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괜찮아요. 나는 고용주가 마련해 준 장소가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이 부적 만들고 노는 데요. 말하고 보니 또 지리교육이 생각나네.”
아이고. 미친 인간들아. 할 짓이 없어서 그 위험한 걸 놀이 삼아 하고 자빠졌냐.
고용주와 지리교육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다가 2인용 소파로 가서 천연스럽게 드러눕는 이혜준을 발견하곤 내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체격이 커다래서 한참 몸을 구겨야 하는 남자는 꿈틀이 과자를 연상케 해서 너무 웃겼다.
큽-.
저 인간 내가 알던 경영 대표 미남 왕자님이 맞냐고. 저 인물로 저렇게 없어 보이는 것도 능력이네.
어느덧 저런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자식을 집에서 내쫓았다는 부모님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너도 거기 누워.”
이혜준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예? 저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안 될까요?”
“누울 자리가 있는데 굳이 왜 앉으려고.”
“…….”
큽큽-.
언뜻 이혜준이란 인물 전반을 관통하는 인생관을 엿본 듯해서 또 웃음이 터졌다. 얼굴도 별종인데 성격마저 유별났다. 멀리서 지켜볼 땐 고고한 왕족님이라 홀로 모든 주변인을 따돌리는 줄 알았지.
이 인간은 그저 사람 상대하는 일을 비롯해서 만사가 귀찮았던 거다.
그런 남자가 유독 내게는 죄책감을 이유로 들며 그의 기준으론 번거롭기 짝이 없는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이제는 기력이 달린다는 말버릇이 무색해 보일 정도로.
왜 저럴까. 진짜 왜 저러지? 나한테서 뭐 건질 거리라도 보이는 거야?
“강지헌, 개천사가 제공했다는 장소 말이야. 부적 만드는 작업장이라면 그야말로 무당집이잖아?”
내가 자리를 잡자, 이혜준이 흘려 버린 줄 알았던 화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서창경 씨는 무당이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지리교육처럼 근본 없는 사이비도 아니지만.”
“걔는 왜 가짜라고 생각해? 같은 아마추어인데 지리교육이 개천사보다 신기가 더 강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정말로 신기가 있었다면 내 몸에 붙은 윤상현도 보였어야죠.”
“윤상현? 너, 회충 이름도 알아? 회충하고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진짜?”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이혜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강지헌 이리로 와 봐. 여기 앉아서 자세히 얘기해 봐.”
“왜요. 전 이쪽이 더 좋아요.”
숨소리까지 들리는 지척에서 새로운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양친도 포기했다는 이 게으름뱅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내가 앉은 소파로 건너왔다.
아는 사이였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젠가?
“윤상현이 누군데?”
“명절 때, 아버지 고향에 내려가면 같이 놀던 동갑 아이요.”
순순히 대답했다.
“귀신인 줄 모르고 어울렸던 거야?”
“아뇨. 걔가 어릴 땐 살아 있었어요.”
말을 꺼내 놓고 보니 내용이 기기했다.
“언제 죽었는데?”
“열아홉 살. 그때는 또 낯을 가려서 서로 못 본 척하고 어울리지도 않았고요.”
“너…… 뭐… 했어?”
“뭐요. 나한테 괴롭힘당한 윤상현이 복수하려고 원귀가 돼서 달라붙었냐고요?”
낮게 깔리는 내 음성에 이혜준이 다급히 부인했다. 그저 물어본 것뿐인데 되게 내 눈치를 보며 절절맸다.
“아냐. 아니야, 설마. 네가 일부러 친구를 괴롭혔다고는 생각 안 해.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네 성격이 얼마나 너그러운지 내가 잘 알아. 호령도에 갔을 때도 학부 애들 걱정에 내도록 마음 썼잖아. 밤에 놀러 나가려던 애들도 그러지 말라고 좋은 말로 타이른 것이 전부였고. ……그나저나 어떡하다 소꿉친구 귀신에 씌게 됐어?”
마지막 질문을 하기 위한 아부가 길고 길어서 중간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고 끝까지 들어 줬다. 덕분에 예상한 것보다 분위기가 처지거나 우울해지지 않았다.
“‘저승혼사굿’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내가 윤상현 집안 어른들한테 그걸 당했어요.”
내 친조부모가 죽은 사람한테 장가들라며 내 사주를 팔았고 그 값으로 백만 원 받았대요.
“말만 들어도 어떤 굿인지 짐작이 가네. 윤상현이란 친구 죽고 나서 바로?”
“예. 봄에 죽었다는데 내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된 건 그해 겨울이었고요.”
“뒤늦게 알았다고? 굿하는 자리에 당사자인 네가 없었는데도 그게 가능했…… 어…!”
드디어 대만 귀신의 달에 마주한 저주와 연결 지었는지 이혜준에게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래서 아까…….”
“예.”
“그 굿을 물리는 방법은 없어?”
“있어요. 있는데, 일반 무속인이 가진 신력이 윤상현한테는 안 통했어요.”
“너 아까 너한테 붙어 있는 놈이 특수한 경우라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서 나와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잠깐 꺼냈던 화제다. 대만 귀신의 달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나는 벌써 이 남자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작정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도 한결 더 부담감이 지워졌다.
“예. 정확히 말하자면 붙어 있는 놈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잡귀인데, 굿을 주재한 무속인이 국내 최고의 만신이었어요. 그 무당 한 사람을 잡으려고 여덟 도인이 모여 힘을 합쳐야 할 정도로 신력이 막강했거든요.”
평범한 고등학생 강지헌을 엮는 저승혼사굿에 최고의 만신이 나선 까닭을 밝히려면 먼저 윤상현의 집안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조상희를 서두로 윤 의원 일가의 이야기를 꺼냈다. 호령도 부둣가의 굿판에서 마주친 이들의 정체 역시.
“고깔 쓴 할머니 무당이 그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네가 심각하게 경계한다는 생각은 들었어. 나한테는 시선도 마주치지 말라고 주의를 줬잖아.”
“예. 그만큼 무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산 사람이 아니라 신령에 더 가까운 존재였어요.”
그 조상희가 얼마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방어벽이 사라지며 이제는 내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게 됐다는 설명도 했다.
이혜준은 그날 밤 갯벌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터라 무속인의 사망 원인을 짐작한 듯도 보였지만, 잠자코 경청하기만 했다. 나 역시 굳이 내가 간접 살인을 저질렀다고 내세우지 않았다.
그날의 의식이 정당한 복수였고 내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여기는 한편, 이 남자의 과한 듯한 호감 역시 내겐 중요한 사안이었던 까닭이다. 후일을 대비해 방상시의 눈을 곁에 두고 싶다는 계산적인 목적 이외에도 그가 나를 혐오의 눈길로 바라보길 원치 않았다.
“선배님한텐 죄송한데, 이번 건은 고용주가 나서 주기로 해서 선배님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이해해. 너 되게 아파했잖아. 기절하는 부작용도 있었고. 그래, 개천사 눈에는 그 귀신이 보인다고?”
“예.”
“호령도에 다녀온 지금도 보인대? 너 나하고 두 번째로 눈 마주친 이후에도 말이야.”
“그……렇겠죠?”
이혜준의 물음은 내 안에 가느다란 의심의 싹을 틔웠다.
고용주가 평소 내게 솔직한 인물이었던가.
대답은 아니다, 였다. 그는 구린 짓을 일삼다 보니 조수인 나에게조차 감추는 비밀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게다가 섬에 다녀와서는 이혜준과 만나지 말라는 그의 억지에 몇 번이나 신경전이 벌어졌다. 험악한 분위기 탓에 윤상현 건을 해결해 달라고 재촉하지 못했고.
혹시 방상시 눈 덕에 윤상현은 이미 내게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닐까? 고용주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라면?
고용주가 날 속이는지 아닌지 알아내는 방법이야 간단했다. 꼴불견을 각오하고 지금 나란히 붙어 앉은 남자와 한 번만 눈인사를 하면 된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한데, 선뜻 울어 보겠다는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도 그토록 펑펑 울었던 기억이 없어서 무지하게 당혹스러웠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꺼림칙했기에 이왕이면 이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으로 미루고 싶었다.
“확실해?”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오늘 가서 한번 물어볼게요.”
“만나기로 했어? 벌써 어두워졌는데 한밤중에 보기로 약속한 거야?”
추궁하는 어조는 아니지만 다소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고용주를 싫어했지. 만나 보지도 않고서 편견만으로 저희끼리 서로 열렬히 견제하는 모양새가 터무니없어 보였다.
싸워라 싸워!
이토록 응원하는 마음이 있기에 고용주가 이혜준에 대해 뭐라고 욕하며 부정적인 위협을 해 대든 내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기 직장이랑 가깝기도 하고 요즘엔 거의 자고 가더라고요. 얹혀사는 주제에 내가 건물주더러 나가라 마라 말 못 하죠.”
“불편하면 우리 집에 와서 지내도 돼. 너 내 옆에 있으면 제일 안전할 거잖아.”
제 부모님의 안위 따윈 걱정하지 않는 호래자식이 권했다.
“다른 가족분들이 위험해져서 곤란해요. 선배님 혼자 나와서 살 만큼 부지런해져서 독립하시면 그때 가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곡을 찌르며 그의 약점을 후벼팠다.
“…….”
돌아보지 않아도 풀 죽은 표정이 상상돼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으이그. 그러게 왜 게을러터져선 그 얼굴로 후배 한 명 못 꼬시냐?
한편, 이혜준이 날 위해서 뭐라도 하나 더 해 주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이 전해져 기뻤다.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진정한 내 소원을 들이밀기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선배님, 윤상현이 나한테서 떨어진 다음엔 그 새끼도 섬 귀신처럼 밟아서 터뜨려 주심 안 될까요?’
이렇게 부탁하고 싶은데, 날 어떤 인간으로 볼지 신경이 쓰였다. 죽은 사람 편안하게 떠나지도 못하게 하는 악독한 새끼라고, 그런 쓰레기 인성이니까 천벌을 받은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