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13)화 (13/96)

13화

내 눈에 귀신이 보이지 않게 하는 또 다른 영능이 어떤 도움이 될지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집안끼리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인사나 드리고 갈까 하고요.”

한번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너 이 섬에 친척 집 있다는 얘기 진짜였어?”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째려보려다가 지레 놀라서 퍼뜩 시선을 돌리자 이혜준이 비웃으며 약을 올렸다.

“강지, 알아서 눈도 깔 줄 알고 참 예의가 바르구나? 착하다. 나는 태어나서 너처럼 착한 애를 본 적이 없어.”

이게 반어법이면 내가 못돼 처먹었다는 얘길까.

“예. 제가 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을 빼면 시쳅니다.”

“그래, 강지가 사람 보는 눈이 좋네. 그건 그거고, 친척이 있든 말든 난 네가 이 섬으로 애들 끌어들인 것부터가 계획적이라고 보거든?”

“……!”

와-. 순간 간 떨어질 뻔했네. 이혜준 돗자리를 깔았나.

뜨끔했지만 이 선배가 내 아군이라는 확신도 없고 대답해 줄 의무 역시 없기에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저는 여기서 구경 조금만 하다가 갈 테니까 두 분 먼저 들어가세요.”

“그럼 나도. 너 먼저 가 있어.”

예상대로 이혜준이 친구를 혼자 보내려 했다.

“어, 알았다. 후배님도 이따가 봐요?”

갯벌에서 우리 학부 사람들과 어울리며 어색함이 사라졌는지 박양우는 미적거리지 않고 떠났다. 어떻게 봐도 이혜준과 단짝이라서 이 섬까지 동행한 느낌은 아니었다.

“저분은 왜 데려오셨어요?”

“운전시키려고. 난 누가 내 수발드는 거 되게 좋아함.”

아무래도 이 말종이 내 앞에선 ‘멋진 이혜준 선배님’인 척하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그가 사교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타인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눈치챈 지 오래라 ‘운전하기 싫으면 애들하고 같이 버스 타면 되잖아요?’라는 대안을 꺼내진 않았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듯 보이지만 은근히 따로 놀았다. 그와 함께 밥을 먹었다는 증언도 못 들어 봤고.

겸상하기 싫어서 학교에선 늘 굶는 거야?

“저분이 선배님 전용 머슴이에요?”

나를 온갖 잡일 담당 돌쇠 취급하는 고용주 서창경이 떠올라 이혜준의 친구에게 동병상련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려 했다.

“이제 너 있는데 뭐 하러. 박양우는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투가 저절로 뾰족해졌다.

“응. 휴학한 뒤에 창업해서 같이 일하고 있어.”

“아니, 그딴 건 하나도 안 궁금하구요. 방금 나더러 머슴이라고 하신 거예요?”

“내 가치를 알고 나면 전용 노비 시켜 달라고 네 쪽에서 절절하게 매달릴걸?”

자기가 대단히 쓸모 있는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큰소리만 치고 쓸모없기만 해 봐요. 가만 안 둬.”

네 본색을 학부에 다 까발려 버릴 테다, 이 아웃사이더야!

이혜준은 내 협박에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 봐. 난 여기서 기다릴게.”

그가 목적지를 정해 주는 것처럼 내 어깨를 틀어 앞으로 쭉 밀어냈다. 우연의 일치인지 윤 의원 일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두어 걸음 걷다 말고 주의해야 할 사항이 떠올라 뒤를 돌아봤다.

“선배님, 저기 고깔 쓴 할머니 무당하고는 눈 마주치시면 안 돼요.”

이혜준의 축귀 능력이 진짜라는 가정하에 경고했다. 괜히 조상희의 몸에 내린 신령을 내쫓아서 경계심을 부추기면 곤란하니까.

“봐서.”

말 더럽게 안 듣네.

“그냥 한 번 얘기할 때 알았다고 대답해 주면 안 돼요?”

“너 상태가 도로 나빠질 것 같으면 무당하고 눈을 마주쳐서라도 구해 내야지. 내 전용 수발 노비가 될지도 모르는 귀한 노동력인데 어떻게 모른 척해.”

“그런 고귀한 일자리는 선배님 친구분께 양보하겠습니다. 아…… 그렇지. 선배님, 저 가방 잠시만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저 할머니가 용하다고 소문난 무속인이라서 가방에 있는 부적 들킬까 봐서요.”

나 역시 이혜준 앞에선 ‘귀신 들리지 않은 보통 사람 후배 강지헌’을 포기하고 막 나갔다. 서로 타인에겐 말 못 할 약점 같은 비밀을 공유하니 이럴 땐 편리하다 싶었다.

조상희가 티브이 방송에 나와 잃어버린 물건 위치를 척척 알아맞히어 조작 논란마저 일으킨 적 있는 신기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하마터면 들킬 뻔한 내 목적은 이혜준 곁에 숨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보관료 받는다.”

“그러세요.”

우리 사이에 무슨 돈거래냐며 장난칠 관계도 아니어서 몇 푼 건네고 말기로 했다.

“줘.”

이혜준이 손을 내밀었다. 체격에 걸맞게 길쭉하고 큼직했지만, 피부가 하얀데다 손가락이 가늘어 보여서 곱상한 손이라는 인상이다.

“얼마 드려요?”

“가방 달라고.”

“아…….”

노리는 바가 있어 수첩과 펜은 챙기고, 가방을 건넸다. 이혜준이 내 흉내를 내어 마치 제 가방인 양 상반신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슬링 백을 둘러멨다. 흉곽이 두꺼워 내가 멜 때보다 높아진 가방 위치를 보자 시기하는 건 아닌데―시기 맞다.― 기분이 영 별로였다.

이 인간은 일견 늘씬한 듯 보여도 몸이 좋았다.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 근육만 봐도 신경 써서 관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울퉁불퉁한 형태가 아니라, 상완근도 제 체형처럼 선이 기다랗고 아름다웠다.

“선배님한텐 하나도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메지 마세요.”

곧장 싸늘한 말이 나갔다.

“아, 예, 납작 가슴.”

눈치 빠른 인간이 내가 무엇에 버튼이 눌렸는지 알아채고는 약을 올렸다. 대놓고 째려본 그의 입매가 삐뚜름히 휘어 있었다.

“…….”

다행이다. 그래도 인성은 내 쪽이 백만 배 훌륭하네.

가족이며 고용주며,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결론을 내리면서 나 혼자 정신 승리했다.

굿판 한편에는 의자가 2열 횡대로 놓였고, 윤 의원은 앞자리 중앙에 앉아 있었다. 다가가는 동안 나를 소개할 문장을 정리하는 중에 그럴 필요성이 사라졌다.

“쟈가 시방 강 영감네 맏손주 아니여?”

“그렁게라우. 여시처럼 반반한 게 지 어매 꼭 닮아뿐네야.”

“대글박도 겁나게 야물어서 공부도 잘해쩨.”

“지현이랑께. 야야, 지현아, 너덜 할무이 집이 갔다 오지야?”

남의 이름을 함부로 바꾸어 불렀지만, 섬 주민들 덕분에 나는 자기소개를 할 품을 덜고 윤 의원 일가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가장자리에 앉은 노부인의 손짓 한 번에 수행원들의 저지 없이 바로 통과했다.

“이 섬에 사는 강일목 씨 댁의 손자라고?”

고상하고 점잖게 들리는 말씨가 조부의 이름을 대며 내 신원을 확인했다. 수년 전 스쳤을 뿐일 이름을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강일목 씨 집안’이 죽은 사람의 사주를 받아도 입 싸매고 있을 만큼 만만한지 아닌지 조사했을 테니 뜻밖의 행동은 아니었다.

“어…… 예. 아, 안녕하세요. 강지헌입니다.”

머릿속은 더없이 차분했지만, 노부인 앞으로 불려와 당황한 것처럼 어색함을 꾸며 냈다. 나는 언제부턴가 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떨리거나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이혜준은 예외여서 그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도 해 봤더랬다.

“얼굴이 그대로라 기억이 나네. 어렸을 때 우리 의원님 별장에 종종 놀러 왔었지? 그래,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우리 귀한 손자 저승길 외로울까 봐 제물로 바쳐진 애가 어쩜 이리도 멀쩡할까.’라는 의혹과 실망이 서린 눈빛이었다.

나의 죽음을 기원하며 혼백을 저희 마음대로 가져다가 윤상현의 생사존망에다 친친 감아 놓은 이들 중 하나였다. 윤상현과 나를 한 운명으로 짝지어 놓았다.

어쩌면 이 사람이 윤상현의 망상을 현실로 이뤄 준 주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기명記名 교환권’을 한 장 더 받아 올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일었다. 의뢰받은 목숨은 두 개뿐이지만, 고용주의 능력이라면 한 사람 더 추가해서 준비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바득바득 갈리는 이를 숨겼다.

“예. 잘 지냅니다.”

별일 없기는. 당신 손자 질투심이 장난 아니어서, 내 혈육이 내게 보이는 관심조차 시샘하고 해코지를 해 대는 통에 나는 맘 편히 우리 집에 발도 못 들이거든?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시고?”

콕 집어서 묻고 싶은 건 내 안위겠지만 노부인은 예의상 나누는 인사처럼 온 식구를 끌어들였다.

남편을 지극히 모시며 제 남편을 지칭할 때조차 ‘우리 의원님, 우리 의원님’ 하고 노래 부르는 이 여자를 한때 멍청한 인간으로 여긴 적도 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사악한데다 교활하기까지 했다.

“예. 다들 건강하세요. 저…… 그럼 안녕히 계ㅅ……. 엇!”

나 역시 상투적인 대답을 돌렸다. 쑥스러워서 몸을 물리며 도망가는 척하니, 노부인은 마음이 다급했는지 덥석 내 손목을 붙들어 잡았다.

“뭐가 그리 바쁘니. 가지 말고 얘길 좀 더 나누지 않고서. 우리 상현이 친구잖니. ……그래, 다들 무탈하시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뱀 같은 눈초리가 어째서 넌 저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지 물었다. 설령 숨은 붙어 있더라도 정신은 망가져야 마땅한데 애가 너무 멀쩡히 살아 있으니 의문스러운 거다.

“예? 뭐가 어떻게요?”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아니야. 아니다. 그나저나 우리 상현이가 지헌이 널 정말 좋아했던 거 알지?”

“그랬나요? 저는 얼굴 본 지 하도 오래돼서 만나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은데.”

“그런 서운한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상현이는 어릴 때 너한테 받은 장난감이며 너하고 찍은 사진이며 강지헌하고 관련된 건 뭐든 다 소중히 보관하고 있단다.”

“…….”

아, 시발 소름 끼쳐.

너희는 그 물건들로 날 옭아맸구나 싶었다.

“지헌아, 너 일단 여기 잠시만 앉아 있자. 이따가 보일 사람이 있어.”

얘가 왜 이리도 온전한지 만신 조상희에게 나를 보이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기대하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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