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제3장>
전야
도장에서 한바탕 대련 후 샤워하고 탈의실에서 옷을 입는 도중에 이혜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용주가 있는 안전 가옥에 돌아갔다간 다시 외출하기가 어려울 듯해, 어디에서 시간을 때울까 고민 중이었는데 늘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것도 내 편의 위주로.
―강지, 아직 식전이면 우리 조금 일찍 만나서 브런치 먹을까? 한식 좋아하는 것 같던데 빵 종류도 괜찮아?
내가 한식을 좋아했나?
좋아하는 음식도,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다. 식탐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교직원 식당에서 왕성한 식욕을 보여 준 바람에 오해를 사 버린 모양이다.
“전 아무거나 다 좋아요. ……선배님 혼자 오세요?”
―공숙선 씨도 같이 만나는 거냐고 묻는 거지? 어젯밤에 혼자 난리굿을 떨더니 지금 곯아떨어져 있어. 데려갈까?
부드러운 속살거림이 오늘도 그의 앞에서는 모든 골치 아픈 문제가 시시해지며 범상하게 바뀔 거라고 예견해 주는 것 같았다. 심각한 일은 없는 것처럼 내내 웃게 될 거라고.
부디 그랬으면.
“아뇨. 그 사람을 만나는 건 선배님 얘기부터 듣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아군이 되었는지, 약점을 잡혀 그 집에 붙들려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숙선은 고용주를 배제한 채 따로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한 후 내게 악이 받쳐 있을 게 뻔했다. 아침부터 기 싸움하며 으르렁거리기 싫었다. 정신이 너덜너덜한 당장은 방상시의 선하고 강한 기운만을 얻고 싶었다.
브런치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추어 열한 시에 만나기로 했다가, 내가 바깥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약속 시간이 훅 앞당겨졌다. 이혜준을 어서 만나고픈 조급함에 예의상 괜찮다는 사양도 나오지 않았다.
마구잡이 주차로 엉망인 도로변이라 먼저 내려가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일찍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계단을 다 밟기도 전에 검은색 밴이 눈에 들어왔다.
이혜준의 밴도 다른 차량과 마찬가지로 질서 없이 엉켜 세워져 있었다.
‘아빠 차 뺏어 타는 주제에 등하교도 따로 하는 호래자식이 차는 돌려준 모양이네.’
이혜준의 옆얼굴을 보기만 했는데도 머리 위로 한가한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새벽부터 가라앉았던 감정 사이로 비시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옅게 선팅된 창을 통해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각오를 다지고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공숙선의 어색한 거짓말도 알아챘고, 윤상현이 나타난 꿈이 개꿈은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 자리에서 엉엉 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진동에 선잠이 깬 그가 바깥에 선 나를 돌아봤다. 두 쌍의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회충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정을 들었는지 충격받은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활짝 웃으며 반겨 주지도 않았다.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린 채 유심히 내게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뭔데? 또 저 표정이네. 웃는 거야, 마는 거야?
‘안녕.’
입매가 느슨해지며 그가 입 모양만으로 인사했다. 동시에 유리창이 내려갔지만 별다른 말 없이 조수석에 타라는 손짓만을 받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 열어 봐요.”
“왜? 나 더 기다려?”
“잠시 나와 보시겠어요? 키 좀 재 보게.”
나 같으면 ‘미쳤어? 할 일 없이 길바닥에서 키를 왜 재?’ 하며 거절했을 텐데 이혜준은 내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걸 여기서 해야 해?”
당황하면서도 차에서 내렸다.
“아뇨. 굳이.”
한 걸음 다가서는 훤칠한 남자와 자동차 사이로 재빠르게 몸을 들이밀어 운전석을 차지했다.
“강지 너…….”
사태를 파악한 이혜준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 차 온다. 조심해서 타요.”
우리가 차를 빼 줘야 하는 상황이라 이혜준도 고집을 피우지 않고 보닛을 돌아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이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말하면 바로 운전대 넘겨주시나요?”
삐죽삐죽 선을 넘어 주차된 차들을 통과해 사거리로 빠져나가며 물었다.
“차 소유권도 같이 넘겨줄게. 운전 솜씨 보니까 네가 몰고 다니는 편이 더 낫겠다.”
언제나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이혜준 씨는 운전기사 고용을 특이하게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5년 치 연봉을 앞당겨 주시는 거예요?”
5년이나 이 사람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중고차 가지고 무슨 5년씩이나 사람을 부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했는데 네가 안정감 있게 운전해 주니까 좋아서 그러지. 편안해서 잠이 솔솔 와.”
본격적으로 주무실 작정인지 이혜준이 시트까지 뒤로 쭉 젖히고 기다란 몸을 뉘었다. 오늘 만나면 다시 어색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랜 지기처럼 사양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내 염려를 지웠다.
“도착하면 깨워 드릴 테니까 주무세요.”
제일 먼저 밤새 공숙선과 뭘 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려고 했지만 충혈된 눈을 보고 나서는 내 궁금증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공숙선 씨 상태가 불안정해서 알람 맞추고 한 시간에 한 번씩 들여다봤어. 다음에 만날 땐 사람이 완전 바뀌어 있을 텐데 놀라지 마. 부품을 갈아 끼웠거든.”
이혜준이 두 눈을 감은 채 나직나직 말했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한 음성이었다. 환자 들여다보듯 공숙선을 살폈다는 표현이 수상쩍었다.
“무슨 부품이요.”
“회충.”
“회충? 자의로 신내림 받은 사람한테 붙은 신령도 회충으로 쳐요?”
그럼 공숙선이나 나나 입장이 뭐가 달라?
그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다니 기분이 상했다.
“내가 자의로 붙은 회충인지 타의로 붙은 회충인지 무슨 수로 구분을 해. 눈 마주치니까 회충 떨어져 나가는 원리는 똑같더라. 물러 달라고 떼쓰기에 집에 굴러다니는 정령 하나 받아 가라고 했지. 어젯밤 처음 만난 사이야. 더 알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
내가 궁금해할까 봐 졸리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설명해 주는 거였다. 피곤해하는 그를 보면 질문을 그만둬야 하는데 ‘집에 굴러다니는 정령’이란 표현이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선배님 집에 귀신 있어요?”
야, 거기 귀신 집이었어?
“귀신이라고 해야 하나? 중간 경로로 이용 중이라 우리 집에는 고대 유물에서 나오는 정령이 바글바글해. 내 거처에서 솎아 내고 난 껍데기를 박물관이나 개인 전시실로 옮기는 거지.”
“그런 데로 날 데리고 갔다고? 나더러 그 귀신 소굴에서 지내라고요?”
나름은 믿었던 도끼였는지 발등이 찍힌 기분이 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귀신은 아냐. 악귀하고도 달라. 부정적인 기운이 말끔히 제거된 상태라서 산 사람을 저주하거나 해악을 끼치지 못해. 오래된 유물이 아니더라도 나쁜 기운이 깃든 물건이 있으면 나한테 의뢰가 들어오거든. 정화해 달라고 말이야.”
“그게 바로 무속인이 하는 일이잖아요. 선밴 무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다며.”
사기꾼 새낀가? 세상에 믿을 놈이 진짜 없구나.
“맞아. 상관없어. 나쁜 기운 도려내는 일로는 한 푼도 벌지 않아.”
“서창경도 마찬가지거든요? 언제나 자긴 봉사 활동하는 거라고 주장해요.”
둘의 본질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가시를 세우는 내 태도에 결국 쉴 생각을 버렸는지 이혜준이 시트를 당겨 도로 일어나 앉았다.
“강지헌, 혹시 이런 얘기 들어 봤어? 사람이 살기 어려울 만큼 흉흉한 터에다 일부러 기가 강한 사람을 머물게 하는 거야. 어지간히 강해선 안 되고 혼자서 도깨비 터도 누를 정도로 기가 센 인간이어야 한대.”
“…….”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누굴 얘기하는지 알겠다. 신령을 쫓고, 영력을 실은 부적마저 통하지 않는 사람.
“단지 나쁜 기운을 누르기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그 사람이 떠나면 다시 사기가 활개를 칠 테니까. 성질을 아예 정순하게 돌려놓아야 해. 그게 유물에서 빠져나온 기운이 넘쳐나는 우리 집이 강지헌한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 이유야. 악귀가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정령들이 널 지켜 줄 거라고 믿고 같이 지내자고 했어. 너는 언제쯤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믿어 줄 거야? 진심으로 말하는데, 널 해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거든?”
먼저 의심받을 소릴 꺼낸 인간이 누군데?
“선배님은 무신이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서 정령이니 신령이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그리 스스럼없이 인정하죠? 나는 정말로 이해가 안 돼요.”
못 믿겠다며 핀잔을 줬지만 내가 여기기에도 그를 향한 말투는 제법 누그러져 온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 달팽이 생명수 같은 남자가 날 해코지할 리 없다는 건 본능으로도 느끼니까.
“그래. 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해 본 적 없어. 산이든 들이든 고대 피라미드 안이든 뭐가 있긴 있겠지. 그게 뭐. 있든가 말든가.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들을 내 삶의 영역까지는 끌어들이지 않아. 강지헌 너도 할 수 있어.”
또 이런다. 나도 저처럼 살 수 있대. 말은 참 쉽다.
“못하거든요. 전 선배님처럼 귀신 쫓고 정화하는 대단한 능력이 없잖아요.”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마음가짐의 문제니까 먼저 마음이 단단해지면 돼.”
“두 번째, 세 번째 귀신도 전부 쫓아내고 나면 나도 마음이 단단해질 자신 있습니다. 그때 가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인과 결과를 비틀었다. 내가 단단해져서 신령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이 물러나면 강지헌이 강해질 거라고.
“내가 끝까지 도울 테니까 그런 식으로 회피하지 마.”
“…….”
“어젯밤에 유리 멘탈 강지헌을 위한 정신 강화 연구를 좀 해 봤어. 우리 구호를 정하자.”
“예?”