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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36)화 (36/96)

36화

심각한 비밀을 털어놓으러 왔다가 왜 이리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는지 자괴감이 들면서도 너무 웃겼다. 머릿속에서 죽은 사람의 존재가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기이한 경험을 실시간으로 겪었다.

“도어 록 비밀번호는 20220916, 조교 형네 강아지 생일이야.”

동생 놈 생일도 가물가물한 뇌 용량으로 남의 집 개 생일까지 챙기긴 무리였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좀 기억해 주라. 맛있는 원두 가져와서 커피 내려 줄 테니까 여기 우리 아지트 해. 나 사람 북적이는 데 가면 기력이 달려서 바깥 카페 같은 데 잘 못 돌아다닌단 말이야. 다녀오면 피곤해서 며칠씩 앓아누워.”

큽-.

이혜준의 변명이 웃긴 탓인지 내 입에서는 한결 느슨해진 대답이 나왔다.

“나 혼자 이 방에 있기 싫어요. 선배님이 여기로 오실 때 저 부르세요.”

“그럼 너 시간표 나오면 보내 줄래?”

“어…… 예. 그럴게요.”

어……?

문득 여러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마시던 초콜릿 음료수에 천연스럽게 입을 대던 이혜준, 눈물로 눅눅해진 물티슈를 내 손에서 가져가던 이혜준, 유시호를 견제하던 이혜준, 게으르다면서 내 앞에서는 한 번도 나태하지 않았던 이혜준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차곡차곡 덧그려졌다.

애매한데?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무심한 나는 같은 성향을 감별하는 눈도 어두웠다. 감별하고 싶은 욕구조차 일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평생 음지에서 귀신과 섞여 지낼 나하고는 접점이 없다고 여겨 왔으니까.

이따가 레이더가 발달한 김재원에게 이 사람 어떤 느낌이냐고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집에 갈 때가 되자 방향도 다르면서 이혜준이 데려다주겠다며 우겼다.

“너 어디에 사는지는 알아야 일 생겼을 때 내가 바로 달려갈 수 있잖아.”

도움을 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에 귀가 솔깃했다.

“근데 실은 고용주한테 들키면 곤란해요. 선배님 얘길 했는데 반응이 영 좋지 않았거든요. 다신 만나지 말라고…….”

내려가는 승강기 안에서 결국 이혜준을 향한 고용주의 적의를 전했다.

“왜. 제 무신이 달아날까 봐?”

“서창경 씨는 무당 아니라고 했잖아요. 귀신 안 모셔요.”

모시진 않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조달해서 써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서창경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덧입히기 싫어서 뒤에 오는 말은 생략했다. 두 사람이 협력해서 나를 조력하기 싫다면 이처럼 따로따로 만나면 되겠지.

이혜준과 엮이지 말라며 고용주에게 열흘 내내 시달려 온 탓인지 나도 이젠 둘을 이어 주는 소개팅에는 진력이 났다.

또, 부적도 통하지 않는 이혜준의 강한 방어력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이 한만한 선배가 그 악질한테 걸려 험한 짓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만신 조상희보다 신력은 떨어질지언정 서창경 역시 만만찮은 저주술 전문가이기에 그가 요즘처럼 바짝 날이 선 상태에서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나를 돕는다는 이유만으로 급살을 맞는 이혜준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죄책감으로 심장이 죄어 왔다.

“그럼 근처까지만이라도 바래다주게 해 줘.”

“강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기력이 달리실 텐데요?”

이혜준의 실체를 까발려 주는 인골학과 사람들을 만난 후 그를 놀려 먹을 거리가 생겨서 재미났다.

“괜찮아. 집에서 한 사나흘 쓰러져 있지, 뭐.”

농담이 아니고 진심 같아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분 한강 두 번 건넜다간 한 달은 쉬셔야겠네.

“나도 괜찮으니까 아버지하고 같이 귀가하세요. 아직 학교에 계실 것 같은데.”

“저녁 먹고 곧장 집으로 갔어.”

이혜준의 부친은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알코올 없는 회식을 하고, 퇴근 후 노닥거릴 친구가 없고, 업무가 끝나면 집으로 직행하는 일상을 산다는 그는 내가 멋대로 상상해 오던 고고학자와는 여러모로 다른 삶을 살았다.

결국 주차장에 다다를 때까지 거절할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고용주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이혜준을 내다본 전적도 있었다. 그런 고용주의 영역으로 데려가면서 이혜준의 존재를 들키지 않길 바라는 건 요행이었다. 개놈의 악다구니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옆에서 걷는 남자 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돌연히 콘크리트 바닥에 달라붙은 달팽이가 눈에 띄었다. 연일 지속되는 뙤약볕과 마른 날씨에 마주칠 만한 생물은 아니었다. 달팽이야말로 기력이 달리는지 제대로 기지도 못했다.

화단에 올려 줘야지.

“생수로 몸이랑 주변 흙 좀 축여 주고 돌려보내자. 잠시만 기다려.”

허리를 구부리는 내 위로 이혜준이 말했다. 그 역시 밤눈이 밝아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 조그마한 생명체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차에서 생수 두 병과 A4 용지를 가져온 그가 종이 삽으로 달팽이를 떠서 화단으로 옮겼다. 수분으로 달팽이와 흙을 흠뻑 적셔 주었다.

그 과정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내 감정이 달팽이에게로 이입해 들어갔다.

‘아, 이 사람이라면 결코 나를 해칠 리가 없겠구나.’

안전하다. 그것은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내 눈엔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나 감정이 결여된 주인공이 하나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냉정한 인성이 그 사람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듯 다정함이 나약함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안다.

내겐 생명수와도 같은 이 남자가 이 순간 조금 더 좋아지려 했다. 폐만 되지 않는다면 온기를 찾아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 ∞ ∞

혜화역 근처 큰길에서 차를 세우며 이 이상은 함께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선배님 이 동네까지 오신 거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개천사 천리안이야?”

“그 비슷해요. 보통 사람이 못 보는 거 많이 보죠.”

이혜준의 말장난에 웃으며 혹시 모를 도움을 받을 훗날을 위해 길 찾기 설명을 이었다.

“여기서 좌회전해서 일방통행 길로 진행하다가 첫 번째 골목 나오면 거기로 쭉 들어가면 돼요. 작은 공원이랑 건물 한 채밖에 없거든요. 건물 간판엔 <극단 퍼핏Puppet>이라고 적혀 있는데 예전에 소극장으로 사용하던 장소래요.”

대학로 일대라 널린 것이 공연용 소극장이었다. 문 닫은 극장인 줄 모르고 잘못 찾아드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간판을 그대로 두는 이유는 인형 놀이에 심취한 고용주가 꼭두각시란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사들인 건물인 까닭이었다.

「강지헌 너하고도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내 첫 번째 인형.」

「나 아직 안 죽었거든?」

「너 죽으면 네 혼백은 내 거. 큭큭.」

「……재수 없게 진짜.」

이런 인간이니까 함께 붙어살다시피 해도 정이 들지 않는 거다.

“가정집으로 지어진 건물도 아닐 텐데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아?”

“걱정되면 얼른 자취하세요. 나 선배님 집에 얹혀살게.”

혼자 지내다가 끼니 챙기기 귀찮아서 굶어 죽을 뻔했다는 인간을 줄기차게 약 올렸다. 썩어들어 갈 것이 분명한 이혜준의 표정을 감상하고 싶었다.

고용주가 만들어 놓은 공간은 온갖 부적과 주술로 보호막을 두른 건물이라서 세상 어디보다 마음이 안정되는 장소라고 털어놓을 순 없었다. 내가 조금 전에 기숙사 방에다 부적을 붙여 놓은 지리교육의 행동을 대놓고 비웃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깃든 영력의 차이로 사람 목숨이 살고 죽는데 부적이라고 다 같은 줄 알아? 지리교육을 얻다 대고 비교하지?

그러나 이혜준의 눈에는 고용주도 지리교육도 똑같은 아마추어 무당처럼 보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들을 싸잡아 사이비라고 매도하진 않았다.

“똑똑한 강지. 벌써 이혜준 굴리는 법을 터득했구나? 알았어, 다시 도전한다, 자취 생활!”

울먹울먹하는 느낌이라 더 웃겼다. 수준 낮은 개그로 금이 갔던 내 자존심이 19.2퍼센트가량 회복됐다.

“기력도 달리시는데 무리하진 마시고요.”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설마.

“그럼요. 선배님이 건강히 오래오래 사셔야지 두 번째, 세 번째에도 저 도와주시죠. 그것들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음……. 정확한 점괘가 어떻게 돼?”

“제 사주에 혼인 운이 세 번 끼어 있대요.”

“그럼 붙는 게 반드시 귀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혼인은 산 사람하고도 할 수 있는 거지.”

귀신 맞아. 난 살아 있는 사람하고 결혼 못 해.

귀신을 피하고자 여자 사람 친구들에게 ‘나하고 가짜 결혼 한 번씩만 해 줄래?’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머리 위로 그려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첫 번째 귀신이 곧 떨어져 나갈 기미가 보이니 미래에 대비하는 이런 망상도 튀어나온다.

위장 결혼 같은 얕은수가 통했다면 서류상 혼인 관계도 고려해 봤겠지. 무엇보다 내 재수 없는 팔자에다 상대방의 운명을 갖다 붙이는 건 도의에 어긋났다. 귀와 관련된 일이다. 산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내가 윤상현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돼 버린다.

선을 넘지 말고 어둠 속에서 결착 지어야 한다.

서창경이 말하길 귀가 머무는 그 어둡고 음습한 곳이야말로 내가 속한 세상이라고 했다.

게이라서 남자와는 결혼해도 괜찮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별을 떠나 선의로 결혼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거절해야 마땅한 일이니까.

“세 번 한다는 얘길 처음 들었을 때도 내가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다 보니 당연히 귀신이랑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붙은 것도 귀신이었고.”

산 사람과의 결혼은 아예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았다. 좋아하는 상대가 생긴다 할지라도 국적까지 바꿔 가며 하는 결혼에는 회의감이 들었으니까.

사람 마음 언제 어떻게 변할 줄 알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

죽을 만큼 사랑한다며 주변에 온갖 민폐를 끼치면서 대환장 드라마를 찍더니 신혼여행 다녀와서 이혼한 커플이 우리 동네에만 두 쌍이다.

하물며 점점 비관적으로 변해 가는 내 상태에서는 누구를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비혼주의였어?”

“내 비혼주의는 4년 전에 타의로 깨졌죠.”

이미 장가 한 번 들어 놓고,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도 어서 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마당에 비혼은 무슨 비혼.

하루라도 빨리 결혼 횟수를 다 채우고 싶은 삼혼 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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