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스스로가 원해서 윤상현의 운명이 되었다. 주술을 푸는 데 그토록 고전한 까닭은 만신 조상희의 강한 신력 탓도 있었겠지만, 나와 윤상현이 서로의 언약에 친친 감겨 있었던 탓임을 깨달았다.
목소리는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강지헌…….』
서너 발걸음 떨어진 곳에서 열아홉 살의 윤상현이 내 이름을 불렀다.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철이 든 후 짐짓 외면해 온 윤상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에게조차 잊히고, 영영 아무도 모르는 채로 묻혔을 그의 감정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낸 욕심 탓에 드러나고 말았다.
“야. 장난해? 너 왜 이제야 나타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너 때문에 우리 식구들이 얼마나…….”
『모습을 드러낼 힘이 없었어.』
“거짓말하지 마! 조상희가 널 떠받쳐 줬을 텐데 힘이 없기는. 우리 엄마 앞에는 잘만 나타났으면서.”
『내가 아니야. 너희 어머니 쓰러지신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믿어 줘 제발.』
윤상현이 악의 없는 눈빛을 한 채 애원하듯 내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강지헌의 인생을 망칠 작정은 아니었고,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그가 전했다.
“네가 아니면, 그게 누구의 의지였다는 거야?”
질문을 던진 순간 그 변수가 누구인지 뚜렷이 이름이 떠올랐다. 서창경.
『말할 수가 없어. 그에게 내 존재를 들킨 순간부터 줄곧 붙들려 있었거든.』
입막음을 당했다는 거다. 그러니 여태 내가 이놈이 사령처럼 굴려졌다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래도, 서창경의 인성을 익히 알면서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 사람이 무슨 이유로 나한테 그런 모진 짓을 했겠어. 우린…… 우린 동료인데.”
같은 편에 서서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협력자라고 여겨 왔는데.
『널 가족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러지. 혼자 고립시키려고. 이미 그의 뜻대로 됐잖아?』
짐작한 대답이 윤상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걸 경고하려고 내 꿈에 들어온 거야?”
『응. 그리고 윤상현과 강지헌을 얽매던 주술이 풀렸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어. 너 완전히 벗어났다고.』
“너 떨어져 나간 거라면 나도 벌써 짐작했어. 그래도 나 너 곱게는 안 보내 줄 거다, 이 나쁜 새끼야. 진혼제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네까짓 게 뭐가 예쁘다고 오냐오냐 넋을 달래 줄까.
『바라지도 않아.』
“너 그럼 개놈한테 계속 묶여 있으려고?”
『왜, 걱정돼?』
“뭐래, 너 걱정해 주는 거 아니거든? 순리에 어긋나니까 바로잡긴 해야 한다는 거지.”
귀신이 된다는 건 사람이 아니게 변한다는 말이고, 사람이 아니면서 살아생전의 인격을 한결같이 유지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이대로 서창경에게 복속돼 사령 노릇을 지속한다면 사기에 집어삼켜져 버릴 거다. 흉신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호령도에서 마주친 이놈 조상신처럼 되게끔 놔둘 순 없지.
『네 힘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무모한 짓 하지 마. 강지헌, 지헌아,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 돼. 그를 조심해.』
윤상현의 모습이 흐릿해져 갔다. 쌓인 감정이 많아서인지 이대로 보내기엔 속이 들끓었다. 우선 욕부터 좀 하자.
“너야말로 내 일로 노심초사할 자격 있어? 시발놈이 죽으려면 곱게 처죽을 것이지 유언도 개 같은 걸로 해 놔서 남의 인생 말아먹고. 야.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안.』
“…….”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면 내 인생에서 꺼져 달라고 하고 싶은데, 이놈도 지금 서창경에게 묶인 몸이라고 하니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힘없는 졸개끼리 무슨 말이 오가든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귀신 새끼가 양심을 어디에다 갖다 버렸는지 적반하장으로 날 책망해 오는 게 아닌가.
『강지헌 네 잘못도 있거든?』
“뭐라고?”
『너 왜 나 못 본 척했어. 원래 살가운 성격이 아니란 건 알지만 너한테 모르는 사람 취급받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어떻게 된 게 죽어서도 도련님 새끼 마인드다.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면 자기가 먼저 나서면 됐을 텐데도 내 탓을 해 댄다.
당연히 나는 멋모르던 유아기 어린애처럼 행동하기가 어려웠지.
철이 드니까 갑갑한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호령도에 발을 들이면 신분 제도가 존재하는 과거로 역행한 기분이 들었고, 섬 주민들이 주인을 섬기는 노비처럼 윤씨 일족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백중날 행사 때 보았듯 아랫것들은 윤씨 일족이 있는 공간에선 함부로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굿 구경을 하더라도 모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런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태생 탓인지 아버지조차 내가 막내 도련님 상대로 실수를 저지를까 봐 절절맸다. 정말로 친구 사이라면 치고받고 싸울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여기기에 이놈과 나는 신분이 다르고 상하 수직 관계였거든.
차라리 윤상현과 상종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할 수밖에.
그래도 귀신이 내게 서운해서 한을 품었다는데 거기에다 대고 지랄 떨지 말라고 꾸밈없이 말하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저 한을 풀어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질은 하지 말아야지.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가던 길 가라 그냥. 어서 꺼져.
“…….”
하지만 표정 연기가 어설펐는지 속내를 들키고 말았다.
『너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관심 없다, 이거지? 모르겠어? 네가 화근이야. 그 무성의한 태도가 끊임없이 화를 부르는 거라고! 그 남자가 너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히는 것도 결국은 너 때문에 비롯된 일이잖아.』
서창경 핑계 대며 자기 얘기를 찌질하게 늘어놓고 있다.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면 확 죽어 버릴 테야! 또는, 나하고 사귀어 주지 않으면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네 탓이야! ―이런 맥락인가?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없었고 이름조차 모르는 애들한테 불려 나가 고백을 받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연예인이나 관심종자도 아닌데 어째서 상대방의 일방적인 감정에 고마워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당시에도 생각했더랬다.
그때처럼 ‘야, 네 기분 조금 후련해지려고 남의 귀한 휴식 시간 빼앗지 마.’라고 했다간 사달이 나겠지?
산 사람에겐 매정하고 재수 없는 새끼라는 낙인이 찍혀도 내 알 바가 아닌데, 이미 찍힌 귀신에게 또 찍히면 재수 없음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나도 너 좋아했다는 거짓말을 지어낼 순 없잖아.
게다가 인간이 아무리 성의 있게 거절하더라도, ‘네 거절은 거절한다.’는 마음가짐이 이것들의 생활신조라서.
“알았어. 네 충고를 진지하게 새겨듣고 서창경 씨를 상대할게. 그나저나 넌 네 유언대로 영결식도 치렀고 4년 가까이나 붙어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뭐가 또 미련이 남아서.”
『너 혼자선 그를 상대하기가 어려워. 내가 도울게.』
이것 봐. 내가 무슨 말을 하며 달래도 소용이 없다니까. 답은 정해져 있거든.
곁에서 틈을 엿보고 있다가 다시 내게 달라붙고 싶다는 속 보이는 말에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렇지. 이런 게 귀신이지.
무엇보다 이혜준에게 당해서 떨어져 나가 놓고선 왜 나 혼자만의 싸움이 될 거라고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새로운 아군이 생겼다고 알아채야 마땅한데 말이다.
어째서 이혜준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을까. 왜 그를 모르지? 첫 번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황금색 눈과 마주쳤다고 해도, 두 번째는…….
아, 두 번째도 각오하고 마주친 건 아니었구나. 내가 방심하고 있다가 술수에 걸려들었지. 그래서 이혜준의 본질을 모르는 건가?
“사양하고 싶네. 윤상현, 너하고의 인연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는 편이 낫겠다.”
이미 악연이지만 더 나빠지기 전에 제발 찢어지자.
『아냐, 아냐. 신령이 붙어서 능력을 얻고 한다는 얘기 많이 나돌잖아, 왜. 내가 해 줄게. 내가 그거 다 해 줄 수 있어, 지헌아.』
윤상현이 유혹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살거렸다.
그 이야기 속 인외 존재가 생기 빨아먹는 배우자 귀신은 아닐 텐데?
그건 날 돕는 것이 아니라 내 피를 말리는 짓이라는 사실을, 이만 내 인생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직설적으로 내뱉는다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러나 뒷감당을 고려해야 했다. 걱정해 주는 척 서두를 뗐다.
“너 여기 너무 오래 머무는 거 아니야? 이러다 서창경 씨에게 들키면 어떡하냐.”
『지금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괜찮을 거야. 모를걸?』
쳇. 안 통하네.
더욱 겁을 줄 필요를 느꼈다.
“솔직히 나는 들켜도 상관이 없거든. 여태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지금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그 사람을 불러서 삼자대면을 한번 해 보자. 네 말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겠어. 서창경 씨! 서창경 씨, 들려요?”
『어, 엇…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너는 진짜 어릴 때도 그러더니 애가 왜 그렇게 무신경해?』
새벽 첫닭을 부르듯 서창경의 이름을 외치자, 윤상현은 그제야 경기가 들린 것처럼 놀라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허둥허둥하며 사라지는 놈에게 손을 흔들었다.
“맞아. 내가 좀 그런 면이 있지?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또 놀러 와라?”
네가 나를 돕긴 어떻게 도와. 내 꿈속에 끼어들어서 또 개소리를 늘어놓았다간 그땐 진짜 이판사판개판이다,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