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제2장>
저승혼사굿
학부생 기숙사에는 서너 가지 주거 형태가 있고, 그중 호빵이가 배정받은 곳은 아파트형이었다. 거실까지 갖춘 구조이긴 하나 한 호실에 여섯 명이 모여 살아야 했다. 요즘은 피를 나눈 혈육도 이 인원으로 좁은 공간에 모여 살기란 버거울 텐데 사람에 치이기 쉬운 환경이었다.
“뭐야. 유시호에게 치킨을 쏜다는 건 같이 사는 나머지 다섯 입도 챙겨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고교 동창인 김재원이 부러 충격받은 얼굴을 꾸며 냈다. 갓 전역한 그는 다른 건물에 있는 생활관에 짐을 풀러 왔다가 내게 호빵이를 소개 ‘당했다’.
호빵이에게 수작질을 해 보라며 자릴 깔아 준 건 아니고, 약속이 겹겹이 잡힌 일정에 두 사람을 따로따로 만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김재원과 나는 둘이 서로 사귄다는 염문을 뿌릴지언정 헤테로는 넘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나마 나머지 두 사람은 개학하고 기숙사로 들어온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래. 인원 비었을 때 많이 베풀어요. 그대는 복을 받을 것이외다!”
룸메이트 중 한 명인 지리교육학과의 복학생이 넉살 좋게 받아쳤다. 호빵이 포함 나머지 놈들은 치킨을 뜯느라 대꾸할 새도 없어 보였다.
“그따위 복은 이놈에게 넘기겠소이다. 완전 호구 새끼요. 큰맘 먹고 소개해 드렸으니 모쪼록 애용하시오.”
경제 사정이 넉넉하긴 해도 이유 없이 남에게 베풀지 않는 김재원이 나를 팔았다.
동기 중에서 가장 부르주아인 그가 편법까지 써 가며 기숙사에 눌어붙어 지내는 이유는 순전히 효율성 때문이었다. 동아리방도 한 건물에 있고, 술을 마시든 운동을 하든 도서관에서 공부하든 날밤을 새우고 씻고 수업에 들어갈 수 있는 최단 거리의 주거지라서.
“친구야, 너의 뜨거운 우정에 감격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른다.”
호구로 팔린 나는 반박하지도 못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서창경이 선업 포인트 얘기를 꺼낸 것이 1학년 2학기 때였나? 그는 무신을 통해 타인을 도우면 더 높은 점수를 얻는다는 개소리도 덩달아 지껄였지만, 알아서 걸러 들었다.
선행의 지름길이 귀신과 관련됐을 리가 없잖아.
서창경이 본색을 드러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역시 선업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타인을 돕는 데에 보람을 느끼진 않고, 그건 선업 포인트를 쌓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에게 희열을 주는 건 사령 놀이.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쭉, 학교에 다닐 때나 군에 복무하고 있을 때나 꾸준히 선업 포인트를 쌓아 왔기에 호구 짓이라는 자각도 없이 그저 익숙했다. 먹을 걸 좀 사는 정도로 호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고용주가 지급하는 과한 액수의 알바 일당을 나를 위해선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안녕 호구?”
지리교육이 방금 인사를 나눠 놓고선 새 마음 새 뜻으로 내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하여간에 웃긴 놈 많아. 호빵이 이 구역에서 심심하진 않겠네.
“바깥에서 보면 아는 척해 주세요. 밥 사 드릴게요.”
음식 보시할 기회가 생기는 거라면 내 쪽에서 환영할 일이지.
밥 산다는 것이 아까운 내 시간을 갈아 넣으며 함께 식사를 즐기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먹었다고 둘러대며 식대만 치르면 그뿐이었다. 상대방이 귀신 쫓아 주는 이혜준도 아닌데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릴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오오, 학식 아니고?”
“어디든.”
“오오오, 잘생긴 분께서는 지갑마저 잘생기셨군요!”
“잘생긴 사람 좋아하세요?”
나는 나보다 더 잘생긴 인간이 있으면 괜히 근접해서 내 얼굴 오징어 인증하기 싫던데 이 선배는 자해하는 버릇이 있나?
“당연하죠!”
“잘됐네. 조금 있으면 우리 학부 최고 미남자가 방문할 거거든요.”
“어? 경영 얼굴 간판이라면 한참 전에 졸업하지 않았어요? 이혜준 씨 맞죠?”
연식이 오래된 학생들 사이에서 이혜준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이번에 복학하면 더 대단해지겠지.
“예. 바로 그분이요. 창업 휴학하고 바쁘셔서 졸업 못 했대요.”
“스타트업? 어느 분야로 진출했는데요? 성공적이래요?”
“모르겠어요. 이따가 그 선배님 오면 직접 여쭤보세요.”
호령도에서 실신한 후 깨어 보니 한낮인데다 서울 이혜준의 집이었다. 그 시간대에 잠시 집에 들른 듯한 그의 아버지와도 마주쳤다.
「아이고, 이 사장님! 주 1일 출근하시는 대표님이 오늘도 집에서 뒹굴고 계시네요? 귀사는 여태 건재하고?」
그의 아버지는 피식거리며 이혜준에게 시비를 거셨다.
자식을 한심하게 취급하는 부친의 태도로 말미암아, 이혜준은 창업하려고 휴학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장기 휴학하려고 없는 일을 쥐어짜 내 사업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야릇한 낌새를 읽어 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개인적인 감상을 오늘 처음 만난 지리교육에게 이러쿵저러쿵 떠벌릴 이유는 없었다. 대외 이미지로 먹고사는 선배님을 존중해 줘야지.
자기 집에선 머저리 취급당하고 무참히 깨지며 사는 듯 보였지만.
늘 해 오던 일과인지 그 집 아버지의 자식을 갈구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혜준의 내성 또한 만만찮아서 자기 아버지에게 무슨 잔소릴 듣든지 시큰둥하기만 했다. 어쩐지 내가 도발할 때마다 씨도 먹히지 않더라니, 자기 집에서 백수건달 취급당하며 오랜 세월 멘탈 강화 훈련을 받아 온 거다.
“아버지가 영국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혼혈 아니면 그런 입체적인 얼굴 안 나온다고.”
글쎄. 내가 보기엔 이혜준과 닮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평범한 한국 중년 아저씨일 뿐이었다. 떠보는 듯한 지리교육의 질문에 모르는 척 딱 잡아뗐다. 친하든 말든 뒷말하기가 싫으니까.
“그런 얘길 주고받을 만큼 이혜준 선배님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요.”
“흥! 친하지도 않은데 개강 전에 시간 내서 따로 만나요? 단체 여행 가서도 그 선배님이랑 단둘이서만 돌아오고! 우리더러는 현관문 바깥에도 나가지 말라고 잔뜩 겁줬으면서!”
별안간 호빵이가 어깃장을 놓았다.
“유시호 후배님, 들고 계신 그 닭 다리는 누가 양보했나요?”
닭 다리로 회유했건만 그날의 배신감은 지우지 못한 모양이다. 호빵이, 생각보다 원한이 오래가는 타입이었구나.
“……강지헌 선배님이요.”
“도로 뺏을까?”
“조심해. 강지는 그러고도 남을 냉혈한이라고!”
옆에서 김재원이 거들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날 돕는 거겠지?
“쳇. 내가 진짜 할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닭 다리 땜에 참아요!”
호빵이가 엉덩이걸음으로 물러나 앉으며 잔뜩 경계했다. 어이없게 귀여웠다.
“여기로 이혜준 선배님 부르는 거 부담스러우면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 나는 따로 만나면 되니까.”
그 선배에게는 친목 도모가 아닌 다른 볼일이 있으므로 나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이혜준이 뭐 하러 수업도 없는 학교에 오겠다는 건지 의심스러웠고, 기숙사를 구경해 보고 싶다는 말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선배님은 탈 인간적 신체 비율과 얼굴 빼고는 아무런 부담이 없죠. 오늘도 술을 가져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다들 혜준 선배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무슨 놈의 존경까지.
이처럼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나는 배신자에다 유죄, 값비싼 양주와 사케를 하사한 이혜준은 무죄가 됐다. 유주무죄有酒無罪. 학우에게 밥 한 끼 사 주지 않고 베푸는 데 인색했던 그 노랑이 선배는 사실 이처럼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다.
“오늘은 맥주밖에 없을걸? 그거라면 생활관 편의점에서도 팔잖아.”
“내 돈 내고 마시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역시 치킨엔 맥주죠!”
“그렇지! 나는 이제 치킨 그만 먹고 술을 기다려야겠어. 시호야, 너는 정말 센스가 훌륭하신 선배님을 뒀구나?”
실망시키려고 꺼낸 얘기가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나머지 두 룸메이트마저 반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마침 술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하여간에 이혜준, 타이밍 맞추는 덴 도가 텄다니깐.
―919동이랬지?
“예, 선배님. 기숙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바로 나오는 ㄱ자형 건물이에요.”
전화를 끊자, 집주인인 호빵이가 나서려 했다.
“강지 형 제가 나갈게요.”
“아니야. 내가 가. 출입 카드 빌려줄래?”
일어서는 녀석을 도로 주저앉혔다.
“내 거 가져가요.”
술이 온다니 마음이 급했는지 지리교육이 제 카드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어서 가 봐요. 부디 귀인님을 조심히 모시고 오고.”
조심할 게 뭐가 있을까. 내 귀엔 선배님은 됐고 술 운반이나 잘하라는 당부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는 후문 쪽으로 마중을 가려는데 반대 방향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지. 어디 가?”
“아, 안녕하세요. 차 가지고 오셨어요?”
눈 둘 데를 찾다가 가슴팍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여기기에도 어깨 너머 먼 산에 시선을 둘 때보다는 발전한 관계였다.
“응. 기숙사 쪽은 주차장 공간이 널널하네.”
“아직 입주 전인 대학원생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이리 주세요.”
선배가 옆구리에 낀 기다란 상자로 손을 뻗었다.
“너는 조금 있다 맥주 들어 줘. 편의점 냉장고 털러 가자.”
이혜준이 위에서 기다리는 인간들이 환호할 만한 대사를 날렸다. 아웃사이더에서 호구로 거듭나실 분이었다.
“그럼 지금 들고 있는 상자는 뭐예요? 술 아닌가?”
“술 상자 맞아. 집들이 간다니까 어머니가 와인 몇 병 챙겨 주셨어.”
이혜준의 집은 와인을 숙성하는 저장고가 따로 있을 법도 한 규모였다. 건물도 여러 채였고, 가택 안에 승강기가 있는 집은 난생처음 구경해 봤다.
돈이라면 저도 차고 넘치니까 내가 금전으로 보답하려 할 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거다.
가진 것은 많고 어지간한 유흥은 심심해진 이런 부류가 떠올리는 인생의 낙이란 무엇일까. 설마 고용주처럼 내게 극한 작업을 뛰게 하려고 계획 중인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