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는 누가 내 수발드는 거 되게 좋아함.」
수발을 들라면서 나더러 대리 운전을 하라는 얘기가 1건 나왔다. 구체적으로 또 뭘 하라는 건지 물어보기가 겁났다.
빵 셔틀 같은 거나 시켜 줬으면.
“가족 중에 술 유통업 하시는 분 계세요? 왜 자꾸 술을 가져와요.”
“너 먹이려고?”
나를 왜? 먹여서 어쩌려고요. 나 술 세서 산공 놈들 다 쓰러져도 나 혼자만 멀쩡하다고.
“음주 운전은 안 합니다.”
지금은 날 걱정하고 죄책감도 느낀다지만 2년 전엔 귀신 붙은 나를 줄곧 흥미롭게 눈여겨봤다는 얘기가 떠올라 의심의 눈길을 던졌다. 가까이에 취미 생활로 무당 놀이하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개놈도 있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방심하기가 어려웠다.
설마 재미로 술 먹이고 운전을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너 마시고 싶은 만큼 실컷 마셔.”
이혜준이 먼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이 건물에 익숙한 사람처럼 식당 옆에 조그맣게 붙은 장소를 잘도 찾아냈다.
“집엔 제가 알아서 가요.”
알아서 우리 집은 피해야 했다.
본가에 아주 발길을 끊은 건 아니지만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내가 그 집에 머물면, 윤상현이 나타나 해괴한 짓을 해 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심장이 좋지 않아 충격받지 않게끔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휴가를 나와서도, 전역하고 나서도 나는 귀신이 침입할 수 없는 안전 가옥에 몸을 의탁했다. 부적으로 뒤덮인 철옹성, 고용주가 연구실이라고 부르는 장소였다.
“그날 일은 용서해 주겠다면서 왜 또 선 긋고 서먹하게 굴어? 우리 이제 친해진 줄 알았더니 너는 며칠 만에 만나니까 다시 어색해진 거야?”
호의를 잘라 내는 내게 이혜준이 물었다.
내가 아쉬워 죽겠는데 용서를 안 하면요?
이혜준이 저지른 짓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만나 주지 않다가 열흘 만에 그의 얼굴을 보는 거였다.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내가 을의 처지임을 망각한 채 그의 연락을 차단해 버렸다.
경영이혜준선배님: [내가 잘못했어 너 체력 바닥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업어주려고 했던 거야 정신까지 잃을 줄은 몰랐지 미안해]
차단을 풀자, 반성문을 연상케 하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의 집을 박차고 나올 때 들었던 변명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별다른 꾸밈없이 제 의도를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문장들.
내 웃음 버튼을 알아챘으니 분위기를 푼다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만도 했는데―그러면 영원한 차단각이지.― 눈치는 있는지 사과문은 점잖았다.
주도권을 쥔, 같은 학부의 선배이기도 한 이혜준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저토록 쉽게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직 그를 잘 모르니 진심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창경 때와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양해 없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그날 밤의 만행을 덮어 주기로 했다.
한편, 그로서는 처음 겪는 공포였을 텐데도 공황에 빠지기는커녕 냉정히 내 상태까지 살펴서 판단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담이 센 건지 둔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예. 조금 어색하네요.”
이 정도면 친해졌다고 인정해야 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시들하게 대꾸해 놓고는 또 그를 밀어낸 건가 싶어 아차 했지만.
맞장구를 치거나 애교를 떨어야 할 시점인 것 같은데 철벽 치는 행동이 일상화된 내게는 이런 부분이 어려웠다.
유감스러워할 줄 알았던 이혜준은 거부당한 적 없다는 듯이 화답했다.
“너 어색함 사라지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나야겠다, 그치. 나는 괜찮아. 섬에서 너하고 같이 그런 일을 겪고 났더니 내적 친밀도가 장난 아니게 올라갔어. 지금 완전 절친 수준이야.”
괜찮아…….
다정한 낱말 하나하나에 까칠하던 감정의 모서리가 깎여 나갔다. 조금 둥글어진 것도 같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옆으로 반걸음 다가섰다. 이 순간만큼은 귀신이 온기를 찾아 헤매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했다.
“바구니는 이리 주세요.”
“내가 들고 있을 테니까 넌 맥주 골라 줘. 전부 몇 명이랬지?”
“원래 여섯 명이서 지내는 생활관인데 그중 두 명은 지금 지방에 내려가 있고요. 손님은 저랑 제 친구, 그리고 선배님이요.”
맥주 캔을 종류별로 쓸어 담으며 위에 누가 있는지 설명했다. (6-2)+3=?
“강지, 실은 나…… 산수가 안 돼.”
큽-.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뭔데, 이 선배님?
하여간에 후배에게 제 한심함을 드러내는 데에 일말의 주저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중 최고봉은 부두에서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리기 무섭다며 징징거렸던 순간.
그땐 상황이 상황인지라 살심마저 치솟았지만 지금은 그저 딱하기만 했다.
“아니, 한 자릿수 단순 계산인데 그게 왜 안 되죠? 여태 회계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전공 필수가 아니기에 전부 수강할 필요는 없었지만 원가회계, 세무회계, 관리회계 등등 세분화해서 듣는 회계 강의 개수만 해도 열 개는 됐다.
“회계학 들으면서 계산기 놔두고 뭐 하러 사람 머리를 써. 귀한 머리 아깝게.”
“…….”
아니, 머리가 왜 아까운데? 산수 하면 머리가 벗겨지는 거야?
웃음으로 무너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사실 숫자만 제시하고 계산하라면 괜찮아. 나는 국어 문해력이 부족해서 둘러 표현하면 한참 생각해야 하거든. 그런데 기력이 달려서 또 깊게 생각하기는 싫지.”
무슨 젊은 놈이 볼 때마다 기력이 달린대. 쓰레기같이.
잠깐 솟아난 호감이 도로 짜게 식어 갔다. 나는 인성이 좀 더럽더라도 능력 있는 남자가 더 좋은가 보다. ……개놈처럼?
아니야. 그건 절대 아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면판만 떠올려도 짜증이 치밀었다.
“어디 외국에서 살다 오셨어요?”
“응. 나 영국에서 나고 자랐어. 국내 학교는 여기가 처음이야.”
비웃으려고 한 말을 이혜준이 진지하게 받았다.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요?”
아버지가 영국 사람이라는 말은 여기서 흘러나왔나? 이혜준은 워낙에 유명 인사이다 보니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나 사실 학교에 적응을 못 해서 사람들하고 얘기 거의 안 해.”
선배님 아웃사이더인 건 내가 잘 알지. 근데 1학년 신입생도 아니고 졸업반을 훌쩍 넘겨서, 4년 가까이 다닌 학교에 대고 적응하기 어렵다고 징징대면 후배한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쪽팔리지 않느냐고.
여행지에서 둘러앉은 사람들이 저를 화제 삼을 때에조차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침묵하던 그의 태도가 떠올랐다. 내 눈엔 무리와 어울리려는 마음 없이 딴생각 중인 것이 훤히 보였다.
“그럼 오늘은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왜 오신 거예요?”
네 성격 다 아는데 왜 무리하느냐고 물어봤다.
“비상 연락망 작성하러. 너 또 산업공학과 친구하고 줄기차게 어울려 다닐 거잖아. 차단당할 때를 대비해서 그 친구랑 미리 연락처 교환하고 얼굴 익혀 둘 거야.”
생각의 방향이 기이한 쪽으로 흐르는 아저씨네?
“애초에 차단당할 짓을 안 하면 되지! 또 선배님 맘대로 눈 마주칠 거예요?”
나도 모르는 새에 혼백이 남의 집에 팔렸던 것처럼, 나는 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사건에 휘말리는 게 싫은 거였다.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 앞에서 무방비하게 정신을 내려놓는 경험도 두 번 다시 겪기 싫었다.
“내 맘대로는 아니고 너만 괜찮다면? ……반성하고 있어. 그날 밤은 뭐에라도 씐 것처럼 너를 데리고 한시바삐 섬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고. 그 섬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줄기차게 경고음이 울리는 느낌 있잖아. 나답지 않게 진짜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러잖아도 가까운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에 한밤중에 서울까지 주파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혜준의 고백에서 답을 얻었다. 제 딴엔 날 위해서, 내게 다정히 대해 주려고 애쓰다가 기절시켰다는 것이 변명의 요지였다.
과정과 결과가 날 분노하게 했어도 의도만큼은 납득했다.
방상시 눈깔이 귀신에 씌었을 리는 없고 안전 지향형 본능이 그를 인도한 듯했다.
이 인간도 윤 의원 일가처럼 조상신이 수호해 주는 것일까? 그치만 나는 여태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조상신은 본 적이 없는걸?
정신이 제대로 박힌 조상이라면 이생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귀신이 돼 후손 곁에 둥지를 트는 대신에 일찌감치 떠나 준다. 산 사람에겐 산 사람의 삶이 있는 거니까.
“드디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시는 거예요?”
“있으면 있는 거지. 내가 언제 못 믿겠다고 했어?”
이혜준은 나와 나란히 공포의 갯벌 체험을 하고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돌아와서 고용주에게 니 새끼가 준 소금이랑 팥이 효험이 없어서 생사람 잡을 뻔했다며 온갖 지랄을 다 떨었는데.
내가 호들갑인 거야, 이혜준이 무딘 거야?
“선배님, 눈동자 색 어떤지 여쭤봐도 돼요?”
냉장고 유리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전처럼 소름 끼치는 감각은 없었지만 함부로 쳐다볼 엄두 역시 나지 않았다.
눈 색깔은 그를 아는 학우들에게 확인하면 그만이긴 한데 내가 여기기에도 퍽 이상한 질문이라 직접 물어볼 기회를 기다려 왔다.
“한국 사람 눈 색깔이 거기서 거기지. 왜. 너한테는 다르게 보였어?”
역시. 이 남자는 나처럼 귀신에게 생기를 빨리며 사는 숙주의 눈에만 무섭게 보이는 괴물인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