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당장은 대답하기가 어려우니까 나 좀 생각할 시간을 줘요.”
“고민이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 아니잖아. 너 양심 있어? 강지헌, 영기도 없는 데다 잘하는 거라곤 기껏 몸 쓰는 거밖에 더 있을까. 그거 신령 부리는 덴 별 도움도 안 되는 기술이건만 내가 여태 거둬 줬잖아.”
개그 아닌 개그에 헛웃음이 터졌다.
“살다 살다 서창경 씨 입에서 양심 타령을 다 들어 보네. 아저씨, 설득력 좀 키우시죠. 고마운 대상에게 감사 표시로 연애해 줘야 하는 법이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수백 명은 더 사귀었겠다.”
“나한테 입어 온 은혜가 말로만 고맙다 하고 입 닦을 수준이었어?”
또 은혜 갚으라는 수작으로 넘어갔지만,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이상 전처럼 죄책감이나 의무감을 자극당하지 않았다. 지극히 냉정한 상태로 따졌다.
“내가 거저 받았어요? 네가 공짜로 봉사해 줬냐고. 수업 째고 시험도 째고 입대해서는 휴가 외박 다 끌어 써 가며 네 취미 생활에 협력해 줬잖아. 뭐가 더 부족해서.”
“부족하지. 나는 아직 너한테 받을 것이 많아. 그러니까 나하고 혼인 계약서 한 장만 써. 나보다는 네가 더 필요하잖아. 국적 돌려서 어떡하든 결혼 성사해 줄 테니까.”
“…….”
들켰나? 설마 이것마저 들킨 거야?
영혼결혼식에 국적이 무슨 상관이냐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반박해야 마땅한 상황에서 그만 솔깃해지고 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희망 탓이었다.
상대가 서창경이라면 아무 죄악감 없이, 뒤탈 걱정도 하지 않고 귀신 운수가 붙은 나와 엮여도 괜찮지 않을까?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남자인걸.
방상시와는 다른 의미로 그의 안위가 전혀 염려되지 않았다.
“어디까지 아는데?”
슬그머니 떠보았다.
“전부. 너에 관한 건 뭐든 다 알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어. 그러니까 내 눈을 속여 가며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 강지헌.”
“…….”
아, 그러십니까.
서창경의 터무니없는 장담에 도리어 긴장이 풀렸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그 계약서에 서명하고 바로 헤어진다는 조건이 들어가면 생각해 볼게.”
세 번째를 대비해야 하니까.
서창경과 같은 패가 딱 하나만 더 나타나면 좋겠다 싶었다. 유유상종 공숙선한테 청혼할까?
“그러지 않아도 돼. 중간에 제물 하나만 집어넣으면 내가 마지막이야.”
그가 세 번째, 그러니까 내 마지막 운명이 되겠다는 말이었다.
“……. 어떻게 알게 됐어?”
누가 알려 줬을까.
서창경의 취미 생활을 모르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 일을 발설했을 리는 없었다. 부모님은 본바탕이 냉랭한 이 남자와의 관계를 진전하기 어려워했다. 나도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다며 서로 떼어 놓으려고 애썼고.
도대체 누구에게 들었지?
이 인간이 본가에 어떤 주술을 걸어 뒀는지 알아볼 셈으로 떠올린 무속인이 있었다.
맨 처음 어머니와 함께 찾아갔던, 내게 세 번의 혼사 운을 일러 준, 윤상현을 떼어 놓으려다가 조상희의 신력에 꺾인 그 무속인 말이다. 모시는 몸주가 죽어난다며 나더러는 두 번 다시 저를 찾지 말라고 했다.
서창경이 내 마지막 보류였던 그 사람과 이미 접촉했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찔해졌다.
정말로 그 무속인과 만나 자초지종을 들은 거라면 어떡한다지?
그 무속인 이외에는 이 남자의 눈을 피해서 저주를 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신에 대해선 나보다 더 모르는 이혜준이 어떻게 손을 쓸 일이 아니니까.
“공숙선이 점괘를 내놨어. 그 인간이 모시는 신령이 과거는 제법 읽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진실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
“어떡할 거야?”
“중간에 제물을 넣겠다는 건 귀신이랑 혼사 굿하는 거 말하는 거죠?”
“그 방식이 현실 법에 따르지 않아도 되고 편리하긴 하지.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 넣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누굴 제물로 할 건지 찍기만 해.”
내 귀엔 그가 알아서 무고한 사람의 혼백을 강제 적출할 거라는 뜻으로 들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내 재수 없는 혼사 운은 이 인간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라고 새삼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머리 아프다. 다음에 얘기해요.”
아무래도 서창경이 진심으로 영결식을 올리자고 우길 것 같아서 정지 신호를 보냈다. 단 십여 분 사이에 날 좋아한댔다가 사귀자고 했다가 마침내는 결혼이라니, 성질이 이토록 급한데 그동안은 어떻게 참아 왔는지 모르겠다.
시발 무서워. 얼른 튀어야지.
운동하러 가는 대신에 오전 내내 서창경의 곁에서 미적거리며 정보를 긁어모으려던 계획을 접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더 곤란한 화제가 등장하기 전에 이쯤에서 빠지기로 했다.
“지금 해.”
목소리에 강압적인 의지가 실렸다.
“못 해. 시간 필요하다고. 내가 이런 문제, 특히 연애 쪽엔 영 소질 없고 관심도 없다는 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창경 씨는 누구보다 잘 알잖아. 갑작스러워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고요.”
‘강지헌과 제일 가깝다는’ 그가 기꺼워할 만한 표현을 사용했다.
“하필이면 이런 무신경한 놈을 내가…….”
서창경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미안. 이제 당신 감정 알았으니까 앞으론 신경 쓸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사과했다. 웬일로 뻗대지 않고 얌전히 수그리는 하수인에게 서창경이 의심하는 시선을 던졌지만, 신경 써 주겠다는 말이 듣기에 좋았는지 그답지 않게 가만히 넘어가 줬다.
직접적인 고백보다는 이런 의외의 부분에서 그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떡하지. 진심인가 봐. 살려 주세요.
나는 진짜 연애할 체질이 아닌지 서창경이 좋아한다며 보이는 짓이 하나같이 무서웠다.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고 해서 상대방과 비등한 감정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고, 내게 부담감만 불러일으키는 그의 진심이 소름 끼쳤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럴 때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내가 제 마음과 성의를 무시해서 귀신이 돼 괴롭힌다는 윤상현의 말도 떠오르고, 정말로 내 탓이면 어떡하지 싶었다.
여태 누가 내게 호감을 드러내든 적의를 드러내든 신경 쓰지도 않고 호응해 주지도 않았던 벌을 이런 식으로 받는 건 아닌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며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올랐다.
“날 실망시키지 마.”
“…….”
불가능한 요구에는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까.
「네 힘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무모한 짓 하지 마. 강지헌, 지헌아,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 돼. 그를 조심해.」
신중히. 언약으로 이용될 만한 내용은 입에 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건 양보할 수가 없었다. 서창경과 나는 서로 상대방이 꺾이길 바라며 고집스럽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
“…….”
“……아, 저 새끼들이 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서창경이었다. 벌떡 일어선 그가 창가로 걸어갔다. 퉁, 퉁. 바닥에 공을 튀기는 소리가 내게도 들려 서창경이 내가 잠에서 깨어날 무렵 어떤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는지 짐작했다.
우레탄 코트가 깔린 공원이 아님에도 이 외진 공원까지 농구 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전부터 서창경은 제 실험실 앞에서 생기발랄하게 소음을 일으키는 방문객 무리를 못 견뎌 했다.
“요 앞은 사유지가 아니니까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막을 순 없지.”
“우리 지헌이가 지금 저놈들을 편들어 주고 싶은가 보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내뱉은 소리에 서창경이 삐딱하게 웃었다. 품에서 괴황지를 꺼내 들기에 그 길로 나도 발딱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종이에다 서창경이 염을 불어넣었다. 붓글씨를 쓰듯 검지가 가는 대로 붉은 문자가 번지듯 일어났다. 나는 그의 손목을 낚아 쥔 채 바깥 동태를 살폈다. 콘크리트 바닥에다 농구공을 튀기는 사람은 방학을 맞은 대여섯 명의 청소년 무리였다.
“새끼들이 새벽부터 시끄럽게 설쳐 대잖아.”
청혼하던 중 관심사가 급작스럽게 소음 공해로 널뛰는 것이 개놈다웠다.
“쟤들 이제 다 놀고 돌아가는 길이네. 한 번만 봐줘. 봐주세요, 형.”
손목을 잡힌 채로도 끝내 부적을 완성해 버리는 독기에 질려하며 고용주를 살살 구슬렸다.
축적되는 경험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그는 나날이 부적 쓰는 실력이 발전하는 듯 보였다. 예전엔 경면주사 대신에 산 닭을 칼로 찔러 생피를 뽑아 쓰는 만행도 서슴지 않더니 지금은 신력을 빌리는 준비 기도도 도구도 없이 부적을 쓰는 경지에 이르렀다. 신기가 없는 내 눈에도 번져 가는 붉은색이 보일 정도였다.
“네가 뭔데 빌어. 네가 저 새끼들 대변인이야?”
“농구 한번 했다고 살까지 날릴 건 또 뭔데? 내가 지금 나가면서 다음부터는 주의해 달라고 말해 놓을게요. 그거 이리 줘요. 부적 이리 내놔. 어서.”
“살은 무슨. 애새끼들이 아침잠이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조금 거들어 주려는 것뿐이야.”
어떻게 거들어 주려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밤새도록 가위에 눌린 뒤 아침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뻗어 버리겠지. 그 저주가 한두 달만 이어져도 사람이 기가 빨려 멀쩡하지 않게 되는 거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이리 줘.”
“내가 살을 날린다는 증거라도 있어? 보여? 네 눈에 증거가 보인다면 하지 않을게.”
내게 붙들린 손에서 자유로운 손으로 부적을 옮긴 서창경이 그대로 유리창에다 종이를 가져다 붙였다. 깜짝 놀라서 바깥부터 확인했다. 부적 앞면이 아이들을 향해 있음에도 당장은 아무런 기색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인지, 살을 날렸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구별할 도리가 없었다. 나로선 저들을 도울 길이 없다는 무력감에 형편없는 기분이 됐다.
잔인한 천성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뿌리치듯 놓았다. 어젯밤 이혜준 대신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말라 가는 달팽이를 밟아 죽이고도 남을 작자였다.
이렇듯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놓더라도 그가 쳐 놓은 덫을 빠져나갈 길은 아득히 멀기만 했다.
“서창경 씨, 좀 착하게 삽시다. 이러다 선업 포인트 쌓아 둔 거 다 까먹고 천벌 받아요. 제 명에 못 죽는다고.”
“나는 괜찮아, 지헌아.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난 결코 널 두고 혼자서만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서창경이 질세라 나를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