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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34)화 (34/96)

34화

“오늘 드리려던 말씀은요. 윤상현만 해결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고, 앞으로 저한테 두 번이나 더 이런 식으로 배우자 귀신이 달라붙을 거라는 거예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선배님이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돕지. 그런데 개천사도 있지 않아? 그 사람도 귀신 떼어 놓을 수 있다며.”

이혜준이 돕겠다는 얘길 아무 조건도 달지 않은 채 해야 마땅한 일이란 식으로 말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남자와는 얼마만큼 친해졌고 어느 정도를 내보여야 하는지, 일일이 계산해서 행동하는 내가 갑자기 이기적인 속물처럼 느껴졌다.

“고용주는 이거 몰라요. 이런 사고가 두 번이나 더 반복된다는 건 이 점괘를 낸 무속인하고 부모님밖에 모르는 사실이에요.”

“다른 사람 거치지 않고 점괘 낸 당사자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그러잖아도 그 무속인이 윤상현의 사주만 가져오면 해결해 주겠다고 해서 다시 찾아갔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모시는 신과는 급이 다른 존재의 힘이 실린 저주라서 풀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길 수 없는 신령이었던 거죠.”

“…….”

이혜준은 놀란 기색도 없이 다음 말을 기다리듯 잠자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겁먹은 무당한테 제가 살려 달라고 매달려서 어렵게 굿을 하긴 했는데, 시작한 지 1분도 안 돼서 분수 피를 토하고 하혈을 했어요.”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였다.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고, 스무 살의 나는 단박에 항복하고 말았다. 감히 나 따위가 초자연적인 어떤 것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렸다.

이로써 이혜준과 나는 새로운 비밀을 공유하게 됐다. 그에게는 후배가 털어놓는 괴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경계선을 넘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무지로 말미암아 첫 번째 무속인을 위험에 처하게 한 죄책감과 실패한 굿, 그날 이후로 줄곧 암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나의 손등 위로 이혜준이 손을 겹쳤다. 손가락을 비집어 넣어 깍지를 끼는 행위에서 위로 이외의 감정은 전해지지 않았다.

“고용주에겐 비밀로 하려고 너 혼자서 찾아갔겠지?”

그랬다. 고용주가 있는 자리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했으므로.

서창경과는 한배를 탔지만 그는 선보다는 악의 축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아무리 선의로 포장하더라도 내게 시키는 일을 보면 한때 같은 사람이었던 존재를 상대로 해도 될까 싶은 짓거리가 대부분이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든 것이 자기 취미 도구였다.

그런 개놈을 진심으로 따른다면 내 인격을 내가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호령도에 다녀와서는 평소 쌓아 온 선업 포인트가 모자랐는지 해신이 내게 몹시 노한 것 같더라고 전했다. 서창경 너는 나보다 더 나쁜 놈이고, 천벌 받을 가능성도 크니까 이제부터라도 마음 고쳐먹고 착하게 살라고 말이다.

예상대로 서창경은 자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죄밖에 없다며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 당시엔 고용주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뢰하기가 어려워서요. 걱정 끼칠까 봐 부모님한테는 굿을 하겠다는 얘기도 꺼내지 않았고요.”

“신입생 때지?”

“예. 1학기였으니까 선배님 복학하기 전이요.”

“갓 스무 살 된 애가 혼자 무당 찾아가서 굿도 시도해 보고 너 그땐 대담한 성격이었네.”

지금의 나를 심약한 겁쟁이로 치부하는 이혜준이 말했다.

“제가 그 피 웅덩이를 보기 전까지는 귀신 무서운 줄을 몰랐죠.”

무속인이 위아래로 피를 쏟아 내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고, 어리석게도 뭘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내 힘으로는 어쩔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처음으로 통감했다.

“전부 너 혼자서 감당해 오느라 힘들었겠다.”

이혜준이 깍지를 낀 채 겹친 손에 지그시 힘을 주자, 대화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던 감촉에 눈길이 갔다.

“선배님, 근데 내 손 왜 잡아요?”

의외로 불쾌하진 않았지만 삐딱하게 물어봤다. 남자한테 손을 잡히면 응당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귀하게 모셔야 할 분인데 아가리에 죽창 날릴 순 없잖아. 말로 해결해야지.

“왜. 이상해?”

“너무 이상하죠. 영국에선 이러고 놀아요? 내가 김재원이랑 아무리 친해도 서로 손 쓰다듬으면서 대화하진 않거든요?”

이혜준에게 어깨동무 자세를 하도 당해서인지 사실 이 정도 스킨십은 별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나도 박양우하고는 이러고 얘기 나누진 않는데……. 그런데 뭐가 다르지? 저승혼사굿 해서 붙는 귀신하고, 일반적으로 붙는 귀신하고는 어떤 차이점이 있어?”

“말 돌리지 말고.”

“진짜 궁금해서 그래.”

“지랄 마세요.”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강지 넌 말본새가 예뻐서 애인이 되게 행복하겠다. 너랑 사귀면 맨날 시발시발 지랄지랄 욕 처먹으면서 지내겠지?”

“…….”

큽-.

사귀는 사람한테 내가 왜 그러겠느냐고 반박해야 하건만, 없는 여자 친구의 존재를 상상 주머니 속에서 끄집어내 오느라 한 박자가 늦어졌고, 그사이 이혜준이 내뱉은 마지막 문장이 또 내 수준 낮은 개그 코드를 건드리는 바람에 빵 터지고 말았다.

와, 진짜. 하이 개그를 지향하던 내가 어떡하다 이런 놈한테 코가 꿰여서는! 담부턴 이 인간 만나기 전에 웃지 않는 연습이라도 하고 와야지. 자존심 상해.

“너 내가 그렇게 좋아서 어떡해? 내가 무슨 말만 꺼냈다 하면 숨도 못 쉬고 넘어가네. 웃겨?”

어깨도 펴지 못하고 끅끅거리는 나를 들여다보며 이혜준이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그거 아니라고, 미친놈아 아무 말 씨불이지 말라고, 버럭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됐어요. 선배님 마음대로 착각하세요.”

이번에야말로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팔을 흔들었다. 깍지 낀 손은 끈적임 없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네가 내 표정을 보지 못하니까 어떻게 내 기분을 전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추행당하는 기분이 들었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더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어요. 근데 이제 건드리지는 말고 말로만 감정을 전하시라고요.”

말로 하면 되지 왜 손을 쓰냐.

“그럴까? 난 그저 혼자서 아등바등 분투했던 스무 살의 너를 떠올리면 안타깝고 마음 아파서 손 꼭 잡고 위로해 주고 싶은 거야. 아주 많이.”

“…….”

뭔데.

수작 부리는 행동이 아니란 건 알겠다. 그렇다고 말로만 하란다고 이런 느끼한 소릴 말로 표현해? 이 인간은 꺼냈다 하면 개소리 아니면 개기름 흐르는 소리네.

“왜.”

개기름 폭탄에 맞고 속이 좋지 않아 굳어 버린 내게 그가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이젠 위로해 주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네가 나보다 몇 수 위의 욕쟁이에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만큼 기가 세졌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나는 네 눈치 보며 연락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잖아?”

내가 강해진 건 전부 개놈을 스파링 상대로 단련해 온 덕분이었다. 이혜준의 칭찬 덕에 언짢은 기분이 가셨지만, 그건 그거고 더 이상의 개기름 테러는 지양해야 했다.

“선배님은 말로도 하지 마시고 그냥 마음으로 생각만 하세요. 겉으로 드러내지 마요.”

“마음만으로 뭘 할 수 있겠어. 행동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널 도와. 어서 돕게 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게으름뱅이답지 않은 대사가 튀어나왔다.

고용주에겐 내 처지를 이용당할까 봐 전전긍긍 숨겨 왔던 비밀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날 못 도와서 난리였다. 심지어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충격받은 기색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재촉하는 이유는 한시라도 빨리 제 시중을 들게 하고 싶어서?

눈치를 보니 인격 말살하며 날 노예로 부릴 성싶진 않다만 서창경에게 당한 것이 워낙에 많았기에 자구책을 깔았다.

“아니, 나…… 보기보다 몸이 허약해서 은혜 다 못 갚아요. 그러니까 내가 갚을 수 있을 만큼만, 조금만 도와주세요.”

이 엉뚱한 작자가 내게 어떤 무식한 주문을 할지 몰라 미리 연막을 쳤다.

쉬운 거 시켜 줘, 쉬운 거. 빵 셔틀, 커피 셔틀 같은 거 말이야.

“그럼. 넌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무리를 시키겠어.”

“정말요?”

됐다, 고 좋아했더니만 곧이어 웬 양아치가 튀어나왔다.

“그래그래. 쏟아지는 은혜를 일시불로 갚긴 벅찰 테니까 일생 동안 조금씩 조금씩 갚아 나가자? 내가 마음이 약해서 장기간 평생 할부로 해 준다.”

“이야아, 한 자릿수 산수도 안 되신다는 분이 사기 치는 덴 도가 트셨네요. 날 평생 머슴으로 부리시려고? 양심 말아 드셨어요?”

“머슴이 싫으면 다른 걸로 봉사해도 돼.”

다른 역할에는 뭐가 있는지 하나도 안 궁금했다. 하인, 노예, 뭐 그런 종류겠지.

마음 같아선 ‘당신 인생에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후배 1’을 시켜 달라고 하고 싶지만, 섭섭한 소릴 해서 화기애애한 공기를 흩뜨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화제를 돌렸다.

“참, 저승혼사굿 해서 달라붙은 귀신은 뭐가 다르냐고 물으셨죠? 일반 귀신처럼 생기 빨리는 건 마찬가진데 저승길 동반자, 즉 배우자로 찍히는 거라서 결혼도 연애도 하기가 어려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코지를 하거든요. 윤상현은 우리 집 식구들까지 괴롭혀요.”

“그러면 네 여자 친구는 괜찮아?”

“……. ……그러게요?”

엇, 이거 아닌데?

되묻고 난 순간 잘못된 대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

큭.

옆자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소리를 죽이려는 듯 고개를 처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나 방금 들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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