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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9)화 (9/96)

9화

어릴 적 이 섬에 들를 때면 작은 도련님의 놀이 상대로 윤 의원의 별장에 불려 가곤 했다. 윤상현은 외국에 살면서 명절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갑내기였는데, 멋모를 땐 그와 곧잘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 철이 들고 나서는 서로 어색해져서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인 척 무시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접점 없이 멀어지면서 우리는 그대로 인연이 끝날 줄 알았지.

나는 윤상현이 내가 수능 시험을 봤던 그해에 요절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른 채 살았다. 설마 죽으면서 내게 굴레를 씌우고, 죽고 나서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내내 나를 고통 속에 둘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나 잘못했을까.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는지, 무슨 이유로 이토록 미움을 받는지, 수없이 그와의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작정을 했으니 내 조부모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날 엮어 넣었을 집안이라곤 하나, 굳이 혈육인 당신들마저 이 저주에 손을 보태야 했는지……. 무엇보다 원망하는 마음이 가장 깊었다.

이 지경이 돼서도 어떻게 윤 의원‘님’ 자가 튀어나올 수 있는지, 고작 이 돈 받자고 자식과 연을 끊었는지, 수표는 주인집에서 주신 영광된 하사품이라 쓰지 않고 남겨 뒀는지, 충성심을 증명하고 칭찬받은 노비의 기분은 어떤지, 이것저것 가슴을 후벼 팔 표현은 많았지만 참았다.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싶기도 했고.

“아무 표시도 없는데 이거 윤 의원 거 확실한가요? 보통 뒷면에 양도하는 사람 증명하려고 이서하잖아요. 수결로요.”

엉뚱한 제삼자를 끌어들일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만 했다.

예를 들자면, 윤 의원 본인이 아니고 상관없는 그의 비서가 쓴 수표라면 혼선이 빚어진다. 나는 나대로 천벌 받을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며, 여태 쌓아 올린 선업 포인트가 깎일지도 몰랐다.

수표 발행처는 제2 금융권이었는데 윤 의원 집안 소유였고, 이 고장에서만큼은 고객 유치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업체였다. 이 섬의 유일한 은행이기도 했다.

지역 텃세가 막강한 탓에 다른 금융 기관에서 고개를 들이밀 환경이 되지 못했다.

“사람들 다 물리고 내게 손수 건네신 거다. 이 근방에선 의원님 이름만 대면 되는데 다른 무슨 증명이 필요하겠니.”

그의 이름이 곧 절대적 신용을 가진다는 얘기였다. 윤씨 집안 홈그라운드에서의 싸움이라는 실감이 났다.

“알았습니다.”

가방에서 종이봉투 두 개를 꺼냈다. 앞면에 손바닥만 한 부적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노란색 봉투였다. ‘조상희’라고 적힌 봉투에 놋쇠 방울을, ‘윤호중’이라고 적힌 봉투에는 수표를 집어넣었다.

이제는 너희가 제물이 되어 봐.

“……면목이 없구나.”

머뭇머뭇하던 할아버지가 말을 잇기가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이건 준비해 주신 물건값입니다.”

지폐 뭉치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증거가 남지 않게끔 일부러 현금으로 가져왔다. 모자라면 돈을 더 뽑아 올까 했는데 예상외로 강지헌 껍데기를 제한 혼백 매매가가 저렴해서 서른 배도 넘게 남아돌았다.

인간 강지헌의 가치, 100만 원.

‘시발, 자존심 상해. 윤 의원 새끼, 노비들 상대로는 이 돈도 아까워서 벌벌 떨었다는 데 100만 원 건다.’

현금 출금기까지 다녀오는 번거로움은 덜었다지만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이걸 어찌 받아. 도로 집어넣어라.”

“제가 드리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대는 경비에 포함돼 있으니까 부담가지지 마시고 사용하세요.”

“그 회사는 뭐 하는 데라고 했지?”

“모르셔도 돼요.”

“……. ……사주단자도 있는데 필요하면 가져가련?”

“사주단자요?”

“작은 도련님 사주가 적힌 종이 말이다.”

“아-!”

그제야 의미를 알아차리고 낮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혼사가 결정되면 신랑 집에서 자식 사주를 신부 집으로 보내는 전통을 현대에도 지키는 집안이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 녀석의 신부로서 내가 사주단자를 받았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비밀리에 치른 혼례식이라고 윤 의원이 제 손주의 성적 취향을 되게 존중해 줬나 보다.

윤상현의 사주는 새로운 정보가 아니었다. 이미 3년 전에 손에 넣어 나도 알고 고용주도 알았다. 그래도 윤 의원 집안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을 듯한데, 당장은 내가 감당할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복귀해서 고용주와 처분 방식을 의논해 봐야지.

“괜찮으니까 그대로 두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 건강하세요.”

안주인이 누워 있는 방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청마루 정면의 벽시계만을 노려봤다. 긴 세월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 여겨 왔던 두 사람인데 상투적인 인사 외엔 다정한 말 한마디 떠오르지 않았다.

따르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물론, 이웃들도 지주 집안의 눈치를 보며 이들을 따돌렸을 테고, 이 섬을 떠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평생을 살아온 고향 땅을 등지는 일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아들의 효심이 깊으니 손주에게 해코지를 해도 너그러이 눈감아 줄 거라고 여겼을까. 뭍에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어째서 신뢰하지를 못하고 겁먹고 그쪽에 붙었을까. 나로선 모르겠다.

윤씨 집안의 먹잇감으로 찍힌 이 노부부 역시 제물의 일부였겠지만, 가해의 동조자이기도 했다. 책임을 묻고 복수할 마음은 없어도 이들을 품어 줄 너그러움까지는 갖추기가 어려웠다.

∞ ∞ ∞

짓누를 듯이 무지근한 기운을 느낀 건 대문을 나서고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골목길을 걷는 내내 누가 뒤에서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고, 두 다리가 무거워지며 점차 신발이 바닥에 끌렸다.

“심리적인 압박일 뿐이야. 강인한 체력에 강인한 정신이 깃든다. 내 몸은 내 것. 내가 제어할 수 있어.”

아버지 도장에 써 붙여 놓은 수련 관훈까지 들먹이며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전엔 귀신의 집 같은 데는 피식거리면서 관람하는 내가 담이 크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마주하면서 진짜 무섭다는 게 어떤 건지 배웠다. 깨달음과 함께 겸손해졌다. 선수 생활 안 할 거라며 농땡이 부리던 운동도 전에 없이 착실하게 임했다.

나처럼 어중간하게 기가 센 인간은 실지로 담이 크고 영력이 강한 인물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용주 같은 사람 말이다.

“나는 잘해 왔어. 몸도 정신도 내 의지로 제어가 되니까 수백 년 묵은 토지신 상대라고 해서 여태까지와 다르지 않아! 무조건 산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들으라는 양 큰소리를 치면서도 소심하게 가방에서 작은 단지를 꺼냈다. 혓바닥과 손이 따로 놀았다.

봉인하려고 붙여 둔 부적을 떼고 그 안에서 소금을 꺼내 내 머리 위로 흩뿌렸다. 하지만 또 다른 성질의 부적으로 눈두덩을 문질러 귀안을 틔운 뒤 지금 내 머리카락을 쪼뼛하게 세우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윤씨네 선산이 있는 섬은 아니지만, 호령도呼靈島에서 신령을 불러들이는 제를 올릴 예정이니 그것들이 많이도 몰려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땅의 터주는 윤 의원의 조상신이며 백 퍼센트 윤씨 집안 편일 가능성이 컸다. 내게 들러붙은 그들의 후손 윤상현의 든든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 고장에 발 한번 들이지 않은 외지인인 고용주조차 꿰뚫어 본 사실을 윤씨 집안 인물들이 모를까.

그들은 지극정성으로 이곳 토지신을 모셨다. 평소 서울에서 지내는 윤 의원과 그의 장남도 오늘 해신제에는 참석할 예정이었다.

‘아. 이거 아니고 팥이었나? 소금 아껴 써야 하는데 술을 가져올걸.’

조개 해감용 소금도 한 포대 싣고 왔지만 그건 식용이고, 이건 축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소금이었다.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여러 번 해 봐도 이런 경우는 팥인지 소금인지 헷갈렸다. 나는 일당 받고 시키는 대로 하는 알바일 뿐, 고용주가 챙겨 준 물품들은 내 개인 신상 보호 물자가 아니었다. 숙소 주변에 뿌려 경계를 그으라고 지시받은 물건들이다.

“쳇. 자긴 만날 편하게 입으로만 나불대고 몸 쓰는 일은 죄다 돌쇠한테 떠맡기지.”

돌쇠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직장 상사 욕으로 워밍업을 한 덕분인지 긴장으로 굳어진 근육이 조금씩 풀려 나갔다. 두려움으로 색색거리던 숨소리 역시 잦아들었다. 길게 한 번 숨을 고른 뒤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윤상현.’

이름을 불러 주면 귀신의 힘이 강성해진다고 해서 좀처럼 부르지 않았던 이름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대며 「씨부엉 개새끼 내 인생 조진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어 댔더니, 고용주가 「윤상현 씨가 너한테 관심받아서 좋아 죽네?」라고 일러 줬다. 그 뒤로는 목구멍으로 치미는 울화를 속으로 삼키고만 살았다.

‘상현아, 오늘 너 실력 발휘 좀 해 볼래? 너희 조상신들이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끔 꼭 붙들어 매고 있어. 하찮은 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하하.’

그만큼 너절하고 보잘것없는 잡귀였다. 살아생전에도 이타심을 모르는 잡스러운 놈이었으니 멀쩡히 산 사람을 제 저승길 동반자로 몰아넣을 발상을 했겠지.

그럼에도 이 하찮은 놈을 여태 떨구어 내질 못했다. 그의 사주를 구해서 첫 번째 무속인을 찾아가 봤지만 떼어 놓는 데에 실패했다. 무속인에 버금가는 영력을 가진 고용주도 마찬가지였다.

「취미 생활로 즐기는 나하고는 급이 다른 만신이 주재한 의식이야.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 무시무시한 노물의 작품을 무효로 돌릴 만한 무당이 있으려나 몰라.」

고용주가 이 저주를 풀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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