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20)화 (20/96)

20화

“내가 후배님 일하는 가게에서 진상이라도 부렸어요? 나더러 뭘 생각보다 다정하대? 날 어떤 인간으로 여겼기에.”

시비가 붙더라도 대체로 내가 봐주는 편이니 진상 부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선 늘 말씀하셨지. 치료비 대는 거 아까우니까 차라리 얻어맞고 다니라고, 일반인에게 맞아 봐야 별로 안 아프다고 말이다. 나는 무술가와 대련하는 데 이골이 나서 호리호리한 체구에 비해 맞는 맷집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편이었다.

“그 쌤이 병동 최고 빌런…… 아니, 아니, 까칠하기로 유명하신데 매번 지헌 선배님 앞에선 쪽도 못 쓰고 깨지는 걸 봐서요. 그래서 저는 지헌 선배님이 진짜 살벌한 성격인가 보다 했거든요?”

유시호는 마침 내가 기 싸움에서 이기는 장면을 봤나 보다. 매번이라니, 내 승률이 그토록 높았나?

“인간미 없게 생기긴 했지만 그 쌤이 겉보기보단 너무너무 순수하고 마음이 여린 분이에요. 그런 천사 같은 분 옆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내가 아주 약간 더 못됐게 보인 모양이네.”

듣고 있을지 몰라도 이혜준을 의식해 뻥을 쳤다. ‘개놈’에서 이미 서창경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고 싶으니까.

게다가 모나고 꼬인 성격이 되기 어려운 호빵이 상대로 내가 성질을 드러낼 일이 있을까. 받는 대로만 돌려주지, 아무한테나 눈 까뒤집고 들이받진 않았다.

“유시호 후배님, 내가 곧 치킨 백만 번 사 줄 기숙사 형아도 소개해 줄 테니까 착한 선배한테 억울한 누명 씌우지 말고 얌전히 보드게임이나 하러 가자?”

일어나서 네 갈 길 가라고 눈치를 줬다.

“오, 진짜요?”

“그럼-. 빈말 아냐.”

내가 시키지 않아도 김재원이 알아서 엎드리며 제 지갑을 진상할걸?

“지헌이 형도 같이 가요. 이거 역사 게임인데 진짜 재밌어요!”

치킨 백만 번 사 줄 자본가와의 소개팅에 넘어갔는지 유시호가 나에 대한 호칭을 조정했다.

“난 좀 이따가. 지금 여기에 내가 울 학부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혜준 선배님 찬양 대회가 열려서 나도 적극 동참하려고.”

성심을 다해 나 당신한테 잘 보이려고 아부 중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인간 벽에 둘러싸여 눈 뜨고 조는 줄로만 알았던 아웃사이더의 음성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푸흡.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불과했지만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이혜준이었다. 그러곤 또 잠잠해졌다. 옆에서 저를 뭐라고 치켜세우든, 옥장판 판매를 권하든 사이비 종교 교주가 되길 권하든 일절 호응해 주지 않는다.

둘이 있을 땐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열 마디도 더 씨불이더니 낯가림을 하나? 사람 상대하기가 그렇게 귀찮으면 이런 덴 오질 말아야지. 하긴 저 인간이 괜히 군중 속의 시크릿 아싸일까.

이혜준의 얼굴 아랫부분, 통증에서 안정권에 시선을 두면서 딴생각을 하는데 왼쪽 허벅지가 묵직해졌다. 제정신 아닌 설정우가 또 내 다리를 베개 삼아 드러누운 거였다. 내려다보자 술주정뱅이가 몽롱한 눈빛을 하고서 배시시 웃었다.

이 새끼 오늘 왜 이리 치대지?

“강지, 이렇게 밑에서 보니까 너 턱 선 진짜 갸름해. 피부도 뽀얗고 입술도 빨갛고 완전 촉촉해 보인다. 산공 걔랑 소문날 만도 하네. 만약에 니가 여자였으면 나도 진작에 사귀자고 했을 텐데…….”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황당해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과대 하겠다는 새끼가 술 핑계 대며 흑역사를 만드네. 사귀자고 하면 누가 사귀어 주나? 이 무슨 자신감인지.

“내가 무슨 성별이든지 너는 안 받아 줄 건데요?”

여상하게 대꾸하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설정우의 얼굴 위로 떨어뜨렸다. 퍽.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으아! 으으.”

설정우가 반쯤 허리를 일으켰다 도로 방바닥으로 뻗으며 불판 위의 먹장어처럼 온몸을 꿈틀거렸다. 코피가 터졌지만 내 눈치를 보느라 누구 하나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곱게 취하지 못한 놈 상대로 미안하다는 생각 한 톨 들지 않았다.

분위기가 경직된 참에 애들을 후려잡을까 하다가 슬쩍 보드게임 판을 돌아보았다. 내가 살벌한 사람인 줄 알았다던 호빵이는 저 멀리에서 주사위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침묵이 흐르는 이 무리와는 달리 저쪽은 저희끼리 환성을 내지르며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였다.

관두자. 내용물이 팥인지 야채인지 모르겠다만 우리 호빵이 충격받고 뇌수 터지면 안 되지.

마음을 착하게 쓰기로 작정하고 용건이 있는 놈들만 빤히 쳐다봤다. 본보기로 삼아 족치려던 1학년 애들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장예준 후배님이라고 했죠? 설마 이따가 몰래 바다에 나가서 둘이 데이트할 거?”

여자애가 물었지만 과 CC라는 그 옆의 남자애를 보며 물었다. 내 입매는 웃는 모양새여도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는데도 새끼들이 말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라는 살기가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

충격을 받고 입이 얼어붙은 장예준 대신에 그의 여자 친구가 되물었다.

“오다가다 들었다는 사람들이 여럿 되네요.”

인원이 불어나며 나 혼자서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전체를 다섯 조로 나누고 각 조 조장을 통해 수시로 인원 점검을 했다. 그 과정에서 흘러들어 온 정보였다.

“…….”

“데이트는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겠어요? 정 아쉬우면 내가 비용 댈 테니까 둘만 따로 이 섬에서 하루 더 놀다 오든지. 여긴 예약돼 있다니까 다른 숙소 잡아 줄게요. 어쨌거나 오늘 밤은 섬 치안 상태가 불안하니까 앞으로 몇 시간만 더 외출 자제합시다, 예?”

내일 간조에 맞추어 섬을 방문해 머물 손님은 의뢰인 일행으로, 이 펜션에서 저 애들이 오붓하게 데이트할 분위기가 만들어질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이 이만큼 심각하게 여기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처음 물귀신 얘기 듣고, 치안 얘기 들었을 땐 경계심이 들었는데 시간 지나니까 긴장이 풀렸나 봐요.”

“우린 들키지 않게 조금만 놀다가 들어오면 괜찮을 줄 알고……. 안 나갈게요.”

일탈 계획이 공개적으로 까발려져서인지 커플은 순순히 밤바다 데이트를 포기해 줬다.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서창경만 상대하다가 핏대 세우지 않아도 재깍 알아듣는 인간을 보니 인류애가 적립되는 기분이 들었다. 잔소리처럼 들릴 것 같아서 더는 입을 떼지 않고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을 완전히 신뢰하긴 어려웠기에 조장더러 계속 지켜봐 달라고 했다.

정작 염려되는 인물은 이혜준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움직이자 그 역시 따라나서는 거다. 비록 당사자와 합의된 바는 없었지만 나는 악령으로부터 이 건물 안의 생명체를 지켜 줄 수호신으로 그를 점찍어 뒀는데 말이다.

수호신이시여, 이러기 있냐? 존 말로 할 때 방상시 눈깔의 본분을 지켜 주세요. 얼른 돌아가!

“……?”

왜 따라 나오느냐며 윽박지르는 대신 잠자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대신 했다. 사이가 틀어지면 내가 더 손해니까.

“이거만 마시고 가.”

이혜준이 뜬금없이 초콜릿 음료수에다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내가 끼니를 걸렀다는 걸 알아챘나 보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제 성의를 무시한다며 삐치면 곤란하니 일단 받아 들었다.

“…….”

“이거 자전거 덕후들이 당 떨어질 때 찾는 최애템이래. 너 기운 없으면 나 부르러 달려오지도 못할 거잖아.”

“안 부를 건데요?”

파투 놓을 작정이 아니라면 혼백과 거래하는 자리에 무슨 이유로 방상시를 부를까. 방해만 될 텐데.

“그래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해. 즐겨찾기 첫 번째 거 지우고 내 번호로 바꿔 뒀어.”

이 미친 분이 남의 전화기에다 무슨 짓거리를!

평소 사용하지 않는 기능이라 용서해 줬다. 게다가 맨 위 번호가 가족 것이었다면 짜증이 솟구쳤을 텐데 그 자리는 개놈 몫이었다.

개놈이 제멋대로 등록해 둔 즐겨찾기 번호를 방상시가 또 제멋대로 바꾸다니 두 사람은 역시 천생연분, 운명의 상대다! 조만간에 날을 잡자. 닮은꼴들 어서 인연을 만들어 줘야지.

“괜찮을 거예요.”

윤상현 이후로 내 몸에 붙을 귀신이 아직 두 놈이나 더 남았으니 목숨이 위태로울지언정 죽지는 않을 거였다.

에혀. 내가 이런 것도 위안이라고 하며 산다.

“마시고 이리 줘. 쓰레긴 내가 버릴 테니까.”

“…….”

선배님아, 시중꾼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누가 누구 수발을 들어?

그의 요구 사항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지적할까 하다가 본인은 아무 자각이 없는 듯 보여서 은근슬쩍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부두에서도 다 쓴 물티슈를 이혜준이 머슴처럼 수거해 갔더랬다. 입술로 빨대를 꾹 누르며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숨겼다.

예상대로 식도가 꽉 막힌 것처럼 수분조차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서너 모금 마시다가 체할 듯한 느낌에 초콜릿 음료수를 도로 건넸다.

이혜준도 더는 권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걸 곧장 제 입으로 가져가 버리네?

“으어-!”

으아아아. 더러워! 더러워 죽겠어!

“버리기 아깝잖아.”

충격 어린 내 표정을 읽은 이혜준이 별거 아니라는 양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요!

내 안에 심어 온 이혜준의, 타인과 말도 섞기 싫어하는 결벽주의적 이미지가 바사삭 부스러졌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털털한 성격이었다.

여태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인데 이건 자주 있는 판단 착오였다. 나는 목숨 붙은 사람에게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니까.

현실에 관심이 없으며 현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잠들 때까지 온종일 귀신 생각에만 골몰했다.

고용주는 이런 나더러 졸업해도 사회생활 하기가 어려울 거라며, 제 일 아니라고 또 막말을 지껄여 댔다.

반귀신, 아마추어 무당인 자기도 멀쩡한 척 사는 주제에 나는 왜 못 한다고 여기는지. 그래도 저보단 내가 더 정상인에 가까울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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