내용의 나열.
뭘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굴어야 하나 싶었는데, 두 쌍의 시뻘건 눈을 마주한 순간 반성문을 좀 더 성의 있게 써 와야 했다고 반성했다.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위험하다는 고용주의 경고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것은 놀이공원의 가짜 귀신이 아니었다.
술과 소금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앉았다. 고용주가 빌려준 사령으로 하여금 그 결계를 지키게 했다. 검은 갓을 눌러 쓴 선비 차림의 사령귀는 저승사자처럼도 보이고 센 것 같아서 나름은 믿었는데, 동이 틀 무렵에 결계 바깥으로 끌려 나가 그것에게 잡아먹혔다.
우두둑우두둑. 우적우적.
귀신이 귀신을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형체 없는 귀신도 통째로 씹힌다는 사실 역시.
귀를 틀어막고 부처님, 하나님, 알라, 비슈누, 온갖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가 절에 갈 때 열심히 따라다닐 것을. 교회 다니는 동네 친구에게 성경책이라도 빌려 올 것을.
놈이 다시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결계 안으로 손을 뻗었을 때, 이제 내 차례인가 싶어서 마음을 비웠다. 비참하게 씹히기 전에 단숨에 죽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놈은 내가 가져온 서류만을 내려놓고 뒤돌아갔다. 서명 대신 찍힌 시커먼 손바닥 자국을 확인하고 고개를 드니, 놈이 제단 쪽으로 걸어가며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폐가의 흉신은 이 미터를 훌쩍 넘긴 거구였다.
우두둑우두둑. 우적우적.
놈이 희생 제물을 받았다. 거래가 성립되었다.
새끼가, 어차피 도장 찍을 거 빨리빨리 하지. 살아생전에 한국 사람 아니었어?
희생 제물이 성에 차지 않아서 나를 노리느라 그토록 뜸을 들였던 것일 수도 있고.
기척을 죽이느라 안도의 한숨마저 참으며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폐가를 빠져나왔다. 바깥세상은 환한 태양이 비추는 가을날 아침이었다.
7교시 강의는 교양 필수인 ‘회계 원리’였는데, 공인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후 골병이 들어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한 선배가 교재를 물려주기로 했다.
선배는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니까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말고 이 자격증은 졸업 후에 천천히 따라고 조언했지만, 함께 문병을 간 선배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골병들어 휴학한 선배를 부러워했다. 1년쯤 학교를 쉬고 몸조리를 해도 좋으니까 그 자격증 시험에 꼭 합격하고 싶다며.
‘그렇게 어려운 과목인가?’
나는 회계학책을 들여다본 적도 없어서 아직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경영신영주선배님: [강지 내 사물함 비번 #6023]
경영대에 도착해서 골병든 선배가 보내 준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용 종료일이 하루 남은 사물함이라니 오늘 반드시 책을 꺼내야만 했다.
세경 그룹에서 지어 줬기에 세경관이라고도 불리는 건물의 입구를 들어설 때였다. 소운동장 규모의 로비 한쪽으로 사람들이 몰린 광경이 보였다. 그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건 한 인물이었다. 지나가던 교수님마저 자석에 이끌리듯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향했다.
아, 그거구나. 원숭이 구경.
듣던 대로 키가 훌쩍하니 커서 인파에 파묻혀 있어도 뒤통수가 보였다. 동기 녀석들의 세뇌가 성공했는지 순간적으로 뒤통수도 잘생긴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소문의 선배님에겐 관심이 없었는데, 그 한 사람 때문에 생성되는 밝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희한해 보여서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사물함으로 가던 발걸음을 로비 반대편으로 옮겼을 때 마침 소문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눈이 마주친 듯도 한 느낌이 들었다.
“……?”
어젯밤에 보았던 시뻘건 두 쌍의 눈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고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피신할 곳을 찾아 건물 입구로 되돌아 나가는데 전신을 관통하며 소름이 내달렸다. 놈의 시선이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속도를 붙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야지만, 저놈에게서 멀어져야지만 내가 살겠다는 생각이 몰아쳤다.
어떻게 된 일일까. 흉가에서 마주친 그것을 달고 와 버린 것일까. 이제 나도 놈에게 넋을 빼앗겨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 걸까.
돌아와서 고용주에게 보고할 때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면 내게도 알려 줬을 텐데 말이다. 서창경은 친절해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조수를 잃기 싫어서라도 내가 흉신에게 넋을 빼앗기게끔 내버려 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양지부터 찾았다. 조금이라도 음기를 떨치고자 하는 발악이었다. 9월,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숨죽여 내게 닥칠 재앙을 기다렸다.
그러나 찾아온 건 재앙이 아니라 그 반대의 증세였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소름이 가라앉고, 따듯한 감각이 돌아왔을 때에야 조금 전의 일이 흉가의 귀신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원인은 저거였다.
‘저거 뭐지? 사람 맞나?’
시뻘건 눈을 하고 느릿느릿 내게 접근하던 흉신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공포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처럼 겁을 먹은 적이 없어서 원인을 분석해 봤다.
나 뭣 때문에 기겁했지? 눈?
사실 눈동자 색을 확인할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럼 좋다. 시뻘건 눈은 내 착시였다고 치자.
새벽에 흉가에서 받은 극심한 공포와 충격이 몇 시간 만에 사그라질 순 없었던 거다.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다가 갑자기 발현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뭘 계기로?
그건 나도 모르지. 저 선배가 귀신이라서?
또 ‘저 선배 사람 아님’ 가설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건 검증할 필요도 없는 잘못된 가설이었다.
나는 영감이 뛰어난 편이 아니다. 신령을 보는 건 운동 신경이 뛰어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감과도 전혀 다른 육감이 발달한 사람에게 유리했다.
고용주가 내 옆에다 사령을 세워 놓아도 나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내가 목격한 그 귀신 눈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선배가 진짜 귀신이라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빨리 알아챌 일이기도 했고.
‘그럼 뭔데 저 인간? 나처럼 귀신이 붙은 건가?’
복잡한 심경으로 한참 동안 도망쳐 나온 건물을 노려보았다. 그 안에 도사린 불길한 인물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