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됩니다. 잠깐 살펴보고 돌려 드릴게요.”
“진짜 잠깐만이에요? 귀한 물건이라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저 상냥한 말투가 더 이상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믿음이 갔고 순종심이 끓어올랐다. 이 남자에게라면 이대로 부복한 채 목이 날아간다 해도 기쁠 것 같았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친 종을 기다랗고 우아한 손가락이 내려와 집어 갔다.
“그럼요. 나는 남의 물건에는 관심 없어요.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기엔 기력도 달리고요.”
“드, 드릴까요?”
순종하다 못해 이제는 어렵게 손에 넣은 유물마저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약간은 아깝다는 미련이 남아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는데, 다행스럽게도 남자가 거절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내겐 무용지물이에요. 잘 봤습니다.”
남자는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없는 듯했다. 순순히 돌려주는 손길에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돌려받았다. 본인의 물건을 돌려받는 것뿐임에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엇-?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기감이 뛰어났던 공숙선은 유물의 성질이 달라졌음을 즉각 감지했다. 일단 파장이 어긋났고 은은히 뿜어내던 음산한 기운 역시 사라져 버렸다. 계획적으로 바꿔치기 당한 건가 싶었지만 이런 고대의 부장품이 흔하게 복사될 리가 없었다.
“정화됐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성격도 고분고분하고 얼굴을 보니 개천사는 아니네. 이름 어떻게 돼요? 신분증 꺼내 봐요.”
“차 안에 있습니다. 상의 지갑에.”
“가요.”
정작 가자고 한 남자는 우뚝 선 채 공숙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길 기다렸다. 공숙선은 타인을 올려다볼 일이 거의 없는 편인데, 남자의 커다란 키 탓에 곁눈질로는 그의 하관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에게 명령을 내리는 남자는 목소리도 젊었지만, 턱과 입 주변을 보니 예상보다 나이가 어린 듯했다. 부분적으로 살펴도 놀랍도록 섬세한 이목구비였고, 조금 전 눈앞을 스친 손 역시 완벽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이 아름다운 남자에게선 인간미가 엿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의 큰 신께서 내려오신 건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자 오랫동안 귀를 숭배해 온 공숙선은 더욱 마음이 놓였다. 정체가 궁금했지만 불손하게 고개를 돌려 신령을 마주 볼 용기는 솟아나지 않았다.
뒤따라온 남자는 열린 운전석 옆에 섰다. 공숙선은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남자에게 제 신분증을 꺼내어 바쳤다. 입이 고장 난 듯이 묻는 말에도 정성껏 답변했다.
“공숙선 씨네. 서창경 씨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예요?”
“일시적인 동업 관계입니다.”
“요새 당신들 무슨 작당 중인데?”
“강지헌의 두 번째 신붓감을 물색 중입니다. 슬슬 저승혼사굿을 준비해야 해서요.”
“……알고 있었어요?”
“…….”
질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해 잠자코 있었다.
“강지헌한테 두 번째가 필요하단 거 어떻게 알았어요? 걔가 본인 입으로 직접 털어놓진 않았을 거잖아.”
“서창경이 말해 줬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무슨 수로.”
“인간의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까요.”
“서창경 씨는 점 칠 줄 모른다고 들었는데요. 귀신 안 모신다며.”
“그렇지요. 서창경은 몸주를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몸주신이 되면 또 몰라도.”
“…….”
“…….”
잠시 침묵이 흐르고 추론을 끝낸 남자가 물었다.
“올 초에 서창경 씨 직장에 병가 내고서 아직 복귀 안 했다고 하던데…… 죽었어요?”
“예. 시체도 냉동해서 잘 보존돼 있고 아직 사망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째서?”
“강지헌 데리고 가야죠? 유언입니다. 불러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보니 유언이 큰 의미는 없지만, 그의 부모가 제명에 죽지 못한 아들의 마지막 소원을 반드시 이뤄 줘야 한다며 성화여서요.”
“…….”
남자가 동체를 비스듬히 틀어 골목 너머 문 닫은 소극장이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저기…… 그런데 누구신지?”
공숙선이 남자의 허리께를 쳐다보며 뒤늦게 정체를 물었다. 앉은자리에선 그의 탄탄하게 뻗은 하반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일단 여기 잠시 봐 주시겠어요?”
나긋나긋한 말투에 더욱 느슨해진 경계심은 멱살이 잡혀도 그러려니 했다. 신장 180을 웃도는 공숙선이 단숨에 자동차 바깥으로 끌어 올려졌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치고, 다시 자동차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끄아아아아악-.
“……!”
극심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눈을 부릅뜬 채 배를 까뒤집고 누워 부들부들 전신을 떨었다.
“원래 있던 귀신은 이제 더는 공숙선 씨한테 달라붙지 못할 거예요. 오늘로 당신은 해방됐습니다.”
“……!”
뭐라고?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서 모신 몸주인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유를 줘도 달갑지가 않나 보네. 사상이 이렇게나 다른데 강지헌하고는 어울리면 안 되는 거죠. 귀신 싫다는 애를 굳이 왜 붙들어 매.”
“아흐…… 제, 제가 아니라 서창경이 걔를 못 놓는 겁니다. 저는 그저 제물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재능 기부 거래를 하는 것뿐이라고요. 제가 힘을 잃으면 서창경을 불러내기도 계약을 이행하기도 어렵습니다. 제발 제 몸주신을 돌려주십시오!”
공숙선은 끙끙 앓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자기변호를 했다. 남자가 강지헌을 옹호하니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지 눈치챈 까닭이다.
“그럼 나하고도 재능 기부 거래를 하나 하죠. 국산품은 아니지만 아주 낡고 오래된 신을 소개해 줄게요. 토종 귀신 말고 서양 귀신 한번 집어넣어 볼래요? 우리 집에 그런 거 잔뜩 굴러다니거든. 잡신 아니고 나름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이름도 있어요.”
“……!”
이름을 가진 신령!
공숙선은 눈알이 파일 듯한 통증을 잊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줄줄 흐르던 눈물도 쏙 기어들어 갔다.
사실 산신이니 용왕이니 해도 산에서 죽은 무명無名, 바다에 빠져 죽은 무명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 신당을 차려 관운장을 모신다고 해서 진짜 관우 장군이 한낱 무속인의 몸에 강령하고자 부를 때마다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오진 않는다는 뜻이다. 몸에 들어온 신령이 정말 장군 신일 수도 있지만 병졸 귀가 대부분이었고, 권능의 차이가 있을 뿐 무명은 무명이었다.
그런데 이름 있는 신령을 내어 주겠다니! 본질이 큰 신이라면 제물을 먹여 가며 강하게 키울 필요도 없지.
“당신께서는 제게 새 몸주를 내려 주시려고 강림하신 거군요! 저를 만나고자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외치는 공숙선의 귀에 예상과는 동떨어진 대꾸가 돌아왔다.
“아닌데. 아저씬 그냥 겸사겸사 낚이신 거고요, 내가 급하게 부동산을 좀 둘러보느라 정차 중이었거든요? 내비에 집 주소 찍어 드릴 테니까 알아서 잘 찾아오세요.”
신의 계시라기엔 너무나도 인간 생활 밀착형 대사였다.
∞ ∞ ∞
서창경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돌아오면 언제나 먼저 얼굴을 내미는 사람인데, 오늘 밤은 건물 전체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손님 보내고선 바로 잠들었을 리는 없고.”
삐쳤나, 서창경?
이혜준을 근처까지 데려온 것이 찔려서 일부러 찾으러 나서기도 망설여졌다. 잔소리와 신경질의 합성 폭탄을 각오했건만 고용주의 낯짝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객석 수가 120개였던 공연장을 포함한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은 고용주와 나, 단둘이 머물기엔 과분할 정도로 넓었다. 오늘따라 실내 분위기가 유난히 을씨년스럽다고 여기며 주거 공간으로 쓰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과 연습실로 사용하던 공간은 살림집 구조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콘크리트 바닥에다 침낭을 던져두고 아무 데서나 뒹굴며 자던 건물 구입 초기를 떠올리면, 침대가 있고 조리 시설까지 갖춘 현재는 호사를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복도 곳곳, 방문마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부적이 안정감을 주는…….
“……?”
음?
수호신처럼 언제나 나를 지켜 주는 듯했던 수천 장의 부적이 오늘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노란색 종이로만 보여서 순간 당황했다. 정말 특별함 하나 없는 종이로만 보였다.
뭔데, 강지헌. 방상시를 만나고 오더니 배가 부른 거야?
내가 이토록 간사한 인간이었던가 싶어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협조성이 예사롭지 않은 이혜준이 더 좋은 선택지를 내밀며 유혹하니 나도 모르는 새에 넘어간 건가?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격이기에 서창경도 날 믿지 못하고서 윤상현이 떠났다는 사실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서창경에게로 향했던 의심과 못마땅함이 내게로 돌아왔다. 다른 선택지가 생기자마자 여태 날 지켜 주던 부적을 보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일지 않는 데에 경각심이 들었다.
은혜를 입었다. 무엇이, 누가, 내게 더 이득이 되는지 계산하지 말고 서창경의 곁에 머물러야 할 이유였다.
어떡하면 서창경의 신뢰를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가 타고나길 인간 불신자라는 사실 또한 떠올랐다. 신뢰와 서창경이란 인간은 양립하기가 어려웠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건 내 문제가 아니라 서창경의 문제다.
그러니 나는 나대로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혜준이 내미는 손길을 요령껏 잘 쳐 내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다. 따듯한 양지를 아쉬워하지 않기로.
내 방은 원룸처럼 개조된 사무실이다. 고용주가 2층에서 가장 넓은 연습실을 침실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그곳은 한쪽 벽면 전체가 거울이기에 사양했다. 대낮에도 혼자서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였다.
곧장 욕실로 가려다가 잊기 전에 김재원에게 답장을 보냈다.
산공김재원: [연애세포 1도 없는 죄 많은 강지씨가 오늘도 열일하시네요^^]
나: [뭔 죄? 나 오늘 뭐 호빵이한테 실수한 거 있냐?]
나: [너 보기에 이혜준 선배님이 나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나: [나 씻고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