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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15)화 (15/96)

15화

“추워?”

굿판을 벗어난 직후 이혜준이 물었다. 온기 품은 커다란 손이 소름 돋은 내 팔뚝을 여러 차례 쓸어내렸다. 방상시 눈깔의 위력을 깨달은 지금은 공연히 친한 척해 주는 이혜준의 태도가 반갑기까지 했다.

“한여름에 추위는 무슨. 무서워서 떠는 거예요.”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솔직했다.

귀신 앞에서 용감한 척하는 쓸모없는 자존심은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무섭다고 발악하든지 말든지 고용주는 “그렇다고 브레인인 내가 갈까? 장기짝인 네가 뛰어야지!” 하며 돌쇠를 현장으로 내돌렸지만.

“정작 무서운 존재는 살아 있는 인간인데 강지헌은 실체 없는 것에만 겁을 집어먹어서 큰일이다. 사고가 왜 거꾸로 흐를까.”

귀신 생각만 하면 귀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느니, 모범 교과서 같은 설교만 늘어놓는 그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나도 예전엔 상상력이 부족해서 납량 특집을 시청하거나 괴담을 들어 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거든요?

그런 간접 경험 대신에 실체 없는 것들과 실지로 마주하기 시작하면서 내 간덩이는 점차 졸아들어 갔다.

“나 같은 놈 말고 정상인한테나 가서 그런 조언을 하세요.”

보통 사람에겐 당신 말이 상식으로 들릴 테니까.

“강지헌이 뭐가 어때서.”

내가 여기기에도 나는 정상이 아닌데 이혜준 씨, 아직 내 상태가 어떤지 파악이 덜 됐나 보다.

“나는…… 귀신이 씌었잖아요. 안 무서워요?”

내뱉은 순간 질문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후회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 말도 듣지 않았지만 ‘회충이 뭐가 무서워.’라는 환청이 들린 듯했다.

“…….”

“아니, 나…… 나하고 있음 꺼림칙하지 않냐고. 기분 나빴다면서요.”

“내가 언제 불쾌하댔어? 뭔 줄 아니까 느낌이 쎄했고, 오늘은 너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고만 했지. 오히려 강지헌 내빼는 거 구경하는 재미로 학교 다녔는걸. 너 완전 빨라. 너처럼 잘 달리는 애 처음 봤어. 그렇게 재미있게 해 주던 녀석이 학기 중간에 별안간 사라져 버리니까 나 너무 심심해져서 인생의 낙이 사라진 기분마저 들었잖아.”

지금 이 인간이 인성 파탄 자랑해? 후배의 불행 덕분에 너라도 학교생활이 즐거웠다니 다행이다!

입영 날짜가 간당간당해서 기말고사 기간을 놓쳤지만, 다른 데서 점수를 끌어모아 어찌어찌 학점이 인정됐다. 이혜준은 내가 출석 일수를 제법 남기고 떠난 일까지 기억했다.

그가 정말로 내 이름과 존재를 알았고, 관심까지 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를 피해 다니려고 원격 스토킹을 했던 입장에서는 은근슬쩍 내적 친밀감마저 들 지경이다.

“저기, 선배님, 만약에요. 그러니까 진짜 만약에 예전에도 내 상태가 지금처럼 안 좋아 보였다면 도와주셨을 것 같아요?”

“널 붙잡고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더라면 뭐라도 시도해 봤겠지? 그런데 네가 도통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

어렵게 던진 질문에 예상보다 호의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학과 일이며 다른 학우의 일에는 신경 안 쓰고 사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줄로 알았는데,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친절함 정도는 갖춘 됨됨이었나 보다.

방상시 눈에 대한 비밀을 드러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내 일에 참견했을 거라고? 애들한테 사기 치는 게 아니라 원래 성품이 상냥했던 거야?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열나게 뛰어다니지 말걸!

이혜준 한정 레이더망을 발동해 요리조리 피해 다닌 과거를 뒤늦게 반성했다.

“좋아요. 내가 기회를 드리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실 작정이죠?”

도움을 구하는 을의 처지인 주제에 ‘그럼 이제 날 도울 기회를 드릴게.’라는 식으로 말을 꺼내자, 갑님께서는 내 양심 없음에 감탄했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지야, 그 이전에 우리 아까 하다 만 고귀한 일자리에 관한 대화를 좀 더 나눠 봐야 하지 않을까?”

고귀한 일자리 → 이혜준 전용 수발 노비.

이 인간이 날 낚으려고 단단히 각오했구나 싶었다. 고용주에게서 복종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황당했지만, 미끼가 지나치게 훌륭했다.

“선배님 다음 학기 복학하세요?”

“응. 네 덕분에 마지막 학기가 다시 재미있어질 듯해.”

도대체 날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몇 학점이나 남으셨는데요?”

“6학점.”

“3학점짜리 교양 두 개 들으면 되겠네. 대리 출석, 대리 시험 해 드리고 과제물 있으면 그것도 대신 써 드릴게요.”

아예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권했다. 이만한 대가면 차고도 넘치겠지?

“4학년 전공 필수인데 저학년 후배님 능력으로 커버가 될까? 네가 이혜준이라며 우리 학부 교수님들 속일 재능은 있고?”

“…….”

없다. 능력도 없고 재능도 없었다. 무엇보다 널리 알려진 저 얼굴 껍데기를 어떻게 흉내 내.

“수발 노비는 주인님 학점 같은 시시한 데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에겐 좀 더 고귀한 노동 활동이 기다리고 있잖아?”

이혜준이 실실 웃으며 약을 올렸다.

뭐래. 누가 함부로 내 주인 노릇을 해. 고용주도 실패한 일이라고.

“도대체 학점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달랑 전공 필수만 남지? 보통 졸업 직전에는 취업에 신경 쓰려고 학점 잘 주는 널널한 과목을 듣지 않아요?”

출석을 게을리해도 교수님들이 눈 감아 주는 그런 강의 말이야.

“우리 학부는 그게 좀 어려워. 졸업 세미나는 4학년 2학기에 있는 필수 강의거든.”

“나머지 하나는요?”

“경영전략. 그것도 4학년 전공 필순데 듣다가 휴학해서 재수강해야 해.”

이쯤 되니 졸업 학기 선배를 학업적으로 지원해 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겐 특출나게 잘하는 분야가 또 한 가지 있지.

돈으로 처바르는 보시.

나한테도 이득이 되는 선업 포인트 쌓기였다.

“그럼 선배님 학교 오시는 날에 제가 밥 사 드릴게요. 커피도 사 드리고, 원하시면 술도 사 드릴게요.”

“강지야, 네 품삯은 내 쪽에서 지불해야지. 원래 머슴 밥은 주인님이 챙기는 거잖아?”

나의 제안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

남은 건 정녕 몸으로 때우는 발싸개 노릇밖에 없는가 싶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창경 돌쇠 노릇도 끔찍한데 이 인간에게까지 코뚜레를 꿰여 끌려다닐 순 없었다.

“강지야 ‘혜준이 형, 제가 다음 학기 동안 형을 어떤 식으로 극진히 모시면 될까요.’라고 물어볼 타이밍이지?”

이 아저씨가 형은 누가 형이야?

“됐어요. 선배님 섭섭하지 않게끔 제가 알아서 잘 행동하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뺀질뺀질 내빼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폰 꺼내 봐.”

“나 그렇게 신용 형편없는 인간 아니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잠금을 해제하고 내밀었다. 이혜준의 연락처는 나도 바라던 바였으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야. 내내 거짓말만 늘어놓고, 현재 강지헌 씨 신용 점수는 땅바닥에 처박혔습니다.”

흥, 오늘에서야 겨우 몇 마디 나눠 본 사람의 뭘 믿고 내 비밀을 모조리 털어놓을까.

3년 가까이 부대낀 고용주조차 윤상현 다음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유령 신부가 날 기다린다는 불길한 점괘는 몰랐다. 성질머리가 개판인 데다 내 약점―윤상현―을 틀어쥐고 부리기만 하는 게 빤히 보여서 나중 일까지 밝힐 정도로 마음이 열리진 않은 상태였다.

호령도 배경의 의뢰에 묻어가는 것이긴 해도, 이번엔 어쩐 일인지 돌쇠의 해방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주는 기미가 보여서 서창경 갑자기 인간 됐나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자꾸 달라붙지 마요. 더워!”

당연히 이혜준에게도 구질구질하게 모든 사정을 꺼내 보일 생각은 없었기에 신경질을 내는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 몸이 자꾸 왼쪽으로 기울어서 낮술 먹었다는 오해받지 않게끔 내가 상체 중심 잡아 준 거야. 덕분에 박양우도 눈치채지 못했잖아.”

“사기 치지 마세요.”

이래 봬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평형 감각인데 어디서 약을 팔아?

“여보세요, 강지헌 씨. 너 아까부터 옆으로 게걸음 걷고 있었어요.”

허…… 진짜?

어깨에 둘러진 이혜준의 팔을 떨쳐 낸 후 시험 삼아 몇 걸음 직진해 보았다. 우려와는 달리 아주 멀쩡했다. 떠올려 보니 조금 전 윤 의원 일가에게 다가갈 때도 내 걸음은 곧발랐다.

“…….”

역시 저 새끼가 날 가지고 노는 거?

열 받는데 차마 돌아보지도, 상대방을 쏘아보지도 못하는 상황에 더욱 혈압이 북받쳐 올랐다.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를 읽은 이혜준이 다시 내 곁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약발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이제 눈 아무렇지도 않지?”

시간이 지나서 눈의 통증과 함께 평형 감각도 저절로 나은 거라고 잡아뗀다.

“…….”

믿어 줘, 말어?

“생사람 잡지 말고 내일 다시 확인해 보면 되잖아.”

“내일 또? 그렇게 빨리?”

출발 준비하느라 다들 부산할 텐데 나더러 그 와중에 질질 짜고 있으라고요? 싫거든요?

“왜, 회충 구제는 느긋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 정이 흠뻑 들어서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게 아니라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농담을 꺼낸 것도 아니고 비장한 심정으로 고백한 건데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고통을 유발한 인간이 누군데! 가해자 주제에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양심 있어 없어.

회충만이 느끼는 고통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상상통이 아니라 나도 실제로 아팠다.

통증의 강도를 체험했더니 치과에 갈 때보다 더 큰 각오가 필요했다. 어느덧 윤상현과 한 몸으로 동화돼 버린 탓에 이토록 절절히 놈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생각하면 시신경보다는 마음이 더 괴로웠고.

나도 반귀신이 다 됐구나. 산 사람에서 점점 멀어져 가.

그나저나 선배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고통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도전하면 안 될까요?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간격은 너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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