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관심 없다고 무심하게 굴지 말고 주변을 잘 돌아봐야 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줘. 하지만 조심해야 하고…… 경거망동하지 않기…….”
꿈인 듯 아닌 듯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곧바로 일어나 운동하러 갈 의지가 생길 만큼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요 얼마간은 쭉 이랬다. 섬에 다녀오고부터였던 것 같다. 이혜준을 만나고 나서부터.
전역하고 이곳으로 돌아와서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기운이 없고 몸이 물 먹은 듯 늘어졌었다. 체중도 쑥쑥 줄어들었다. 더위 탓인가 해서 억지로라도 끼니를 챙겨 먹으려 애썼는데, 그건 잘못된 진단이었고 순전히 윤상현 탓이었나 보다. 그가 떨어져 나간 이후 이처럼 개운해졌으니.
인기척은 없었지만 냉방기기 돌아가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든 것을 감지했다. 노트북 팬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었다. 방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었고, 그의 정체도 쉽게 짐작했다.
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은 건물 주인과 청소 업체 직원들뿐이다. 공숙선은 늘 아래층으로만 다녀갔다.
일부러 꾸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적으로 둘러쳐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서창경이 흘끔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잘 잤느냐는 아침 인사를 나눌 만큼 다정다감한 성품들이 아니었다. 나는 건조했고, 그는 냉랭한 인간이었다.
첩첩이 쌓인 묶음 포장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생수를 한 병 꺼내 들고 소파로 걸어갔다. 식욕이 없는 대신 이상하게 갈증은 자주 느꼈기에 나는 생수 부자였다. 바깥에서도 줄기차게 마셔 댔고, 집에서는 물류 창고처럼 수백 통을 쟁여 놓고 살았다.
“냉장고가 바로 옆인데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지, 왜.”
지켜보고 있었는지 서창경이 참견했다.
“아. 냉장고 문 여닫기가 귀찮아서.”
이혜준 흉내를 내보았다. 표본을 관찰하고 났더니 기력 달리는 척을 어떻게 하는지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음식이나 잠자리에 호불호가 갈릴 것이지. 너는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대부분이라 키우기 쉬운 듯해도 막상 어이없는 부분에서 까다롭게 굴거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픈 모양이다. 주인님 말씀 잘 듣고 이혜준 좀 만나지 말라고.
이 주제로 다투지 않으려면 못 들은 척을 하면 된다.
‘키우다니, 사람을 개 취급하지 마세요, 사장님!’이라며 평소처럼 대거리하는 대신에 느릿느릿 소파로 가서 드러누웠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지. 누울 자리가 있는데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가라앉네. 조금만 쉬다가 도장에 나가 봐야지.”
이웃한 동네에 아버지 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이 있었다. 나는 사범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곳에 정식으로 고용된 건 아니었다. 새벽에 가면 주로 몸을 풀거나 대련을 했고, 낮에 가면 유아 체육이나 줄넘기를 가르쳤으며, 저녁에 가면 호신술을 배우는 사람들 상대로 강도 치한 소매치기 등의 역할을 도맡아 열연했다.
그러고 보니 서창경과 처음 마주친 것도 그 아버지 후배의 문병길에서였다.
“기운이 없다면서 굳이 왜 운동하러 가려고. 너 그렇게 새벽부터 설치고 다니니까 골병이 드는 거야. 오늘은 어디에도 가지 말고 온종일 가만히 누워만 있어.”
여느 때처럼 서창경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동안은 별생각 없이 흘려 넘겼건만, 느닷없이 이 사람은 일 시킬 직원의 몸이 튼튼해지는 것이 싫은가 하는 의심이 움텄다. 그러고 보니 저번엔 나더러 어째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냐며 시비를 걸기도 했었다.
“아저씨, 제가 어서 기운을 차려야지 댁의 회사에서 알바를 뛰지요.”
“너 당분간 일 안 할 거라며.”
그랬지.
“몰라. 할 일이 없으니까 무기력해지네. 어서 개학이나 했으면 좋겠다. 개판 난 학점 메우려면 이번 학기 내내 공부에 매달려야 할 것 같아요.”
출장 다녀오라고 할까 봐 지레 앓는 소리를 꺼냈다. 이곳에 머무는 대가로 건물주가 시키는 일을 하긴 해야겠지만 앞으로 얼마간은 귀신의 그림자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구태여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발목 있는 귀신이 있는 것처럼 그림자 있는 귀신도 존재했다. 부적으로 귀안을 틔웠을 때 이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내 눈엔 분간이 가지 않는 정체 모를 것들도 상당했다. 서창경이나 공숙선은 바로 알아본단다.
내 생각에도 나는 이쪽 방면으론 둔하고 소질이 없었다.
“너 어차피 졸업 못 해. 취직도 못 하고 사회생활도 못 할 건데 공부는 해서 뭐 하려고. 너한테 학교가 왜 필요해. 괜히 헛꿈 꾸지 말고 네 처지 파악이나 잘해.”
어제 누가 나더러 아직 살날 많이 남았다고 했어! 너 같은 개놈도 번듯한 직장에 잘만 다니고 있으면서 남의 장래에다 함부로 초 치지 마!
여느 때처럼 대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몸 상태가 엉망이라고 넘겨짚어 주길 바라며 하고픈 말을 억지로 삼켰다.
“집에서 걱정하시니까 그러지.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냐. ……뭐야, 또 이거 돌려 봤어요?”
탁자 위 노트북 모니터에 정지돼 있는 영상은 적외선 카메라의 녹화본으로, 윤 의원의 별장에 설치된 기계에서 뽑아 온 자료였다.
신기가 없는 내 눈에 윤 의원은 그저 동틀 때까지 쭉 미동 없이 침대에 누워 잠자는 노인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시체 옆에는 그의 부인마저 잠들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숙면 중에 평온하게 세상을 하직했다며, 복 받은 죽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같은 시각, 조상희의 방 풍경은 대조적이었다.
내가 보낸 사령을 마중하듯 조상희는 제 발로 방문 앞까지 걸어 나갔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허공에 대고 꾸짖듯 고함을 쳤지만 다행히도 소리 없이 움직임만이 녹화됐을 뿐이다. 곧 노구는 뒤로 넘어갔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혼백이 강제로 끄집어내져 해변으로 끌려 나갔을 거라고 어림했다.
“강지헌, 너 이거 어디까지 보여?”
테이블로 다가온 서창경이 물었다.
순간, 그에게 벌써 여러 번 똑같은 질문을 받고서도 무심코 넘겨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생각해 보면 무섭도록 의미심장한 테스트인 것을.
윤상현이 꿈에 나온 오늘 새벽은 서창경의 모든 부분이 별스럽게 다가왔다. 또, 많은 것이 보였다. 서창경이 내뱉는 말, 행동 하나하나에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보이긴 뭐가요?”
“네가 보낸 사역들이 보이냐고.”
“아니? 지금 부적도 쓰지 않았는데 내 눈에 그 물귀신들이 보일 리가 없잖아.”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서창경의 창백한 낯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실망한 거다.
왜? 너는 내 귀안을 틔워서 어떡하려고? 공숙선과 짜고서 내게 무슨 주술을 걸어 둔 거야?
그 속셈을 알아내고자 피곤한 척 연기하며 미적거리는 중이었다.
“강지헌, 너 보기만큼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닌가 보다?”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면 정신에도 영향을 미쳐 헛것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내게서 그걸 기대하는 듯했다.
내가 아직 멀쩡해서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이 굴던 윤 의원네 노부인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허약해졌으면 좋겠어요? 왜요.”
지나가는 투로 떠보았다.
“그냥. ……피곤하면 집에서 푹 쉬라고. 나도 오늘은 외출하지 않을 테니까.”
서창경이 태연스레 둘러대며 눈웃음을 쳤다. 이 상황에서 이혜준과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한다고 말하면 고용주의 성질이 화약고처럼 폭발하는 장면을 구경할 텐데. 그럼 또 대판 싸움 나는 거지.
나의 편리한 외출을 위해 이 인간을 먼저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엔 어떤 구실이 필요할까.
“모처럼 휴일인데 사장님도 데이트를 하셔야죠.”
“할 거야. 너하고.”
“……. 노트북에 맞아서 머리통 박살 나 볼래요?”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 테이블 위를 훑던 내가 조곤조곤 제안했다. 컴퓨터는 서창경의 소유물이기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거 부서지면 더는 날 시험하려고 윤 의원의 별장 풍경을 들이밀지 않으려나.
내가 그 장소에 없었다고 한들 지켜보기 껄끄러운 장면이었다.
그들이 먼저 나를 해치려 들었으니까 복수하려, 아니 복수보다는 내가 살고자 손을 썼다.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조상희가 죽을 날만 손가락 빨고 기다리며 윤상현을 달고 다닐 순 없잖겠어.
오히려 그들이 무소불위로 휘두르던 힘을 거둬들였다는 점에서 안도감마저 일었다.
혼백 둘을 해저에 묶어 물귀신으로 만들고 죄책감 없이 내 숨통이 트였다는 생각만 하는 나는 사이코패스일까.
그냥 섬에 계신 조부모님처럼, 다른 주민들처럼, 밟으면 밟히고 손주 사주 달라면 건네주면서 조용히 죽어지내는 편이 현명한 생존 전략이었을까.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고민했다.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지렁이 주제에 꿈틀거리는 반응 그 이상을 욕심낸 까닭에 불러들인 화가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이 남자였다.
서창경은 너도 공범이라며, 네 죄를 잊지 말라는 듯이 그날 밤의 일을 끊임없이 내게 되새김질시키고 있었다. 그 탓에 이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평생토록 잊을 생각도 없었지만.
“고작 데이트하잔 말에 왜 살인까지 저지르려 해, 지헌아.”
“그런 건 당신 애인이랑 하시라고.”
서너 번 마주친 적 있는 그의 여자 친구 이름을 대려고 했는데 떠오르지 않았다. 안 궁금해서 외우려고 애쓰지도 않았나 보다.
서창경은 나한테는 온갖 추악한 꼴을 다 보이면서도, 제 애인에겐 본색을 숨긴 채 정중히 예의를 갖추었더랬다. 물론 제 애인하고는 강령술 하며 노는 취미 생활도 공유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집안끼리 교류해 온 사이라며 애인을 VIP 고객 접대하듯 대했으면서 지금 서창경은 헛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굴 말하는 거야?”
“…….”
어?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