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방학인데 저 학교 나온 거 보세요. 벌써 절반은 고쳤지. 지헌이하고 같이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완치될 거예요.”
“이야아. 이혜준을 집 밖으로 끌어내다니, 후배님이 능력치가 아주 대단한 구세주신데?”
이 교수는 곧 죽어도 자식 칭찬은 하기 싫었는지 아무것도 안 한 나를 끌어들였다.
“아니요, 저는….”
이혜준이 또 중간에 나섰다.
“우리 지헌이가 말도 얼마나 예쁘게 잘하게요. 얘가 ‘아오 시발 성질 뻗쳐서! 닥치고 얼른 못 뛰어와?’ 하면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나답지 않게 빠릿빠릿 움직이게 된다니깐요?”
“……!”
내 지랄이 인상 깊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순간에 터뜨리다니. 유치원생도 아니고 자기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와 일러바칠 줄이야.
이 고자질쟁이 새끼야! 이 짓을 하고 싶어서 나를 이리로 유인해 온 거지!
“오오, 진짜?”
“이야아, 발로 걷어차도 굴러다니기만 하는 굼벵이 자식을 일으켜 세우다니 정말로 그리스도신데?”
이혜준의 파렴치한 행각에 황당해서 아무 변명도 못 하고 있는데―지어낸 말은 아니어서 변명 거리가 없긴 했다.― 뜻밖에도 사람들은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단연코 친아버님이 제일 신명 난 것처럼 보였다. 나더러 말씨가 예쁘고 성격도 예뻐서 이혜준에게 말려들 염려가 없겠다며, 잘 사귀어 보라는 기이한 응원까지 해 주었다.
“지헌이랬지? 같이 계산하면 되니까 맛있는 거 많이 시켜 먹어~~.”
말투까지 상냥하게 바뀌었다.
이혜준에게 욕설을 퍼붓고 그를 괴롭혔다는데 도리어 나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이다. 어디서든 중심의 태양으로 추앙받을 것 같았던 선배가 이 동네에선 구석탱이에서 망가지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선배님은 도대체 얼마나 게으르기에 아버지며 사람들 반응이 저래요?”
닫힌 공간에는 빈자리가 없어 바깥쪽 홀에 나와 앉으며 물어봤다.
이혜준에게는 거짓말을 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단체 생활에 익숙해 낯가림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 저녁 식사는 그와 단둘이서만 하고 싶었다. 내 비밀을 함께 짊어지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가려야 하니까.
게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김재원처럼, 어느새 이 남자에게도 곁을 내주려 하는 나를 발견한다.
“틈만 나면 드러눕는 거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내쫓겨서 혼자 자취한 적 있거든. 너 휴학하고 없을 때였어. 학교 코앞에 사는 거였는데도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서 강의 시간에 맞추질 못하겠는 거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계속 결석하다가…… 끼니도 챙겨 먹기 귀찮아서 몇 날 며칠 굶다 보니 살이 쑥 내려앉고, 마침내 움직일 기력까지 바닥나니까 그제야 본가에 돌아와도 된다고 허락하시더라고. 허약해진 덕택에 휴학계 낸다는 말에도 집에선 아무 반대 없으셨지. 지헌아, 나 네 옆에 앉을게? 아님 맞은편에 앉을까?”
인간아, 인간아, 네 목숨을 걸고 ‘기력이 달려서’를 증명한 거였네.
게름뱅이의 신박한 무용담에 얼떨떨해 있으려니, 이혜준이 순진한 척 제 자리를 정해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시선이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역시 나란한 자리겠지?
손을 뻗어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선배님은 자립심 같은 거 안 키우세요?”
“응. 고마워. 집에서 독립할 기력이 달려서 자립심은 고이 접어 뒀어. 혼자 살아 보니까 진짜 필요한 것도 많고 챙길 일도 많고 몸이 안 따라 줘서 돌아 버릴 것 같더라. 나는 그냥 평생 시중만 받고 싶고, 다른 사람 부리는 게 더 좋아.”
이혜준의 변함없이 해맑은 음성이 「나는 누가 내 수발드는 거 되게 좋아함.」이라던 과거의 대사와 겹쳐졌다. 기력이 달리는 와중에도 전력을 다한 진심이었던 거다.
이쯤 되니 도무지 개그로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순수하게 이혜준이라는 괴생명체가 두려워졌다.
“…….”
빌어먹을. 강적이 나타났네. 징한 새끼랑 엮이게 생겼는데?
지금이라도 방상시 눈깔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칠까 고민이 됐다.
“지헌아, 특별히 가리는 음식 없으면 내가 네 것까지 주문해도 될까? 나 여기 있는 거 다 먹어 봤는데 그중에서 추천할 만한 메뉴가 몇 개 있어.”
“그러세요.”
이혜준의 제안에 들여다보던 메뉴를 내려놓았다. 저녁 메뉴 따위에 신경 쓸 상태가 아니어서 아무래도 좋았다.
“혹시 식품 알레르기 있어?”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다 잘 먹으니까 선배님 드시고 싶은 거로 시키세요.”
거창하게 알레르기 반응까지 묻고 무슨 대단한 요리를 주문해 주는가 했더니 이혜준은 셰프가 추천하는 ‘오늘의 메뉴’를 시켰다. 맨 위에 적힌 것부터 차례대로 주르륵. 별다르게 고민하는 기색도 없고 성의도 없었다.
“…….”
결론은 역시 내가 이상한 놈한테 잘못 걸린 듯했다. 현장에 나가 귀신을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 명이서 육해공 정식을 하나씩 주문해 나눠 먹었다. 3인분이나 시키고 무슨 음식 낭비인가 했지만 직화로 구운 소고기와 삼겹살, 고등어와 훈제 연어, 오리고기가 내 위장 속으로 차례차례 사라져 갔다. 이혜준의 위장으로는 훨씬 더 많은 양이.
그는 게걸스럽게 먹는 유형은 아니지만 상당한 대식가였다. 내게도 자꾸 권하는 이혜준 때문에 나는 식욕이 돌았던 것이 아닌데도 분위기에 휩쓸려 든든히 배를 채우게 됐다.
우습게도 포만감이 들자 대만 귀신 얘길 꺼낸 고고학에 대한 분노와 아마추어 부적 제작자인 지리교육에 대한 근심과 짜증이 누그러들었다. 관심을 얻고자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치게 날을 세운 것도 같았다. 내가 겪고 있는 저주와 복사한 듯 포개어지는 내용에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잔뜩 몰입해 버렸다.
불쾌감은 여전했지만 아까만큼 예민해지지는 않았다. 격앙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의 이야기도 차분히 털어놓을 준비를 갖춘 기분이 들었다.
또다. 무슨 인간 손톱 깎기도 아니고 이혜준은 울화로 뭉쳐 돋아난 내 가시를 톡톡 깎아 내 그를 할퀼 수 없게끔 했다. 자해 또한 어렵게 만든다.
어쨌거나 날로 먹는 것처럼 인생 편하게 사는 인간 옆에 있으니 나도 감정적으로 숨쉬기가 편하다는 이점은 있었다.
∞ ∞ ∞
“너는 겁이 많으니까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둘게. 이 방 주인은 인골 고고학자야.”
연구실 문을 열기 직전에 이혜준이 일러 줬다.
“저 겁쟁이 아니거든요? 귀신한테만 담력이 소용없어지지 사람이든 공룡이든 뼈다귀는 하나도 겁 안 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뼛조각이 수십 개쯤 널려 있는데 빨래 넌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쳐다보다 보면 정이 들어. 너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왜요.”
이 선배님은 해골 숭배자였어? 그래서 일상 속의 호러에도 무덤덤한 건가?
관심 없던 분야라 구체적으로 뭘 연구하는 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인골 고고학이란 학문도 오늘 처음 들어 봤고.
“학교 다닐 때 여기가 내 아지트였거든.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고 조용해서 도서관보다 공부하기에 나아. 너한테 내 책상 물려줄게.”
전등을 켠 이혜준이 문 바로 앞에 놓인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 앞, 판자로 된 허술한 가림막 너머로 다른 책상이 하나 더, 그리고 소파와 책장, 복사기 등의 사무기기, 커피 머신, 에어컨과 냉장고, 이혜준이 정들었다는 해골과 갖은 뼈다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여럿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구실이라서 그런지 공간은 넓었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한텐 생판 모르는 남의 연구실이잖아요?”
“괜찮아. 허락받는 거 너도 봤잖아. 조교 형 말이 어차피 이번 학기엔 박물관 쪽 연구실 쓸 거래. 사용하지 않고 비워 두면 다른 학회의 연구생한테 넘어가 버리거든. 다시 필요로 할 때 방 구하지 못해서 대학원생들 우글거리는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걸 고려하면 우리가 조교 형을 돕는 거야.”
교내 지도에서 박물관이 있는 건 봤는데, 이 학과에서 담당하는 시설인 줄은 몰랐다. 실제로 운영되고 있다니 장식용으로 세워 둔 건물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요?”
“아무래도 네가 여기 있으면 나도 자주 들르겠지?”
이 게으름뱅이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시네? 굼벵이 주제에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자기가 차린 회사에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출근한다는 선배님한테 그게 가능한 미션일까요?”
거리낌 없이 그의 나태함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내겐 고용주가 마련해 준 안전 가옥이 있는데 죽은 사람의 뼈다귀가 득실거리는, 살인 사건 프로파일러의 사무실 같은 공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저거 진짜 사람 뼈가 맞겠지?
“수업이 있으니까 주에 두 번 이상은 오겠지. 음. 올 수 있을 거야. 아마도.”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자신만만하던 음색이 주춤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어져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르는 사람 연구실 말고 선배님 혼자 사는 집이었다면 방문하기에 부담이 적었을 텐데 말이에요. 근데 선배님이 워낙에 게으르시고 생활력이 없어서 자취는 안 된다니까 뭐어-…….”
안타까워하는 척 말을 길게 뺐다.
내뱉고 보니 정말로 부담감 제로였다. 혹여 이 남자 집에 귀신이 든다면 귀신 걱정을 해 줘야 할 판이니까.
“진짜? 되게 고민되네.”
제법 눈치가 빠르더니 지금은 미련하게도 농담인 줄을 알아채지 못했다. 진지 모드로 장난치는 나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문득 갈등 어린 이혜준의 얼굴은 어떤지 보고 싶었다.
윤상현을 몰아낸 후에도 신세계 에반게리온처럼 내게는 세컨드 임팩트, 서드 임팩트에 해당하는 재앙이 찾아올 텐데, 언제쯤 겁먹지 않고 이 절세 미남의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할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