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노부인이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장년의 남자가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못 이기는 시늉을 하며 끌려가 앉았다.
“어, 저, 오늘 학교에서 단체로 MT 온 거라 얼른 가 봐야 해요. 날 저물면 숙소 바깥으로 나오는 거 금지라서 준비할 게 많거든요.”
오늘 밤의 ‘그 현장’엔 내가 없을 거라는 알리바이를 미리 댔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서 이러지. 시간 많이 빼앗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응?”
조상희가 들려줄 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한 사람은 나였다. 귀하의 소중한 도련님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이혜준의 영능은 진짜일까.
나는 친하지도 않은 선배 앞에서 질질 짜는 추태마저 보였는데, 내 안의 회충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사하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다. 이혜준의 개입으로 내게 유리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길 바랐다.
“예. 그럴게요. 근데 혹시 윤 의원님 사무실에 사람 필요 없을까요? 아르바이트요. 6선 의원 되신 거 티브이에서 봤거든요. 아빠도 같은 고향 분의 경사라고 너무너무 기뻐하시고……. 아, 안 되면 조금 있다가 의원님 친필 사인 한 장만 받아 가도 될까요?”
순진하고 멍청한 말투로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진짜 목적을 흘렸다. 내가 가지고 내려온 준비물도 미진하다 여기진 않았지만 윤호중에 관련한 물건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할아버지에게 받아 챙긴 수표도 그 일환이었다.
그를 뽑지 않으면 은혜도 모르는 상놈 배신자가 되는 지역 사회에서 윤 의원은 단 한 번의 쓴맛도 보지 않은 채 6선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누렸다.
“맞아. 우리 의원님은 출마만 했다 하면 당선 확정이셔.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세상이 다 아는 거지. 그나저나 지헌이 너도 우리 의원님 팬이었구나?”
“…….”
지랄도 풍년이네.
속마음을 숨긴 채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너라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내야지. 앞으로 자주 만났으면 좋겠구나. 우리 의원님 사인은 바로 받아다 줄게?”
“예. 고맙습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시험 삼아 굿판으로 파고들길 잘했다.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내 수첩을 들고 가서 윤 의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사인을 받아 왔다. 내 연락처도 내놓으라고 해서 고분고분하게 건넸다. 계획이 성공해 오늘 이후로는 이들이 내게 신경 쓸 여력조차 없기를 기대하면서.
이미 간조 시간을 넘겼고 물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도로가 잠기기 전에 섬을 빠져나가야 할 인사도 있기에 해신제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조상희가 중앙 굿판에서 물러났다.
그다음에는 검은색 전통 무복을 차려입은 남자 셋이 등판해서 제상에 절을 하고, 긴 명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읊고 종이를 태웠다. 윤 의원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렸고, 윤씨 텃밭답게 해신제 축원문 명단의 상당수가 같은 성씨였다.
조상희가 굿판 바깥으로 불려 나오자, 노부인이 제 집안 전속 무당과 나를 재촉해 구석 자리로 몰고 갔다.
“철연네, 이 섬에 사는 강일목 씨라고 기억하지? 이 아이, 그 댁 맏손자야. 만난 김에 신수 한 번만 봐 줘요. ……지헌아, 수억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와도 제가 싫으면 물리는 대한민국 최고 무속인이셔. 넌 오늘 운수가 참 좋은 줄 알아야 한다. 평생 다시 없을 기회란 말이지.”
“…….”
약을 파시네. 누군 뭐 고고할 줄 몰라서 단돈 백만 원에 사주가 팔려 죽은 당신 손자하고 엮인 줄 알아?
헐값에 팔린 영혼은 절로 삐딱해져서 마음에 철벽 가시를 세웠다.
신들린 만신이 코앞에 있음에도 예상보다 겁을 먹지는 않았다. 내 안의 회충이 이 무속인과 한통속이기에 거부감이 없는 것일까.
나는 이혜준 때와는 달리 무덤덤하게 조상희의 시선을 받아쳤다.
“…….”
“…….”
조상희는 원색 한복 위에 하얀 장삼을 걸치고, 하얀 고깔까지 쓰고 있어 굿하러 온 이가 아니라 승무를 추는 승려처럼 보였다.
고깔 아래 여든 넘은 만신의 얼굴색은 허연 밀가루 색이었다. 탈을 덮어쓴 것 같은 표정은 도무지 생명이 붙은 사람의 자태가 아니었다. 새까만 눈자위가 흰 바탕까지 침범해, 꼭 공포 영화의 귀신 눈을 마주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느다란 눈매가 하회탈의 그것처럼 밑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높이 솟은 광대뼈 아래의 양쪽 입꼬리가 위를 향해 있기에 ‘저게 웃는 건가 보다.’라고 어림잡아 헤아렸다.
접신 상태에 든 조상희는 소름 끼칠 만큼 인상이 강렬했지만 내 마음은 평정을 유지했다. 신령을 마주하면서도 두려움이 일지 않는 건 드문 경험이었다. 여전히 쓰라린 내 두 눈이 이 담대함의 원인은 적재적소에 나타난 학교 선배 덕분이라고 일러 주었다.
증명 완료!
굿판에 뛰어들어 시도해 본 눈깔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고용주의 염려와는 반대로 이 만신의, 인간이 아닌 눈은 오늘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세상에, 조상희가 가진 신력을 무력화 시키다니 도대체 이혜준 저 인간은 정체가 뭘까. 내게 또 뭘 해 줄 수 있지?’
별안간 이혜준의 호박색 방상시 눈깔이 미치도록 궁금하고 탐이 났다.
「내 가치를 알고 나면 전용 노비 시켜 달라고 네 쪽에서 절절하게 매달릴걸?」
이혜준 저 인간 예언 능력도 있었나?
이렇게 되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라도 머슴 시켜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윽고 조상희가 입을 열었다.
“작은 도련님이 계십니다. 계신데…… 그게…….”
치켜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앉으며 일자로 굳었다. 무표정한 가운데서도 심각한 분위기가 읽혔다.
“예? 작은 도련님이라면 윤상현? 미국에 있다는 애가 왜요?”
다음에 나올 말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의심을 사지 않으려 의문을 드러냈다. 노부인이 조상희에게 눈치를 주며 ‘쟤 모르나 봐. 쟤는 몰라.’ 하며 입 모양으로 전하는 모습도 못 본 척했고.
“응. 그냥 네가 우리 상현이 친구라는 말씀이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누굴 등신으로 아나.
“어…… 그거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선 ‘예, 그렇군요. 뜻 모를 말씀을 하셔도 저는 신경 쓰지 않을게요.’라고 수긍하는 태도가 더 수상할 테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마…… 그러게? 우리 상현이가 왜 여기에 있지?”
잠시 후 노부인도 뒤늦게 의혹을 품고서 눈살을 찡그렸다. 만신을 노려보는 뱀 눈이 무슨 이유로 내 귀한 손자가 여태 이승에 남아 있느냐고 책망했다.
“……. ……백중이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이리로 불러들였나 봅니다.”
조상희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태연히 거짓말을 읊었다. 윤상현이 내게 붙어 있느라 황천객이 된 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눈치였다. 이제 보니 그는 윤씨 일가에 개처럼 충성하진 않았고 허리를 굽히더라도 제 살길을 찾아 가며 굽히는 하수인이었다.
“네에-? 혹시 윤상현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아니야, 아니야, 넌 몰라도 돼!”
충격받은 척하자 노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만신 안의 신령은 고맙게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했고 내가 듣고 싶은 정보를 뱉어 내주었다.
“우리 도령이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누가 우리 도령을 못살게 굴지? 너 아닌데? 네가 아닌데? 너는 불길한 것과 닿았구나. 네 뒤에 누가 있지? 보이지가 않아.”
조상희의 눈자위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희번덕거렸다. 이번 건 공포보다는 불쾌함 탓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윤상현이 궁지에 몰렸다는 얘길 듣고서도 기뻐하는 걸 잊을 정도로 섬뜩해졌다. 도망가야겠다는 본능에 뒷걸음을 치는데 존재하지 않았던 벽에 부딪혀 등이 가로막혔다.
조상희가 모시는 신령의 힘이 나를 가둔 거라는 착각 속에 몸을 떤 것도 잠시,
“지헌아, 우리 많이 늦었어. 애들 기다리는데 어서 돌아가야지?”
묵직한 팔과 동시에 같은 무게의 안도감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내 뒤에 선 남자가 방벽처럼 든든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이 와중에도 일을 그르치면 곤란하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선배님, 보지 마세요.”
저 무당 눈을 쳐다보면 안 돼요. 저 신령에겐 아직 당신 특성을 내보일 때가 아니야.
“안 봐. 네가 한 말 잘 새겨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가자.”
이혜준이 내 몸을 돌려세웠다.
“어딜 가니? 지헌이 너 할머니 댁에 묵고 있니?”
“아, 저…… 올라가면 꼭 연락드릴게요!”
날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노부인을 떨치고자 안심할 만한 언약으로 달랬다.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은 죄만큼 자멸하길 바랐지만 가문의 수장에게 변고가 닥친 상황에서도 끝까지 윤상현의 버팀목 노릇을 하려 든다면, 후속 조치가 필요할 테니까.
나는 윤상현이 이승에서 기댈 만한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앨 작정이었다.
등 뒤로 제 손자가 무슨 이유로,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며 만신을 추궁하는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살이에 인이 밴 만신이 알아서 주인마님을 잘 다독일 거라고 믿었다.
저렇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대충 충성하고 살 거면 나를 향한 주술 역시 대충대충 처리할 것이지. 생면부지의 미성년자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어지간한 영력이나 도력으로는 저주를 풀지도 못하게끔 그토록 꼼꼼하게 일 처리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