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31)화 (31/96)

31화

“지헌인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더 놀다 와요. 일 생기면 연락하게 재원 씨 번호도 찍어 주고.”

이혜준이 덩달아 일어서려는 김재원을 저지했다.

“일은 무슨요. 강지랑 다녀 보시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시비 거의 안 붙어요. 으쓱한 골목에서 깡패를 만나더라도…….”

“씁-.”

이 자식아, 나 지금 고용 협의 중이라 내 스펙을 가능한 한 찌질하게 만들어서 강도 낮은 노동력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지가 대신 얻어터져 줄 겁니다.”

눈치 빠른 김재원이 뒤에 올 말을 바꾸었다. 시궁창 같은 결말이지만 나를 돕는 내용이긴 했다.

“아니, 지헌이 얘가 이 빈약한 몸으로 맞을 데가 어딨다고요. 가슴도 되게 납작하던데.”

“대신에 엉덩이에 볼륨이 있잖아요. 잘 찾아보면 생각보다 때릴 구석이 적잖이 있을 거예요.”

이 새끼들이 둘이 언제부터 친했다고 사이좋게 뭉쳐선 면전에다 대고 나를 깠다.

“혜준 선배님, 저랑도 연락처 교환해 주세요.”

호빵이가 내 친구의 번호를 저장 중인 이혜준에게 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 그럴까?”

이혜준이 호빵이의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일순이었지만 분명 부정적인 기운이 스쳤다. 거슬려 하는 듯한 느낌이 읽혀 고개를 갸웃했다.

호빵이처럼 무해한 애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나? 왜 싫어하지? 이혜준 선배님 사탄이야?

술 마시며 밤을 지새울 거라는 김재원을 남겨 둔 채 수월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 배고파. 저녁 먹으러 갈래?”

따로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혜준이 먼저 운을 떼 주었다.

“그래요, 그럼.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너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면 내 단골 식당으로 가도 될까? 메뉴는 다양하고 적당히 먹을 만해.”

“설마…… 학식?”

불길한 예감에 찍어 봤더니, 이혜준이 “이야아, 강지헌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네!”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데이트하러 가는 길은 아니라지만 이 인간 센스 뭔데?

무엇보다 내 몸에 붙은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앞 뒤 옆으로 사람이 바글거리는 학생 식당 같은 데서 풀고 싶지는 않았다. 시큰둥한 기색을 알아챈 이혜준이 나를 살살 달랬다.

“아직 학기 시작 전이라 많이 붐비진 않을 거야.”

“…….”

지랄 마.

“학생들도 드나들지만 3층은 교직원 식당이거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지금 회식 중이라 거기 끼어서 먹으면 돼.”

“우리 학부 교수님들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아웃사이더가 아는 인물이라면 같은 학부 사람들밖에 더 있을까.

“아니.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하고 조교, 그리고 대학생원들.”

뭐라고?

“그거 방금 대만 귀신 얘기 꺼낸 인간 전공 아니에요?”

“그랬던 것도 같네.”

이혜준은 관심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일 아니라고 선을 그어 놓고는 귀신 얘길 들은 거였다.

“그 시발 새끼 전공 과목은 전부 에프 떴으면 좋겠어!”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그럼 그 과 교수한테 걔 낙제시키라고 사주하러 가자!”

뜬금없는 내 육두문자 저주에 이혜준은 충격받고 말리기는커녕 되레 응원했다. 신나는 척하며 수작을 부렸다.

고고학 놈이 내 사정을 알고서 괴담을 늘어놓진 않았겠지만, 밟히는 곳마다 상처를 헤집는 지뢰가 있었다.

“가긴 어딜 가요. 저 소심해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밥 먹으면 체해요.”

“너도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이거든? 우리 아버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자식을 디스하던 그분께서는 이 학교 교직원이었나 보다.

“초면인 저한테 아버지와의 그런 추태까지 보이고 쪽팔리지도 않으세요? 왜 또 마주치게 하는데?”

“그런 추태 뭐? 그냥 부자간의 평범한 대화였잖아. 아버지들은 원초적으로 자기 아들을 한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법이야. 누가 들으면 가족 상잔이라도 벌어진 줄로 알겠네.”

와! 자식 디스가 국룰이야? 어떤 낯짝으로 이딴 소릴 지껄이는지 이혜준 얼굴 한번 들여다보고 싶네?

우리 아버지도 성인이 된 아들 두 명을 약간 한심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긴 한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선배님의 이유는 내가 잘 알지.

“아버지 말씀대로 선배님은 일주일에 딱 하루만 출근하세요?”

그럴 거면 무슨 생각으로 회사 차렸어? 스타트업이면 회사에서 날밤을 지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사실 나나 박양우는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직원들 있어.”

“여태 굴러간다는 사실이 신기하네요.”

“삐걱거릴 때마다 돈 가져다가 퍼부으면 되지. 내가 사업 접을 의지가 없는 이상 우리 회사는 망할 일 없어.”

이혜준의 신박한 경영 기밀―돈 처바르기―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와. 그렇게나 쉽고 간단한 비즈니스 노하우가 있었는데 여태 아무도 몰랐다, 그쵸.”

“…….”

저도 너무한 건 알았는지 가만히 웃음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제 불성실함을 수치스러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너 긴하게 할 말이 있는 거지? 우리 집에 갈래? 내가 머무는 층에는 여기저기서 들여온 유물 나부랭이밖에 없어서 아주 조용해. 실물 공룡 뼈 보여 줄게.”

그래서 집 안에 승강기가 있었나 보다. 고고학자인지 미술사학자인지 모를 부친이 화물 운반용으로 사용하려고.

집에다 박물관을 차렸나? 아니면 도굴꾼이야? 왜 가정집에다 공룡 뼈를 보관할까.

장난감 공룡도 아닐 테고 개인이 소장해도 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생소한 분야라서 무신을 처음 대할 때처럼 얼떨떨했다.

“싫어요.”

“그럼 식당에서 밥만 먹고 조교 형이 쓰는 개인 연구실로 가자. 그것도 불편하면 연구실에서 배달시켜 먹고.”

저녁 먹자는 얘길 포기하지도 않고 늘어놓는 걸 보니 허기가 지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알아서 잘해 줄게요!’라고 큰소리를 쳐 놓고선 그를 굶기고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다소 나긋해진 태도를 보였다.

“알았어요. 다른 과 사람이 끼어도 되는 자리라면 저도 데려가요.”

“당연히 되지.”

마치 날 제 영역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공대에다 말뚝 박고 놀던 나도 함부로 우리 학부생을 그쪽에다 소개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그가 섬으로 몰고 왔던 검은색 밴은 보이지 않았다. 이혜준이 도로에서 제일 흔히 보이는 차종 중 하나인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 바꾸셨어요?”

학교 오가며 운전할 땐 눈에 띄지 않게 지내고 싶은가 보다고 넘겨짚었더니, 호래자식 같은 대꾸가 돌아왔다.

“아버지 거. 주차할 공간이 부족하다며 학부생 차량엔 교내 정기 주차를 허용해 주지 않으니까, 매번 내 차를 가져오는 건 성가시지.”

“그럼 아버진 어떡하시고요?”

“걸어 다녀. 이제 연세도 있으니까 다리 근력 운동에 신경 쓰셔야지.”

“…….”

이거 완전 개호래자식 아니야?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고개를 치켜들어 얼굴을 쳐다볼 뻔했다.

레스토랑은 인문대 내에 있었고, 이혜준은 익숙한 듯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해가 저문 후의 교직원 식당은 전혀 붐비지 않았다. 식당 직원이 마지막 주문 시간이라고 일러 주어 영업 종료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혜준의 부친 일행 여덟이 삼면이 벽으로 된 닫힌 구조의 공간에서 식사 중이었다. 테이블 위로 술병이 보이지 않는 무알콜 회식이었다.

너저분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탐험가 조끼를 입는 말술 호주가 집단이라는, 학습만화로 고고학자를 접한 내 편견을 깨듯이 일행은 아주 멀끔한 행색이었다. 적어도 공룡 뼈를 양손에 들고서 우가우가 할 것 같아 보이는 면면은 아니었다.

“어째 낯이 익는데?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갔던 학생 아닌가요?”

인사를 하자, 이혜준의 아버지가 나를 바로 기억해 냈다.

“예, 그때 신세 졌습니다.”

“이혜준 친구는 사회 부적격자들밖에 없는데……. 멀쩡하게 보이는 학생이 왜 이런 자식하고 어울려 다녀요. 부모님 아시면 걱정한다.”

아버지의 아들 디스는 집에서나 바깥에서나 한결같았다.

도대체 이혜준 인생 어떻게 살아왔기에 친아빠가 이러시니? 내 눈엔 지금까지도 충분히 한심했는데, 실제로는 더 한심한 인간인가 보다.

“네? 박양우 씨는 저보다 더 멀쩡해 보이던데요.”

낯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조개도 열심히 캐고 사회생활 잘하시던데? 이혜준하고 같은 과였어?

“생긴 거 말고 정신 상태가 말이야. 양우 그놈은 중학교 때 어디 국방부 해킹하다가 걸려서 잡혀갔다 왔잖아요. 결국 중학교 자퇴했어요. 실력도 없는 게 깝치는 거 보면 딱 이혜준인데…….”

이 교수가 별안간 ‘너도 유유상종이지?’ 하는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국방부 해킹할 능력이나 되고 오해를 받았다면 이토록 억울하진 않을 텐데.

“어.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랬지. 생긴 거 조금 멀쩡하다고 혹해서 어울려 다니다간 큰코다쳐요. 이놈한테서 지독한 게으름병이 옮으면 인생에 답이 없어진다고.”

“저는 이혜준 선배님 외모에 관심 없는데요.”

소름 끼쳐서 아드님 얼굴 못 쳐다봐요.

“오?”

“것보다 선배님이 시도 때도 없이 꺼내는 기력 달린다는 소리가 게으르다는 뜻이었어요? 저는 몸이 힘들다는 얘기인 줄 알았거든요.”

체력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혜준 기운은 좋아요. 학교 다니는 게 용할 정도로 만사에 의욕이 없어서 탈이지.”

교수 맞은편에 앉은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내 의문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학교 안 다녔잖아요. 기력이 달려 가지고. 형, 이번 학기엔 내가 인문대에 있는 연구실 좀 쓸게요.”

이혜준은 니 인생이 쓰레기라는 화제에도 영문 모르게 당당한 태도로 장소를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게으름으로 공격받는 게 일상이라 아무런 대미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조교라기에 대학원생이라고 예상했건만 형이라고 불린 사람은 졸업한 지 10년도 넘은 연배로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학위도 땄고, 강의를 맡기도 한단다. 이번 학기부터 자리가 나서 지도 교수 밑을 벗어나게 됐다고.

“네 병이 치료가 돼? 그거 불치병 아니었냐?”

친아버님마저 대놓고 자식을 깔아 보았으나, 이혜준의 자기 방어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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