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예전에도 그러했듯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먼저 술부터 여기에다 내려놓고 차 대러 가려고요.”
등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혜준의 음성은 아니었다.
“오, 술! 뭐 가지고 오셨어요? 우린 일단 소주랑 맥주 두 박스씩 챙겨 왔고 모자란다 싶으면 나중에 이 섬 슈퍼에서 조달하려고 했는데.”
“이쪽은 위스키랑 와인 열 병씩이요.”
“오오, 양보다 질!”
“진정한 물주시네요. 존경합니다! 혜준 선배님 친구분이라고 하셨죠?”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혜준이 데려온 사람인 듯했다.
“예. 꼬맹이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았어요. 그리고 내 돈 내고 산 것도 아닌데 물주는 무슨 물주요. 이거 전부 이혜준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와, 선배님은 술 좋아해서 양주 모으고 계시나 봐요?”
“그건 아니고. 가족 중에 마시는 사람이 없다 보니 들고 가서 처분하라며 어머니가 내주시더라고.”
낯선 목소리에 이어 사근사근한 음성이 부드럽게 귀에 감겨들었다. 좀처럼 학부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없고, 무리 지어 몰려다니지 않음에도 저처럼 모나지 않은 태도 덕분에 그는 성격이 원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도 않더라만 착각은 각자의 자유니깐.
서둘러 귓구멍을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위층은 여학우들이 사용하기로 했기에, 아래층을 돌며 수십 명이 모일 만큼 너른 공간부터 찾았다. 가장 큰 방에다 과자 상자를 두고, 주방으로 가서 라면 상자를 내려놓았다.
“강지, 술은 어디로 가져가면 돼?”
되돌아 나오는 길, 복도에서 마주친 설정우가 물었다. 녀석의 뒤로 줄줄이 짐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조리 식품 말고는 전부 오른쪽 복도에 문 활짝 열어 둔 방에다 쌓아 둬.”
“냉장고 커? 술병 다 넣어 두게.”
“응. 업소용 냉장고 두 대나 있더라. 주방은 이쪽.”
등 뒤를 가리켰다. 현관 한쪽으로 비켜서서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나긋한 인사말이 들려왔다.
“강지, 오랜만이다?”
“어, 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혜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성의 없이 인사하고, 그 뒤로 따라 들어오는 그의 친구를 반가운 척 챙겼다.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는지 친구는 모델 체형의 훤칠한 미남이었다.
이름을 지목당해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 하는 이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내 본명도 모르면서 애들이 내뱉는 별명을 장난처럼 따라 읊은 것 같아서 더더욱.
“안녕하세요. 이번 갯벌 체험 주최하신 분이죠?”
친구가 물었다.
무슨 주최씩이나.
“저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몰릴 줄은 몰랐어요. 조개 캐기는 인원 줄이려고 내건 조건인데 오히려 일을 더 키워 버렸네요. 간조 시간 다가오는데 나가 보지 않으세요?”
“나야 운전 담당 겸해서 이혜준 뒤만 졸졸 따라온 사람이니까요. 이놈이 나서 줘야지 나도 경영학과 학생들 틈에 끼어들어 어울릴 텐데 말이죠.”
친구의 시선이 한껏 기대를 품고서 이혜준을 향했다.
그니깐요. 이 사람 왜 여기서 얼쩡거리느냐고. 어서 갯벌로 꺼져 줄래?
“아, 그러시구나.”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으며 어서 갈 길 가라는 뜻으로 좀 더 물러섰다. 이혜준의 친구가 갖가지 양주병이 든 나무 상자를 들고 지나쳤다. 레이블만 훑어도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호감도가 치솟을 뻔했다.
“강지 넌 어떡할 건데. 너는 쟤들하고 여기 남아서 바비큐 준비해야 해?”
이혜준이 또 친한 척 별명을 불렀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 인간이 더위를 먹었나.
이혜준과는 이처럼 가까이에서 대화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바깥으로 나가려다 우르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전 두 학기 동안 그랬듯이 내가 의식적으로 그를 피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야 했다. 후배가 돼서 선배 묻는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고 쌩 까면 십중팔구 나만 나쁜 놈이 될 테니까.
설마 타이밍 재고 말 시킨 건 아닐 테지?
“저는 잠깐 개인적으로 볼일 보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일 도울 거예요.”
눈을 바짝 내리깐 채 대꾸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쪼뼛쪼뼛 뒷골이 당기고 불안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진짜 나 왜 이러지?
“무슨 볼일인데.”
니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
어이가 없어서 멈칫하는 사이, 곁으로 다가온 짐꾼 녀석들이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
“강지 형 할머님 댁에 인사 드리러 간대요.”
“이 섬이 강지 아버님 고향이래요.”
“…….”
소리 없이 혀를 차며 동기와 후배를 따라 나가는 내 등 뒤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났다. 솟구치는 짜증을 읽어 낸 비웃음처럼 들렸다.
이혜준과 그의 친구까지 거들며 서너 번 왕복하자 버스 짐칸이 말끔히 비었다. 상자 해체와 나머지 잔일거리는 설정우와 후배들에게 맡긴 채 나는 길을 나섰다. 섬 안동네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찾아 깊숙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들의 수험 공부보다는 당신의 자식 된 도리가 더 중요했던 사람이라 고3 명절 때에조차 끌려오듯 찾았던 장소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도 매해 의무적으로 방문했을 익숙한 길이었다.
백중날 행사 준비로 어수선한 부둣가와는 다르게 섬 안쪽 골목은 인적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어느 집에 다다른 나는 이내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
여기 맞아?
낯선 기분에 고개를 뒤로 젖혀 문패를 확인했다. 강일목. 제대로 찾아왔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언제나 말끔히 단장되어 있던 담벼락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바래져 있었다. 청회색 대문 역시 군데군데 녹이 드러난 채였다.
입대하기 전에 부모님 몰래 이 집을 방문하려던 내 계획은 서창경으로 말미암아 무산됐다. 그의 말로는 내가 이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곳 토지신의 주의를 끌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왜냐하면 토지신과 한통속인 윤씨 집안의 죽은 자손도 나를 따라 들어올 테니까.
초인종을 누르자,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철문이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열렸다. 끼긱끼긱. 끼긱끼긱. 이 또한 이 집을 방문할 때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할아버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지헌입니다.”
노인에게 무의미한 인사를 건넸다. 노인의 옆으로 황량한 마당 풍경이 드러났다. 어업에 쓰는 장비며 이것저것 자질구레하게, 그러나 정감 있게 많이도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부의 집인지 뭐 하는 집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꾸던 꽃밭도 증발하고 없었다. 이 계절 즈음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바닷바람에 춤을 추던 꽃물결이 사라지고 검은 흙더미만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들어오렴.”
노인이 대문을 열어 둔 채 비치적비치적 걸어 들어갔다. 그를 따라 방치되어 쇠락의 기운이 감도는 가옥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고작 서너 해 사이에 이렇게까지 쇠락하다니. 집주인인 노부부에겐 내 아버지 말고도 자식이 둘이나 더 있었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근면히 저축해 온 분들이라 노후 대비 또한 돼 있다고 들었다. 긴 시간 집을 비운 것도 아니면서 이처럼 주변을 돌보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정작 주변을 살필 여력을 잃은 피해자는 귀신과 인연을 맺은 나인데 말이다.
“앉아라. 점심은 들었니?”
노인이 대청마루에 앉기를 권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예. 밥은 먹었고요.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저 어서 돌아가 봐야 해요.”
잔말 말고 물건이나 내놓으라는 요구를 둘러 말했다.
“…….”
알아들은 노인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후 마루에 올라 안방으로 향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내 아버지가 허리가 아프다는 당신 모친을 위해 주문했다는 커다란 돌침대가 곁눈에 들어왔다. 방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보아 버렸다. 그 위로 덮인 이불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외면했다. 더는 눈에 담기가 거북했다.
곧 서랍을 뒤적이는 소리와 함께 두런거림이 들렸다.
“누구 왔어요?”
“석이네 첫째.”
“지헌이?”
“…….”
“백중에 온다면서. ……오늘인가 보네. 하이고. 하이고…….”
“나오지 말고 누워 있어요. 애 놀랜다.”
“애 놀랄 걸 염려했다면 그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
잠시 갑갑한 침묵이 흐른 후 노인이 마루로 돌아왔다. 꼿꼿이 선 내 앞에 주저앉은 그가 물건을 내려놓고 내밀었다.
“이게 철연네 거고, 이건 윤 의원님이 주신 거.”
먼저 내민 물건은 무속인이 점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요령이었고, 뒤엣것은 자기앞수표였다. 파란 종이 쪼가리에 적힌 금액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금일백만원정>이라는 한글. 이게 본인 허락도 없이 내 사주를 죽은 사람 집에 판 값이었다.
돈 때문에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이 땅에서 나라 이름이 몇 번이고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오랜 세월 굳건히 이 일대 대지주 자리를 지켜 온 윤씨 가문을 거역하지 못하는 복종심이 벌인 일이었다. 노예근성이.
이 근방 섬이나 육지 출신 중에는 윤씨 집안 종살이의 유전자가 뼈에 사무치지 않은 주민이 없다고 들었다. 21세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하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윤 의원의 손자가 소꿉친구 강지헌하고 저를 같이 묻어 달라고 유언하면, 살아 있는 강지헌의 영혼을 그에게 제물로 바칠 만큼의 영향력이 행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