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45)화 (45/96)

45화

드러누워 가만히 서창경을 올려다보던 나는 놓치고 있던 또 하나의 진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사고를 전환하자 집 나갔던 눈치코치가 제자리로 되돌아온 듯 무섭도록 실력을 발휘했다.

느릿느릿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 좀 앉아 봐요.”

공간을 내어 주며 소파를 툭툭 건드렸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서창경이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광기와 예민함과 까탈스러운 기질이 내재된 잘생긴 얼굴을 살피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인간은 또 왜 이럴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 누님이랑은 헤어진 지 얼마나 됐어요?”

“김재은? 그 여자라면 얼굴 안 본 지 2년이 다 돼 가는데. 이 얘긴 당시에 너 휴가 나왔을 때도 했잖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역시 안 궁금해서 기억하지 않았나 보다.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다 저장하며 살진 않았다. 특히나 남의 연애 사정 같은 중요하지 않은 사안은 적당히 흘려 넘겼다.

“잊고 있었나 봐.”

“지헌아, 네 성격이 그 모양으로 삭막해. 주변을 돌아보지를 않지. 제일 가까운 사람 섭섭하게 말이야.”

제일 가깝다고?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어두운 비밀도 공유했기에 함부로 친한 척하지 말라고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섭섭해서 나 괴롭히는 거예요?”

네 마음 몰라주는 나한테 섭섭해서 우리 집에다 그 짓을 했느냐고 멱살을 잡고 싶었다. 심장병 앓는 사람 앞에다 귀신을 불러냈느냐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윤상현이 한 말과 일치하는 상황이기에 표본이 두 개밖에 없을지라도 정말 나 때문인가, 내 잘못인가, 하는 불안이 스쳤다.

“괴롭히긴. 마음이 있으니까 관심을 주는 거잖아. 좋아하니까 너와 관련한 모든 걸 내 통제 아래에 두고 싶은 거야.”

“아. 그랬구나-.”

수긍하는 척 서너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기가 보던 전공 서적하고 필기 태블릿을 갖다 바치고, 시험문제랑 족보도 바치고, 제 시간을 빼서 원서 공부도 돕는 호구가 돼야 마땅한 줄 알았는데, 서창경의 방식은 매우 신박했다.

통제?

예전에는 충성, 충성, 노래를 부르더니 레퍼토리가 바뀌려나 보다.

“예상대로 너는 고백을 받아도 동요하지를 않네. 여태 눈치 못 챈 기색이더니.”

“어, 맞아요. 방금 알았어. 서창경 씨 줄곧 애인 있는 줄 여겨서 그런 쪽으론 전혀 고려해 보지를 않았거든.”

당신한테는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마음의 동요는커녕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점차 머릿속이 차가워지기만 했다.

그런데 거절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돌아온 건 내게 제 애인 역할을 맡겨 둔 듯이 뻔뻔스러운 질문이었다.

“애인 없으니까 된 거지?”

“네?”

되긴 뭐가 돼.

“난 네가 게이인 것도 알아. 너 남자한테만 관심 있잖아.”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씀인데요?”

지금부터는 주변 사람들을 알뜰살뜰 챙기고 다정다감해져 보겠다는 성격 순화 콘셉트가 깨어지며 평소 서창경을 상대할 때 사용하던 매몰찬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일부러 김재원도 소개해 주지 않았건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은 무슨 수로 알아냈을까. 차라리 누굴 만나다가 들통이 났다면 덜 억울할 텐데 연애는커녕 데이트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인간에게 비밀을 한 가지 더 들킨다는 것은 내 약점을 하나 더 잡힌다는 뜻이다. 그런 관계였다. 서로 비밀을 나누었을 때 더욱 거리가 좁혀지며 친밀해지는 사이가 아니었다.

“강지헌, 너도 나일 먹더니 시시해졌어. 조금만 겁을 줘도 새파랗게 질려선 바들바들 떨고 나 진짜 재미있게 해 주던 애기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럼 이제 나 놓아줄래?”

“아니다. 다시 재밌어졌다.”

“…….”

이 시발놈이 사람 가지고 놀고 있어.

잠자코 이를 가는 나를 감상하면서 서창경이 눈을 가느다랗게 접으며 웃었다. 내가 속으로 무슨 욕설을 지껄이는지 다 들여다보는 눈치였다.

“강지헌, 나하고 사귀자. 여기서 나와 너 둘이서만 쭉 같이 살아. 이곳에 머물면 넌 영원히 내게 보호받을 수가 있어.”

보라고. 약점을 잡으니 바로 협박질이지.

“그 말씀은 내가 거절하면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내쫓기는 거?”

“연애 좀 하자는데 어째서 협박으로 받아들이지? 사고의 방향이 왜 그리 꼬였을까.”

방상시급 이혜준도 받아들이기가 겁나는데 내가 너하고? 고용주님은 내 눈에 ‘푸른 수염’ 등급이시거든요?

그러잖아도 서창경은 나더러 지하 연구실로 통하는 문만은 절대로 열면 안 된다며 경고했더랬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승강기도 이용하지 말라고 했고.

연쇄 살인마로 넘겨짚기에 딱 적절한 설정이잖아.

“나 조금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전에 사귀던 여성분 있잖아. 김재은 씨랬나? 혹시 그분 네가 죽였어요?”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네 눈앞에서 사라진 거냐고, 일반인을 상대로는 정신 나간 소리밖에 되지 않는 의문을 드러냈다. 이 인간은 일반적인 정신 상태의 소유자가 아니니까.

“왜? ……그 여자 죽었대?”

푸른 수염이 되물었다.

“음. 안 죽였나 보네. 그 사람은 무사히 살려서 보내 줬구나.”

내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빠르게 파악한 서창경이 피식 웃더니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살려 보내 준 거고 아는 것이 차고도 넘치는 강지헌은 기필코 내 손으로 처리해야겠지? 네 혼백은 내 거라고 했잖아.”라며 기분 나쁜 장난을 쳤다.

“아니요. 저는 댁에 대해 아는 거 별로 없어요. 지하실엔 그 근처에도 안 갔습니다.”

안전 이별을 위해 적극 부정했다.

“그래. 너는 주변 환경에 호기심이 없어서 여태 무사한 거야. 앞으로도 쓸데없는 일에는 고개 들이밀지 말고 무조건 내 말만 따르면 돼.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 어제 누굴 만나고 왔는지도 다 아니까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서창경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다 안다는 인간이 방상시와 함께 있다는 공숙선 얘기를 꺼내지도 않아? 당신이 손수 그를 보냈다면 저쪽에서 공숙선의 이름을 감추려고 들 리도 없겠지?

공숙선이 저를 배신한 걸 알면 노여워하며 발칵 뒤집어엎고도 남았어야 했다. 내 옆에 앉아 지금처럼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윤상현이 내 꿈에 나타났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는 듯 보였다. 윤상현을 사령 삼아 제어하던 그의 힘이 약해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고개를 돌려 창가에 방벽처럼 둘러쳐진 부적―고용주의 신력을 불어넣은 부적을 주시했다. 어젯밤처럼 그저 노란 종이 쪼가리로만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과 같이 내게 절대적인 안정감을 주는 수호부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깨달은 이상, 예전처럼 돌아가긴 어려웠다.

“…….”

“그래서, 대답은?”

“대답? ……서창경 씨부터 정직하게 군다면 나도 속이지 않을게.”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와 나눈 대화를 추슬러 겨우 대꾸했다. 자길 속일 생각을 하지 말라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조건을 달지 말고 순응하는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서창경이 바라는 대화의 주제는 나의 정직 여부가 아니었다.

“내 애인 해, 강지헌.”

“뭐?”

아, 그 얘기로 돌아갔구나. 두 번이나 물어볼 줄은 몰랐네.

자존심이 강한 그는 내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면 속으로 열은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길 줄 알았다. 이 자리에서 매정하게 거절한다면 이 개놈이 신령을 앞세워 음험한 복수를 할 게 뻔해서 벌써부터 불안해졌다.

윤 의원과 조상희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그 제물들을 묶은 가장 강력한 족쇄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 피는 물론 내 가족의 몫까지 채혈해 가지고 있을 그에게 물리적으로 멀어지며 도망친다는 건 무의미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인생 시궁창인 채로는 살아갈 수가 없잖아.

“강지헌 너 여기서 나가면 갈 데가 어디에 있어.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면 윤상현이 또 나타나서 집안을 뒤집어 놓을 거야. 아무 죄 없는 분들에게까지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지?”

현실 주거 문제와 무신을 섞어 놓은 복합적 위협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족까지 끌어들이는 수법에 그동안 얼마나 휘둘려 왔는지.

“당신이 윤상현을 처리해 주면 간단하잖아. 얘는 언제 떨어뜨려 줄 거야?”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물었다.

“너 하는 거 봐서. 네가 대답만 제대로 한다면 네 목숨은 살려 줄게.”

나를 빠져나갈 통로가 없는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여겼는지 서창경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문득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은 채 그저 돕게만 해 달라던 이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는 피신처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지금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거다. 서창경의 덫에 걸린 이상 달리 빠져나갈 방도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

이혜준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자꾸 기어오르고 머리끝까지 열 받게 해서.”

“뭐? 그딴 게 무슨 이유가 되는데.”

“되지. 너는 내 건데 얌전히 내 옆에 머물지를 못하고 어떡하든 벗어나려고만 해. 그게 계속 신경에 거슬리니까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어. 차라리 죽여서 사령으로 삼든지 도망 못 가게 박제하는 편이 마음 놓일 것 같아. 그러면 온전히 내 것이 되겠지? 순종적이지 못한 네 탓이 커, 지헌아.”

이혜준이 아니다 보니 이혜준에게선 나올 리 없는 정신 나간 대답이 돌아왔다.

‘아. 이런 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야 하는구나.’

연애 고자는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서창경 이 미친놈은 예전부터 정상이 아니다 보니 그의 입에서 나를 죽이니 박제하니 이런 미친 소리가 나와도 그러려니 했다. 원래 무서웠기에 저 말을 듣고 나서 새삼스럽게 두려움이 가중됐는지 어쨌는지 판단도 되지 않았고, 그저 이런 새끼한테 걸려든 내 사나운 팔자를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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