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24)화 (24/96)

24화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내 귀를 의심했다.

뭐가 저리도 당당하실까. 언제나 저 인간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대놓고 무섭다니, 저게 날 구해 주러 온 용사님이 보일 법한 태도야?

하마터면 ‘이 쓸모없는 개쓰레기야!’라고 외칠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성질 죽이자, 성질.

“그 높이에선 떨어져도 죽는 게 더 어려워요. 계단까지 못 가. 선배랑 거리 벌어지면 나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이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동하면 되지.”

“……!”

므어?!

“너는 아래에서, 나는 위에서 계단까지 나란히 걸어서 가면 되잖아?”

“아오 시발 성질 뻗쳐서! 닥치고 얼른 못 뛰어와? ……요?”

10초 전의 다짐을 망각하고 그만 버럭 해 버렸다. 끝에 ‘요’를 붙였지만 뒤늦은 감이 있어, 지랄을 떤 나도 이혜준만큼이나 놀랐다.

“……!”

“……!”

이번 건 심하게 하극상이었다, 그치. 일단은 반성. 근데 저 인간은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귀신이 따라온다는 말을 우습게 여기잖아. 바로 지척에서 도사리고 있는데!

내 지랄에 스스로 충격받은 것도 잠시, 다시 생각해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저 한만스러운 인간이 잘못한 거였다.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절실히 도움을 구하는 사람더러 산책을 권장하다니 정신 빠진 놈이 아니고 뭐란 말이야.

걷긴 뭘 나란히 걸어!

“…….”

유들유들 받아칠 줄 알았던 이혜준이 잠자코 모래사장으로 점프했다. 그거 뛰어내렸다고 착지 후 서너 번이나 휘청거리는 꼴을 보니 운동 신경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드디어 이혜준 성내는 모습을 구경하는구나 했는데, 웬걸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해맑았다.

“자, 내려왔어. 나 이제 뭐 할까? 손잡아 줘?”

멘탈 갑이네 진짜.

EQ가 한없이 낮은 인간처럼 보이다가도 이럴 땐 또 높은 것도 같았다. 눈높이에 걸린 이혜준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 유연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던 열화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미소로 사람 녹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선배님이 오니까 귀신이 저만치 물러났어요. 지금 내가 하는 말 믿기세요?”

회충에 대해서도 아는 선배이니 날 사기꾼이라고 내몰진 않을 거였다. 그래도 보이지도 않는 걸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니 허황된 종교를 권하는 기분이었다. 도를 믿으세요?

“네가 말하는데 믿어야지.”

아니,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이토록 신뢰를 주시지?

“이 부적을 사용하면 선배님 눈에도 사람 아닌 게 보일 테지만…… 그때부턴 돌이킬 수가 없어요. 거부감 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어요.”

이혜준을 나와 서창경이 속한 음지로 이끌었다.

이 남자가 일반인이었다면 절대, 내 양심을 걸고서 하지 않을 위험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 보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내가 그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쪽도 기꺼이 이용당하고 싶은 기색이니까.

“안 하면 또 성질 튀어나오는 건 아니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변명 없이 곧장 사과했다.

“괜찮아. 나는 너처럼 말 예쁘게 하는 애 처음 봐서 신선했어.”

“…….”

미친.

재빨리 아랫입술을 깨물어 꾸역꾸역 웃음을 억눌렀다.

“이거 내 손에 들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이혜준이 부적을 받아 들었다. 그는 부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도 않은지 뒤집어보지도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아뇨. 눈에 가져다 대고 문질러야 해요.”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오히려 시선을 더욱 아래로 두면서 사용법을 일러 줬다.

“눈 뜬 채로?”

“아니이-, 큭, 그러면 다치잖아요. 눈두덩에다가요.”

어떻게 종이를 안구에다 직접 비빈다는 발상을 하지? 등신인가? 근데 나는 이 와중에 왜 처웃고 있지 진짜.

방상시 버프 덕분인지, 이혜준이 자꾸 한심한 소리를 해 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에 도사린 토지신이 안중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지 않았고 조금 전만큼 두렵지도 않았다.

귀신 앞에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건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신령이 내린 조상희의 눈조차 가라앉은 마음으로 마주했더랬지.

“나 눈 감고 있을 테니까 전문가가 문질러 줘.”

“저 전문가 아니거든요?”

내가 무당이라고 놀릴 때마다 욱하는 고용주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해 줘.”

“괜찮을까요? 나 또 눈 아파지면 어떡해.”

“눈 마주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 아파서 못 걷겠으면 내가 업고 가면 되지. 그나저나 해야 할 일은 끝낸 거야?”

“뭐. 일단은요.”

토지신을 달고 왔지만 그건 내 신변에 생긴 문제일 뿐이고 고용주가 시킨 임무는 완수했다.

“그럼 됐네. 나 눈 감았어, 강지야.”

놀리는 말투가 아니고 되게 친밀한 척 별명을 부른다. 누가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우리 학부 학생은 물론이고 공대생들까지 아무나 부르는, 그저 이름 절반을 뚝 자른 아무렇지도 않았던 별명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눈 절대 뜨지 마요. 어……. 선배님 이렇게 생기셨구나.”

부적으로 가리기 전 잠깐 쳐다본 외모가 현실감 없이 달빛 아래 아도니스 조각상을 감상하는 기분에 젖게 했다. 나보다 아주 쪼-끔 잘생기긴 했다. 얼굴로 경쟁할 의욕이 소멸할 만큼 쪼오-끔.

괜찮아. 인성은 내가 훨씬 훌륭하니깐.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지?”

“예.”

“눈 뜨면 인상이 제법 달라져.”

이 인간이 큰일 날 소릴 지껄였다. 제정신으로 도주해도 귀신에게 잡힐까 말까 하는 마당에 날 울리려고?

“뜨지 마요.”

정색하며 다시 경고했다.

“그래도 내가 눈 뜬 모습을 봐야 할 텐데. 나중에 내 사진 잘 나온 거로 몇 장 보내 줄게.”

“왜요?”

어이가 없네. 나더러 좌절감 느끼라고 자기 얼굴 사진을 들이미는 거야?

“내성 생기라고 그러지.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다 보면 실물을 대할 때의 거리낌도 덜어지지 않을까? 전만큼 아프지 않을 수도 있고.”

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예. 그럼 부탁합니다. ……이제 됐어요.”

부적을 치우고, 미끈한 낯짝을 조금 더 감상한 뒤 눈을 뜨라고 했다.

“뭐가 보인다고?”

“저쪽이에요.”

허옇게 어른거리는 옷자락을 가리켰다. 명색이 수백 년 묵은 토지신인데 경계하며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자 새삼 이혜준이 부러워졌다.

이 선배였다면 혼백을 거래하는 주술에 휘말릴 일도 없지 않았을까.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저긴 아무것도 없어. 나 밤눈도 꽤 밝은 편이라 멀리 해안선까지 다 내다보이거든.”

이혜준이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고용주가 만든 부적이 통하지 않는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체질이야. 인간 맞아? 이 선배님이 사람 골고루 놀라게 만드시네.

가방에서 팥이 든 주머니를 꺼내어 그중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잘 보세요.”

토지신을 향해 팥알을 던졌다. 과녁의 덩치가 커서 비뚜로 맞추기가 더 어려웠다. 예상대로 한낮의 소금처럼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성가시게 구는 것이 불만인지 쉭쉭 소리만이 났다.

“방금 물 끓어오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아니. 들리는 건 없어도 허공에서 팥이 튕겨 나오는 건 봤어. 이리 줘 봐.”

이혜준에게 팥 주머니를 통째로 넘겼다.

따악.

『캬아아악-. 크르륵크르륵. 크르륵크르륵.』

이번엔 간지러운 듯 보글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비명 뒤로 고통에 겨운 신음이 연이어졌다. 생긴 건 인간형인데 어째서 짐승이 내는 소리가 날까. 다시 봐도 윤 의원 일가가 모시는 조상신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여태 그 인간들은 조상이랍시고 도대체 뭐한테 제사를 올리고 있었던 거야?

“효과 있어요, 선배님! 크기가 줄어들었어요. 팥도 사람 차별하나 봐. 아끼지 말고 더 던져 보세요. 이쪽!”

다시 팥알을 던져 물러서는 토지신의 위치를 알렸다.

“팥으로는 그렇게까지 멀리 안 나가.”

이혜준이 말릴 새도 없이 자갈을 주워 들어 던졌다.

“아니 그냥 돌멩이로는 아무 소용 없…!”

퍼억.

『키야아아아악-.』

몸집이 훅 줄어든 토지신의 비명은 전보다 더욱 가늘어지고 날카롭게 울렸다.

우와, 대박! 굳이 팥이나 소금이 아니어도 됐던 거야? 이혜준 씨 당신 뭔데 진짜.

어떻게 이처럼 구마에 특화된 귀인이 딱, 망혼일에 딱, 내 눈앞에 딱, 등장했는지 이 적절한 타이밍과 운발이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나한테 붙은 윤상현도 길가의 아무 돌멩이나 주워서 때려죽이면 되는 거? 참 쉽죠, 그 자체였다.

날 노릴 기회를 엿보며 주위를 배회하던 토지신은 일단 제 몸부터 사리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등을 돌려 도망치는데 땅바닥에 양손을 짚더니 사족보행 짐승의 자세를 취했다. 인간형이 하얀 소복을 펄럭이며 네 발로 펄떡펄떡 뛰는 모습은 실로 괴괴하기 짝이 없었다.

시발 무서워. 내 눈엔 요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저게 무슨 수로 사람의 조상신 노릇을 해 왔지?

제 몸 사리는 특징은 이혜준도 마찬가지라 그에겐 소름 끼치는 이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엎드렸어요. 훨씬 낮은 곳을 노려야 해요.”

잔돌을 주워 들어 위치를 알리면서, 그에게도 돌멩이를 여러 개 건넸다. 짐승신이 격렬하게 움직이니 실패를 우려한 여유분이었는데 이혜준의 첫 돌팔매질이 곧장 명중했다.

빡!

토지신의 뒤통수에서 깔끔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쓰러졌어요!”

“가자.”

덥석 손목을 잡혀 끌려갔다.

억! 이분이 완전 겁을 상실하셨네! 아니 뭘 믿고 이러세요?

보이지 않는 상대를 대하는 막막함이 느껴지지 않아 황당했다. 난 어둠 속에서는 우선 발걸음부터 묶이고 허공으로 손을 내뻗기조차 두렵던데, 이 선배님은 성격이 매우 특이했다.

“아니, 아니, 그냥 멀리서 돌멩이로만 해치우면 안 돼요?”

사람도 아닌 거하고 무슨 근접전이야! 나 무서워 죽겠다고!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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